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I 부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심 (출애굽기 3-18장) 제 2장 지도자를 부르심 (출애굽기 3-4장)
 출애굽기 3장4장은 모세의 질문과 그의 부적격함(3:11, 13; 4:1, 10, 13, 18)에 대한 기사들로 가득 차 있다. 모세가 많은 질문 공세 등으로 두려움을 나타낸 것은(4:13, 14)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보편적 특징은 개인적 필요를 절실히 느낀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사업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는 자들에게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분께서 그들의 사명을 반드시 이루고자 언제나 기꺼이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할 것이다. (58.5)
 나는 스스로 있는 자 (59.1)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과 그분이 느끼시는 것, 역사하시는 방법과 이유 등을 진술하는 것으로 이 장과 필적할 만한 구약의 장면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출애굽기 3장은 주의 깊은 사고와 기도드릴 때와 같은 명상을 요구한다. (59.2)
 출애굽기 2:23-25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보고 듣고 또 친히 기억하고 계심을 설명하고 있다. 출애굽기 3장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보고”, “듣고”, “염려”하고 계셨으며(7절), 이제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를 기술하고 있다. (59.3)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심으로 모세의 관심을 끄셨으며 그로 하여금 경배케 하였다. 하나님께서 불을 사용하시는 심오한 이유는 앞서 언급하였다. 불은 2절3절에서만 5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모세가 그 불을 기이하게 여겼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실지로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기이히 여기어 다가옴으로 그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59.4)
 20세기 서구의 과학적 사고로 이러한 종류의 불과 이러한 종류의 기사를 이해하는데 다소 무리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기사를 환상이라 일컫기도 하며, 모세의 심리적인 경험으로 간주하여 기사의 생명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추론은 첫째, 모세가 떨기나무를 보고자 다가갔다는 내용으로 볼 때 기사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로, “만약에 화학자를 가까스로 피한다면 또 다른 과학자인 심리학자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한 Bernard Ramm와 같이 이러한 추론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불을 심리적인 상태의 불로 간주하는 것은 의구심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이 모든 이야기가 사람의 뇌에서 발생한 심리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59.5)
 이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짧은 역사 속에 그것도 주로 서구 문명의 소수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우리는 용기를 얻게 된다. 역사의 전 시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실지로 이 땅에 있었음을 받아 들여왔다. 이 사건은 모세 개인에게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는 놀라움으로 경외심이 생겼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이기도 하다. (59.6)
 하나님은 이곳에 매우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그분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으며 그의 조상들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그분께서는 그 개인들을 실질적으로 알고 계시었다. 그분은 모세의 질문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부분만 드러내시지 않으셨으며 모세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많은 의문들을 남겨두지 않으셨다. (60.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매우 적극적인 방법으로 구원하시고자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내려오시어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8절)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역을 이룰 사자로 모세를 보내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실 것이며 그에게 증거를 주셨다(12절).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하실 것이며(16절), 애굽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18, 21절). (60.2)
 이곳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을 열심히 드러내시고자 하는 분이셨다. 그분께서는 백성들이 그분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묘사하고 있는 당신의 성호를 드러내셨다. 그분께서는 과거에 가지셨던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모세에게 말씀하셨다(6, 15절). 그분께서는 그분의 성호가 기억되기를 원하셨다(15절).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백성들로부터 결코 숨기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께서는 알기를 갈망하셨으며 또 알려지기를 갈망하셨다. (60.3)
 이곳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매우 밀접하신 분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적극적인 구원자가 되시고자 내려오셨다(8절). 그들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처음으로 내려오신 것이 아니었다. (60.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정녕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고(마 28:19, 20),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이 모세와 함께 바로에게 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다”(18절)라고 전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뿐만 아니라 그분의 백성 모두에게 친밀하신 분이셨다. (61.1)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모습의 절정은 13절15절에 나타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분의 성호가 무엇인지 질문하였으며 그분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은 끝없는 논란의 요지가 되어왔다. 부정확한 두 개의 공통된 설명을 언급하고자 한다. (61.2)
 첫째로, 이 대답이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 또는 그분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신다는 사실의 철학적인 언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추상적인 헬라적 사고의 질문과 관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분명히 그와 같은 종류의 기별은 아니다. (61.3)
 둘째로, 이 답변이 베일에 쌓인 수수께끼와 같은 분명치 않은 게임놀이가 아니었다. 문맥상 그러한 사실을 배제하고 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사명에 도움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게임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셨다. (61.4)
 이 구절은 관련된 문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엄청난 언약이 모세에게 이제 막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당시의 가장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셨다. 이스라엘은 수년간 애굽의 압제로 신음해 왔다.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 과연 가능한가? 수년이 지난 후 이제 와서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적극적인 분이 되셨는가? 왜 그들이 이제 와서 그와 같은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필요했으며, 그 답변들은 이해하기 쉬워야 했다. (61.5)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무엇이다”(be) 또는 “무엇이 되다”(become)로 번역되어지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시어 답변하셨다. 불완전 동사라고 불리는 이 동사의 형태는 영어의 불완전 동사와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이 동사는 종결되지 않은 미완성의 진행중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영어로 옮길 경우 이러한 종류의 동사를 진행형이나 미래의 시제로 번역하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실 것을 언급할 때 “나는 존재할 것이며”, 또는 “나는 될 것이다”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대개의 경우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61.6)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이제 그들의 하나님으로 이해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또, 미래에도 함께하실 분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셨다. 15절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장래에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히브리 동사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호칭인 야훼로 부를 것을 명하셨으며, 하나님의 성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진행하고 있는 역사를 기억하게끔 하였다. 모세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내야 했으며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62.1)
 나머지 절들(16-22절)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역사하고 계신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세에게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18절). 하나님의 강하신 손이 모세와 함께함으로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도록 하실 것이다(19-22절).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그분의 성호가 진실됨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62.2)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의 실체에 관한 철학적 고찰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또 그들은 신학적 토론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율법이나 복음 또는 성화나 거룩하게 되는 것 등으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도움과 구원과 해방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확신시키고자 하나님의 성호가 주어졌다. (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