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8장은 바벨론의 몰락을 초래하는 심판이 짧은 것도 “일 시간에”(계 18:10, 17, 19)라는 동일한 표현방식으로 묘사한다.29 같은 장에 앞서 나오는 “하루 동안에”(8절)라는 표현도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열 왕은 마지막 세계적인 정치권력을 대표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6장 아마겟돈의 문맥에서 그들을 만났었고(계 16:12), 이제 18장에 그들이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는 것을 다시 만날 것이다. (221.2)
 아마겟돈—제1부
 이 마지막 국면은 선지자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땅의 임금들이 짐승의 권위 아래 함께 통치하는 것에 합의하는 잠시 동안의 논의가 있은 후에(계 17:13), 그들은 아마겟돈 전쟁을 선포한다(14절). 참패를 당한 왕들은 돌아서서 그들의 지도자, 자기들이 여왕으로 세운(17, 18절) 그 여자를 공격한다. 예언은 열 왕(세상의 임금들)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6절)고 예고한다. (221.3)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들이 그 다음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단순히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라고 덧붙인다. 천사의 그 외침은 둘째 천사의 외침(계 14:8)을 반향하며, 이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린다.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17절). (221.4)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을 때처럼 모든 책임을 하나님이 지신다. 그리하여 바벨의 찬탈하는 본성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바벨의 죄악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 구절의 빈틈없고 구체적인 표현이 이러한 개념을 지지한다. (222.1)
 이렇게 냉정하고 엄격한 결정론(決定論)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예언의 내용이 역설과 아이러니로 엮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왕의 복장과 보석으로 치장한 미녀가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계 17:4) 잔을 우아하게 들이마신다. 그녀는 “참람된 이름들”(3절)이 새겨진 끔찍한 짐승 위에 우아하게 올라앉아 있다. 그 여자와 짐승은 마치 하나인 것 같은데(17, 18절), 바로 그 짐승이 돌아서서 나중에 여자에게 분노한다(16절). “큰 바벨론”이 이제 막 잿더미에 쓰러지게 되었다(계 18:2). (222.2)
 이렇게 역설적이고 혼란스러운 표현은 정치적인 혼란과 악한 의도들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감지하는 역사철학을 입증한다. 결국 하나님이 역사의 모든 얽히고설킨 혼란들을 정리하신다. 역사에는 방향이 있어서, 현재의 불합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해결될 것이고, 그렇게 그분의 공의와 새로운 의미의 희망을 입증할 것이다. (222.3)
 거기서 나오라
 이제 예언은 긴급한 어조를 띤다. 그 외침은 온 땅에 울려 퍼진다. 예레미야서로부터 빌려온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말이다(4절). 그의 의도는 유수(幽囚)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으로부터 피하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렘 51:45). 그 소환은 그 도성에 막 떨어지려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탈출하고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준비하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우상 숭배의 부패한 영향으로부터 피해야 할 더 긴급한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47, 52절). (222.4)
 그 동일한 호출은 이스라엘의 역사 대대로 들려왔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갈대아 우르에서(창 12:1), 롯은 소돔에서(창 19:12)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들었다(출 12:31). 신약에서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라고 하는 그 동일한 호출을 듣는다(고후 6:14: 엡 5:11). 삶의 터전을 떠나고 예상치 못한 모험으로 인도하는 그 요구는 항상 부담스러운 기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라는 요구가 아니다. 역사적인 바벨론의 멸망 이후로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호출은 꼭 이삿짐 차와 비행기 표를 의미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222.5)
 사실상 바벨론은 어디에나 있다. 물론 바벨론은 제도적인 기독교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벨 론에서 나오기 위하여 어느 특정한 교회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벨론은 또한 일종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그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교회가 수 세기 동안 밀착하고 있던 사고방식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에게로 가는 문(바벨)이라는 생각을 멈추고, 하나님을 교회로, 신앙을 정치로 대신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바벨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그것의 제국주의와 오만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反) 셈족주의에 반대하고, 교회가 유대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바벨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에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락함과 전통에 안주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한 사람들이 무릅쓰는 모험이다. (223.1)
 그러니까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전적인 회심의 경험이다. 그것이 마지막 때의 학살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며, 살아 남는 유일한 길이고, 사람이 참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23.2)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바벨론의 거리, 바로 그곳에서 울리는 희망의 외침이며, 아직 기회가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 각 사람을 부르는 호출이다. (223.3)
 바벨론을 위하여 애곡하다.
 그러한 논리를 지지하듯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은 미래 바벨론의 마지막 허상(虛像)을 무너뜨린다. 온 땅은 애곡하고 있다(계 18:9~20). 바벨론 후(後) 시대는 불행하다. 땅의 왕들(9절), 상인들(11절) 그리고 선원들(17절) 즉 바벨론의 부와 영향력으로 혜택을 입던 사람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슬퍼한다. 일어난 비극에 대하여 그들은 남 탓을 할 것이 없다. 그들이 그 일의 원인이고, 그것을 불 속에 던진 자들이다(계 17:16). 자기가 망가뜨린 장난감을 가지고 우는 변덕스러운 어린아이처럼 바벨의 연인들은 헛된 눈물을 흘린다.

  (223.4)
 땅의 거민들은 그들의 유일한 신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숭배하기를 계속한다. 그들이 애곡하는 것도 그것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한다.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계 18:18)라고 하는 말은 옛날 짐승을 숭배할 때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계 13:4)라고 하던 말을 거울로 반사하듯 한다. 그것은 또한 고대 이스라엘 예배의 자세인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라는 말과도 유사하다.30 (224.1)
 그 날은 아마겟돈에 대한 표현에서도 보듯이 다른 어떤 때와도 다른 애곡의 날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다드 림몬을 위해서 그랬던 것과 같이 신(神)을 위한 애곡이다. 그러나 본 구절의 신은 봄이 와도 그 가나안의 신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224.2)
 전통적인 애곡의 의례와는 달리 이 경우에는 위로하는 예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이야기에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결말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는 한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그 큰 성의 멸망을 상징한다.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계 18:21). (224.3)
 예레미야 선지자도 역사적인 실제 바벨론의 멸망을 상징하는 데 동일한 몸짓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는 큰 돌을 유브라데 강 속으로 던지면서,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렘 51:64). 두 구절에서 그 의식적(儀的)인 행동들과 그것의 의도는 동일하다. 그 대상만 다르다. (224.4)
 이번에는 큰 맷돌이 바다에 던져지는데, 그 상세한 묘사가 특히 중요한 것은 맷돌의 이미지가 일상생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계 18:22). 그 천사는 맷돌을 바다에 던지는데, 그것을 사용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거민들은 모두 죽고 없다. 맷돌은 그렇게 생존에 꼭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는 그 생명을 전집(典執)함이니라”고(신 24:6) 하면서 누구든지 그것을 빚 담보로 취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제 그것이 아무 쓸 데가 없게 된 것이다. (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