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6 장 — 믿음에 확고부동함—언약의 맹세
 사도는 5장에서 시작했던 권면을 계속한다. 그의 독자들은 나태하며, 마땅히 더 실속있는 음식물을 먹고 있어야 할 때 젖을 먹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의 기본 원리들은 다소 뒤에 두고 하나님에 관한 더욱 깊은 사물로 계속해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4절부터 시작하여 그는 배도의 위험에 대해 엄숙한 경고를 발한다. 그의 첫 진술들로부터 그는 그의 독자들을 주제로 해서 말하는 듯이 보이나 8절9절에서는 그들에게도 나은 것들이 있음을 인 정한다고 우리에게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즉시 교정해야만 될 곤경에 그들이 처해 있지 않을런지 몰라도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 그가 경고해도 무방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13절부터 20절까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을 보이고 그들 앞에 제시된 소망에 확고부동함을 주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서에 관하여 논한다.

히 6:1-3 (6:1-3)
 이 절들은 유치한 것들을 버리고 성숙한 남녀처럼 행하라는 바로 앞의 권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장성할 때가 됐다. 사도는 기독교가 기초한 여섯 기초 교리들을 열거는 하지만 논의하지 않고 지나친다. 그는 이 교리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위에 상부 구조물을 짓기 원한다. 계속해서 기초를 놓는 사람은 결코 완성된 건물을 갖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구조물을 완성하고 싶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버리고
 내버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기초를 이미 놓았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는 집의 기초 공사를 마치고 세우기 시작한다.

회개
 이것은 첫 기본 원리로 언급되었다. 이 교리는 구약에서 현저했다. 선지자가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 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겔 18:30). “너 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겔 14: 6),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침례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설교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예비했다(막 1:1-4).
하나님께 대한 신앙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기초 교리들의 목록에서 둘째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필요성과 옛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발휘했는 지에 관한 주석이다. 회개와 믿음은 신약 독자들에게는 너무 친숙하여 그것들에 관해 거의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의 첫 단계들이며 그것들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가까이 나아감에 있어 어떠한 진보도 이루어질 수 없다.
히브리서 6:2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침례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침례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엡 4:5)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형이 여기에 사용된 사실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있다. 동일한 복수형의 단어가 히브리서 9:10에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씻는 것”이라고 번역되었으며 유대인의 의식에 있어서의 많은 정결 행위들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씻는 것을 기독교나 유대 신앙의 한 기초 교리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이것은 그 의미가 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여기서 의미하는 바가 기독 교회의 두 침례들 즉 물에 의한 침례와 성령의 침례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침례 요한은 이것에 대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막 1:8)고 말한다. 예수는 부활 후에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셨다(행 11: 16, 참조 고전 12:13; 요 3:5). 이 진술들을 고려하면 물에의 한 침례와 성령의 침례가 복수형을 사용하여 지적한 두 침례들이라고 믿는 것이 정당하다.
안수
 구약에서 안수는 명령된 의식이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여호와를 봉사케 하기 위”(민 8:10, 11)하여 안수에 의해 임명되었다. 여호수아도 역시 그렇게 임명되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 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민 27:18, 23; 신 34: 9 참조).

 신약에서도 동일한 관습을 좇았다(행 8:17). 그것은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행 8:18)이었다. 이 관습은, 비록 여러 곳에서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연구될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는 기독교의 원리들 가운데 그것이 열거되어 있다.
죽은 자의 부활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눅 20:37; 참조, 시 16:9, 10; 사 26:19; 단 12:2).

 마찬가지로 신약은 부활을 강조한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3, 14)라고 말하면서 부활의 중요성을 총괄한다.
영원한 심판
 매우 일찍부터 사람들은 심판이 올 것을 알았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유 14, 15; 참조 시 9:3-8, 15, 16; 단 7:9 이하) 라고 했다. 또한 신약에서도 심판은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마 12:41, 42; 참조, 마 25:31-46; 눅 11: 31, 32; 고후 5:10). 이 여섯 기초 원리들이 구약에서처럼 신약에서도 동일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딤후 2:19) 성육신으로 인해 어떤 변화들이 생겼으나 기초 원리들은 동일하고 확실하며, 하나님께서 신약에서와 다른 근거로써 구약의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음을 아는 것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주어진 이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여전히 참되다. 만약 누군가 이 모든 기초 원리들이 두 시대에 동일함을 의문시하여 침례를 예로 든다면 그 의문을 설복시키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엄격히 침례가 신약의 예식만은 아니며, 그리스도 이전에도 행해졌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전주자로서 침례를 베풀었다. 따라서 그가 첫째가 아니라 전에 오랫동안 침례와 같은 것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행해져 왔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매우 옳다. 이것에 대한 증명은 우리의 논의에 적절하지 못하므로 흥미있는 독자는 그 주제를 취급하는 성경 백과 사전에 일임할 따름이다.
히브리서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바울은 이러한 원리들을 그들이 잘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또 믿으면서 당분간 이것들을 “버리고”자 한다. 그는 보 다 깊은 몇몇 진리들,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늘에 있는 성소 즉 참 성소로 그를 이끌 “단단한 식물”을 제시할 작정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 들어가기 전에 주제를 벗어나서 한 번 비침을 받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경고를 발한다.
히 6:4-12 (6:4-12)
 이 부분은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사람들의 두려운 운명을 다루고 있다.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영어 번역은 이 운명이 반역을 고집하며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절들을 주석할 때 두 가지 사실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믿음으로부터 타락한 사람들은 모두 회개할 수 없고 결정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다는 생각이다. 이 가르침은 많은 낙담거리가 되고 심지어 영혼들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는 원인이 되어 왔다. 다른 위험도 마찬가지로 실제적이다.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있고 그들이 마침내 구원될 것이라고 한다면 왜 지나치게 그들이 경고를 받아야 하는가? 사유함을 받지 못할 죄와 같은 것이 없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염려해야 하는가? 이것도 또한 거짓 교리이다. 사유함을 받지 못할 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관련된 개개의 절들 하(下)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없나니
 (한글 개역 6절), 문제점은 깊은 그리스도인 경험을 얻고 타락한 사람들을 회복시킬 가능성 여부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교제에 회복되어 다시 자비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늘의 은사를 맛
 저자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가 아니고 진보된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한 번 비춰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비침을 얻음
 “비침을 얻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다(엡 1:18; 요 1:9).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는 죄의 사유함을 받은 축복을 뜻하며 성령의 어떤 특별한 선물도 아마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
 그들은 또한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 즉, 성령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로 부터 이들은 참으로 회심했으며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명백한 진보를 했다.
히브리서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내세의 능력
 초기 사도 시대에는 많은 이적들이 행해져서 갇힌 자들이 놓임을 받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심지어 죽은 자가 되살아났다. 이 능력을 맛보는 것은 어떤 치료나 다른 이적의 대상으로서 또는 그것들을 행하는 주체로서 그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단지 인간이 행하는 것을 초월하는 것을 행할 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목격했음을 뜻한다.
히브리서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타락한 자들은
 이것은 불행스런 번역이다. 왜냐하면 그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들을 목격했거나 참여했으며, 위대한 일들이 행해지는 것을 보았으되, 그 후 타락한 자들은 회복할 수 없다고 가르 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말은 자비의 한계를 넘어섰을까?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했을까?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당혹의 근원이 되어 왔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음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도록 하라.

 위에서 주목했듯이 영어 흠정역에서의 본문 번역은 불행스럽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들을 한 후 타락한 자들은 모두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된다는 부당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개역의 난외에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 동안” 즉, 그들이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정확한 의미에 좀 더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 이키지 않는다면 즉,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해서 저항하는 한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호소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으로 명백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굳어지는데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에 더 이상 반응이 없다. 따라서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은 양심의 가책도, 죄를 슬퍼하는 느낌도,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갈망도, 그를 고소하는 양심도 없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올바로 행하고자 하는 진실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면 아직도 그에게 희망이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이것은 낙담한 영혼들에게 위로의 근원이 될 것이 틀림없으나 부주의에 대한 격려로 결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슬픈 자들을 위로하길 원하시지만 또한 불신 속에서 옛 이스라엘의 전례를 따르지 않도록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길 원하신다. 그들의 불순종의 역사는 우리의 경고를 위해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 5)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비유 가운데서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눅 8:13)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신다.
히브리서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땅이∙∙∙ 비를 흡수하여
 여기서는 하늘로부터 비를 흡수하여 그 댓가로 인간을 위하여 풀과 식물을 내는 땅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복된 비와 이슬 즉,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받고 그 댓가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히브리서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가시와 엉겅퀴
 한편 만약 땅이 하늘로부터 비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면 거절을 당하며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것은 매우 강력하여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예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며 우리가 열매 맺길 기대하신다. 만약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과 우리 길에 비추신 모든 빛을 가지고 도 여전히 열매 맺기를 거절한다면 또는 우리가 배반한다면 우리에게는 유일한 종말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망각과 분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아마 우리를 멈추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심지어 우리가 그릇 행할지라도 계속해서 죄악 중에 있지 않으면 우리를 여전히 받아 주실 것이다. 그분은 비를 ‘자주’ 내리실 것이지 만 항상 그러시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넘어가서는 안 될 선이 있다. 모두가 조심하는 것이 좋다.
히브리서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사도는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와 훈계로써 날카롭게 말해 왔다. 이제 그는 그들을 위로한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들이 거절할 의도가 없고 “구원에 가까운 것”을 주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히브리서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행위와 ∙∙∙. 사랑으로 ∙∙∙ 섬기는 것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불의 하지 않으시므로 어떤 사람들이 하잘것 없는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을 받들던 그리고 받 드는 사람들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사도의 주의를 끄는 중요한 일들이 많은 때에 성도를 받드는 일은 사도가 언급하기에는 작은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여행자를 위한 하룻 밤의 숙박, 음식 및 음료, 호의와 친절 등,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므로 그러한 친절의 행위들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마 10:42; 25:31-40).
히브리서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시작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끝 마치는 것은 더 좋다. 시작이 아무리 좋더라도 끝까지 인내하지 않으면 쓸모없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 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슥 4:9). 하나님의 약속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빌 1:6) 것이라는 것이다. 시작하는 사람은 너무 많으나 끝마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편지서를 받는 신자들은 성도를 대접하는데 열심이었으므로 바울은 그들이 계속해서 봉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말투는 단순한 봉사를 넘어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고 하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그들이 다른 일만큼이나 구원에 대한 그들의 소망에 있어서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상을 받기 위한 그들의 경주에 있어서는 도중에서 멈추거나, 떨어져 나가거나, 꾸물거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히브리서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게으르지 아니하고
 나태는 근면의 정반대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화평한 때에 돌보는 태평한 직업이다. 그것은 그들의 계획에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끝 부분에 있다. 다른 모든 것을 틀림없이 먼저 해 버리면 하나님은 남은 것을 가지게 될 지 모른다. 이것은 거꾸로 할 필요가 있다.

 때때로 젊은 사람들은 좀 더 늙어서 종교를 가져도 되며 이 생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을 때에도 더욱 중대한 일을 돌볼 시간은 충분하다고 결정한다. 다른 사람들은 종교를 가볍게 받아들여서 가장 편한 방법을 취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부지런하기를 원하신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 분은 우리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기를 원하신다.

히 6:13-20 (6:13-20)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맹세하셨다는 것은, 비록 그 분 자신은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분께서 기꺼이 모든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현저한 예증이다. 믿음이 다른 모든 것을 가리는 지점까지 아브라함이 도달하기를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순간은 왔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순종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믿음은 조금도 혼합물이 없었다. 그제야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후 그의 손자들,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서 약속의 성취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 충분히 살았던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있다.

 닻은 붙들어 주는 것으로서 보증과 안전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닥쳐오는 인생의 어떤 폭풍 속에서도 붙들어 주는 그러한 닻을 가지고 있다. 그 닻은 확실하고 확고부동하다. 왜냐하면 그리스 도 안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히브리서 6: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하나님이 ∙∙∙. 약속하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후사에 관하여 하신 첫 약속은 그 분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말씀하신 후 즉시 주어졌다. 그 약속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창 12:2)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칠십 오세였다(창 12:4).

 몇 해가 지나갔으나 아브라함은 아직 아들이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가 아들이 없음을 상기시켰고, 그 때까지 사라에게 한 아들이 태어날 희망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의 집에서 태어난 자가 아마도 후사로 지명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 15:4)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에게 밤 하늘의 광경을 보이고 별들을 셀 수 있는지 물으셨으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창 15:6)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그 땅을 물려 받을 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삼 년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와 삼 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다(창 15: 9, 10).

 이것은 언약을 맺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짐승을 취하여 머리부터 꼬리까지 쪼갠다. 그 후 쪼갠 것을 서로 마주 대하여 약간 간격을 두고 놓는다. 그런 다음 계약 당사자들이 그 쪼갠 것 사이에서 걷는다(렘 34:18, 19 참조). 그런데 그렇게 하자 밤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 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7, 18) 하셨다.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들이었다.

 수 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는 아이를 배지 않았으며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칠십 오세였고 아이가 그녀에게 태어날 희망이 전혀 없었을 때 그녀는 아마 그녀의 하녀 하갈이,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후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을 처음 약속하신 이래로 십 년이 지나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것이 해결책이라고 사라와 함께 믿었다. 그리하여 멀지 않아 하갈에게 한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 때 아브라함은 팔십 육세였다. 십삼 년이 더 지나가서 이제 아브라함은 구십 구세, 그 아내는 팔십 구 세가 되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셔서 그 에게 그의 아내를 사래라고 부르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6:15, 16)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힘에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 17:17) 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약속이 되리라∙∙∙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19, 21)고 하셨다.

 며칠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방문하셔서 사라의 안부를 물으셨고, “장막에 있나이다”(창 18:9)라는 대답을 들으셨다. 그러자 하나님은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 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 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0-15).

히브리서 6: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이십 오 년을 아브라함이 기다려서야 비로소 약속된 아들이 태어났다. 이 기간 동안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충분히 믿음을 나타냈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사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래서 이것이 그의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믿음은 희미해졌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나기 일년 전 그는 하나님을 비웃었다.

 최고의 시험은 이삭이 실제로 성숙한 후에 그에게 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에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 2). 이 이야기는 반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마침내 그들은 산에 도착하였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 단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창 22:10)였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 그의 손을 멈추게 했고, 그는 손을 이삭에게 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에 제물을 준 비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수양을 잡아 하나님께 드렸다(창 22:13). 그러자 주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르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창 22:16~18)고 말했다.

히브리서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히브리서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히브리서에서 언급된 맹세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의 확증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나올 때 약속이 처음 주어진 후로부터 적어도 사십 년이 지난 후 마침내 확증의 맹세를 받았고,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가 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참조, 창 12:2; 22:13).

 자기 아들을 막 죽이려고 손을 들고 서 있던 아브라함은 약 십오 여년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던 아브라함과는 달랐다. 그는 그 이후로 많은 것을 배워왔으나 그의 독생자를 취해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후 그 사흘 동안에는 전혀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계획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였으나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될 만했다. 최고의 시험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 뜻이 변치 아니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삭의 출생으로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실로 약속의 아들, “죽은 자와 방불한” 한 남자와 “나이 늙어 단산”한 한 여자의 아들이었다 (히 11:11, 12). 그러나 그는 약속의 자손이 아니었다. 비록 필요한 존재이긴 했으나 마침내 역시 기적적으로 잉태될 사내 아이를 낳을 긴 계통 가운데의 한 고리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라고 하셨는데, 바울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내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6)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도록 수 많은 세월을 기다렸었다. 때때로 그의 믿음은 거의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했다. 약속은 성취되기 불가능한 듯 보였다. 그러나 때가 되자 아들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처음 주어졌던 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까지는 약 이천 년의 세월, 우리가 이쪽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저쪽에 계신 만큼이나 먼 세월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긴 세월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다. 메시야가 필경 오신다고 했는데 왜 그 분은 기다리셨을까?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잊으셨던가?

 그의 아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오랜 기다림은 참 아들(Son)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오래 기다려야 함을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때에 그분께서 기다리셔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기다리셔야 할 이유가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갈 4:4)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급함이나 지체함을 모른다. 때가 무르익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히브리서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맹세,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불변이다. 어떠한 맹세도 결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무엇이든지 더하거나 그것을 더 확실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맹세로 확증하심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확증을 위해 맹세를 사용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어 똑같이 그렇 게 행하신다. 이 맹세는 그리스도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명백한 도움이었음에 틀림없다. 만약 어떤 의심이 그들의 마음에 일어났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 그것을 맹세로 확증하셨다는 사실에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었다. 이리하여 맹세는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큰 안위
 이것은 맹세를 고려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은 할 수 없으셨다. 그는 약속하셨고 맹세하셨다. 이것보다 더 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하여 가는
 이 예증은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고 피난처로서 성전으로 달려가 제단의 뿔들을 잡는 사람의 관습에서 취한 것이다. 이 곳은 불가침 장소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했다.

 이러한 예가 열왕기상 2:28 이하에 하나 기록되어 있다. 요압은 그의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뿔들을 잡았다. 솔로몬 왕은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곁에 있나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의 부하들 중 한 사람에게 “너는 가서 저를 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그 부하는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그에게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왕상 2:30) 하였으나 그가 왕의 명령을 듣고 나오지 않자 그 부하는 요압을 쳐죽였다(왕상 2:34).

 히브리서에 제시된 것은 제단의 뿔들을 잡는 이러한 관습이다. 우리는 죄를 범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성소로 피하여 가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제단의 뿔을 잡고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바 그것은 위에서 언급된 요압의 경우에서처럼 일시적이고 불안전한 것이 아니라 결코 실패하지 않는 희망이다.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영혼의 닻
 닻은 폭풍 속에서 배를 붙잡아주고 배가 표류하여 암초에 부딪히지 않도록 한다. 해상(海床)에 붙들어 줄 견고한 어떤 것이 없어서 닻이 미끄러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닿은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 “닻”은 구약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 그것은 예증으로서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적절한 예증이다.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묶어서 붙들어 줄 어떤 것, 닻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러한 닻이다. 그것은 휘장 안에 들어가 붙들어 준다.
히브리서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앞서 가신 예수
 전주자(前走者)는 길을 가리켜 주는 안내인 이상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가며 그들을 인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분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그 분을 좋아갈 수 있다.
부가적 설명—영혼의 닻
 6장의 뒷 부분에 주어져 있는 이 보증의 표현들—“하나님이∙∙∙ 약속하실”,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그 뜻이 변치 아니함”,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큰 안위”, “소망을 얻으려고”, “영혼의 닻”,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예수께서∙∙∙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을 주목하라.

 이 표현들은 모두 힘과 보증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약속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고자 시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의 권 면이 불변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충분히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덧붙여서 약속을 다시 한번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전혀 말하지 않던 매우 특별한 맹세를 덧붙이셨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든 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을 구성하며 이 닻은 소망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들어가신 휘장안에 직접 정착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의 논법은, 하나님의 임재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던 그 어둔 밤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창 15:17)으로부터 우리를 하늘에 있는 성소의 휘장 안에 계신 예수께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말씀을 맹세로서 확증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껴야만 했느냐고 질문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듣지 못했다. 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셔야만 할 정도로 중요했는가? 그의 약속이 충분하지 못했는가?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이것이 그의 의로 여김을 받았다(창 15:6) 할지라도 그의 믿음이 처음에는 강하고 튼튼하며 흔들리지 않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겨자씨 한 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했으므로 후일에 그는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비웃었다(창 17:17). 아브라함은 역경의 날이 오고, 씨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가 불가능하게 보일 때에 그가 붙잡고 늘어질 어떤 것이 필요했다. 정말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는 만족했어야만 했는데, 그러나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자비로 그가 결코 잊을 수 없으며 혹시 그의 믿음이 비틀거릴 때에 기억하고 매달릴 어떤 것을 그에게 주셨다.

 아브라함이 도살된 짐승들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을 때 그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겼다.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창 15:12) 그 때 갑자기 한 빛이 닥아와서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창 15:22)웠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와 관계가 있었다(창 12:7; 13:15; 15:18).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목격했던 의식은 맹세를 엄숙히 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 계약 당사자들은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렘 34:18) 갔다. 그들은 이 행위에 의해서 만약 그들이 언약을 어기면 송아지처럼 잘라져도 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었다. 즉, 그것은 당사자들이 목숨을 걸고 계약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피 언약이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깊은 인상, 해가 갈수록 자라고 깊어지는 인상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으므로 비록 아브라함이 아마 그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씨”에 포함되어 있었던 모든 것을 이해했겠느냐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는 이삭의 질문에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한 답변에 의해 확증된다(창 22:7, 8).

 언약은 “씨”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맹세로써 확증하셨을 정도로 엄청나게 중요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큰 안위”를 가지는 것은 “씨”,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 분은 우리의 소망이시며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으며 이 소망은 “휘장 안에 들어가”“예수께서” “그리로 앞서 가”셨다(히 6:19).

 이것을 말할 때,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성소와 연결시켰다. 그가 만약 소망과 닻을 “휘장 안에 있는 것”(영어 흠정역)과, 연결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곳에서 휘장이나 그리스도께서 성소로 들어 가셨음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씨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천사에 의해서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 :21)고 알려진 것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한 아들이 씨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태어날 것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이 구주가 되실 것이라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새 언약이었다. 이것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흥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그리스도 인들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히 6:19) 간다.

 닻은 굵은 밧줄에 의해 배에 묶여져 있는 기구로서 배에서 물 속으로 던져져 땅이나 바위를 일종의 갈고리에 의해 붙들어 배가 그 자리에 있도록 붙들어 주어 암초에 배가 부딪쳐 산산 조각이 나지 않도록 한다. 닻 그 자체는 물에 붙들어 맬 수 없다. 밧줄이 바닥에 닿을 만큼 충분히 길지 못해서 닻의 갈퀴들이 땅이나 돌출한 바위를 붙들고 있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여기에서 제시된 그림이다. 두 개의 닻,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붙들 것이다. 그러나 닻, 그 자체는 미끄러지거나 끌리지 않고 안전하게 그것을 붙들 수 있는 확실하고 견고한 어떤 것에 붙 들어 매져야 한다. 비록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그것은 “휘장 안에” 있으며 “예수께서” “그리로 앞서 가”셨다(히 6:19, 20). 만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닻이 붙들어 매져 있다. 그것은 확실히 붙들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의미하는 휘장이 첫째 휘장이냐 둘째 휘장이냐하는 질문으로 몹시 번민해 왔다. 만약 이 질문이 중요했었다면 틀림없이 말했을텐데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있다. 본문은 다만 “휘장”이라고 말할 뿐 그 이상 규정짓지 않고 있다. 강조된 것은 휘장이 아니고 휘장 안에 있는 것인데, 다음 절에서는 앞장서신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닻줄의 다른 끝에 계신 분은 그리스도시다. 닻을 붙들고 계신 분은 그분이시다. 만일 그분께서 첫째 칸에 계시면 그곳이 우리의 소망과 닻이 있는 곳이다. 만일 그 분께서 둘째 칸에 계시면 그곳에 소망과 닻이 있다. 그것이 필경 “휘장” 이 그 이상 규정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어디에 그리스도께서 계시 든지 거기에 우리의 닻과 소망이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닻을 성소 안에 두는 경우를 취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거룩한 곳에는 촛대, 진설병, 분향단 즉 빛, 떡, 계속적인 중보가 있다. 법궤, 속죄소, 율법, 쉐키나, 천사의 봉사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대한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좋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히 6:20)신 예수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닻이 붙들어 매져 있는 곳은 이곳이다. 따라서 그것은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붙들고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4장에서 사도는 매우 현저한 방법으로 제칠일 안식일을 하나님의 참 안식과 연결짓고 있다. 6장에서 그는 마찬 가지로 의미심장하게 새 언약,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닻을 성소에 연결 짓고 있다. 그는 성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휘장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성소로부터 우리는 소망과 큰 안위를 받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소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밧줄을 붙들고 계시는 한, 닻은 붙들고 있을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인상지우려고 갈망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생각으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구름 덮이고 풍랑 일 때에,

 너의 닻이 튼튼히 견딜까?

 밀물이 세고 닻줄 길 때,

 너의 닻이 튼튼히 견딜까?


 풍파 뚫고서 목적지까지

 주의 능력 힘입어 가겠네.

 주의 주시는 힘을 얻으면,

 모든 풍파 능히 이기리.


 숨은 암초를 만날지라도,

 굳센 닻이 튼튼히 붙드네.

 맹렬한 폭풍 성난 물결도

 너의 배를 해치 못하리.


 죽음의 물결 덮칠지라도,

 굳센 닻이 확실히 붙드네.

 우리의 소망 휘장 안에서

 거센 밀물 능히 이기리.


 동이 터서 동천이 밝은데,

 진주 문이 환하게 보이네.

 하늘 포구에 닻을 내리니,

 이젠 폭풍 길이 없겠네.


 나에게 있는 닻 튼튼해.

 큰 풍랑일 때에 견딤은,

 반석 같은 주의 사랑에

 깊이 박혀서 튼튼함일세.


 - W. J. 커크패트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