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7장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교회론적 해석
바울은 이 약속[사 54:1]의 성취를 그리스도를 안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에서 보았다. 그것은 유대인들 중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나온 모임이다.14
(119.1)
 바울의 예언 해석의 원리를 이해하는 열쇠는 예루살렘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사실에서만 발견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죄악의 잔을 채웠다고(마 23:37) 심판하신 것처럼 바울도 이방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반대 하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 죄를 항상 채운다”(살전 2:16)고 심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끝까지(완전하게 혹은 영원히)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6)”고 덧붙였다. (119.2)
 갈라디아서 6:16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울의 용례는 갈라디아서 전체에 나타난 바울의 음조와 조화를 이룬 가운데 그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의 말로 요약하고 있다. (119.3)
[유대인들의] 할례나 [이방인들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 16).
(119.4)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과 자비의 축복을 이 규례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는 원리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모두를 포용하는 진술을 하였다(15절). 그가 교회 안에서 갑자기 유대인 계급과 이방인 계급을 구분하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페인(J. Barton Payne)은 “하나님의 이 스라엘도(갈 6:16)”를 교회 안에 있는 특별한 계충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 세대주의 주석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했다. (119.5)
그 단어를 마치 독특한 히브리출신 그리스도인 집단을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and, 갈 6:16]로 번역하는 것은 서신 전체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구분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는 끝났다.15
(120.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바울의 표현은 심원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가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 3:29)라는 표현과 동의어임이 분명하다.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의미했다는 것을 인정한다.16 그러나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려는 그들의 세대주의적 관심 때문에 바울이 교회 안에 독특한 계층으로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구별해 내는 것은 바울의 갈라디아서 기별과 근본적으로 충돌되는 개념이다. 그는 교회 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는 그 전체가 아브라함의 씨요 언약의 약속의 후사라고 선언하였다(3:26-29). (120.2)
 이러한 역사적—신학적 문맥 때문에 신국제역(NIV)과 여타 비슷한 성경 역본들이 갈라디아서 6:16카이(kai)를 설명 접속사 and나 even으로 제대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였을 때, 교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완전히 같은 말이다.17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16에서의 바울의 축도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의 씨요, 이스라엘의 언약의 약속의 후사(갈 3:29: 6:16 비교)임을 선언하는 가장 주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신자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할 때만 그는 어떤 의미로든 영적 이스라엘인이 된다”18는 라이리의 주장은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며 그 분명한 메시지와도 충돌된다. (120.3)
 리챠드슨(P. Richardson)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라는 구절은 “본심으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하며 “(모든) 이스라엘 안에(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갈라디아서 6:16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썼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준을 따라 걷는 모든 자들에게 평화를, 그리고 그의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주시기를 기도하노라.”19 이 해석은 바울이 두 종류의 신실한 이스라엘을 인정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갈 6:15)이 된 이스라엘과 아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121.1)
 리챠드슨은 갈라디아서 6:16쉐모네 에스레(Shermoneh Esreh, 우리와 주의 백성 모든 이스라엘에 자비를)의 유대인 축도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에 주목하였다. 그는 바울이 무의식적으로 이 유대인 축도를 언급하였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는 전적으로 같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 문장은 그 축도가 반영된 해석이라는 인상을 준다”20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접근법의 근본적인 결함은 그 해석학적 열쇠를 갈라디아서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비 성경적인 자료에서 외적 유사성만을 보고 찾아냈다는 점이다. 리챠드슨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바울 서신의 신학적 맥락을 무시하고 갈라디아서 6:16에 두 종류의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 즉 이미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과 아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소개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두 종류로 구분하여 불충한 이스라엘 사람들 옆에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끼워 넣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래로 하나님의 (the) 신실한 이스라엘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121.2)
 바울은 그의 기독론과 교회론에 근거하여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엡 2:15) 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에서는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신실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122.1)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동료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편지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빛을 던져준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 분명한 이 책에서(엡 2:11, 17; 4:17), 사도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로서 이스라엘 안에 들어온 것은 결코 하나님이 나중에 생각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창세 전에”(엡 1:4)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엡 1:5, 11).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엡 1:10) 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언약의 축복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인과 동일한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엡 2:12; 4:4). (12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 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19, 20)
(122.3)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엡 2:16).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사”(엡 2:15),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엡 2:14)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성전 의식과 함께 모세의 법을 폐기하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언급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는 메시아적 이스라엘의 형성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다. 그의 목적은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엡 2:15)는 것이었다. 이 목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실현되었으며(2:16),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선포되도록 위임되었다. (123.1)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강조 첨가).
(123.2)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과 언약의 약속 안에서 전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함께”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함으로써 강조한다. 이 단어를 원어 신클레로노마(sunkleronomaa), 시쏘마(syssoma), 심메토카(syminmetocha)로 보면 더욱 눈에 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담을 세워 구분하려는 어떤 신학적 체계도 정당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집에 이방인을 받아들인 것이 예수의 비유인 탕자를 그 아버지 집에 받아들인 것(눅 15:11-32)과 비교되 었다.21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이 부끄러워하며 돌아왔을 때 그를 안아 주었다. 반면에 형은 아버지의 관용에 불만을 품었다. 그와 같이 바울 시대에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집인 이스라엘 집에 들어와 이스라엘의 동료와 같은 후사로서(롬 8:17) 이스라엘의 언약에 전적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방인의 자녀 됨은 이미 있던 집에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다. (123.3)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엡 1:12)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로 구분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해 그는 우리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여(엡 2:12) 예정되었다고 하였다.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그는 그 안에서 너희도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 14)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같은 운명 즉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엡 1:14). (124.1)
 바울이 에베소 1장에서 강조하려는 개념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시고 정한 것을 다만 그리스도가 수행하고 성령이 드러낸다는 것이다.22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계획을 수행하는 정한 수단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는 이스라엘 나라가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야기된 응급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임시 조치가 아니다. 전에 둘로 나뉘어졌던 인류의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신비요, 본체요, 본질이다. 이것은 비록 충분하고 명료하지는 않지만 원칙상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글에 나타나 있다(엡 3:5; 롬 1:2; 16:25, 26).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글에 완전히 가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시대 이전에는 단지 희미하게 이해되었을 뿐이다(벧전 1:10-12; 눅 24:15-17, 44을 참조하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조명 아래서 사도들은 우주적인 범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고 그 그리스도 중심적 구조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엡 1:9, 10; 고후 3:13-18 비교). (124.2)
 만물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되듯 우주의 만상은 결국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피에 의지하여 그로 말미암아 재결합되고, 다시 온전한 유기체로 통합될 것이다(골 1:20). 하늘과 땅의 우주적 연합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엡 1:22). 그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참된 씨와 이스라엘의 영적인 가족 사이에 있는 어떠한 민족적 장벽도 여하한 이분법적 구분도 완전히 끝나버렸음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아적 이스라엘을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동등한 시민으로서 이스라엘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