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의 뒷 부분에 주어져 있는 이 보증의 표현들—
“하나님이∙∙∙ 약속하실”,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그 뜻이 변치 아니함”,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큰 안위”,
“소망을 얻으려고”,
“영혼의 닻”,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예수께서∙∙∙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을 주목하라.
이 표현들은 모두 힘과 보증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약속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고자 시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의 권 면이 불변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충분히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덧붙여서 약속을 다시 한번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전혀 말하지 않던 매우 특별한 맹세를 덧붙이셨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든 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을 구성하며 이 닻은 소망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들어가신 휘장안에 직접 정착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의 논법은, 하나님의 임재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던 그 어둔 밤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
창 15:17)으로부터 우리를 하늘에 있는 성소의 휘장 안에 계신 예수께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말씀을 맹세로서 확증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껴야만 했느냐고 질문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듣지 못했다. 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셔야만 할 정도로 중요했는가? 그의 약속이 충분하지 못했는가?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이것이 그의 의로 여김을 받았다(
창 15:6) 할지라도 그의 믿음이 처음에는 강하고 튼튼하며 흔들리지 않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겨자씨 한 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했으므로 후일에 그는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비웃었다(
창 17:17). 아브라함은 역경의 날이 오고, 씨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가 불가능하게 보일 때에 그가 붙잡고 늘어질 어떤 것이 필요했다. 정말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는 만족했어야만 했는데, 그러나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자비로 그가 결코 잊을 수 없으며 혹시 그의 믿음이 비틀거릴 때에 기억하고 매달릴 어떤 것을 그에게 주셨다.
아브라함이 도살된 짐승들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을 때 그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겼다.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 15:12) 그 때 갑자기 한 빛이 닥아와서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
창 15:22)웠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와 관계가 있었다(
창 12:7; 13:15; 15:18).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목격했던 의식은 맹세를 엄숙히 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 계약 당사자들은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
렘 34:18) 갔다. 그들은 이 행위에 의해서 만약 그들이 언약을 어기면 송아지처럼 잘라져도 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었다. 즉, 그것은 당사자들이 목숨을 걸고 계약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피 언약이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깊은 인상, 해가 갈수록 자라고 깊어지는 인상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고 말씀하셨으므로 비록 아브라함이 아마 그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씨”에 포함되어 있었던 모든 것을 이해했겠느냐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는 이삭의 질문에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한 답변에 의해 확증된다(
창 22:7, 8).
언약은
“씨”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맹세로써 확증하셨을 정도로 엄청나게 중요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큰 안위”를 가지는 것은
“씨”,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 분은 우리의 소망이시며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으며 이 소망은
“휘장 안에 들어가”고
“예수께서” “그리로 앞서 가”셨다(
히 6:19).
이것을 말할 때,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성소와 연결시켰다. 그가 만약 소망과 닻을
“휘장 안에 있는 것”(영어 흠정역)과, 연결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곳에서 휘장이나 그리스도께서 성소로 들어 가셨음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씨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천사에 의해서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1).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 :21)고 알려진 것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한 아들이 씨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태어날 것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이 구주가 되실 것이라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새 언약이었다. 이것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흥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그리스도 인들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히 6:19) 간다.
닻은 굵은 밧줄에 의해 배에 묶여져 있는 기구로서 배에서 물 속으로 던져져 땅이나 바위를 일종의 갈고리에 의해 붙들어 배가 그 자리에 있도록 붙들어 주어 암초에 배가 부딪쳐 산산 조각이 나지 않도록 한다. 닻 그 자체는 물에 붙들어 맬 수 없다. 밧줄이 바닥에 닿을 만큼 충분히 길지 못해서 닻의 갈퀴들이 땅이나 돌출한 바위를 붙들고 있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여기에서 제시된 그림이다. 두 개의 닻,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붙들 것이다. 그러나 닻, 그 자체는 미끄러지거나 끌리지 않고 안전하게 그것을 붙들 수 있는 확실하고 견고한 어떤 것에 붙 들어 매져야 한다. 비록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그것은
“휘장 안에” 있으며
“예수께서” “그리로 앞서 가”셨다(
히 6:19, 20). 만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닻이 붙들어 매져 있다. 그것은 확실히 붙들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의미하는 휘장이 첫째 휘장이냐 둘째 휘장이냐하는 질문으로 몹시 번민해 왔다. 만약 이 질문이 중요했었다면 틀림없이 말했을텐데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있다. 본문은 다만
“휘장”이라고 말할 뿐 그 이상 규정짓지 않고 있다. 강조된 것은 휘장이 아니고 휘장 안에 있는 것인데, 다음 절에서는 앞장서신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닻줄의 다른 끝에 계신 분은 그리스도시다. 닻을 붙들고 계신 분은 그분이시다. 만일 그분께서 첫째 칸에 계시면 그곳이 우리의 소망과 닻이 있는 곳이다. 만일 그 분께서 둘째 칸에 계시면 그곳에 소망과 닻이 있다. 그것이 필경
“휘장” 이 그 이상 규정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어디에 그리스도께서 계시 든지 거기에 우리의 닻과 소망이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닻을 성소 안에 두는 경우를 취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거룩한 곳에는 촛대, 진설병, 분향단 즉 빛, 떡, 계속적인 중보가 있다. 법궤, 속죄소, 율법, 쉐키나, 천사의 봉사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대한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좋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
히 6:20)신 예수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닻이 붙들어 매져 있는 곳은 이곳이다. 따라서 그것은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붙들고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4장에서 사도는 매우 현저한 방법으로 제칠일 안식일을 하나님의 참 안식과 연결짓고 있다.
6장에서 그는 마찬 가지로 의미심장하게 새 언약,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닻을 성소에 연결 짓고 있다. 그는 성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휘장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성소로부터 우리는 소망과 큰 안위를 받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소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밧줄을 붙들고 계시는 한, 닻은 붙들고 있을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인상지우려고 갈망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생각으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구름 덮이고 풍랑 일 때에,
너의 닻이 튼튼히 견딜까?
밀물이 세고 닻줄 길 때,
너의 닻이 튼튼히 견딜까?
풍파 뚫고서 목적지까지
주의 능력 힘입어 가겠네.
주의 주시는 힘을 얻으면,
모든 풍파 능히 이기리.
숨은 암초를 만날지라도,
굳센 닻이 튼튼히 붙드네.
맹렬한 폭풍 성난 물결도
너의 배를 해치 못하리.
죽음의 물결 덮칠지라도,
굳센 닻이 확실히 붙드네.
우리의 소망 휘장 안에서
거센 밀물 능히 이기리.
동이 터서 동천이 밝은데,
진주 문이 환하게 보이네.
하늘 포구에 닻을 내리니,
이젠 폭풍 길이 없겠네.
나에게 있는 닻 튼튼해.
큰 풍랑일 때에 견딤은,
반석 같은 주의 사랑에
깊이 박혀서 튼튼함일세.
- W. J. 커크패트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