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월드컵 (요한계시록 15~18장)
 킵푸르의 종결
 그러나 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저자는 우리를 하늘 성전의 의례가 거행되는 장면으로 다시 데려간다. 예언적 이상은 일곱 개의 컵20)을 넘어서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까지 연장된다. 그는 먼저 유리처럼 잔잔한 바다를 보는데(계 15:2),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성전에 관한 문

20) 이 책에서는 “잔” 또는 “대”과 같은 의미로 쓰임(역자 주).
(194.1)
 맥에서 만나보았던 이미지이며(계 4:6), 창조의 과정에서 패배를 당하여 물러났던 태초의 물을 상징한다.1 (195.1)
 그 다음 장면은 우리를 구속 받은 거대한 무리에게로 데려간다(계 15:2~4). 선지자는 그들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고대 이스라엘 자손처럼 물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출 15장)를 부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거두신 승리를 경축하는 것을 본다.

  (195.2)
 이러한 승리의 이상 후에, 선지자는 황폐하게 하는 임무를 시작하려고 하는 일곱 천사를 돌아본다. 선지자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대속죄일에 제사장이 입는 흰 세마포 옷을 입고(계 15:6; 참조 레 16:4)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본다. 그 장면은 우리에게 킵푸르 의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순서를 연상케 한다.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레 16:17). (195.3)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 있다(계 15:8). 속죄의 봉사가 완결될 때까지는 아무도 그 영역을 침범하지 못한다. 동일한 현상이 출애굽기에서 성막의 건축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일어났다.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성소를 채우고, 아무도 거기 들어갈 수 없었다(출 40:35). 출애굽기의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의 표현을 반향한다. 창조 이야기를 결말짓는 “일이 마치니”(창 2:2)라는 동일한 표현이 출애굽기 40장 33절에도 등장한다. (195.4)
 성소 건축의 완결은 세상 창조의 완결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그 양(兩) 순간을 그분의 임재로써 영예롭게 만드셨다. 이제 계시록의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결말을 지목한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킵푸르의 특성인 정결 과정의 마무리를 암시하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심판의 끝에 와 있다. 판결은 인봉되었다. 그것은 킵푸르의 의례 안에 담긴 진리이다. 해질 때 올리는 킵푸르의 마지막 기도인 느일라(né ilah)는 예루살렘 탈무드에서 하늘 성전이 닫히는 것과 관련되어 나온다. 유대 전승에서 킵푸르는 열흘 동안 있는 은혜의 기간이 완료되는 날이기 때문에, 느일라가 드려지는 동안 “우리의 생각, 우리의 운명 그리고 우리의 심판은 봉인(封印) 되었습니다.”2라고 기도한다. 흥미롭게도, 느일라에서 따온 호트메두(hotmenu, 우리를 인 치소서)라는 말은 나중에 하티마 토바(batimah tovan)라는 전통적인 킵푸르의 인사말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당신이 잘 봉인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196.1)
 계시록은 또한 각 사람의 운명이 인 쳐지는 순간에 대한 이러한 전승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용서하실 수 없다. 그리스도의 개입이나 그분의 희생을 떠올리는 것도 더 이상 소용이 없다. (196.2)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개념은 역사적인 실제의 느낌은 상실한 채 감상주의(感傷主義)의 한 형태로 희석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구원은 실제적이며,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에 스스로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소망은 하나의 의미 없는 개념이나 감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개입하기를 거절하신다는 것은 역사 안에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고 행동하신 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유한하고 시간과 환경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다. (196.3)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어느 시점이 지난 후에는 개입하기를 거부하신다는 사실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의 패턴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굳어지게 한다. 위로부터 오는 봉인은 다름이 아니라 다시는 돌이키는 일이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부단히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회개할 수도 없는 돌아 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어떤 사람인 것을 바꿀 수가 없다. 그 과정은 마지막 때에 최종적인 완결에 도달할 것인데, 그때는 모든 사람이 그들 스스로의 선택을 고의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196.4)
 계시록에도 뒤에 가서 이 동일한 원칙이 속담의 형태로 나타난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다가오는 일곱 재앙 중 몇 재앙은 선지자의 우울한 관찰로써 끝맺는다.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계 16:9; 참조 11, 21절). (197.1)
 우리 편에서 이러한 인치는 사건의 때가 언제일지 추측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그때에 도달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염려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아직 회개할 시간이 있음을 보여 준다.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을 때가 우리가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 않기로 선택할 때일 것이다. (197.2)
 계시록은 조금 전에 큰 포도즙 틀에 포도를 짜서 피로 만드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였다. 이제 본 구절에서는 그 이상이 실현된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는 큰 포도즙 틀로부터 세상의 컵들에 부어진다. (197.3)
 그 표현 역시 상징적이다. 잔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요셉은 미래를 점치기 위하여 잔을 사용하였다(창 44:5). 예레미야는 잔에서 열방의 미래 운명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라’(렘 25:15, 16).3 (197.4)
 인치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단서(端緖)는 하나님이 그분의 진노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분은 진노의 일곱 잔을 땅에 부으신다. 성전이 닫히는 것은 잔의 재앙과 함께 일어 나는 사건이다(계 15:8). (198.1)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여섯째 인과 일곱째 쇼파르에서 예견되었던 것이고(계 6:12; 11:15), 셋째 천사가 선포했던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 14:9, 10). (198.2)
 진노의 일곱 잔은 그러므로 세 천사의 선포 뒤에 따라 나오고, 짐승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을 때에 부어지기 시작한다. 첫째 잔에서 선지자는 그 심판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계 16:2) 오는 것임을 알려준다. (198.3)
 일곱 잔(대접)은 사실상 일곱 쇼파르 심판의 재판(再版)이다. (198.4)
▶ 첫째 쇼파르 ▶ 첫째 잔
    땅     땅
▶ 둘째 쇼파르 ▶ 둘째 잔
    피의 바다     피의 바다
▶ 셋째 쇼파르 ▶ 셋째 잔
    강들과 물샘들     강과 물 근원
▶ 넷째 쇼파르 ▶ 넷째 잔
    해     해
▶ 다섯째 쇼파르 ▶ 다섯째 잔
    흑암     흑암
▶ 여섯째 쇼파르 ▶ 여섯째 잔
    유브라데 강     유브라데 강
▶ 일곱째 쇼파르 ▶ 일곱째 잔
    하나님의 진도:우박     하나님의 진도:우박
    나라를 되찾음     나라를 되찾음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