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7장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교회론적 해석
 베드로는 중동에 흩어져 있는 그 시대의 교회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존귀한 칭호를 사용하면서(벧전 1:1)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14.2)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여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 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출 19: 5, 6과 비교하라).
(114.3)
 비록 사도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의미하던 모든 것을 이제 그는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출 19:5, 6)에 대한 베드로의 교회론적 해석이다. 이러한 적용은 메시아적 예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의 부산물이다. 교회론적 적용은 단지 기독론적 성취의 유기적 확대이다. 마치 몸이 유기적으로 머리에 연결되어 있듯이 교회도 메시아에 대하여 그러하다. 교회론적 해석은 이스라엘 옛 언약의 인종적 민족적 제한을 완전히 제거한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더 이상 인종이나 나라의 연대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 특징을 이룬다. 이것을 “거룩한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베드로의 영화(榮華)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들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 1:19) 구속된 자라고 강조할 때 유월절 표상학의 노선을 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유월절 표상학(출 12:5 참조)은 바울에 의해 고린도전서 5:7에서도 사용되었다. 더 나아가 베드로가 교회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벧전 2:9) 자들로 묘사한 것도 억압의 집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한 유비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출 4:23; 19:4; 사 43:21). 마치 옛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그의 구 원하시는 공로를 찬양하기 위하여 출애굽을 경험한 것처럼 교회도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그의 현재의 구원을 경험한 것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 어가게 하신 자를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골 1:13과 비교).” 이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11 (114.4)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한 특별한 예언을 계속 인용할 때, 그는 지속적으로 교회론적 적용을 따르고 있다. (115.1)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호 1:10; 2:23과 비교).
(115.2)
 호세아 선지자는 이 말씀들을 BC 721년 앗수르 유수 전에 배도한 이스라엘 지파에게 전달하였다. 이 지파들은 마치 이교도들처럼 살았고 그 결과 자신들에게 언약의 저주를 불러왔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 안에서 지금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벧전 2:9, 10) (115.3)
 바울도 소아시아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확신을 심어 주고 있다. (115.4)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2, 33).
(115.5)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의 왕으로서 즉위하셨다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토대는 시편 2편에 대한 그의 기독론적—종말론적 해석이다. 메시아 예언에 대한 그의 기독론적 적용에 기초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그들의 복음 기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사명으로 주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115.6)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7, 사 49:6에서 인용, 강조 첨가).
(116.1)
 이사야의 원문에 예언된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빛’은 이스라엘 나라와 구별되는 개인으로 묘사된 메시아의 강림에 대한 예언이다.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의 첫 번째 사명은 “야곱을 자기[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사 49:5)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 종은 이방을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이라고 부름을 받았다. “내가 또 너 [종]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116.2)
 이 메시아 예언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그의 팔에 안았을 때 처음으로 그에 의하여 기독론적으로 적용되었다(눅. 2-28-32 참조).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이 메시아적 임무를 지금 성취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변호하기 위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서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116.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2, 23).
(116.4)
 바울은 그 자신을 너무도 밀접하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심지어 그 안에서 합해졌다고 하였다(롬 6:3, 5, 11). 그래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에 대한 그의 기독론적 적용은 메시아 사명에 대한 사도적 적용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는 여호와의 이스라엘, 소명은 사도적 교회에서 성취되는 것이었다. 그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호세아의 예언을 인용한다(롬 9:24-26 참조). 그러므로 베드로와 바울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예언은 교회론적 성취를 이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데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116.5)
 교회 공동체에 대한 보편적 적용은 추상적인 영적화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자적 성취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대한 이러한 성취의 실체는 지역 교회를 방문한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깊은 인상을 받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 14:25)고 고백하는 바울의 확신으로 설명된다. 이것이 이방 가운데 끼칠 이스라엘의 영향력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사 45:14; 슥 8:23 참조). 그것은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어디에서든지 즉시로 성취될 것이다. (117.1)
 갈라디아서 본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6, 강조 첨가.)라는 축복으로 마친다(역자 주, 영어는 even to the Israel of God로서 ‘이스라엘에게도’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도 [kai]”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법적으로 말하면, 카이(kai)”“심지어(even)” 혹은 “그리고(and)”로 번역될 수 있다. 라이리(C. C Ryrie)는 “실제로 이 구절 자체로는 절대적인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용례는 이 절에서 두 계층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선호한다”12고 하였다. (117.2)
 그러나 이 마지막 말로 그는 문자적 주석의 기본 원리를 무시하였다. 어디서나 문법적 구문이 확정적이지 않는 곳에서는 역사적 문맥이 그 용어의 특별한 의미를 밝혀준다. 이 서신의 역사적 배경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비교 되거나 우월하다는 여타의 다른 지위나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다. 침례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이며,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들” 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갈 3:26-28).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무슨 말로 어떻게 더 명확하고 애매하지 않게 진술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바울은 오해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몇 마디 더 한다. 갈라디아서 4:21-31에서 사도는 언약의 약속에 대한 민족적 이스라엘의 어떤 주장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 구절은 “신약에 나타난 예루살렘과 유대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변증”13이라고 제대로 불린다. 바울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 앞에서 이삭을 핍박하였기에 아무런 유업을 얻지 못한 이스마엘의 신분과 같다고 까지 말한다. (117.3)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9-31).
(118.1)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사 54:1)을 교회의 창건에 적용한다(갈 4:237 참조). 그 원래의 배경에 서는 이사야가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남편”(사 54:5)인 여호와께서 큰 긍휼로(7절) “버림받은 여인”인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실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다시 번성할 것이요 전에 없이 부흥할 것이다(2-3절). 사도적 권위로 바울은 이사야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이렇게 적용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강조 첨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의 이러한 성취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지금 “위에 있는 예루살렘”(26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얻어진다. 리더보스(H. Ridderbos)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 (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