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7장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교회론적 해석
 이스라엘 언약의 교회론적 적용
 히브리서의 영감받은 저자는 특별히 그리스도가 그의 자기희생과 현재의 제사장직을 통해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이라는 것을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 있게 권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125.1)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125.2)
 히브리서는 제사장직언약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옛 언약은 “지상 성전”과 그 제사직분이다(히 9:1).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이후 하늘 성전에서(히 8:1, 2),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 사장이라 칭하심을”(히 5:1) 받으신 자이시다. 레위지파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로 바뀐 이 제사직분의 변개는 필연적으로 성소와 그 의식법의 변화를 수반하였다(히 7:12). 옛 언약은 그 자체로서 마음의 악을 제할 수 없지만,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히 7:22) 되셨다. 그는 단지 “영원한 제사장 직분”(7:24, 25)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옛 언약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드린(7:27) 그의 대속의 자기희생의 공로를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9:24)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보좌에 나아오는 모든 자 들에게 하나님께서 옛적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들 즉 악한 양심으로부터의 구원과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히 9:14; 10:22) 등을 주실 수 있으시다. (125.3)
 실패한 옛 언약과는 달리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된(31:31-34) 새 언약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확신과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다(히 7:22). 그리스도는 세 가지 근본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달성하 셨다.

   (1) 그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백성들의 마음에 내면화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법을 이스라엘에게 외적 멍에로 놓은 것보다 더 좋다(히 8:10). 이것은 에스겔서의 병행 약속이 분명하게 한 것처럼(겔 36:26, 27)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는 심령의 중생을 의미한다.

   (2)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을 개인화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 각자는 예외 없이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히 8:11).

   (3)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신다”(히 8:12). 이것들이 예레미야가 예언한 “더 좋은 약속들”이며,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히 8:6). 이 새 언약을 시작하심으로써,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히 8:13)이다.

 우리는 “저자의 설명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선지자(예레미야)의 시각에서 기록된 것이며, 그는 옛 언약은 이미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유효한 관계를 나타내기에는 그 수명이 다 하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23을 기억한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이미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개념을 소개하자마자 옛 언약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이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히브리서는 어느 백성들에게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약속을 적용하고 있는가? 미래에 있을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인가? 아니면 지금 이 시대 교회에 있는 유대인 개인과 이방인들인가? (125.4)
 세대주의 저자들은 해석상 모든 면에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월부어드(J. F. Walvorrd)는 다비(J. N. Darby)는 새 언약은 오직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하였지만, 체이퍼(L. S. Chafer)는 두 개의 다른 새 언약, 즉 오직 미래의 천년기에 성취될 민족적 이스라엘을 위한 새 언약(예레미야 31장)과 현 시대 교회를 칭하는 새 언약(히브리서 8장)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24 그러나 스코필드 주석 성경(초판, 1917)은 새 언약은 이중 적용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첫째는 천년기에 성취될 이스라엘이고, 둘째는 현재의 교회이다.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은 이전의 견해를 수정하여 새 언약은 오직 미래에 회개하는 이스라엘게서만 승인된다고 밝혔다(1317쪽). 월부어드도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것이며 그 성취는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천년 왕 국에서”25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26.1)
 세대주의자들이 히브리서 8장의 직접 문맥을 바로 취급하는 것을 어렵게 느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부인할 여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월부어드는 “사실, 이것은 재림 전 천년설 [더 정확히는 세대주의] 견해를 곤란하게 하는 단 하나의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 어려움은 사라진다”26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의 책 천년 왕국(The Millerinial Kingdom, 제 18장 “이스라엘과 맺은 새 언약”)에서 보여준 소위 “주의 깊은” 연구는 매우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신성한 주석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바쳐진 어떤 심사숙고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히브리서 8:8-13을 꼭 필요한 문맥과 그 책 자체의 기별과 연관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건들어 보지도 않은 채, 그는 단지 자신의 세대주의적 견해만을 방어하고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두 개의 새 언약 개념이 이 문제에 대한 더 나은 분석이며 전체적으로 재림 전 천년설과 더 잘 조화를 이룬다.”27 “두 개의 새 언약” 이라는 이 기발한 생각은 성경에 대한 주의 깊은 주석의 결과라기보다 그 문제 많은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히브리서 8장“더 좋은 언약”이 예언된 이스라엘의 “새 언약”이라는 것을 부인 하려는 월부어드의 노력은 결국 성경의 기별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다. (127.1)
항상 옳았던 유일한 주장은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은 자동적으로 모세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 아니라 한시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는 것이다∙∙∙.그것은 모세의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 가능해졌다고 선언한다(히 8:6). 그러나 그것은 이 더 좋은 언약이 “이스라엘 집과 맺은 새 언약” 이거나 이스라엘의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고∙∙∙말하지 않는다.28
(127.2)
 거룩한 성경 본문에 대한 이 믿어지지 않는 해체는 히브리서 8장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려는 것, 곧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더 좋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심으로 그 진정한 성취를 이루게 되었다는 그 중대한 확신을 완전히 와해시키고 만다. 히브리서 8장“항상 옳았던 것”을 장황하게 반복하고 있지도 않으며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미래에 성취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약속된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으로 비준되었으며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효과가 강력한 권세를 보이고 있다는 복음을 외치고 있다(히 4:14-16; 5:5, 6, 10; 6:19, 20; 7:11-27; 8:1, 2; 9:14, 24; 12:24; 13:20). 특별히 다음의 세 성경절이 이스라엘의 새 언약이 아직도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 되지 않았다는 월부어드의 결론을 논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128.1)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128.2)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128.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니라(히 12:22-24)
(128.4)
 월부어드는 자기의 주장을 펴면서 이 영감적인 구절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히브리서 7:22은 새 언약에 관한 본문 설명에서 조직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이 중요한 기별은 심지어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29 히브리서 9:15에 대해서 그는 “그리스도는 ‘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물론 그것은 교회와의 언약을 위해서나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있어서나 모두 진리이다”30라고 언급하였다. 히브리서 9:15을 그 자체의 문맥으로 설명하기를 회피하고 월부어드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을 이 본문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재림시에 유대 나라를 위하여 “새 언약” 의 중보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한 새 언약 이 교회를 위해 주어졌지만, 이스라엘을 위한 (the) 새 언약은 아니다”31는 것에 동의한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128.5)
 라이리(C. C. Ryrie)는 예수께서 주의 만찬 시에 교회를 위해 제정한(마 26:28; 막 14:24)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34에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모든 중요한 축복들“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수여 한다고까지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다. (129.1)
우리는 교회가 이스라엘과 맺은 새 언약의 축복들과 비슷한 축복을 받을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슷한 것은 성취가 아니다∙∙∙.이스라엘을 위한 새 언약이 있는 것처럼 교회를 위한 새 언약도 있을 수는 없는가?∙∙∙히브리서 8:7-13의 새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교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32
(129.2)
 세대주의는 동일한 하나의 성경 예언 속에 다른 두 개의 새로운 언약을 억지로 삽입시켰다. 이것을 두고 아직도 “정상적인 문자적 개념”이며, “평범한 문자적 개념”33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만일 교회의 ‘새’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이 아니라면, 성경 어디에 교회의 첫 언약(히 8:13 비교)이 있는가? (129.3)
 페인(J. B. Payne)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교회에서 유효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히브리서 8-10장에 대한 세대주의적 주장은 “지지받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실제로는 아니지만 다만 유추하여 교회에 적용된다는 “그렇게 본질적으로 가망성이 없는 거칠고 교묘한 사상”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 추론은 분명히 히브리서의 주장을 허물고 있다. (129.4)
그 독자들은 모세의 의식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유혹을 직면하게 되었다. 예레미야가 천년기에 의식주의가 좀 더 영적인 예배 형태로 대체되리라 고 예언하였다는 설명은 그 당시에 이미 그것이 대체되었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 선지자를 인용하는 것처럼 설득력이 없다.34
(130.1)
 페인은 히브리서 8:13; 9:1410:16-17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은 “하나이며∙∙∙교회에 해당됨”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 가 새 언약에서 약속한 죄의 용서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히 10:19)은 모든 자들에게 이제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130.2)
 히브리서 12:24에 대한 월부어드의 유일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언급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새 언약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맺은 언약에 대한 것이다.”35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언약과 분리되어 있다면, 왜 교회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히 12:22-24) 예수께 나아가고자 “시온 산,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24)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본질적인 성취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히브리서 전체는 유추의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언약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와 표상학적 성소 중보의 개념으로 전달된 것이다(히 1:1-3, 13). 모든 이스라엘의 상징과 표상이 나타내던 것은 예수의 삶과 봉사에서 마침내 그 성취에 이른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두 개의 새로운 언약 사이의 상상적 유추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열두 제자 모두 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과 맺은 새 언약과 모세의 옛 언약 사이의 역사적 대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풀러(Daniel P. Fuller)는 히브리서의 근본적인 구조와 명백하게 조화를 이루는 다음 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1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