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7장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교회론적 해석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세대주의 작가들이 선호하는 것처럼5 먼 미래에 다른 유대인 “세대”들에게 신정정치의 하나님 왕국을 약 속한 것이 아니라 “동서로부터” 모든 민족과 나라들로부터 나온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음이 분명하다. 간단히 말해, 그의 교회(“내 교회” 마 16:18)가 그리스도를 거절한 나라를 대신하는 것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구원법칙의 계속성을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 제기되어 왔다. (109.2)
바실리우 투 쎄우[하나님의 왕국]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 이르는 실체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가 그가 범죄한 이후 다시 취하셨다. 그것은 이제 한 백성에게 새롭게 주어졌다. 이전에 맡은 자가 ‘백성’이었던 것처럼 새롭게 맡은 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 왕국의 계속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계속성을 필요로 한다.6
(109.3)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삶과 봉사에서 현재적 실체로 나타났다. 구약의 메시아적 희망은 죄와 사단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봉사에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강조 첨가)고 선포하셨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거절한 나라이다. 래드(G. E. Ladd)는 “그 나라가 전체적으로 그 제안을 거절하였을 때,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그 왕국의 자녀들, 참된 이스라엘, 초기 교회로 구성되었다”7고 하였다. (110.1)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의 정체를 밝혔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느니라”(눅 12:32; 22:29과 비교, 강조 첨가)고 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분명히 그의 제자들을 새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소 떼와 양 떼로 불렀기 때문이다(사 40:11; 렘 31:10; 겔 34:12-14). 참 이스라엘은 메시아 예수의 멍에(마 11:29)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왕국의 참 아들들이다(마 13:37, 38; 8:12과 비교). 브루스(F. F. Bruce)는 “예수께서 왕국을 받을(눅 12:32; 단 7:22, 27과 비교) ‘적은 무리’들을 형성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을 자기 주 위에 부르신 것이 그를 새 이스라엘의 기초자로서 우뚝 세웠다”8고 확언하였다. (110.2)
 예수께서 믿음과 회개를 왕국에 들어갈 조건으로 선포한 것은 “다만 구약 예언의 남은 자에 대한 희망에 맞추어 믿음의 남은 자를 모으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될 뿐”9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곁에(beside)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약속과 책임을 계승할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자(as) 삼키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 나라와 분리된다.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할 때 하나님의 계신 곳을 설명하였다. (110.3)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111.1)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로 모여든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과 오직 모세 주위로만 모여드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이스라엘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잘 알려진 다음의 랍비들의 말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두 사람이 함께 앉아 토라의 말씀에 그들 스스로 관심을 기울이면 셰키나가 그들 중에 있다”(미쉬나의 Aboth 3.2). (111.2)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나라에서 신정정치를 거두신 직접적인 결과는 모세가 레위기 26장, 신명기 28장, 그리고 다니엘 9:26, 27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언약의 저주가 내린 것이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그 도성의 끔직한 미래에 대해 우시면서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셨다. (111.3)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2-44, 강조 첨가).
(111.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 강조 첨가).
(111.5)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에 “오신 하나님의 때”였다. 메시아의 철회의 결과는 이스라엘 나라에 광범위하게 미쳤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신정의 상실은 마지막 때까지 미칠 것이다(단 9:26, 27; 눅 21:24; 살전 2:16).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인 그 적은 무리에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그 도성에 다가오거든 그 운명의 도시로부터 도망치라고 절박하게 촉구하였다(막 13:14; 마 24:15-20; 눅 21:20-24). (111.6)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정한 언약의 백성으로서 남아 있게 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아적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순간 유대 나라는 이방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시험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열 두 사도들과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그는 옛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거룩한 소명을 그의 메시아적 무리들에게 부여하시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고(마 5:14),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마 28:19)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유대 나라에 의존하지 않으셨다. 그의 계획은 메시아를 거절한 이스라엘 의해 좌절되거나 연기될 수 없었다. 오 순절은 하나님께서 “스케쥴 따라” 움직이신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분명히 연례적인 오순절 축제가 다가왔을 때(행 2:1), 예언이 성취되는 중에 새롭고도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다. (112.1)
 이스라엘 예언에 나타난 남은 자로서의 교회
 사도는 교회를 하나님의 계획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이나 이스라엘 예언의 범주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연기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변경을 제안하는 대신에 사도는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각 사건 즉 그의 삶,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부으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등 모든 것이 이스라엘 예언을 펼치시고 이루시는 것으로 강조하였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 배신당하시고 죽으심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행 2:23) 이루 어진 것으로 설명하였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행 4:28; 시 2:1, 2을 의지하여)는 것으로 보았다. (112.2)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승천하시어 이스라엘과 열방을 위한 다윗 가문의 통치자로 즉위하신 것에 대해 베드로는 다윗의 예언적인 시편 110편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3.1)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 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436).
(113.2)
 베드로가 시편 110편을 그리스도의 현재적 왕권에 적용한 것은 “구약 예언에 대한 놀라운 재해석”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시편 110편의 약속은 예루살렘에서의 왕의 보좌를 언급하기 때문이다(시 110:2을 보라). 래드(Ladd)는 이렇게 설명한다. (113.3)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아래 다윗의 보좌를 예루살렘에 있는 그 지상의 위치에서 하늘 그 자체로 옮겼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신다. 그의 메시아적 고난은 지나갔다. 그는 메시아로서 통치에 임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 통치를 그의 모든 원수들이 굴복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고전 15:25).10
(113.4)
 베드로의 해석은 시편 110편에 대한 문자적 주석이 아니라 다윗의 예언에 대한 권위 있는 기독론적 적용이다. 구약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 방법은 이스라엘의 예언을 그리스도와 신약의 조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연기는 전혀 없다. 오직 새로운 진전과 극적인 성취(약 삼천 명의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해 침례를 받았다. 행 2:41)만이 있을 뿐이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말세를 위한 요엘 예언의 직접적인 성취로 설명한 베드로의 해석(행 2:16-21)은 구약에 예견되거나 예언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요엘의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의 놀라운 성취였다. (113.5)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사후 고안이나 중간 방해물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이스라엘 남은 자의 거룩한 과정이요 실현이다. 교회에 성령이 부어진 직후에 베드로는 “또한 사무엘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함이니라”(행 3:24)고 단호하게 언급하였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 이래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은 사도적 교회의 형성에서 그 실제적 성취를 맞게 된 것이다. 교회는 구약의 남은 자에 대한 약속에서 명백하게 예언되어 있다. (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