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사도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의미하던 모든 것을 이제 그는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출 19:5, 6)에 대한 베드로의 교회론적 해석이다. 이러한 적용은 메시아적 예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의 부산물이다. 교회론적 적용은 단지 기독론적 성취의 유기적 확대이다. 마치 몸이 유기적으로 머리에 연결되어 있듯이 교회도 메시아에 대하여 그러하다. 교회론적 해석은 이스라엘 옛 언약의 인종적 민족적 제한을 완전히 제거한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더 이상 인종이나 나라의 연대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 특징을 이룬다. 이것을
“거룩한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베드로의 영화(榮華)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들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벧전 1:19) 구속된 자라고 강조할 때 유월절 표상학의 노선을 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유월절 표상학(
출 12:5 참조)은 바울에 의해
고린도전서 5:7에서도 사용되었다. 더 나아가 베드로가 교회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벧전 2:9) 자들로 묘사한 것도 억압의 집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한 유비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출 4:23; 19:4; 사 43:21). 마치 옛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그의 구 원하시는 공로를 찬양하기 위하여 출애굽을 경험한 것처럼 교회도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그의 현재의 구원을 경험한 것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 어가게 하신 자를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골 1:13과 비교).” 이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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