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1 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점검
 라쯔라프의 언약의 대조에 대한 평가
 라쯔라프에 의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후자는 전자보다 더 낫고 더 단순한 것으로, 또 그것들이 다른 표징들을 가진 두 다른 율법의 틀로 축소하려는 시도는, 일반적으로는 십계명을, 그리고 특별하게는 안식일이 십자가상에서 종결된 옛 언약의 본질이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지원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상력을 동원한 해석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정부의 도덕적인 일관성을 증명하고 있는 성서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66.3)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옛 언약의 법들보다 “더 나은 계명”을 제정하셨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다. 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율법에 보여주신 도덕적인 요구들을 변경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자세들을 위해 자신의 완전하고 거룩한 요구들을 변경할 필요를 느끼셨을까? 바울은 선언하기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하였다. 그는 승인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의 타당성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딤전 1:8)고 흔들림 없이 제시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도덕적인 요구를 변경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인 요구들을 반대하는 우리들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롬 4:25; 5:8, 9; 8:1-3). (66.4)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희생되시므로(요 1:29; 고전 5:7), 장차 올 메시야의 구속의 소망을 고양시키고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구약 당시에 행해졌던 모든 희생 봉사와 법들을 성취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보게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오심으로 “폐하고”(히 7:18), “낡아지게 하고”(히 8:13), “폐하게 된”(히 10:9) 희생 법들과, 그리고 “그런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히 4:9) 안식일 준수 사이에 분명한 구별을 두고 있다. (66.5)
 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십계명의 도덕적인 원칙에 따라 살도록 애굽으로부터의 당신의 구속적인 인도하심에 반응하도록 부르셨으며, 후에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욱 단순하고 더욱 나은 계명에 순종하므로 죄로부터 당신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시내에서 반포하신 도덕적인 원칙들이 충분하지 못한 도덕이어서, 결국은 더 단순하고 더 나은 계명으로 개선하고 대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는가? (66.6)
 그러한 추측은 하나님의 도덕률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특성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실은 터무니없는 것들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으로 하여금 십계명을 더 단순하고 더 나은 율법으로 대치시키시는 것으로 구성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내면화(internalization)시키므로 구성하시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67.1)
 이 구절은 우리에게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차이점은 “법”“사랑”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오히려,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법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결과와, 순종으로 하나님의 법을 성공적으로 내면화시킨 결과와의 차이점이다. 새 언약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성령의 능력으로 내면화시키는 것은, 바울이 놓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롬 8:2)하였기 때문에 그 법을 깨뜨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67.2)
 하나님의 법의 내면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내면화시키는 것은 이스라엘과 교회에 적용된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꼭 같은 약속을 교회에 적용시킨다(히 8:10; 10:16). 새 언약에서, 법이 단순화되거나 대치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내면화되었다. 성령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더 높은 윤리에 조화되는 생애를 살도록 하는 힘을 주는 율법을 향해 문을 열도록 한다. 새 언약 아래서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29)라는 라쯔라프의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잘못 인도되고 있다. 신자들은 성령의 강하게 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할 때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아니하며, 그들은 그 율법의 말씀을 따라 생애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더 이상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행한 것에 따라 갚아 주시기 위해서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롬 14:10)야할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법 앞에 책임이 있다. (67.3)
 성령은 허공에서 운행하지 않으신다. 성령의 기능은 율법을 지나쳐 버리거나 또는 대치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도록 돕는다(갈 5:18, 22, 23). 앨돈 래드는 “바울은 몇 번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새 생애라고 주장한다”(롬 8:3, 4; 13:10; 갈 5:14)는 것에 주목한다.30) (67.4)
 새 언약에서 발생하는 율법과 관련된 어떤 변화는 도덕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롬 8:4)는 성령에 의해서 힘을 얻어 계몽된 신자들 가운데 있다. 율법에 대한 존중 의식이 없이도 영에 의해서 인도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 성장에 위험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교회와 라쯔라프, 그리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옹호되는 “새 언약” 신학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각자가 자신에게 율법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이다. 이것은 쉽게 비 책임성의 행동으로 끌어내린다. 미국이 복음주의 신자들의 수(거의 100만 명으로 추산됨)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범죄, 폭력, 살인, 이혼 등에 있어서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므로, 백성들은 그들의 눈에 좋게 생각되는 대로 행하는 변명을 찾는다. (67.5)
 아마도 보편화된 “율법의 폐지” 의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늘날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들을 그들의 생애에 어떻게 적용시키는지에 대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돕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 것 같다. 크게는, 1968년 이후 북미주에 있는 주요 도시들에서 열려 수 천명의 사람들을 이끌었던 청년 갈등 기본 세미나(Basic Youth Conflict seminars)로서 바로 그 일을 성취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언급하면서, 왈트 카이제르(Walter Kaiser)는 “이것은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덕률을 전파하고 그것을 생애의 모든 국면에 적용시키는 일에 침묵하는 것이며, 곧 교회에 대한 도발이다”31)라고 기록하고 있다. (68.1)
 율법과 사랑 사이를 둘로 나누지 않음
 성경에서는 언약은 율법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율법과 사랑 사이를 양분화 시키는 일이 없다. 언약이란 주님께서 은혜롭게 설정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보존하시는 규칙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율법은 그러한 관계를 의미 있게 하는데 요구되는 질서를 보증한다. (68.2)
 신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률은 그분의 의지와 품성을 나타내며, 그것의 준수는 질서 있고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율법은 죄의 부산물이 아니고, 사랑의 부산물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그분의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신 후였다(출 20:2).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동정, 신실성, 그리고 완전성이 어떻게 반사되는지를 알게 된다. (68.3)
 십계명은 단순히 열 계명의 목록이 아니고, 근본적인 사랑의 열 원칙들이다. 율법과 사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이가 양분화 되어 있지 않다. 십계명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사랑을 그들의 주님과 그들의 이웃에게 표현해야하는 지를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이미 구약에서 발견되는 십계명의 정신을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레 19:18; 신 6:5).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음욕을 품음으로까지도 파괴될 수 있다(마 5:28). (68.4)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원칙이 어떻게 넷째 계명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복음서는 안식일 준수의 본질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에 의해서 사용된 일곱 번의 안식일 치유의 이야기들을 보고하고 있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선을 행하는”(마 12:12) 날, “생명을 구하는”(막 3:4) 날, 남녀를 신체적인 속박과 영적인 속박에서 해방되는 날(눅 13:12), 그리고 깊은 신앙심보다는 자비를 보여주는 날(마 12:7)로 설명하셨다. 제4장 “구주와 안식일”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의미와 기능을 어떻게 명확하게 했는지를 좀더 자세히 보게 된다. (68.5)
 새 언약의 사랑으로부터 옛 언약의 율법을 나누려는 라쯔라프의 시도는 두 언약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므로 사랑이 나타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경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를 명확하고 반복적으로 제시하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요 14:21).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그리스도의 계명은 도덕적인 원칙들을 개선했거나 단순화한 틀이 아니라 그분께서 시내산에서 선포하신 동일한 도덕적 원칙들이다. (68.6)
 두 언약들 아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행동을 위한 하나의 도덕적인 표준, 곧 생애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가지고 계신다. 생애의 완전함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품성(그분의 사랑, 신실함, 의로움, 공의, 용서)을 반영하면서 자라 가는 자들에게서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의 완성이다. 두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십계명 안에서 표현된 도덕적인 원칙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므로 그분과 그들의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가도록 하는 안내자로 기여한다. 성령은 새 언약에 있는 이러한 도덕적인 원칙들을 대치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 증서가 경건한 자의 심령 속에 살아 있어 더 힘있게 되도록 하신다. (68.7)
 예수와 새 언약의 율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