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I 부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심 (출애굽기 3-18장) 제 2장 지도자를 부르심 (출애굽기 3-4장)
 이 지팡이는 모세의 사역에 끊임없이 사용된다. 동일한 의미가 아론의 지팡이에도 부여되었다(7:8ff.). 모세의 전능한 지팡이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게 한다(14:16). 후에 모세는 이 지팡이로 반석을 쳐 물이 솟게 했다(17:1-7). (67.1)
 성경에 등장하는 지팡이는 왕권과 권세와 권위를 상징한다. 홀(笏)은 일종의 단장으로 동일한 의미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홀은 애굽 왕들의 의례적인 상징이었다(Sarna, 60).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분의 권세와 권위와 지도력을 대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음을 모세가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모세의 막중한 직책에 대한 가시적이고 실체적인 한 증거였다. 아론의 지팡이 역시 신령한 권세와 직책이 부여되었다. (67.2)
 두 번째 이적은 문둥병과 모세의 손이었다. 모세가 그의 손을 품안에 넣자 문둥병이 손에 발하였다. 다시 손을 품에 넣자 문둥병이 사라졌다. 이적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 모세가 가졌던 두려움과 이적이 끝났을 때 그가 안도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67.3)
 첫 번째의 이적과 달리 이 문둥병은 다시 출애굽기에 언급되지 않는다. 이 이적의 중요성은 명확치 않다. 문둥병은 일반적으로 죄 또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문둥병 이적은 모세의 끊임없는 거절과 질문들에 대한 가벼운 질책이며,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수도 또 심판을 거두실 수도 있다는 단순한 하나의 언약이었다. 문둥병 이적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심판과 함께 그분의 선지자나 기별을 거절할 경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67.4)
 세 번째 이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데 애굽에 도착했을 때 나일강의 하수를 취해서 땅에 부으면 피로 변할 것을 말씀하셨다. 애굽인들은 나일강을 생명의 근원으로 신령하게 여기고 있었다. 모세가(그리고 하나님) 이러한 이적을 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생명과 종교를 통제하고 있다는 능력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67.5)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실로 불가사의한 이적들이었다는 것이다(8, 17절). 하나님께서 마술과 같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큰 실체들에 대한 표상들이었다. 모세 자신이 하나님과 실지로 대면하였음을 믿어야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과 애굽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면했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다. 이러한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며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68.1)
 이 이적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과 애굽의 바로 보다도 더 권세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연약하여 비록 종살이에 처해있고 애굽이 당시의 강대국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신들과 그 나라와 통치자들을 멸하실 수 있는 전능의 하나님이셨다. 비록 이스라엘은 연약하지만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교훈을 적용하면, 하나님을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던 것처럼 구원받을 것이다.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먼저 마음에서 시작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해방되었을 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구원이 뒤따르게 된다. (68.2)
 모세와 그의 겸손함
 본 장에서(4:10-17) 모세는 자신이 언변에 능하지 못함으로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직접적으로 반응하셨다. 일련의 수사적 질문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의 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귀머거리나 벙어리 되게도 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하였다. 문법적으로 강한 명령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가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 모세가 할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가 전할 기별을 돌아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실 때는 그분께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또한 제공하심을 의미했다. (68.3)
 “모세가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다. 11, 12절의 하나님의 반응은 모세가 상당히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모세는 겸손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맥상 변명의 이유는 간단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언변을 가르치실 것을 계속하여 언급하지만, 모세는 여전히 이 사명에서 벗어나기만을 구했다. 모세의 빗나간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이 그와 함께할 것이며 그가 모세의 언변을 도움으로 그에게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지시하셨다. (69.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사실에 당황케 된다. 다른 수많은 성경절들처럼 이 구절 역시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의 광범위한 수정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당황하며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69.2)
 첫째로, 하나님의 분노는 의미 없고 변덕스럽고 사소하기도 하며 파괴적 본성이 있는 인간적 분노와는 차이가 있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께서 우리의 일상에 깊이 관여하시며 인간들과 깊이 교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감정적인 면에서 그분의 백성들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시다. 만약 우리의 고통과 사랑을 그분과 함께 나누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분노 역시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69.3)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분노는 교훈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너무 멀리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분노는 백성들이 정도를 가고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노가 심판으로 변하면, 그 노는 훈계의 가르침인 것이다. 모세의 경우 더 이상의 질문과 거부를 하지 않게 되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69.4)
 이 성경 구절은 또한 예언적 기능의 견지에서 매우 흥미롭다. 예언적 진행의 전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고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론이라는 또 다른 절차를 추가하신다. 이와 같은 독특한 상황에서는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또는 기별을 주는 자)이 되었으며, 아론은 백성들에게 “모세”(또는 선지자)가 되었다. (69.5)
 모세는 하나님과의 신령한 대면 후 미디안의 집으로 돌아와 애굽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출애굽기 4:18-30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부터 미디안 그리고 애굽까지의 여정 중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70.1)
 본 장의 기사는 모세가 미디안으로 돌아온 후 얼마간 시간이 경과한 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셨음을 암시하고 있다(19절). 이 명령은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하셨지만, 이제 모세를 기억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바로의 죽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70.2)
 이제 모세와 그의 가족들 관계에 주목해 보자. 모세는 당시 80의 나이였지만, 그는 장인에게 애굽으로 떠날 수 있는 허락을 구했다.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그의 백성들(가족)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허락과 또 그 이유는 우리들 귀에 다소 이상하게 들리게 된다. 왜 80의 고령자가 장인의 허락이 필요한가? 왜 모세는 옳지 않은 다른 이유를 말했을까? (70.3)
 우리는 모세가 그의 처 식구들과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세가 바로의 노를 피해 이방인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에게 아내와 거처할 곳을 제공하면서, 모세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세가 처한 문화가 부모와 연장자를 매우 공경하였다는 사실이다. 부모 된 권위나 힘은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래의 계획에는 그의 가족들과 아내도 함께 데려 가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십보라는 이드로의 딸이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이들의 할아버지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모세는 순종하는 아들(사위)로서 처신했으며 장인 이드로에게 떠날 허락을 청했고 아마도 그가 떠날 여정에 대한 축복을 청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이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70.4)
 예절과 애정과 풍습 등이 모세로 하여금 장인의 허락을 구하도록 했지만 모세는 그의 장인에게 떠나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를 밝혔어야 했다. 모세가 자신의 가족을 보고자 했던 평범한 이유는 진심이었지만 허락을 구하기 쉬운 변명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변명함으로 하나님께 부여받은 명령이 쉽지 않음을 숨길 수 있었다. (71.1)
 애굽으로 가는 여정에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와 아들들을 동행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20절24-26절을 증거로 인용한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모세의 가족이 그 이후 애굽에서나 또는 출애굽 하는 과정 중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가족들을 출애굽기 18:2-6절에서 만나게 되는데,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 이드로가 그들을 돌보고 있었다. 18절에서 모세는 “나로 가게 하소서”라고 요구하며, 장인 이드로는 “네가(단수형) 평안하라”라고 대답하고 있다.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