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창조 당시에 아담은 순종이라는 조건하에서 생명을 약속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그에게 전달되었다.
“여호와 하 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6, 17).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셨을 때 천연계는 균형을 이루었다. 모든 피조물, 모든 동물과 물고기, 모든식물, 모든 꽃과 관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그 생명의 존재를 주관하는 생명의 법칙에 단지 순응할 때에만 생명을 가질 수 있었고 가졌었다. 물고기들은 그들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근본요소로써 물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본래적인 습관을 떠나서 뭍에서 생명을 계속 유지토록 시도한다면 그들은 죽을 것이다. 식물들은 흙에 뿌리를 뻗는다. 생명의 법칙은 그렇게 그들이 남아 있도록 요구한다. 동물들은 들판에서 돌아다니도록 창조 되었으며, 만일 그들이 물고기처럼 살고 또는 새처럼 날도록 어떤 시도를 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개개 피조물이 그의 적당한 장소를 가지고, 법이 지배하고, 생명의 법칙에 순응하는 조건하에서 모든 것이 생명을 갖는 질서정연한 세계를 발견했다. 그러한 세계 위에 그는 지배자로서 군림했다. 모든 창조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생명은 생명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조건하에서 부여되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다른 피조물들이 음식물을 부여받은 것처럼 그의 음식물을 부여받았고 보편적인 창조의 계획하에서 그의 행동 분야와 장소가 그에게 지정되었다. 그는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되어있었고, 그는 땅을 정복하게 되어 있었고, 모든 생물 위에 통치권을 가지도록 돼 있었다(
창 1: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한 아담과 땅의 창조물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아담은 지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다른 창조물보다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한다. 동물들은 어떠한 의지적인 행동으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하나님과 자연의 법칙에 복종한다. 그들의 순종에 첨부된 아무런 도덕적 가치는 없었다. 그와 반대로 아담은 물론 결과에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할 존재로서 항상 그는 그렇게 선택 할 수도,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명령을 거절할 수도 있 었다.
아담이 복종하려는지 아니면 자신의 길로 갈 것인지의 의도를 나타내는 어떤 시험 장치를 고안하는 것은 하나님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었다.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생명의 법칙을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를 알기 위하여 평가를 받을 때까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에게 독립된 특권과 그에게 무조건적인 생을 부여한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천연계는, 법칙하에 있고, 모든 피조물은 법칙에 복종한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복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확실히 밝혀져야 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명령은 아담이 단지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명령은 단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의 의지를 결정하는 시험이다.
하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신학” 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아담이 하나님을 기꺼이 복종하느냐 안하느냐를 결정하는 외적이고 확실한 시험으로 그것이 단순히 부여되었다. 그리고 순수한 애정을 가진 거룩한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에 아담의 순종에 관한 시험은 외적이고 확실한 명령이라는 것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다; 나무의 본성 자체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금지된 것을 행함으로써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복종 그 자체를 위해서 아담이 복종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순종은 그 자신의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더 직접적이었다”(제 2권, p. 119)
하지(A.A.Hodge)는 이것에 대해 말하기를,
“금지된 과일을 먹는 것을 삼가라는 명령은 일반적으로 순종이라는 것에 관한 단지 한 특별하고 결정적인 시험에 불과한 것이다. 금해진 그 일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명령은 하나님의 그러한 절대적인 의지에 대한 복종을 시험하는 명백하고 뚜렷한 것으로 받아 들여 졌다”(Outline of Theology, pp. 230, 231).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시험을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명확한 명령이다. 그것은 적극적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의 유일한 배경은
“Thus Saith the Lord”(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기 때문이다. 적극적 명령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도 아니고, 그것 자신의 본성이 악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금했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창조하셨다. 죄악이 그러한 것처럼 나무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나무를 선택하시고 그것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면 시험은 똑같이 주어졌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그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를 둔 하나의 단정적인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자신의 이성을 팽개치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것보다 훨씬 고귀한 정신과 권위를 인식해야 한다.
생명의 언약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창조시에 하나님의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의 판에 그의 법률을 쓰신 것처럼 우리들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쓰셨다. 그들의 모든 감정, 생각 언어와 행동들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완전히 일치하였다. 그들이 생애의 원칙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였던 것은 뱀에 대한 하와의 대답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그녀는 그들이 행하였거나 행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창 3:2, 3)
이러한 대답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명령을 어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과를 먹으라는 사단의 꼬임을 받 아들이는데 있어서 그녀의 망설임은 그녀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조건들은 그것들 자체 속에 언약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은 자연의 언약, 합법적인 언약, 행위의 언약, 생명의 언약이라고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다. 그것들은 단순히 생명의 법칙이다. 그것들은 영원한 행복과 생명을 가져올 수 있었던 생명의 법칙과 일치하였고 그 법칙을 범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언약을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호 6:7)라고 언급하였는데, Hitzig, Pusey, Keil, Wunsche 같은 사람들은 아주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흠정역 성경과 개역 성서의 난외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인류 시조에게 주어진 시험은 아주 가벼운 있을 법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 가벼운 것이었기 때문에 범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상상력을 비약하지 않고도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지가 아무런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선악과 나무만 제외하고 모든 나무에 금지령이 내렸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그들의 범죄에 용서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죄는 고의적이었다.
아담의 타락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즉시 죽게 하실 수가 있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한 쌍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실패를 인정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교훈을 배웠을 것이며, 다시는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쉽게 그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것에는 다른 중요성이 내포되었다. 만약 다른 시험이 주어지고, 그들이 다시 실패하면, 그들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다른 더 많은 끊임없는 시련이 그치지 않았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것이 끝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가장 적은 탈선에도 죽음이 이르러온다는 교훈을 배웠을 것인가? 그들이 이것을 배우지 않는 한 안전은 이 세계 혹은 이 우주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용서하실 수 있으셨으나, 그 문제 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또한 죄의 삯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범죄 때문에 독단적으로 죽음을 선포하시지 않으시고, 죄 그 자체 속에 죽음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필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의 회복을 위해서 계획하는 죄를 다시 짓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신다. 영원부터 마련된 그 계획은 지금까지 실시되어져 왔는데, 그것은 그를 상실한 신분으로부터 구하고, 그에게 죄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복귀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것을 논하기 전에 언약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언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선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언약의 정의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언약은 조건이 서로 같아야하며, 서로 책임을 져야하며, 서로 의무가 같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계약인 것이다.
“종주 언약” 혹은 명령적 언약이라고 부르는 언약은 정부와 국민 사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 같이 동등치 않은 사이의 언약으로 본질이 다른 언약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조건을 수행하는 법률이나 약속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웹스터 사전에 신학적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보통 인간이 수행하는 조건이 따르는 것”으로 언약을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주에 의해 부과된 언약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 창조주(하나님) 편에서의 약속 2. 특별한(상세한) 규칙에 대하여 순종을 조건으로 한 약속들 3. 규칙의 위반에 대해 가해지는 형벌 그 계약의 내용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동등할 경우에는 당사자들은 언약에 기초된 줄어들에 대해 의논하고 합의를 하게 된다. 반대로 명령으로 주어진 언약에서는 아무런 흥정(계약)이 없다. 윗사람들은 단순히 조건들을 말하고, 아랫 사람들(것들)은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한 국가의 시민이 되기 원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수 있다. 그가 국민이 되고자 원하는 나라의 법률을 즐거이 존경하고 명예롭게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리고 그 국가의 법률을 순종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계약에서 명시된 것처럼 그 정부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아무런 홍정이 없는 것이다. 정부는 법을 부과하고 그 사람은 거기에 기꺼이 따른다.
이미 어느 국가에 태어난 이는 형식적으로 제도와 법률에 따르겠다고 서명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렇게 선언한 것처럼 이들을 지키기 위해 엄숙한 언약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태어난 당시의 법률뿐 아니라 그 이후에 제정되어지는 모든 법률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군주 정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법을 제정하는 일에는 참가할 수 없겠으나 그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엄숙한 의무를 갖는다. 그의 출생이 언약의 조문들을 따르도록 하기도 하면 반역이 일어났을 때 혹은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는 그는 아마도 그의 순종을 재서 약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과 마찬가지로 그가 서약을 하기전에 이미 순종의 의무를 갖는다. 한 국가에 계속적으로 주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서약된 계약을 지키겠다는 것과 같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을 때 그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제정하셨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신 4:12, 13).
십계명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 또는 지시된 언약으로 불리었다. 또 다른 그러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 세우셨다(
신 29:1). 이것은 또한 명령된 언약이고 이러한 규정을 포함한다.
“내가 이 언약과 맹서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신 29:14, 15).
이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제정되었고, 그리고 또한
“오늘 우리와 여기에 함께 서있는 그,” 즉 언약으로 들어갈 의사가 아마도 없는 이방인에게 제정되었다. 그 언약이 제정될 때 존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 여기에 함께 있지 않는 그에게까지” 만들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명령으로 주어진 언약은 그 때에 있었거나 간에 모두에게 순종되어야 하는 일반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한 법을 단순히 천명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십계명은 우주적인 의무로 명령되어진 언약이다. 또 다른 혹은 좀더 제한된 의미로서는 그 계명들은 이스라엘과 성립된 특정한 언약에 그 기초들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은 그 언약에 있고 또한 그 언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웹스터의 위에 인용한 용어 해석에 의하면 신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언약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간이 지켜야할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조건들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에 첨부되어진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실 때 한 언약에는 어떤 조건들을 거기에 부가시킨다.
이와같이 순종의 조건에 관한 생명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아담에 대한 약속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언약이었던 것이었다. 하늘의 회의에서 결정된 하나님의 조건들은
“순종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불순종하면 멸망하리라”였다. 이러한 조건들은 하나님 자신이 변질될 수 없는 것처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명의 기초석들이며 인위적 계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살 수 없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이와같이 인간은 그의 존재와 생명의 법칙들을 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들, 생명의 법칙들을 인위적인 규제로서가 아니라 어길 수 없는 존재의 조건들로서 그것을 금한다.
하나님의 계획 영원하시며 무한하시고 불변하시고 그리고 전지 전능한 하나님 께서는 모든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보시고 계획을 수립하셨다. 루스벨의 반역과 인간의 타락의 결과를 아시므로 그의 구원의 관점에서 세상을 창조했다. 그의 창조물과 그자신에게 영원한 결과를 초래할 매우 중요한 사업인 창조의 사업을 시작함에 있어서 발생할 문제를 대처할 준비를 세우지 않고 그의 원수의 도전을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 답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사업의 경영 방법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해야 하므로 그 결과는 그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공의는 물론 그들에게 제공된 생명의 법칙을 거절하는 피조물들의 동의까지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사고할 줄 아는 존재를 창조하기로 결심하신 데는 그 창조물뿐 아니라 창조주 자신께도 중대한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창조에 관한 결정에는 성육신과 고통,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창조의 심오한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자신과 다른이와 더불어 생명을 공유키를 원하시는 것이 배경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도 또한 살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
요 14:19).
하나님은 창조란 것이 당신의 아들의 생명의 값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창조의 결정이 삼위,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협의된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선지자가
“가지”의 비유에 대해 말할때 이 회의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이라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론이 있으리라”(
이사야 6:12, 13). 어떤 사람들은 이 예언이 여호수아의 머리에 관을 씌우는 것으로 지엽적인 성취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나 이러한 지엽적인 성취가 예언을 이룬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언급해진 그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즉 그는 그의 보좌위에서 다스리시며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을 것이다. 그는
“영광도 얻고” 그리고
“평화와 협의가 그 둘 중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영원한 회의라는 것으로 해석할 때 그것의 완전한 해석을 발견한다. 그 회의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도록 결정되었으며 그 보좌는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의 건물인 것이다.
영원한 언약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존재해 온 것은 성경과 논거로서 명백한 것이다. 다음의 문제들을 고려해 보자.
예정된 계획의 성취로 생각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의 그의 생애와 봉사를 당신이 동의하시고
시편 40:7에서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초림을 선포하셨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이 초림은 완전히 그리스도 자신의 소망과 일치되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여전히 강력한 말씀으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라고 표현하셨다(
시 40:7; 요 4:34).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어졌다. 이렇게 그는 자주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
요 12:4; 6:4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 11:42).
“사람들이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요 15:21).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요 17:3) 예수의 초림의 때는 또한 예정되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 4:4).
그리스도께서는 초림으로 이 땅에서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달성하는 사실을 깨달았고 성실하게 그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수행했다. 그의 신성에 대한 지각있는 인식으로 어렸을 때에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만 한다고 알았다(
눅 2:49). 그는 진정한 마음으로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요 8:29).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행했던 그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계획을 가르쳐 주고 일을 주사 이루게 하실 뿐 아니라 그 계획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그를 도와주셨다.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요 14:31).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해야 하리라”(
요 9:4).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요 5:36).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0).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로 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들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요 12:49)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24).
“아버지가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요 8:28, 26). 예수께서 가르쳤던 교훈에 대해서조차 그는 말할 수 있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 7:16). 예수께서 이 지상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
요 17:4).
이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요한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는” 부분이다(
요한일서 4:10).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요 10:18).
그의 사업을 마칠 때 쯤에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특수한 요청을 말하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요 17:24). 이것은 평상시의 기도가 아니다. 실로 그것은 기도라 기보다는 요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다.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지금 그는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는 바랍니다”(I will) 라고 선언하신다. 그는 호의를 바라시지 않으시며 그는 승리의 보상을 요구하시고 있다. 그의 대제사장이 드리는 것과 같은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되풀이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왔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요 17:6, 9, 11, 12, 24). 그는 이것들을 주장한다.
“그들은 당신의 말을 지켜왔습니다.” 그들이 조건을 달성함으로써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그는 그들이 그에게 드려지고 그와 함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사 13:12). 앞의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업을 행하시기로 동의를 나타내셨고 그 조건들을 충족시킨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땅에서 주의 초림의 목적이 인간의 구속 사업이었으므로, 그가 수행하도록 그에게 주어진 그 사업을 마친 것을 선포함으로서, 그리고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주어졌던 사람들을 요청하심으로 우리는 명시된 언약의 요소들을 발견한다. 즉, 다른 성경 구절로부터 믿어온 바 바로 그것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은 바로 그 본질에 있어서 영원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언약은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져야만 했던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천사를 만드시고 죄의 결과에 따른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음을 아시고 그들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는 두번째 시험의 기회를 주셨다. 제공된 자 비까지도 거절하는 존재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로부터 죄의 근본적인 말살을 위한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쪽의 근시안적 면을 드러내거나 그분의 균형진 능력에 결핍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자비로운 아버지요 친절한 분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신 분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는데 불과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하나님께서는 하잘것 없는 것이었으며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아버지의 본질의 주장에 대해 의심을 자아내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같은 이유들이 창조가 하나님과 인간의 구속을 위해 모든 준비를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 완전한 계획이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완결되었음에 틀림없다고 밝힌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구속의 계획은 계약 당사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빛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그들의 화합에 있어서 신성을 나타내시고 그 아들은 그들의 대리자요 보증인으로 그를 선출했던 사람들을 대표하셨다.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진 조건들의 성취를 약속하셨고 보증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약속하시고 보증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가 보증을 서시고, 그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킨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인간에 관한 언약의 관리는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조건을 성실히 이행함에 있어서 보증인이 되신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업을 끝내셨을 때 그는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어 왔나이다”라고 증명하셨다. 그는
“굉장한 기쁨으로 그의 영광스런 임재 앞에 흠없이” 그들을 받아 주시도록 소개 하였다(
요 17:6;
유 22).
그 언약을 성취하는 것은 이런 지혜 위에 있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기를 실패하고 삶에 대한 그의 권리를 상실하자마자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리를 취하셨고 아담의 보증이 되셨으며 그것에 의해 즉각적인 죽음에서 그를 구하고 그에게의 또 다른 길을 보여주셨다. 두번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성의 우두머리가 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인간의 대표자로 취급하셨다. 하여간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가 진실로 인간이 되고, 모든 면에서 인간의 입장을 취하시고 오직 인간의 죄 때문에 그 자신이 벌 받아야 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는 조건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한 것과 같은 테스트와 심판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고, 엄격한 복종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복종함이 가능하다는 것과 이와같이 아담의 불명예스런 실패를 대속한다는 것을 나타내신다. 당신이 순종하시므로 예수는 하나님을 공의롭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이행할 수 없다는 사단의 주장을 논박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에 의하여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인간을 또 한 고무시킨다.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사이에 그 계약은 바로 구속의 언약이라 불리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준비는 인간의 구속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번째 아담에 대한 두번째 아담의 대체였고 그는 인간에 의해 초래된 모든 책임을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보증에 의하여 인간이 순종으로 돌아섬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불멸을 위한 적합한 후보자로서 인간을 흠도 점도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진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형벌을 잠시 금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을 회복할 시간을 주셨다. 즉 인간에게 인간의 죄를 계산할 시간이 아니라 유예의 시간을 주었고 하늘과 땅에서의 모든 권력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예수를 준비된 언약의 완전한 통수권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표자로 취급하시므로 하나님은 그 리스도와 거래하시고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리스도와 홍정을 하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오가며 중보자, 중개인 또는 매개자가 되신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떠한 요구도 예수그리스도만을 통해 상달되어진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의 교신이 우리에게 다다를 수 있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요. 보증이시다.
은혜의 언약 어떤 사람들은 은혜의 언약을 구속의 언약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설명을 하자면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좋다. 은혜의 언약은 인류와 연관된 것으로 구속의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도권의 실재에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속의 언약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사 13:12) 할 것을 약속하셨다. 은혜의 언약은 사람으로 더 높은 표준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도록 미리 준비시켜 준다. 그것은 단지 인류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입장으로 인도하며 거기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고자 하는 시험을 견디게 하며 승리자로서의 상을 얻게 만든다.
이러한 사업에는 두가지 특수한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죄의 용서로 이를 통하여 과거의 허물을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만약 인류가 그의 모든 죄를 뽑아 버릴 수 있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그가 거듭나고 그의 심령과 행위가 변화되고 또 완전히 새로 창조함을 받아 그의 옛 사람이 죽고 장사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갖고, 모든 과거의 것들이 지나가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면, 다른 말로 말해서 그가 단순히 죽고 새로 태어 난다면 그는 과거의 불리한 조건 없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 계단 중의 첫번째 것으로 회개와 중생을 얻고 이를 통하여 위에 언급된 모든 새로남의 경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타고날 때부터 짊어진 모든 허물을 벗기고 아무런 죄가 없는 아담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새로난 사람에게 요구되는 사업을 위한 능력을 얻는 것이다. 그는 아담이 필요했던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능력 면에서 아담의 그것보다 훨씬 뒤져 있고 위로부터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해 주시야만 되기 때문이다. 아담보다 연약할 뿐 아니라 유혹은 더욱 강하여 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도 거기서 났”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
시 87:4; 롬 5:20) 치도록 하실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은 아담이 가졌던 동일한 기회를 갖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요구받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의 법을 어기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죄 가운데 출생한 사람은 거기에 대한 책임이 없이 그의 무능이 일소되고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첫째 인간에 주어 졌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공평함이 요구된다. 이것은 자비라고 말하기 보다는 공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요한은 언급했다(
요일 1:9).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므로 유전된 죄와 연약성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전가시키지도 않으시므로 하나님에겐 공의로우심이 있는 것이다. 죄의 면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뿐 아니라 그의 의로우심까지 볼 수 있다고 바울은 기술하고 있다(
롬 3:25, 26; 히 6:10).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취급하심에 있어서 선악간 공의에서 머리털 만큼도 빗나가시지 않으시며 그의 자비를 의인에게 한정하시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5) 인간이 하나님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그 분으로부터 떠나 죄로 돌이킬 때만 그 분께서는 마지못해 그 악행에 대한 열매를 거두도록 허락하신다.
인류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범죄자에게 선언하셨던 사형 선고를 변경하시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중재 때문에 그 분께서는 그 집행을 유보하셨다. 아담과 전 인류에게 허락된 이 유보를 우리는 유예 기간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은 은혜로 전 인류에게 한결같이 허락된, 사물을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인간에게 제공하는 은혜의 기간이다. 인간이 죄를 버렸다는 것을 회개와 하나님께 향한 분명한 방향 전환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한 결국 사형 선고는 집행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의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공의와 상충되지 않는다. 사람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그는 마침 내 죽음에 직면하게 되지만 의인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사망은 그가 다시 영생으로 일어나는 수면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집행 유예란 인류에게 비록 그들이 생명의 법을 범했지만 계속적인 삶을 제공하려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허락된 은혜의 날인데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돌리지 않고 그들을 다시 순종으로 이끌기 위해 사랑으로 호소하신다. 그것은 유보된 선고의 기간이요 집행 유예 기간이다. 그러나 법적인 의미에서만 그렇다.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이 회개하도록 애원하시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충성된 자들에 주실 한 가닥 기쁨을 그들에게 보이시며 한편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다면 그들의 것이 될 손실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등 바쁜 활동의 시기이다. 은혜의 언약하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은 죄인을 취하셔서 그들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끝없는 친절로써 그분은 약한자를 도와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필요하다면 인간이 드디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의 힘을 붙잡고 새로운 생활을 할 때까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각자의 힘에 맞게 시험을 허락하시고 인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인간이 한 시험을 지나서 자기 자신은 물론 다소간 힘을 얻으면 그 분께서는 인간이 특정한 필요에 조심스럽게 측정된 또 다른 시험을 주셔서 드디어 죄를 짓기보다는 죽음이라도 택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다다른다. 인간이 이러한 결정에 다다를 때 그 사업은 마쳐지고 시련은 끝이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준비되어 성화되는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무한한 기쁨으로 하나님 존전에 인간을 드리게 될 것이며 사단은 실패했고 하나님께서 옹호를 받으시며 그 영혼은 구원을 받게 된다.
여러가지 오해의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은혜의 언약의 목적은 단순히 죄의 용서가 아니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위치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임을 강조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는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요구를 변개치 않으시며, 자기 모순과 인간 차별의 비난을 겪으려는 모험 없이는 변개하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서도 변개시켜서도 안 되며, 인간 자신을 위해서도 변개 시켜서는 안된다. 지금에 와서 아담에게 하셨던 것보다 덜 요구하신다면 재난을 초래할 일이며, 그 당시에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면 오늘날로 완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요약 생명의 언약: 이는 생명의 일반적인 습관이나 법칙을 의미하며, 이 법칙 아래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영위한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생명체 곧 식물이나 꽃, 나무, 곤충, 동물, 새 혹은 물고기들은 저들의 독특한 삶이나 죽음의 조건에 순응해야 한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천사들과 기타 그 외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적인 생명체들은 저들을 지배하는 생명의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이 법칙들의 순전한 특성은 이 법칙들에 대한 엄격한 순종에 달려 있다. 모든 규칙에 따라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조문이 기록되어 있다. 불순종의 결말은 저들의 본질에 대한 형벌이 아니요 범죄의 결과라든지 죄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죄의 댓가이다. 독을 마시는 자는 생명의 법칙을 범함으로 그 종국을 겪는다. 형벌은 본래 그 행위 자체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법칙은 자연의 언약 혹은 자연적인 언약, 법적인 언약, 행위의 언 약등 다양하게 일컬어진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명의 법칙에 의하여 모든 것이 존재하며 모든 만상은 이 법칙을 좇아야 한다. 이 법칙은 격식을 갖춘 언약이 아니라 모든 자연계는 생물이든 무생물 이든 이에 순복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밤과 낮의 약정을 세우셨으며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워 하나님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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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생물 사이에 영원한 언약의 표로써 무지개를 주셨다(
렘 33:20, 25; 창 9:9-17).
이 법칙이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일반적이며 포괄적이고, 이 법칙에 의하여 순종의 조건 위에 생명이 약속되기에 생명의 언약이라 부른다.
구속의 언약: 구속의 언약은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엄숙한 계약을 맺으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 언약에는 성육신과 고난과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위치를 취하실 것이며 둘째 아담으로서 모든 인간의 책임을 완수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人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는 모든 자들을 받아주시고, 저들을 위하여 보증이 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인간을 정금보다 더욱 귀하게 하시며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지으시며 마침내 하나 님의 보좌앞에 흠없이 세우실 것을 보장하신다.
이 언약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대표하시며, 하나님과 인간—인간 예수 그리스도—사이에 맺어진 이 언약은 결렬될 수 없는 약속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인간에 대해서 이 언약의 이행은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된다.
은혜의 언약: 이 언약은 구속의 언약의 이행에 관계되는 것이며, 은혜의 언약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속하실 것이며, 저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회복시킬 것이다. 이 언악은 그리스도와 타락한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그 지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결점을 용서하시며 의롭게 살고자하는 저들의 욕망을 굳세게 하도록 저들을 도우신다.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비록 밀접하게 연결되긴 했지만 두 가지 분명한 부분 곧 죄의 용서와 성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심령 가운데 행하시던 봉사를 마치실 때, 당신의 봉사를 아버지 앞에 제시하실 것이다. 각자 자신을 위하여 시험을 견뎌야 하며, 시험을 견디는 자들은—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중보가 되시고 보증이 되신 모든 자들을 포함해서—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인간이 타락한 후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인간과 맺어졌다. 달리 방법이 없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고대의 모든 성도들과 맺으셨던 것과 똑 같은 언약이다.
이 언약은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다가올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인간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구속의 언약의 이행에 불과하다. 이 언약은 인간을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있던 위치로 회복시켜주며, 인간은 생명의 언약의 은혜에 들어가며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전에 시험을 견뎌야만 한다. 이 시험이 마지막 시험이며, 이를 위하여 은혜의 언약이 그를 준비시킨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세워졌다. 인간은 저희가 자신의 의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린 예가 없었다. 예수께서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던 두 제자들에게, 그 지위에 합당한 댓가를 치를 수 있겠는가 물으셨을 때, 저들은 즉시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마 20:22). 요구되는 합당한 능력을 행함에 있어 저들은 마음 가운데 조그마한 의심조차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젊은 청년에게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즉시 대답하였다.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0). 그의 마음 가운데는 자신이 그 계명들을 지키었을뿐만 아니라 항상 그대로 행한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한 것으로 그는 생각하였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는 말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보이는 표현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조건으로 율법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요구하셨을 때, 저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 19:8) 고 대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대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셔야 할지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는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 앞에서 전연 무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당신께 의지하는 교훈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저들은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돕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셨으며, 저들이 전적으로 무력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깨닫기 원하셨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한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저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백성들이 언약의 조항들을 매우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공공연히 율법인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이다. 저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한계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다시 한번 확실히 하기 위하여 저들의 상황에 맞도록 십계명의 원칙에 대한 세부적인 적용을 나타내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저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정확하게 알게 하셨다(
출 20:22-23:33). 이러한 판단과 신분을 설명하는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 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출 23:20, 21)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심장한 말씀은 저들을 잠시 멈추게 했어야만 했었다. 저들은 아직도 경고를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던가? 아직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느꼈는가?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실패할 것을 아셨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 그들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셨거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씀하시거나, 혹은 저들이 행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특권을 주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정당한 기회가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이를 증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경험해 보도록 내버려 두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셨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대로 실패였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의 죄와 실패에 따른 실망의 경험을 받도록 하시었다. 저들이 금송아지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당신의 방법을 보다 완전하게 가르치실 성막을 짓도록 모세에게 일러주고 계셨다. 저들은 죄악의 가증스러움과 가장 작은 죄라도 죽음을 의미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용서의 필요성을 더욱 알아야 했다. 지상의 제사장으로 예표된 하늘 중보자의 필요성에 대한 생생한 이해가 필요했다.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알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성소 봉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예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고 있는 짓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을 때, 모세는 대노하였다.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두개의 돌판을 땅에 내던져 조각을 내었다. 금송아지는 가루를 내어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헌신을 촉구하였으나 범죄한 자들은 응답하지 아니하고, 복종하기를 굳게 거절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에 모세는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 32:31, 32)라고 간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엄숙하게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백성을 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제안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중재하여 하나님께 저들을 살려주실 것을 간청하였으며 응답을 받았다(
출 32:11-14). 그러나 모세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출 32:33)고 잘라서 말씀하셨다.
그리고나서 모세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택하신 땅으로 인도하라 명하시며, 당신께서 저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고 대신에 당신의 사자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가올 징벌에 대한 경고를 반복하셨다.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4절).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표시로 장막을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
출 33: 7)였다.
이 때에 모세는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절하셨으며, 그들은 언약을 어겼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셨다. 저들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저들을 당신의 백성이라 말씀하시는 대신에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출 32:7)고 말씀하셨다. 여하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답을 듣고 나왔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강한 손으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출 32:11).
모세는 여행을 함에 있어서 한 천사만 함께 동행하는 데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수 그들과 함께 가시기를 원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내어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하나님께 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
출 33:14)고 말씀하셨다. 이에 모세는 용기를 얻기는 했으나 만족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담대하게
“친히 가실” 뿐만 아니라
“함께 행하시”(
출 33:16)기를 요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너의 말하는 이 일로 내가 하리”(
출 33:17)라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모세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
출 33:13)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8)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의 특성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자비 또한 그러하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성의 측면인 공의를 보여주셨으나 모세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달라고 간구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 비와 인자를 강조하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나타내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할 기회가 되리 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서 모세는 실수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6, 7).
당신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여호와께 모세는 마지막 요청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한 천사를 보내시는 대신에 당신께서 친히 백성들과 함께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모세는 두 가지를 구하였다. 첫째로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출 34:9). 하나님께서는 진 밖에 따로 떨어져 계셨다(
출 33:7). 모세는 이제
“우리 중에 행하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이 요청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출 33:3)라고 말씀하셨을 때 한번 거절당하였다. 다른 요청은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출 34:9)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출 34:10) 로 대답하였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 중에 거하며 너희 죄악을 용서하는 것은 너희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이 언약에 대한 신실한 이행 여하에 나의 결정이 달려 있다”는 말과 같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혼자 올라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6주일 전에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70명의 장로들도 함께 올라오도록 부름을 받았었다(
출 24:9).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으며
“그들을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
출 24:10, 11)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모세 혼자 하나님을 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말씀하셨다. 주로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르라” 라는 일반적인 형태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다. 언약 맺기를 마치 실때 하나님께서는
“너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출 34:27)고 말씀하셨다.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산에 오르라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며, 언약을 맺는데 비준하거나 동의를 하도록 요청을 받지도 않았고, 모세만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였다. 언약이 모세와 마찬가지로 이 백성들과 맺어진 것이기에 비록 2차적인 의미를 지닌다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그 안에 한 부분이 되었다.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습이니라” 이 언약은 출 19~24장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사자를 통한 언급이 있다.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출 23:21).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며, 모세를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로 은혜스럽게 받아주신다. 이 언약은 구약 성경 시대의 상황 아래 이뤄진 새 언약의 모든 모형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 가운데로 들어오시고, 모든 의식이 용서를 가리키는 성소 봉사가 시작되었으며, 대제사장으로 포상된 중보자가 세워졌으며,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 부정과 과실과 죄를 용서받는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모형이라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보자가 되실, 보다 나은 언약에 대한 예언적인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죄들이 진실로 사함을 받고 도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