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가장 중대한 이슈들 제3장 조사심판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여정에 예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은 우리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때마다 우리의 손을 놓으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분은 몸을 굽혀 우리를 일으키고, 계속해서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고, 다음번에 그 시험이 다시 올 때는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신다. (39.1)
 복음에 대한 엘렌 화잇의 이해도 이와 같다 그녀는 말하기를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향과 노력을 인간의 최선의 봉사로 받아들이시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거룩한 공로로써 그의 결함들을 대신해 주신다”2)라고 하였다. 그 말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그녀는 또한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에 그분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3)라고 말했다. (39.2)
 이 진술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여지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분께 순종하도록 헌신하고 그분께 순종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신실함은 완벽한 순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고, 순종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순종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다음번에는 더잘하기로 마음먹는다. 엘렌 화잇은 “바르게 살기로 정직하게 갈망하는”4)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우리가 그러한 유의 신실함을 가지고 있으나 순종하기에 실패할 때 예수께서는 그분의 의로 대신해 주신다. 그것도 즉시 그렇게 하신다. (39.3)
 이것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번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고 해서 돌아설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반역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께 대한 신실함과 헌신을 유지하기만 하면, 즉 바르게 살기로 정직하게 갈망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미끄러지고 넘어질 때에도 우리 곁에 남아 계신다. (40.1)
 로마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때 거기에는 엄청난 마음의 평화가 있다. 나는 일어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그분께서 여전히 내 곁에서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므로 안식을 누린다. 예수께서는 내가 미끄러지고 넘어질 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의 영적 성장에 전념하신다 그분은 매일 매순간 내 곁에서 동행하시고, 내가 죄를 범할 때 다음에는 이겨내도록 도우신다. 내가 오늘밤 죽더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나의 자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알므로 마음에는 평안이 있다. (40.2)
 이것이 복음이다. (40.3)
 그리고 그것은 심판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40.4)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심판
 나는 앞 장에서 다수의 재림교인들이 과거 여러 해 동안 그들이 조사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언급한 바가 있다. 심판 중에 언제라도 그들의 이름이 올라올 수 있으므로 매순간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재림교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불안한 상태에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 복음은 우리의 평생에 걸쳐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를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의를 제공하신다고 확증한다.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그분께 순종하는 데 헌신한다면 설사 우리가 실패할 때에라도 그분의 의는 우리를 덮으신다는 확신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고, 이러한 실패들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미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40.5)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두려움에 근거하여 심판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신학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그가 “매순간 바르게 사는 것”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올바르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경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나 올바르게 사는 것이 그분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조건은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일생의 다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심판 때 우리의 이름이 올라오는 때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41.1)
 근래에 재림교인들은 이렇게 깨닫게 되었고 그 결과로 심판을 매우 은혜에 중점을 두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심판에 관한 우리의 기본교리에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41.2)
조사심판은 하늘의 지성이 있는 존재들에게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누가 그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또한 산 자들 중에서 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켜 그의 영원한 나라로 옮겨질 준비가 되어있는지 나타내 보인다. 이 심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5)
(41.3)
 이 진술에 따르면 우리가 심판 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잠들어 있는지(우리가 심판 전에 죽었다면), 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면)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지, 얼마나 잘 살았는가; 즉 우리의 선한 행실에 달려있지 않다. (42.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학편림〉도 조사심판에 대하여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42.2)
신자로서 우리는 심판의 매 국면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다 바울의 말씀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 34). 우리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안심은 우리의 구주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신실한 자들은 주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분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분이요(요일 1:9), 우리의 하늘 중보자(中保者)이시고(딤전 2:5;히 9:15;12:24), 우리의 빚에 대하여 우리 편에 서는 분이며(히 10:12-14), 그분의 공로로 우리는 담대하게 심판을 맞을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 4:16) 수 있다. 그분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요일 2:1)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중보자, 대언자이며 대제사장과 맺은 관계가 우리를 심판 날에 담대하게 만든다.6)
(42.3)
 담대함 또는 그 파생어가 이 문단에 네 번이나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심판의 매 국면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는 담대하게 심판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의 중보자, 대언자이며 대제사장과 맺은 관계가 우리를 심판 날에 담대하게 만든다.” (42.4)
 하나님은 그분께서 예수의 공로를 우리의 재판에 적용시키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7) 설 수 있도록 하셨으므로 우리가 심판을 담대하게 보기를 원하신다. (43.1)
 심판 때 우리의 행실은?
 이것이 우리의 행위는 심판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솔로몬은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 하시리라”(전 12:14)고 말했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말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행위가 심판에 고려된다는 사상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43.2)
 엘렌 화잇은 심판 때 우리가 가지는 책임에 대하여 상당이 단호하게 말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