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7 장 — 멜기세덱보다 우월한 그리스도
 이 편지서의 제1장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제시했다. 제2장에서 그는 그 분이 또한 사람임을 보였다. 제3장에서 그는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우월한 분임을 보였다. 제4장에서 그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반면에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는데 그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도록 남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제5장에서 저자는 대제사장 직무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격 부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으나 그의 청중들에게 그들이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을 먹기 시작할 때라고 훈계하기 위해서 그의 설명을 중단했다. 그는 제6장에서 그의 훈계를 계속하며 여기서 그의 훈계를 계속하며 여기서 그는 그들이 믿음으로부터 타락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경고한다. 제6장의 뒷 부분에서 그는 제5장에서 멈추었던 곳에서 실마리를 이어 점차로 다시 그의 주제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인 그리스도로 이끌어 간다. 이 주제를 그는 제7장에서 계속하며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사장 직분이 멜기세덱과 그의 제사장 직분보다 나은 일곱가지 점을 열거한다.

히 7:1-3 (7:1-3)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절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역사적으로 우리가 멜기세덱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창세기의 세 절과 시편의 한 절에 포함되어 있다(창 14:18-20; 시 110:4). 성경에 언급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 출생과 가문이 다소 암시되 어 있으나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우리는 모른다. 유대인들은 멜기세덱을 높이 존경하였으므로 아마 그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지식에 접근하였던 것 같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우리는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살렘 왕이기도 한 멜기세덱에게 소개된다. 아브라함은 롯을 막 구출했고 또한 전리품도 얼마 가지고 왔다. 귀로에 그는 멜기세덱을 만났는데 멜기세덱은 그를 축복했다.

히브리서 7: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은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 그의 권리를 아브라함이 인정했으며 멜기세덱이 그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멜기세덱은 누구였는가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이것에 관해 성경은 창세기 14:18-20에 나타난 것과 히브리서에서의 언급된 것 이상의 지식을 주지 않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였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그가 성령이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그가 셈이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더군다나 다른 세계로부터 온 초자연적 존재였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만일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관한 빛을 주셨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지식이 없으므로 우리는 추측하지 말고 그를 그 당시 작은 나라들 중 하나의 왕으로서 아브라함과 동시 대인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의의 왕
 이것은 왕으로서 그가 의로 통치했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의인들 가운데 그가 우두머리였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왕” 즉, “살렘 왕”은 평화라는 뜻을 가진 살렘에서 그가 통치했거나, 그가 평화적인 왕이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인상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으며 게다가 또한 왕이었고 그의 통치와 개인적 품성이 의의 왕과 평강의 왕의 속성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만일 그가 실제로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면 그 주장은 글자 뜻 그대로 오직 하나님의 위격들에 해당하는 것이 틀림없 으므로 멜기세덱은 어떤 초자연적 존재였다라는 추측을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택할 필요는 없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계를 기록하고 보존함에 있어서 매우 특이 했다. 이것은 특히 제사장들에게 해당한다. 어느 누구도 만약 그가 레위 족속 아론의 가계에 속하지 않다는 면 제사장으로 봉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전연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혈통 어딘가에 단절이 있다면 그는 제외되어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잃었다.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과 특히 제사장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모든 가계의 기록을 보존했다.

 멜기세덱에 관해서 우리는 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출생 또는 그의 사망에 관한 기록이 없다. 성경에 관한 한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만들어졌다고 첨가되어 있다(참조 영어 흠정역 히 7:3). 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그 어구는 하나님의 계획에 그는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이 사건들을 그 목적으로 돌리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이유 때문에 그의 가계는 보존되지 않았고, 그의 출생 또는 사망 그리고 그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메시아적 화신에 적합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오실 참 제사장의 표상으로 그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그의 품성과 자격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도록 택한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는 신적 존재, 삼위 가운데 한 분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 가운데서 취”해져야 했기 때문이다(히 5:1).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성육신하셔서 우리의 인성과 시험을 같이 하고 고난을 받아 순종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다. 멜기세덱은 천사나 어떤 다른 천체의 존재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이 아니며 오직 사람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멜기세덱을 평범한 인간으로 간주하도록 제한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그에 관해서 아는 모든 것은 그는 의의 왕이고 살렘 왕이며,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그쯤으로 놓아 두지 않으면 안된다.
히 7:4-10 (7:4-10)
 이 부분에는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것보다 나은 점 네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a)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에(히 7:4-6)

   (b)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히 7:7)

   (c) 멜기세덱은 결코 죽지 않는 분의 표상이기 때문에(히 7:8)

   (d) 심지어 레위도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에(히 7:9, 10)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7: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멜기세덱의 탁월함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의 탁월함을 보일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더 탁월하다는 것을 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상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여기서 “조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멜기세덱은 “조상조차도”(영어 흠정역 참조)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월등한 제사장 권위를 인정했다.
히브리서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을 수 있도록 허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명령도 받았다. 이것이 그들을 거룩하게 임명된 반차로 성립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를 취한 첫번째는 아니었다. 멜기세덱이 그들보다 먼저 그렇게 했다. 만약 그들이 거룩하게 임명되었다면 멜기세덱도 그러했다. 그리고 “조상 아브라함조차도”(영어 흠정역 참조)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승인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레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십일조를 받도록 위임되었다면 멜기세덱은 보다 더 그러했다.
히브리서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레위인들보다 더 탁월했다. 그에게 약속들이 주어졌다. 그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였다. 만약 그가 멜기세덱을 인정했다면, 그의 후손들도 역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권위와 아브라함의 승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요소들은 멜기세덱의 탁월함에 대한 어떤 참된 평가에도 무시될 수 없다.
히브리서 7: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분명히 작은 자가 큰 자에 의해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머리를 숙이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을 때 그는 멜기세덱의 영적인 우월성과 권위를 인정했다.
히브리서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여기는, 저기는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일조를 받는다.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는다. 이 말에서 저자는 멜기세덱을 넘어서서 그가 상징하는 분께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가 항상 살아서”(히 7:25)라고 긍정되고 있다.
히브리서 7: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히브리서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레위도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들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후손이 그 안에서 했다. 이와같이 레위조차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으며 이것은 멜기세덱의 탁월함의 또 다른 강력한 증거이다.

히 7:11-19 (7:11-19)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것보다 나은 다섯번째 점은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아무것도 완전케 하지 못했으나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겼다는 사실이다(히 7:11, 19).

 이 부분에서의 논의는 주로 전체의 제도의 연약함과 무익함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된 제사장 직분에 관한 율법의 변이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필요가 있느뇨
 레위 제도에 대한 불평은 그것이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예배자들의 온전함이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만약 레위의 제사장 직분이 이것을 달성했더라면 또 다른 제사장 직분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제사장 직분이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고 더욱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 온전함을 이룰 다른 제사장 직분의 설립을 강요했다.

 한편 만약 하나님께서 온전함을 원하셨으며, 또한 만약 레위 제도가 이것을 이루지 않았거나 그렇게 못했다면 새로운 계획이 온전함을 성취해야 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제사장 직분을 바꾸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편지서에는 온전함에 관해서 많이 언급되어 있다. 우리의 새로운 대제사장은 그 분 자신과 다른 사람 안에 온전함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변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매우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그가 만드는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재판을 받고 있다.

히브리서 7: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아론은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그 아들들은 그를 따라 봉사해야 한다. 그리 스도는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았고 오직 이 지파의 구성원들만 제사 장이 될 수 있었으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게 되려면 율법에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명백하다.
히브리서 7: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히브리서 7: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다른 지파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계와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롬 1:3; 막 10:47, 48; 미 5:2; 마 1:1; 눅 3: 33). 이 지파에서는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다. 오직 레위 지파의 남자들만 그것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하며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와 같은 의견일 것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히브리서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더욱 분명하도다
 사도는 만일 제사장 직무의 변역이 있다면 율법의 변역도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가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그분은 제사장이므로 오직 레위 지파의 남자들만 제사장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율법이 변역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한 제사장이 멜기세덱과 같이 일어나리라는 예언에서 최대의 증거를 찾는다. 만약 이것이 그러하다면, 옛 레위인의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명백하고도 더 더욱 명백하다.

히브리서 7: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무궁한 생명, 불변의 생명
 즉 그칠 수 없는, 풀리거나 늦추어질 수 없는, 영원히 계속되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은 여기서 비난의 용어로서 사용된 것이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대조해 볼 때 레위인의 규례하에서의 제사장 직분의 열등한 질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직무에 있어서 제사장의 장자가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이것이 항상 가장 좋은 종류의 제사장들이 되는데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레위인들의 봉사 기간은 길지 않아서 기껏해야 30년 즉 20세에서 50세 까지였다. 따라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어려움 때문에 봉사 기간은 보통 20년 또는 25년이었다(대상 23:24-27; 민 4:47; 8:24, 25). 제사장들은 고된 일 때문에 남자들에게 있어서 보통 전성기인 50세에 은퇴하여야만 했다.

 이것과 그리스도의 불변의 생명과 대조해 보라. 그분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좋아” 영원히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 7: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이 말에 저자는 거듭 되돌아 가며 이것에 그의 주장을 기초하고 있다. 전적으로 아무도 영원히 제사장이 될 수 없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오직 수년 만을 봉사했다. 그 러므로 영원히 봉사하게 될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면 그는 사람 이상, 레위인 이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만약 그러한 종류의 제사장 이 직무를 행하게 되려면, 제사장의 율법의 변역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더 더욱 명백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율법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 아들들을 제사장들로 임명했으나 아들이 항상 그의 경건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신성한 일에 전혀 부적합한 사람들이 거룩한 직무를 차지했다. 이것과 반대하여 대조해 볼 때 그리스도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분은 부적합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르는 후계자도 없다. 제사장 직분은 또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수 없다. 그 분은 영원히 살아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실 것이며 그분은 우리들이 항상 가까이할 수 있다. 이 임명은 하나님 자신에 의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은 증언하신다.
히브리서 7: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저자는 여전히 레위인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연약하고도 무익하다.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선했지만 그것에 대한 백성의 태도 때문에 쇠했던 첫 언약과 같이 율법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죄에 대한 혐오를 가르치려고 주어졌던 희생의 법은 죄의 격려를 위한 방편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희생 제물들이 그들의 죄를 갚았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그들은 몇 명의 제사장들에 의해 격려되었으며 모든 종교 의식은 가증한 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예배와 제사장 직무를 폐하시는 일밖에 없었다.
히브리서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율법은 범죄의 성질에 따라서 희생 제물을 규정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희생 제물을 바쳐 성소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의 죄를 고백하면 죄 사함을 받고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는 다시 죄를 범하고 동일한 의식을 되풀이하면 죄 사함을 받았으며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일년 내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희생 제물에는 끝이 없었다. 대속 죄일 조차도 그 의식들은 성격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날의 일이 성취되자 마자 또 다른 일 년의 한 차례의 일이 시작되었으며, 그 일이 끝나면 여전히 또 다른 일 년의 한 차례의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매년 그렇게 되풀이되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이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히 10:1, 2)라고 진술한다. 여기서의 불평은 희생 제물에 끝이 없다는 것이며 주어진 이유는 율법이 범죄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으며 그렇지 아니하면 제물들이 그쳤을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더 좋은 소망을 가져옴으로 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고 있다. 왜나하면 그분은 연약하고 무익한 레위인의 제사장 직분을 대신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4)고 한 것을 읽는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는 했다.
히 7:20-28 (7:20-28)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것보다 나은 여섯번째 국면은 그것이 맹세 즉, 심지어 하나님의 맹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7:20, 21). 일곱 번 째이면서 마지막 국면은 레위인의 제사장 직분에서의 일정한 교체와 대조해 볼 때 그것의 변하지 않는 제사장 직분이다.

 22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보증이시며 중보자이시라는 언약에 관한 관념을 도입한다. 그는 이곳에서 그것에 관해서 더 이상 논하지 않고 그가 후에 말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독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주제를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고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므로 적합하며 하나님의 시험을 견딜 보증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7:20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히브리서 7: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히브리서에서 전에 두 번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고 우리는 들었다. 즉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올 씨를 보증하셨을 때와 이스라엘이 당신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을 때이다(히 3:11; 6:13). 맹세하는 것은 항상 엄숙한 경우이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맹세하시 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우리가 이것은 왜 그렇게 엄숙하게 되어야 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삼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왜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하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취임했다. 이 경우에는 왜 맹세가 필요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 진술은 왜 필요한가? 외관상으로 이것은 매우 이상한 경우이며 대단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에의 임명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진술에는 그분이 치루는 댓가가 암시되어 있다. 죄에 대한 인간의 댓가가 아무리 클지라도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댓가에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댓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간략하게 이 댓가를 생각해 보자.


 1. 구속의 경륜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와 전혀 같지 않은 존재로 생각한다면 이 희생은 막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어떤 한 아버지는 십자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내 자신은 줄 수 있을지라도 내 아들은 결코 줄 수 없다”고 말했다.


 2.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과 꼭 같았다. 그 분은 성육신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고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복종하셔야 했으며 그들로부터 모든 모욕을 당하셔야 했고 마침내 범죄 자처럼 나무에 달리셔야 했다. 인간은 통치자와 재판관의 자리를 차지한 반면에 그 분은 종으로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3. 구속의 경륜은 결국 우주의 재조직을 수반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상속자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대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실 때 인간은 그리스도의 보좌에 자리가 주어질 것이다. 인류는 높혀져서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록 결국 하나님께서 왕국을 받으시고 만유가 되실지라도 여전히 인간을 천사보다 훨씬 높이고 신의 성품의 참여자로 만들 능력과 책임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구속의 경륜은 사단의 고발과 반역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수하셔야 만했던, 그 분께 억지로 맡겨진 어떤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의 모든 단계는 미리 심지어 영원한 날 전부터 그 분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 분의 원래의 계획은 인간의 향상과 인간이 보좌를 함께 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임명에 포함되었다. 이 임명은 맹세에 의해서 확증되었으며 이것에 하나님은 당신께서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덧붙인다.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
 “이”라고 하는 것에는 우리가 간략하게 진술했던 것이 포함된다. 인간은 이득을 받기만 했고 받기만 한다. 하나님의 희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궁극의 결과는 하나님의 지극히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나타낼 것이다.

보증
 여기서의 보증은 어떤 사람이 어떤 계약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거나 그 수행을 확약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더 좋은 언약”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양쪽에 대한 보증이시다. 그 분은 자기의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약한 몫을 온전히 이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 분은 자기의 생애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계약한 몫을 이행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이었고 인간이었기에 그는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언약”(testament)은 다른 곳에서 계약(convenant)이라고 사용된 것과 같은 말이다. 그것의 올바른 사용에 관해 논의가 많았으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약과 언약, 둘 다를 의미하거나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의미하는 한 단어를 선택하실 때 그 단어가 그분이 의도하는 바를 표현하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을 안심하면서 추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은 또한 언약이며 그리고 언약은 계약이라는 것과 그리고 본래의 단어가 계약과 언약 둘 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개념을 띠고 있는 바른 표현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7: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히브리서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이 절들은 그 의미가 명백하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죽었으므로 그들의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없었다.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는 언제나 또 다른 제사장이 수행해야만 하곤 했었다. 이 교체는 매일의 봉사에서 책임지고 있던 바로 그 대제사장이 대속죄일 봉사에서 그의 일을 완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불리했다. 때때로 공교롭게도 법정에서 어떤 소송을 책임지고 있는 변호사가 병 또는 죽음으로 계속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두번째 변호사가 첫 번째 변호사만큼 좋을지 모르지만 그는 첫번째 변호사만큼 배경을 완전히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변호 의뢰인은 불안하다.

 이것이 여기서 우리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계속하실 수 있다. 그분은 변하지 않는 제사 직분을 가지고 계신다. 그 분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온전히” 구원한다. 만약 천국의 문들이 모든 사람이 밀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게 열려 있다면 모두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속에 대한 그리스도의 생각이 아니다. 그 분은 문들이 활짝 열려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당당하게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영어 흠정역 계 22:14 참조).

 어떤 사람들은 노예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5-17).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상태를 옛날의 신자들의 상태와 비교해 볼 때 그의 특권들을 더 잘 이해한다. 비록 도피성들이 놀랄만한 축복이었고 많은 목숨들을 피의 보수자로부터 구했던 것은 의심할 바 없지만 그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 준비되어 있는 구원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 그분은 항상 살아서 중보하신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그 분은 극악한 죄들을 씻을 수 있으시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 털 같이 되리라”(사 1:18, 19).


 2. 그 분은 음란하는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탐색하는 자들, 도적들, 탐람하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후욕하는 자들, 토색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고전 6:9-11). 사람의 신분은 그를 돕지도 방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도 부한 자도 똑 같이 구원하신다.


 3. 그분은 인간 즉 육체, 혼 그리고 영을 구원하시며 지성, 의지, 마음, 기억, 양심, 상상 등을 정결케 하실 수 있다. 그 분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분은 “온전히” 구원하신다.

히브리서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대제사장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그러한 대제사장을 가지는 것은 적절하고도 필요한 것이었다.

 “거룩하고”에 대해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품성에 뚜렷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헌신한(dedicated), 봉헌한(consecrated), 성화된(sanctified), 온전한(completed), 완전한(perfected)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이 시다. 어느 점에 있어서도 그분은 부족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죄가 있음을 납득시키거나 입증하도록 도전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진실했다.
악이 없고
 이것은 간특하지 않은, 순진한, 양심이 있는, 누구에게 어떤 해를 입히려고 계획하지 않는, 본을 보임으로써 부패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적인 면으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계획하는 것, 좋은 모범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
더러움이 없고
 이것은 순결한 순수한 부패하지 않거나 부패할 수 없는, 어떠한 종류의 오점도 없는, 환경에 의해 해로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단지 본질적인 거룩함과 순결함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경향을 지녔으나 죄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덧붙여 준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그리스도는 죄인들과 섞이면서도 그들로부터 떠나 계실 수 있었다. 그 분은 군중 속에서 다만 홀로 계실 수 있었다. 누가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주목해 보라.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눅 9:18)라고 했다. 영어 개역에는 “그가 떨어져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있더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어구는 매우 뚜렷하다. 제자들은 그분께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을 때에 그분께 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었으나 그분은 그들로부터 떨어져 계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면서도 그들로 부터 떨어져 계셨다. 그분은 군중 속에서 당신 자신을 격리시킬 수 있었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 분과 함께 있음에 비하여 그분은 떨어져 기도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환경을 지배하는 법을 아셨다.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것은 자신의 존귀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시다. 그것이 보좌들이거나 권세자들일지라도, 주관자들이거나 능력자들일지라도 어떠한 피조물보다도 그 분은 높으시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분은 이러한 종류의 대제사장이다.
히브리서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날마다 ∙∙∙. 할 필요가 없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날 마다” 대신에 “해마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제사장이 매일 속죄제를 드렸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론과 그의 후계자들이 매일 드리도록 명령받는 제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제이고 속죄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레 6:20-22). 그러므로 곤란한 점은 옛날의 대제사장은 매일 속죄제를 드렸으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에 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수행하는 봉사는 무엇이든지 그들이 대제사장의 대리인들로서 했다고 우리들이 생각할 때 이 곤란한 점은 사라진다. 그들은 그를 대신하여 직무를 행했으며 그들이 한 것은 마치 대제사장 자신이 그것을 한 것처럼 간주되었다. 그들은 단지 돕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이 매일 속죄 제물을 드렸으므로 대제사장이 매일 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성소가 처음으로 광야에 세워졌을 때 대제사장이 후에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행해진 모든 봉사를 수행했다. 그는 성소에 등불을 켰고 그는 진설병을 갈아 놓았다. 그는 향을 피웠으며 제단에서 직무를 행하였다(출 30: 7, 8; 레 24:5-9; 레 1:5). 다른 사람들 이 참여했을 때 그들은 단지 그의 조력자들로서 봉사했으며 그를 위하여 그의 일을 했다. 그는 어떠한 때에도 어떠한 자격으로도 직무를 행할 권리가 있었다. 성전의 역사를 통하여 대속죄일이 계속되는 한 주일동안 대제사장이 매일의 봉사에 직무를 행하는 것이 관습이 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예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제사장이 날마다 제사장들의 신분으로 그 자신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자기 죄를 위하고”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먼저 그 자신의 죄를 위하여 먼저 제물을 드렸고 그후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드렸다(레 16:11, 15). 그리스도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셨다.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는 말의 의미에 관해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대제사장처럼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의 죄를 위하여 드렸고 백성들을 위하여 드렸는가?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 분께서 가지셨던 유일한 죄는 우리를 위하여 지신 죄였다. 그 분은 죄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을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렸을 때 자신이 지신 모든 죄를 갚으셨다. 그 죄는 우리의 죄였으나 그 분은 자신의 몸에 지니시고 나무에 달리셨다. 그것들은 그 분께서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맡겼을 때에만 그분의 죄였다.
히브리서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제사장들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율법은 죄 있는 사람들을 대제사장들이 되게 했다. 맹세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 되게 했다. 만약 유전에 의한 법에 호소했다면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론의 후손들만이 이 직무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택하시기 위해서 제사장 직무를 계승할 수 있는 계급의 범위를 벗어 나셨으므로 사실 우리는 영구히 임명된 대제사장을 가지고 있다. 어떤 교회들이 사도직 계승에 강조를 두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중대하다. 만약 이 법칙을 따랐었다면 그리스도는 영구히 임명된 대제사장이 아닐 것이다. 그분은 자격이 없는 자로 제외되었을 것이다.
부가적 설명—의문의 율법
 레위기의 제사 제도의 주된 약점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비고의적인 죄의 사유함에 대해서만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속죄제가 드려졌던 각 경우에 그것은 부지 중에 범한 죄에 대해서만이라고 특별히 규 정되었다. “누구든지 ∙∙∙ 그릇(through ignorance) 범하였으되”,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만일 족장이 부지중에(in ignorance)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만일 평민의 하나가∙∙∙ 부지중에 범하여”(레 4:2, 13, 22, 27)라고 되어 있다. 주목한 바와 같이 각 경우에 오직 부지불식간에 범한 죄에 대해서만 고려되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요구되는 속죄제를 드린 후에도 여전히 그는 고의로 범한 죄에 대해서와 같이 불확신 가운데 있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희생 제물이 없었다. 그가 성소를 떠날 때 죄의 짐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심각하지도 않은 죄 즉 부지 중에(unwittingly) 범한 죄만 사유함을 받았다. 그러나 참으로 그를 억누른 죄는 그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지은 죄였다. 비록 부지 중에 범한 죄가 통탄할만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그가 고의적으로 계획하고 수행한 죄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의 부지 중에 범한 죄를 덮어주실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죄였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모세의 율법에 규정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중하게 다루어지는 죄들이었다. 이것들이 양심을 울리는 죄였다. 그런데 그것들에 대한 모세의 사유함은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복음은 죄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강한 호소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그의 기별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 38, 39).

 일반적으로 부지 중에 범한 죄만 모세의 율법에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 대해 사유함을 선포한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는 그들이 모든 죄로부터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좋은 소식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힘입어 모든 일”에도 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단에 날마다 드려졌던 제사와 예물이 “그 양심상”으로 만족시킬 수 없었고 다만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신성하게 하였다(히 9:9, 13). 대조해 볼 때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위에서 주목한 바와 같이 비록 어떤 사람이 그의 부지 중에 범한 죄가 사유함을 받을지라도 그의 양심은 깨끗하지 못했다. 실제의 죄 즉 그가 알면서 고의로 범한 죄에 대해서는 그가 드릴 수 있는 어떤 희생 제물에 의해서도 가리움을 받을 수 없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결점을 예민하게 느껴 양심에 영향을 주는 어떤 구제책을 갈망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구제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되었다. 그는 더 나은 소망을 들여왔다.

 어떤 사람들이 구약 시대에는 오직 부지 중에 범한 죄만 사유함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지금처럼 모세 시대에도 구주가 있었다는 것을 서둘러 주장해 보기로 하자. 바울이 주장했던 모든 것은 그들이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많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처럼 그 때에는 한 종류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해서 완전하고 자유로운 사유함이 없었다고 잠시라도 말하고 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의도는 모세의 율법에는 고의로 범한 죄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 말이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고의로 범한 죄는 어떻게 사유함을 받았는가? 지금과 같았다. 비록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사유함을 받을 수 있었다(사 1:18). 그러나 사유함은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써 받을 수 없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면 그는 악한 일을 행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나에게로 흠 없는 양 한 마리를 가져오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죄에 어떤 값을 정한 것이 되어 사람들은 죄는 어떤 값으로 사유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 가치가 완전히 붕괴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해를 끼치게 되었을 것이다. 루터(Luther) 당시에 텟첼(Tetzel)로 하여금, 어떤 값을 치르고 죄를 범할 자유로 사람들을 빠지게 했던, 면죄부를 사도록 이끈 것은 그러한 관념이었다. 구약에서 간음은 죽음으로 서 처벌해야 했다(레 20:10),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범한 죄는 어떤 방법으로 너그럽게 보아주거나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줄 수 없었다. 다윗은 더 잘 알았다. 그는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라고 말했다.

 이것이 구약 시대에 있었음을 기억하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종류의 죄에 대해서는 제사를 열납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죄 즉 실제의 죄는 지금처럼 그 때에도 회개에 의해서 사유함을 받았다. 변화가 없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갈 3:19)는 엄중한 질문을 한다. 다른 번역들은 더욱 사실적으로 “그런즉 율법은 왜 있느냐?”라고 되어 있다. 의문의 율법에 적용될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명백한 목적을 위해 소용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질문에 부분적으로 답할 수 있겠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죄는 죽음을 뜻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를 범했을 때 죄 없는 동물이 죽어야만 하며 그들이 그 죽음의 원인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이 직접 그 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매우 확실히 부지 중에 범한 죄일지라도 중대하며 그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 대신에 죄 없는 산 제물이 죽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의문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모든 죄에서 사유함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역시 알았을 것이다. 이 죄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했는가? 여기서 선지자의 기별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사야와 다른 선지자들은 그들의 주의를 황소와 염소의 희생으로부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되어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로 돌렸다.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했다. “여호와께서 그 영혼을 속건제 물로 드리우기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0, 12).

 이것은 드려진 제사에 영적인 적용을 준다. 죄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참된 양이시며 어떤 양 무리도 사람의 죄의 댓가를 치룰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와같이 고려해 볼 때 그들은 전체의 의식이 그 분 안에서만 참된 사유함이 주어질 수 있는 오실 메시야를 표상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했다.

 도피성의 설치도 사람들에게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옛적에는 살인을 하게 되면 피의 보수자는 살인자를 죽임으로서 그 범죄에 보복할 권리가 있었다(민 35:19). 그러나 만약 살인이 그 우연에 의한 것이 고 계획적인 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일시적인 도피처를 제공하셨다.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출 21:13)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언명이었다. 본래 이것은 성소였다. 그러나 후에 비고의적으로 살인을 범한 자가 도망할 수 있도록 여섯 개의 도피성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의 보수자를 피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까지의 긴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도피성들은 편리하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구원은 다만 일시적이었다. 만약 그들이 고의적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들은 도피성으로부터 끌려 나와 죽임을 당했다.

 이 제도는 부지 중에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한 자비로운 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그를 구원하지는 않았다. 무죄이건 유죄 이건 그는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망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민 35:12).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민 35:24, 25).

 어떤 사람이 고의적인 살인의 죄가 없다는 선언을 받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안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도피성의 경계를 벗어나면 피의 보수자는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를 다스리는 법은 이러했다.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 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흘린 죄가 없나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민 35:26-28).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이 고의적인 죄가 없다면 그는 구원함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구원이었다. 그는 무죄였으며 그렇게 선언을 받았으나 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것이 하루이든지 이십 년이든지 도피성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의 생명은 구원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 도피성에서 잘못하여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피의 보수자는 그를 죽일 것이었다. 물론 그가 고의적인 살인의 유죄가 있다면 그는 처형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더 좋은 소망”을 필요로 한다는 히브리서의 저자와 의견을 같이 한다. 우리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히 7:25)수 있는 분을 필요로 한다.

 이스라엘의 전체 국가는 기껏해야 불완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좋은 어떤 것을 가리켰다. 이 더 좋은 어떤 것이 히브리서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옛날의 성소의식에서 마련된 것과 그리 스도께서 하실 수 있고 하고자 하시는 것 사이의 차이를 명백히 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의 주장은 자기 독자들에게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제도의 결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열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