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8 장 — 두 언약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하늘의 참 장막에서 대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고서 저자는 6절부터 새언약과 옛 언약으로 주제를 옮아간다. 백성의 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약속 위에 기초한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선포하신다. 이 언약에서는 그의 법을 저희 마음에 기록할 것이며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허물을 더 이상 기억치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히 8:1-5 (8:1-5)
 이 성경 구절들에서 사도는 앞에서 말한 것들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성소와 참 장막에서 부리는 자이시며 예물과 제사를 드리기위해 세우신 자이시다. 만일 그가 이 땅에 계셨다면 그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는데 이유는 그가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봉사야말로 참된 봉사로서 땅에서 행하는 것은 단지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8: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이제 한 말의 중요한 것은
 저자는 이미 기초를 놓았다. 이제는 그 기초 위에 건축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건물을 짓기에 앞서 그가 한 말을 요약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일반 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여기 높은 지위는 그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 보다 더 알기를 원하면 히브리서 1:3절의 해설을 참고하라.
히브리서 8: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성소와 참 장막에서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지상의 성소는 그림자요 그 참 것은 하늘에 있다. 성소에서 부리는 자로 불리워졌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는 단순히 직책만 가지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부리는 자요, 봉사하는 자요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그가 성소에서 봉사하는 자라면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섬길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 제사장들도 예물, 또는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도 무엇인가 드리신다.

히브리서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언제 제사장이 되셨는가에 대한 의문은 자주 논란이 되어 왔다. 침례를 받으신 후인가, 또는 승천하신 후인가 아니면 다른 어느 때인가?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성경절에 의하면 “무슨 드릴 것”이 있을 때까지는 아무도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선의 피를 드리는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가 흘려질 때까지 봉사를 시작하실 수 없으셨다. 이것은 그가 이전에는 제사장이 아니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그가 봉사하기 전부터 제사장으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언제 그가 제사장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갈바리에서 그는 제사장인 동시에 제물이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헌신하기 이전에 선택함을 받았으며 그들의 직무에 합당하게 준비될 때까지 얼마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공생애가 시작될 즈음 제사장이 되어 그의 승천 후에 공식적으로 인준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서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한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쌓여 있음”이기 때문이다(5:2) 그는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4:5)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7, 18).

 이 성경절 특히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2:17) 라는 말씀은 분명히 지상에 머무는 기간이 준비의 날들이 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의 지상 생애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준비 기간이요 그의 봉사는 준비 기간이 끝날 때까지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하면 안전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기 이전에 공식적인 제사장이 되었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효과적으로 해결해 준다.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주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그가 준 비를 끝내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피를 흘리지 아니했으므로 드릴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의 기초를 놓을 때부터 살해된 어린 양이요 영원전부터 중보자이시라는 사실은 부정되기 보다는 오히려 증명된다. 그가 구주이시라는 것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과 같은 의미, 즉 영원 전부터 있어온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는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레위 제사장직의 규칙은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예수께서 세상에 계셨다면 자격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레위 족속에 속한 사람만 이 가능한 것이요 유다지파에 속한 그리스도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직분은 독립적인 것으로 하늘에 속한 것이 었다.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예물과 제물을 드렸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드”렸다(히 9:14). 그의 제사장 직분은 영적인 것이었다.

 만약 적절한 때(in time) 그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공식적인 취임이 있다는 것과 중보자로서의 그의 사역의 차이를 구분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혼란과 논란은 배제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늘의 회의에서 중보자로 내정되시었다. 신약에서 그러한 것처럼 구약에서도 그의 중보에 의하여 인간은 구원을 얻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이름은 오직 하나뿐인데 그리스도는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 수천 년 전에도 수천 년 후에 그런 것처럼 구세주이셨다. 그는 “창세 전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셨다. 다른 구주가 있은 적이 없었다.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한 구주가 나셨다. 그는 언제나 구주이셨으나 이제 적절한 때(in time)에 나타나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shall save)자”(마 1:21)라는 말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다. 성육신의 관점에서 구원은 미래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중보자이셨으나 대제사장으로서 실제적이고 공식적으로 취임한 것은 적당한 때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승천 후에 있은 취임식 때까지는 제사장으로서 공식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갈바리에서 그는 생명을 버렸다. 제물은 죽임을 당하였고 피는 흘려진바 되었다. 이제 그는 드릴 제물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으로 소개하셨고 인정하셨다. 그의 탄생이 실제였듯이 죽음도 실제였고 그의 피 역시 실제였고 그의 봉사 또한 실제이였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보의 사업은 적절한 때 분명한 현시(顯示)와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갈바리에서 흘리신 피는 실제적이지만 그 봉사는 실제적이 아니라는 주장과 지상 생애 동안 “자비하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기에 적합한 준비를 하셨다고 믿으면서 그 준비 시간 동안의 실제적인 봉사는 부인한다면 모순되는 이론처럼 보인다. 만일 하늘에서 실제적 봉사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실제적 죽음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피와 속죄의 두 실제성을 부정하는 비평가들의 주장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모형과 그림자
 지상에서의 봉사와 하늘에서의 봉사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땅에 것은 하늘의 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때로 그 실체보다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며 섬세하지 못하다. 그림자로 부터 지나치게 많은 추리를 해내는 것은 위험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윤곽은 분간할 수 있으며 또 그림자는 선명한 사상을 던져 줄 수 있다.

 모형(Example)은 그림자보다 약간 더 한정적이다. “그림자는” 성소와 그 두 방들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하여 독특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모형”은 성소 봉사에 관하여 적절히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형들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상징적인 것이므로 전체적인 봉사와 의식의 정확한 의미를 둘 수 있다.

 지상에서의 봉사와 하늘에서의 봉사 사이엔 아무런 유사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기별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행하고 계시는 중요한 사역에 협력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성소에 사용된 작은 자료들 즉 널판지, 못 등까지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해석을 받아 드리지 않는 자들을 무조건 비방하는 자들도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모형”“그림자”는 지상의 성소를 설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하나님의 용어이다.
히 8:6-13 (8:6-13)
 이 부분에서는 언약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약에는 헬라어로 언약(covenant) 이란 말이 33번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를 21번은 “언약”(covenant)으로, 12번을 “약속”(testament)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근본 의미는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의미가 “covenant” 또는 “testament”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문장의 내용에 따라 적절한 것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직분은 지상의 아론의 제사장 직분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인데 이유는 그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옛 언약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결점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용어들을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 쪽에 있던 것이다. 그들은 계속하여 언약에 머물지를 못했다. 만약 인류가 계속적으로 언약에 머물렀다면 그것은 훌륭한 언약이었을 것이며 두번째 언약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가 실패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실수를 인정하셔야만 하셨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그들이 범한 율법을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쓰셨으며 그들이 가까이 나아올수 있도록 용서에 의하여 그들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제정하셨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더 아름다운 직분
 마치 실체가 그림자 보다 더 완전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직분은 그 모형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었다. 더 좋은 약속위에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신약에서의 중보자는 구약의 “판결자”와 같은 것이다(욥 9:33). 판결자는(判決者) 자신에게 제소된 사건에 대하여 듣고 결정을 내리며 주장과 증거가 다른 당사자들을 합의에 이르도록 시도할 날을 택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 미국개역성경에는 “관계자들 사이의 논쟁과 문제에 대하여 독자적 결정권이 위탁된 사람”이라고 정의된 “심판자”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욥은 그와 같은 판결자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손을 얹으시며’, 함께 이끄시며 정의와 평화를 확립하시는 분으로 기대하였다.

 중보자는 논쟁하는 당사자들 각각의 권리와 주장하는 바를 이 해하여야 하며 저들로부터 그 자신이 맡은 바 일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는 양편 모두에게 편견없이 공정하며 편중되지 않아야 한다.

 신약에는 ‘중보자’라는 단어가 6회 나오는데 그중 4차례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판결자이시며, 양편 모두에게 그의 손을 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대하여, 그는 하나님을 이해하시며 하나님을 위해 변호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인간에 대하여, 그분은 인간을 이해하시며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오직 신—인(God-man) 만이 판결자가 되실 수 있으시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 양편 모두를 이해하신다. “더 좋은 언약”, “더 좋은 약속”,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더 좋은”이라는 단어는 최초의 언약은 두번째 것만큼 좋지 않았으며 불완전하고 바꾸어져야할 필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어떤 측면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더 좋은가 하는 질문이 일어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위에서 성립되 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시 질문이 일어난다. 누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좋은 약속인가? 하나님에 의해서인가? 인간에 의해서 인가? 아니면 둘 다에 의해서인가? 여기에 대하여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 첫 언약
 “저 첫 언약”은 무흠(無次)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흠이 없었더라면 두번째 약속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불완전하고 바뀌어져야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을까? 첫번째 약속을 생략하고 더 좋은 약속만을 세우시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언약’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약 300회 나온다. 그 히브리어 단어는 berith이다.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창 15:17렘 34:18, 19에 나타난 바대로, 희생제물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는 고대의 관습을 나타내는 ‘자르다’로부터 온 것 같다.

 데이빗슨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bond(결합)’라는 단어는 어떤 다른 단어보다도 berith의 다양한 용도를 표현하는데 더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두 전체가 상호 자신들을 결속시키는 데 뿐만 아니라 한 단체가 상대방에게 계약을 강요하거나 또는 한 단체가 그 스스로 임무를 떠맡는 데 에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제임스 하스팅, 성서 사전, 1권, 509, 510: “언약”)

 언약이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간의 협정이라는 정의는 그것을 동등한 관계에 적용하는 한 옳으며, 거기에서 언약은 상호 의무를 지우며 피차에 구속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되는 곳에서 언약은 창조주에 의해 이루어진 약속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피조물에 의해 수행될 조건들과 그조건들을 수행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적적한 형벌로 연결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 만이 항상 언약을 제안하시고 그 조건을 결정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오직 두 개의 조건만을 제시한다. 즉 완전한 순종 또는 믿음이다. 영원전부터 존재하는 생명의 언약은 완전한 순종에 의존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제공된 것이 바로 이 언약이었다. 아담안에서 세상은 그 집행 유예를 가졌었다. 아담이 실패하였을 때, 세상은 실패하였다. 그는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인류는 그의 안에 숨기워진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아담의 위치와 의무를 지셨으며 불충한 언약을 충족시키셨다. 이리하여 그는 인류의 새로운 주인이 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간의 대표자로 취급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은 회복되었다. 이제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만족스런 관계로 인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임무가 되었다. 그분의 나타나심에 의하여 그분은 스스로 굴욕을 당하심—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며 그분께서는 인간에 대한 두번째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인간은 법을 지킬수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업이다. 이것은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를 입어야 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오빌의 금보다 더 귀하게 하시기로 약정하셨으며, 그는 그의 사업이 마쳐 지도록 계속노력하시고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한 백성을 가지고 계시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용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지을 경향을 지녔으며 계속하여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용서는 은혜의 언약의 구성 요소가 되며,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약속에 기초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이 은혜의 언약은 그리스도와 죄인 사이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인간과 함께 일하시기를 계속하신다. 이 일이 완성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셨던 원래의 언약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표하시게 되는 권리를 얻으셨던 그같은 언약을 만족시키는 존재로 나타내실 것이다. 언약에 대한 더 깊은 연구는 이 장의 끝의 ‘언약’이란 부분을 참고하라.
히브리서 8: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브리서 8: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에서 우리는 첫 언약의 약점이 율법 그 자체에 있던 것이 아니며, 더더구나 결점이 하나님께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저들이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저들이 지키기로한 약속을 시작은 잘했으나 저들은 곧 잊어버리고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였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저들을 완전히 끊어 내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더좋은 약속위에 성립된 새 언약을 저희들과 맺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약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저지르고 언약을 파기했으므로 그들이 지킬 어떤 새롭고 더 좋은 언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새 언약은 그들의 첫 언약 보다 더 확실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다시 한번 약속해야 했으나 그 언약을 다시는 파기하지 않겠다는 보증이 없었다. 그 들은 누군가가 와서 그들을 구하거나 그들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보증인이 필요했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만 언약은 이루어지며 더 좋은 약속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언약을 더 좋은 약속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의 의미는 인간이 만들고 파기하는 언약보다 더 좋다는 것을 말함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위치에 서심으로, 또 인간을 위해 약속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할 것을 아시면서 왜 언약을 맺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신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들에게 그러한 시도의 특권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기회도 주지 않았다는 주장을 했을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다면 충분히 해 낼 수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 기회도 주지 않으셨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지킬 수 있는지의 기회를 허락하셔야 했다. 그들을 만족시킬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언약을 지킬 수 없음이 용서를 얻을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포함되지 않은 협정의 사실로 명백해졌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즉시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성소에 대한 지시를 하셨다. 성소의 모든 봉사는 용서에 대한 교훈으로 가득차 있다. 백성들은 언약 속에 용서에 대하여 한 마디의 말도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그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거절했고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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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는 금송아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추는 백성들 앞에 희생제도에 관한 세부적인 준비를 마련하셨다. 40일의 마지막 날에 그는 성소에 관한 모든 지침을 완성하였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지침은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것으로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 숭배하는 백성의 공식 문서(official note)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그들이 참여하고자 하는 언약은 실패에 관한 아무런 해결책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출 23:20, 21). 그러나 이 경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들이 그들의 몫을 다 이행할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출 19: 8:24: 3,7). 그러나 하나님은 잘 아셨고 하나의 계획을 수립하셨는데 그것을 통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찰이야 말로 옛 언약은 새 언약처럼 죄의 용서에 대한 방법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 편의 잘못이 아님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원하셨지만 백성이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들에게 그 필요를 느끼도록 유도하시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으셨다. 그들이 약속한 것을 그들 스스로가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위로부터의 도움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부가적 설명—언약들
 그의 창조 당시에 아담은 순종이라는 조건하에서 생명을 약속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그에게 전달되었다. “여호와 하 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 17).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셨을 때 천연계는 균형을 이루었다. 모든 피조물, 모든 동물과 물고기, 모든식물, 모든 꽃과 관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그 생명의 존재를 주관하는 생명의 법칙에 단지 순응할 때에만 생명을 가질 수 있었고 가졌었다. 물고기들은 그들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근본요소로써 물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본래적인 습관을 떠나서 뭍에서 생명을 계속 유지토록 시도한다면 그들은 죽을 것이다. 식물들은 흙에 뿌리를 뻗는다. 생명의 법칙은 그렇게 그들이 남아 있도록 요구한다. 동물들은 들판에서 돌아다니도록 창조 되었으며, 만일 그들이 물고기처럼 살고 또는 새처럼 날도록 어떤 시도를 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개개 피조물이 그의 적당한 장소를 가지고, 법이 지배하고, 생명의 법칙에 순응하는 조건하에서 모든 것이 생명을 갖는 질서정연한 세계를 발견했다. 그러한 세계 위에 그는 지배자로서 군림했다. 모든 창조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생명은 생명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조건하에서 부여되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다른 피조물들이 음식물을 부여받은 것처럼 그의 음식물을 부여받았고 보편적인 창조의 계획하에서 그의 행동 분야와 장소가 그에게 지정되었다. 그는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되어있었고, 그는 땅을 정복하게 되어 있었고, 모든 생물 위에 통치권을 가지도록 돼 있었다(창 1: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한 아담과 땅의 창조물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아담은 지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다른 창조물보다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한다. 동물들은 어떠한 의지적인 행동으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하나님과 자연의 법칙에 복종한다. 그들의 순종에 첨부된 아무런 도덕적 가치는 없었다. 그와 반대로 아담은 물론 결과에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할 존재로서 항상 그는 그렇게 선택 할 수도,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명령을 거절할 수도 있 었다.

 아담이 복종하려는지 아니면 자신의 길로 갈 것인지의 의도를 나타내는 어떤 시험 장치를 고안하는 것은 하나님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었다.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생명의 법칙을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를 알기 위하여 평가를 받을 때까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에게 독립된 특권과 그에게 무조건적인 생을 부여한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천연계는, 법칙하에 있고, 모든 피조물은 법칙에 복종한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복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확실히 밝혀져야 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명령은 아담이 단지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명령은 단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의 의지를 결정하는 시험이다.

 하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신학” 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아담이 하나님을 기꺼이 복종하느냐 안하느냐를 결정하는 외적이고 확실한 시험으로 그것이 단순히 부여되었다. 그리고 순수한 애정을 가진 거룩한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에 아담의 순종에 관한 시험은 외적이고 확실한 명령이라는 것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다; 나무의 본성 자체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금지된 것을 행함으로써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복종 그 자체를 위해서 아담이 복종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순종은 그 자신의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더 직접적이었다”(제 2권, p. 119)

 하지(A.A.Hodge)는 이것에 대해 말하기를, “금지된 과일을 먹는 것을 삼가라는 명령은 일반적으로 순종이라는 것에 관한 단지 한 특별하고 결정적인 시험에 불과한 것이다. 금해진 그 일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명령은 하나님의 그러한 절대적인 의지에 대한 복종을 시험하는 명백하고 뚜렷한 것으로 받아 들여 졌다”(Outline of Theology, pp. 230, 231).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시험을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명확한 명령이다. 그것은 적극적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의 유일한 배경은 “Thus Saith the Lord”(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기 때문이다. 적극적 명령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도 아니고, 그것 자신의 본성이 악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금했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창조하셨다. 죄악이 그러한 것처럼 나무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나무를 선택하시고 그것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면 시험은 똑같이 주어졌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그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를 둔 하나의 단정적인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자신의 이성을 팽개치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것보다 훨씬 고귀한 정신과 권위를 인식해야 한다.


 생명의 언약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창조시에 하나님의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의 판에 그의 법률을 쓰신 것처럼 우리들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쓰셨다. 그들의 모든 감정, 생각 언어와 행동들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완전히 일치하였다. 그들이 생애의 원칙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였던 것은 뱀에 대한 하와의 대답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그녀는 그들이 행하였거나 행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 3)

 이러한 대답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명령을 어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과를 먹으라는 사단의 꼬임을 받 아들이는데 있어서 그녀의 망설임은 그녀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조건들은 그것들 자체 속에 언약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은 자연의 언약, 합법적인 언약, 행위의 언약, 생명의 언약이라고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다. 그것들은 단순히 생명의 법칙이다. 그것들은 영원한 행복과 생명을 가져올 수 있었던 생명의 법칙과 일치하였고 그 법칙을 범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언약을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고 언급하였는데, Hitzig, Pusey, Keil, Wunsche 같은 사람들은 아주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흠정역 성경과 개역 성서의 난외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인류 시조에게 주어진 시험은 아주 가벼운 있을 법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 가벼운 것이었기 때문에 범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상상력을 비약하지 않고도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지가 아무런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선악과 나무만 제외하고 모든 나무에 금지령이 내렸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그들의 범죄에 용서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죄는 고의적이었다.

 아담의 타락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즉시 죽게 하실 수가 있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한 쌍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실패를 인정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교훈을 배웠을 것이며, 다시는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쉽게 그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것에는 다른 중요성이 내포되었다. 만약 다른 시험이 주어지고, 그들이 다시 실패하면, 그들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다른 더 많은 끊임없는 시련이 그치지 않았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것이 끝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가장 적은 탈선에도 죽음이 이르러온다는 교훈을 배웠을 것인가? 그들이 이것을 배우지 않는 한 안전은 이 세계 혹은 이 우주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용서하실 수 있으셨으나, 그 문제 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또한 죄의 삯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범죄 때문에 독단적으로 죽음을 선포하시지 않으시고, 죄 그 자체 속에 죽음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필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의 회복을 위해서 계획하는 죄를 다시 짓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신다. 영원부터 마련된 그 계획은 지금까지 실시되어져 왔는데, 그것은 그를 상실한 신분으로부터 구하고, 그에게 죄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복귀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것을 논하기 전에 언약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언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선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언약의 정의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언약은 조건이 서로 같아야하며, 서로 책임을 져야하며, 서로 의무가 같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계약인 것이다.

 “종주 언약” 혹은 명령적 언약이라고 부르는 언약은 정부와 국민 사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 같이 동등치 않은 사이의 언약으로 본질이 다른 언약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조건을 수행하는 법률이나 약속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웹스터 사전에 신학적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보통 인간이 수행하는 조건이 따르는 것”으로 언약을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주에 의해 부과된 언약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 창조주(하나님) 편에서의 약속

  2. 특별한(상세한) 규칙에 대하여 순종을 조건으로 한 약속들

  3. 규칙의 위반에 대해 가해지는 형벌

 그 계약의 내용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동등할 경우에는 당사자들은 언약에 기초된 줄어들에 대해 의논하고 합의를 하게 된다. 반대로 명령으로 주어진 언약에서는 아무런 흥정(계약)이 없다. 윗사람들은 단순히 조건들을 말하고, 아랫 사람들(것들)은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한 국가의 시민이 되기 원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수 있다. 그가 국민이 되고자 원하는 나라의 법률을 즐거이 존경하고 명예롭게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리고 그 국가의 법률을 순종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계약에서 명시된 것처럼 그 정부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아무런 홍정이 없는 것이다. 정부는 법을 부과하고 그 사람은 거기에 기꺼이 따른다.

 이미 어느 국가에 태어난 이는 형식적으로 제도와 법률에 따르겠다고 서명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렇게 선언한 것처럼 이들을 지키기 위해 엄숙한 언약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태어난 당시의 법률뿐 아니라 그 이후에 제정되어지는 모든 법률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군주 정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법을 제정하는 일에는 참가할 수 없겠으나 그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엄숙한 의무를 갖는다. 그의 출생이 언약의 조문들을 따르도록 하기도 하면 반역이 일어났을 때 혹은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는 그는 아마도 그의 순종을 재서 약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과 마찬가지로 그가 서약을 하기전에 이미 순종의 의무를 갖는다. 한 국가에 계속적으로 주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서약된 계약을 지키겠다는 것과 같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을 때 그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제정하셨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 4:12, 13).

 십계명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 또는 지시된 언약으로 불리었다. 또 다른 그러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 세우셨다(신 29:1). 이것은 또한 명령된 언약이고 이러한 규정을 포함한다. “내가 이 언약과 맹서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신 29:14, 15).

 이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제정되었고, 그리고 또한 “오늘 우리와 여기에 함께 서있는 그,” 즉 언약으로 들어갈 의사가 아마도 없는 이방인에게 제정되었다. 그 언약이 제정될 때 존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 여기에 함께 있지 않는 그에게까지” 만들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명령으로 주어진 언약은 그 때에 있었거나 간에 모두에게 순종되어야 하는 일반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한 법을 단순히 천명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십계명은 우주적인 의무로 명령되어진 언약이다. 또 다른 혹은 좀더 제한된 의미로서는 그 계명들은 이스라엘과 성립된 특정한 언약에 그 기초들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은 그 언약에 있고 또한 그 언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웹스터의 위에 인용한 용어 해석에 의하면 신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언약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간이 지켜야할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조건들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에 첨부되어진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실 때 한 언약에는 어떤 조건들을 거기에 부가시킨다.

 이와같이 순종의 조건에 관한 생명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아담에 대한 약속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언약이었던 것이었다. 하늘의 회의에서 결정된 하나님의 조건들은 “순종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불순종하면 멸망하리라”였다. 이러한 조건들은 하나님 자신이 변질될 수 없는 것처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명의 기초석들이며 인위적 계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살 수 없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이와같이 인간은 그의 존재와 생명의 법칙들을 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들, 생명의 법칙들을 인위적인 규제로서가 아니라 어길 수 없는 존재의 조건들로서 그것을 금한다.


 하나님의 계획

 영원하시며 무한하시고 불변하시고 그리고 전지 전능한 하나님 께서는 모든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보시고 계획을 수립하셨다. 루스벨의 반역과 인간의 타락의 결과를 아시므로 그의 구원의 관점에서 세상을 창조했다. 그의 창조물과 그자신에게 영원한 결과를 초래할 매우 중요한 사업인 창조의 사업을 시작함에 있어서 발생할 문제를 대처할 준비를 세우지 않고 그의 원수의 도전을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 답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사업의 경영 방법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해야 하므로 그 결과는 그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공의는 물론 그들에게 제공된 생명의 법칙을 거절하는 피조물들의 동의까지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사고할 줄 아는 존재를 창조하기로 결심하신 데는 그 창조물뿐 아니라 창조주 자신께도 중대한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창조에 관한 결정에는 성육신과 고통,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창조의 심오한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자신과 다른이와 더불어 생명을 공유키를 원하시는 것이 배경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도 또한 살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요 14:19).

 하나님은 창조란 것이 당신의 아들의 생명의 값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창조의 결정이 삼위,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협의된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선지자가 “가지”의 비유에 대해 말할때 이 회의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이라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론이 있으리라”(이사야 6:12, 13). 어떤 사람들은 이 예언이 여호수아의 머리에 관을 씌우는 것으로 지엽적인 성취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나 이러한 지엽적인 성취가 예언을 이룬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언급해진 그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즉 그는 그의 보좌위에서 다스리시며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을 것이다. 그는 “영광도 얻고” 그리고 “평화와 협의가 그 둘 중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영원한 회의라는 것으로 해석할 때 그것의 완전한 해석을 발견한다. 그 회의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도록 결정되었으며 그 보좌는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의 건물인 것이다.


 영원한 언약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존재해 온 것은 성경과 논거로서 명백한 것이다. 다음의 문제들을 고려해 보자.

 예정된 계획의 성취로 생각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의 그의 생애와 봉사를 당신이 동의하시고 시편 40:7에서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초림을 선포하셨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이 초림은 완전히 그리스도 자신의 소망과 일치되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여전히 강력한 말씀으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라고 표현하셨다(시 40:7; 요 4:34).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어졌다. 이렇게 그는 자주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요 12:4; 6:4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1:42). “사람들이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 15:21).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요 17:3) 예수의 초림의 때는 또한 예정되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그리스도께서는 초림으로 이 땅에서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달성하는 사실을 깨달았고 성실하게 그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수행했다. 그의 신성에 대한 지각있는 인식으로 어렸을 때에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만 한다고 알았다(눅 2:49). 그는 진정한 마음으로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 8:29).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행했던 그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계획을 가르쳐 주고 일을 주사 이루게 하실 뿐 아니라 그 계획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그를 도와주셨다.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요 14:31).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해야 하리라”(요 9:4).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요 5:36).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로 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들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요 12:49)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아버지가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요 8:28, 26). 예수께서 가르쳤던 교훈에 대해서조차 그는 말할 수 있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예수께서 이 지상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요 17:4).

 이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요한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는” 부분이다(요한일서 4:10).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그의 사업을 마칠 때 쯤에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특수한 요청을 말하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 17:24). 이것은 평상시의 기도가 아니다. 실로 그것은 기도라 기보다는 요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다.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지금 그는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는 바랍니다”(I will) 라고 선언하신다. 그는 호의를 바라시지 않으시며 그는 승리의 보상을 요구하시고 있다. 그의 대제사장이 드리는 것과 같은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되풀이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왔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6, 9, 11, 12, 24). 그는 이것들을 주장한다. “그들은 당신의 말을 지켜왔습니다.” 그들이 조건을 달성함으로써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그는 그들이 그에게 드려지고 그와 함께 있을 것을 요구한다(사 13:12). 앞의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업을 행하시기로 동의를 나타내셨고 그 조건들을 충족시킨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땅에서 주의 초림의 목적이 인간의 구속 사업이었으므로, 그가 수행하도록 그에게 주어진 그 사업을 마친 것을 선포함으로서, 그리고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주어졌던 사람들을 요청하심으로 우리는 명시된 언약의 요소들을 발견한다. 즉, 다른 성경 구절로부터 믿어온 바 바로 그것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은 바로 그 본질에 있어서 영원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언약은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져야만 했던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천사를 만드시고 죄의 결과에 따른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음을 아시고 그들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는 두번째 시험의 기회를 주셨다. 제공된 자 비까지도 거절하는 존재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로부터 죄의 근본적인 말살을 위한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쪽의 근시안적 면을 드러내거나 그분의 균형진 능력에 결핍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자비로운 아버지요 친절한 분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신 분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는데 불과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하나님께서는 하잘것 없는 것이었으며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아버지의 본질의 주장에 대해 의심을 자아내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같은 이유들이 창조가 하나님과 인간의 구속을 위해 모든 준비를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 완전한 계획이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완결되었음에 틀림없다고 밝힌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구속의 계획은 계약 당사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빛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그들의 화합에 있어서 신성을 나타내시고 그 아들은 그들의 대리자요 보증인으로 그를 선출했던 사람들을 대표하셨다.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진 조건들의 성취를 약속하셨고 보증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약속하시고 보증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가 보증을 서시고, 그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킨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인간에 관한 언약의 관리는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조건을 성실히 이행함에 있어서 보증인이 되신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업을 끝내셨을 때 그는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어 왔나이다”라고 증명하셨다. 그는 “굉장한 기쁨으로 그의 영광스런 임재 앞에 흠없이” 그들을 받아 주시도록 소개 하였다(요 17:6; 유 22).

 그 언약을 성취하는 것은 이런 지혜 위에 있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기를 실패하고 삶에 대한 그의 권리를 상실하자마자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리를 취하셨고 아담의 보증이 되셨으며 그것에 의해 즉각적인 죽음에서 그를 구하고 그에게의 또 다른 길을 보여주셨다. 두번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성의 우두머리가 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인간의 대표자로 취급하셨다. 하여간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가 진실로 인간이 되고, 모든 면에서 인간의 입장을 취하시고 오직 인간의 죄 때문에 그 자신이 벌 받아야 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는 조건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한 것과 같은 테스트와 심판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고, 엄격한 복종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복종함이 가능하다는 것과 이와같이 아담의 불명예스런 실패를 대속한다는 것을 나타내신다. 당신이 순종하시므로 예수는 하나님을 공의롭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이행할 수 없다는 사단의 주장을 논박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에 의하여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인간을 또 한 고무시킨다.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사이에 그 계약은 바로 구속의 언약이라 불리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준비는 인간의 구속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번째 아담에 대한 두번째 아담의 대체였고 그는 인간에 의해 초래된 모든 책임을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보증에 의하여 인간이 순종으로 돌아섬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불멸을 위한 적합한 후보자로서 인간을 흠도 점도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진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형벌을 잠시 금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을 회복할 시간을 주셨다. 즉 인간에게 인간의 죄를 계산할 시간이 아니라 유예의 시간을 주었고 하늘과 땅에서의 모든 권력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예수를 준비된 언약의 완전한 통수권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표자로 취급하시므로 하나님은 그 리스도와 거래하시고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리스도와 홍정을 하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오가며 중보자, 중개인 또는 매개자가 되신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떠한 요구도 예수그리스도만을 통해 상달되어진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의 교신이 우리에게 다다를 수 있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요. 보증이시다.


 은혜의 언약

 어떤 사람들은 은혜의 언약을 구속의 언약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설명을 하자면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좋다. 은혜의 언약은 인류와 연관된 것으로 구속의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도권의 실재에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속의 언약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사 13:12) 할 것을 약속하셨다. 은혜의 언약은 사람으로 더 높은 표준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도록 미리 준비시켜 준다. 그것은 단지 인류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입장으로 인도하며 거기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고자 하는 시험을 견디게 하며 승리자로서의 상을 얻게 만든다.

 이러한 사업에는 두가지 특수한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죄의 용서로 이를 통하여 과거의 허물을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만약 인류가 그의 모든 죄를 뽑아 버릴 수 있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그가 거듭나고 그의 심령과 행위가 변화되고 또 완전히 새로 창조함을 받아 그의 옛 사람이 죽고 장사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갖고, 모든 과거의 것들이 지나가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면, 다른 말로 말해서 그가 단순히 죽고 새로 태어 난다면 그는 과거의 불리한 조건 없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 계단 중의 첫번째 것으로 회개와 중생을 얻고 이를 통하여 위에 언급된 모든 새로남의 경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타고날 때부터 짊어진 모든 허물을 벗기고 아무런 죄가 없는 아담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새로난 사람에게 요구되는 사업을 위한 능력을 얻는 것이다. 그는 아담이 필요했던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능력 면에서 아담의 그것보다 훨씬 뒤져 있고 위로부터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해 주시야만 되기 때문이다. 아담보다 연약할 뿐 아니라 유혹은 더욱 강하여 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도 거기서 났”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시 87:4; 롬 5:20) 치도록 하실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은 아담이 가졌던 동일한 기회를 갖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요구받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의 법을 어기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죄 가운데 출생한 사람은 거기에 대한 책임이 없이 그의 무능이 일소되고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첫째 인간에 주어 졌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공평함이 요구된다. 이것은 자비라고 말하기 보다는 공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요한은 언급했다(요일 1:9).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므로 유전된 죄와 연약성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전가시키지도 않으시므로 하나님에겐 공의로우심이 있는 것이다. 죄의 면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뿐 아니라 그의 의로우심까지 볼 수 있다고 바울은 기술하고 있다(롬 3:25, 26; 히 6:10).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취급하심에 있어서 선악간 공의에서 머리털 만큼도 빗나가시지 않으시며 그의 자비를 의인에게 한정하시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인간이 하나님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그 분으로부터 떠나 죄로 돌이킬 때만 그 분께서는 마지못해 그 악행에 대한 열매를 거두도록 허락하신다.

 인류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범죄자에게 선언하셨던 사형 선고를 변경하시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중재 때문에 그 분께서는 그 집행을 유보하셨다. 아담과 전 인류에게 허락된 이 유보를 우리는 유예 기간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은 은혜로 전 인류에게 한결같이 허락된, 사물을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인간에게 제공하는 은혜의 기간이다. 인간이 죄를 버렸다는 것을 회개와 하나님께 향한 분명한 방향 전환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한 결국 사형 선고는 집행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의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공의와 상충되지 않는다. 사람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그는 마침 내 죽음에 직면하게 되지만 의인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사망은 그가 다시 영생으로 일어나는 수면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집행 유예란 인류에게 비록 그들이 생명의 법을 범했지만 계속적인 삶을 제공하려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허락된 은혜의 날인데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돌리지 않고 그들을 다시 순종으로 이끌기 위해 사랑으로 호소하신다. 그것은 유보된 선고의 기간이요 집행 유예 기간이다. 그러나 법적인 의미에서만 그렇다.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이 회개하도록 애원하시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충성된 자들에 주실 한 가닥 기쁨을 그들에게 보이시며 한편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다면 그들의 것이 될 손실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등 바쁜 활동의 시기이다. 은혜의 언약하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은 죄인을 취하셔서 그들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끝없는 친절로써 그분은 약한자를 도와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필요하다면 인간이 드디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의 힘을 붙잡고 새로운 생활을 할 때까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각자의 힘에 맞게 시험을 허락하시고 인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인간이 한 시험을 지나서 자기 자신은 물론 다소간 힘을 얻으면 그 분께서는 인간이 특정한 필요에 조심스럽게 측정된 또 다른 시험을 주셔서 드디어 죄를 짓기보다는 죽음이라도 택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다다른다. 인간이 이러한 결정에 다다를 때 그 사업은 마쳐지고 시련은 끝이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준비되어 성화되는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무한한 기쁨으로 하나님 존전에 인간을 드리게 될 것이며 사단은 실패했고 하나님께서 옹호를 받으시며 그 영혼은 구원을 받게 된다.

 여러가지 오해의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은혜의 언약의 목적은 단순히 죄의 용서가 아니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위치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임을 강조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는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요구를 변개치 않으시며, 자기 모순과 인간 차별의 비난을 겪으려는 모험 없이는 변개하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서도 변개시켜서도 안 되며, 인간 자신을 위해서도 변개 시켜서는 안된다. 지금에 와서 아담에게 하셨던 것보다 덜 요구하신다면 재난을 초래할 일이며, 그 당시에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면 오늘날로 완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요약

 생명의 언약: 이는 생명의 일반적인 습관이나 법칙을 의미하며, 이 법칙 아래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영위한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생명체 곧 식물이나 꽃, 나무, 곤충, 동물, 새 혹은 물고기들은 저들의 독특한 삶이나 죽음의 조건에 순응해야 한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천사들과 기타 그 외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적인 생명체들은 저들을 지배하는 생명의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이 법칙들의 순전한 특성은 이 법칙들에 대한 엄격한 순종에 달려 있다. 모든 규칙에 따라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조문이 기록되어 있다. 불순종의 결말은 저들의 본질에 대한 형벌이 아니요 범죄의 결과라든지 죄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죄의 댓가이다. 독을 마시는 자는 생명의 법칙을 범함으로 그 종국을 겪는다. 형벌은 본래 그 행위 자체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법칙은 자연의 언약 혹은 자연적인 언약, 법적인 언약, 행위의 언 약등 다양하게 일컬어진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명의 법칙에 의하여 모든 것이 존재하며 모든 만상은 이 법칙을 좇아야 한다. 이 법칙은 격식을 갖춘 언약이 아니라 모든 자연계는 생물이든 무생물 이든 이에 순복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밤과 낮의 약정을 세우셨으며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워 하나님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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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든 생물 사이에 영원한 언약의 표로써 무지개를 주셨다(렘 33:20, 25; 창 9:9-17).

 이 법칙이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일반적이며 포괄적이고, 이 법칙에 의하여 순종의 조건 위에 생명이 약속되기에 생명의 언약이라 부른다.

 구속의 언약: 구속의 언약은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엄숙한 계약을 맺으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 언약에는 성육신과 고난과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위치를 취하실 것이며 둘째 아담으로서 모든 인간의 책임을 완수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人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는 모든 자들을 받아주시고, 저들을 위하여 보증이 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인간을 정금보다 더욱 귀하게 하시며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지으시며 마침내 하나 님의 보좌앞에 흠없이 세우실 것을 보장하신다.

 이 언약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대표하시며, 하나님과 인간—인간 예수 그리스도—사이에 맺어진 이 언약은 결렬될 수 없는 약속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인간에 대해서 이 언약의 이행은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된다.

 은혜의 언약: 이 언약은 구속의 언약의 이행에 관계되는 것이며, 은혜의 언약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속하실 것이며, 저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회복시킬 것이다. 이 언악은 그리스도와 타락한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그 지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결점을 용서하시며 의롭게 살고자하는 저들의 욕망을 굳세게 하도록 저들을 도우신다.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비록 밀접하게 연결되긴 했지만 두 가지 분명한 부분 곧 죄의 용서와 성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심령 가운데 행하시던 봉사를 마치실 때, 당신의 봉사를 아버지 앞에 제시하실 것이다. 각자 자신을 위하여 시험을 견뎌야 하며, 시험을 견디는 자들은—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중보가 되시고 보증이 되신 모든 자들을 포함해서—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인간이 타락한 후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인간과 맺어졌다. 달리 방법이 없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고대의 모든 성도들과 맺으셨던 것과 똑 같은 언약이다.

 이 언약은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다가올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인간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구속의 언약의 이행에 불과하다. 이 언약은 인간을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있던 위치로 회복시켜주며, 인간은 생명의 언약의 은혜에 들어가며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전에 시험을 견뎌야만 한다. 이 시험이 마지막 시험이며, 이를 위하여 은혜의 언약이 그를 준비시킨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세워졌다. 인간은 저희가 자신의 의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린 예가 없었다. 예수께서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던 두 제자들에게, 그 지위에 합당한 댓가를 치를 수 있겠는가 물으셨을 때, 저들은 즉시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마 20:22). 요구되는 합당한 능력을 행함에 있어 저들은 마음 가운데 조그마한 의심조차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젊은 청년에게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즉시 대답하였다.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 그의 마음 가운데는 자신이 그 계명들을 지키었을뿐만 아니라 항상 그대로 행한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한 것으로 그는 생각하였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는 말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보이는 표현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조건으로 율법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요구하셨을 때, 저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 고 대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대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셔야 할지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는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 앞에서 전연 무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당신께 의지하는 교훈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저들은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돕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셨으며, 저들이 전적으로 무력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깨닫기 원하셨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한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저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백성들이 언약의 조항들을 매우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공공연히 율법인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이다. 저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한계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다시 한번 확실히 하기 위하여 저들의 상황에 맞도록 십계명의 원칙에 대한 세부적인 적용을 나타내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저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정확하게 알게 하셨다(출 20:22-23:33). 이러한 판단과 신분을 설명하는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 이 그에게 있음이니라”(출 23:20, 21)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심장한 말씀은 저들을 잠시 멈추게 했어야만 했었다. 저들은 아직도 경고를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던가? 아직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느꼈는가?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실패할 것을 아셨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 그들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셨거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씀하시거나, 혹은 저들이 행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특권을 주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정당한 기회가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이를 증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경험해 보도록 내버려 두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셨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대로 실패였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의 죄와 실패에 따른 실망의 경험을 받도록 하시었다. 저들이 금송아지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당신의 방법을 보다 완전하게 가르치실 성막을 짓도록 모세에게 일러주고 계셨다. 저들은 죄악의 가증스러움과 가장 작은 죄라도 죽음을 의미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용서의 필요성을 더욱 알아야 했다. 지상의 제사장으로 예표된 하늘 중보자의 필요성에 대한 생생한 이해가 필요했다.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알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성소 봉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예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고 있는 짓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을 때, 모세는 대노하였다.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두개의 돌판을 땅에 내던져 조각을 내었다. 금송아지는 가루를 내어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헌신을 촉구하였으나 범죄한 자들은 응답하지 아니하고, 복종하기를 굳게 거절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에 모세는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 32)라고 간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엄숙하게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히 8: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백성을 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제안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중재하여 하나님께 저들을 살려주실 것을 간청하였으며 응답을 받았다(출 32:11-14). 그러나 모세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고 잘라서 말씀하셨다.

 그리고나서 모세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택하신 땅으로 인도하라 명하시며, 당신께서 저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고 대신에 당신의 사자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가올 징벌에 대한 경고를 반복하셨다.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4절).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표시로 장막을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출 33: 7)였다.

 이 때에 모세는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절하셨으며, 그들은 언약을 어겼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셨다. 저들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저들을 당신의 백성이라 말씀하시는 대신에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출 32:7)고 말씀하셨다. 여하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답을 듣고 나왔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강한 손으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출 32:11).

 모세는 여행을 함에 있어서 한 천사만 함께 동행하는 데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수 그들과 함께 가시기를 원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내어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하나님께 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출 33:14)고 말씀하셨다. 이에 모세는 용기를 얻기는 했으나 만족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담대하게 “친히 가실” 뿐만 아니라 “함께 행하시”(출 33:16)기를 요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너의 말하는 이 일로 내가 하리”(출 33:17)라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모세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출 33:13)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의 특성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자비 또한 그러하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성의 측면인 공의를 보여주셨으나 모세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달라고 간구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 비와 인자를 강조하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나타내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할 기회가 되리 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서 모세는 실수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7).

 당신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여호와께 모세는 마지막 요청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한 천사를 보내시는 대신에 당신께서 친히 백성들과 함께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모세는 두 가지를 구하였다. 첫째로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출 34:9). 하나님께서는 진 밖에 따로 떨어져 계셨다(출 33:7). 모세는 이제 “우리 중에 행하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이 요청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 33:3)라고 말씀하셨을 때 한번 거절당하였다. 다른 요청은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출 34:9)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출 34:10) 로 대답하였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 중에 거하며 너희 죄악을 용서하는 것은 너희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이 언약에 대한 신실한 이행 여하에 나의 결정이 달려 있다”는 말과 같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혼자 올라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6주일 전에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70명의 장로들도 함께 올라오도록 부름을 받았었다(출 24:9).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으며 “그들을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출 24:10, 11)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모세 혼자 하나님을 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말씀하셨다. 주로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르라” 라는 일반적인 형태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다. 언약 맺기를 마치 실때 하나님께서는 “너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출 34:27)고 말씀하셨다.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산에 오르라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며, 언약을 맺는데 비준하거나 동의를 하도록 요청을 받지도 않았고, 모세만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였다. 언약이 모세와 마찬가지로 이 백성들과 맺어진 것이기에 비록 2차적인 의미를 지닌다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그 안에 한 부분이 되었다.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습이니라”

 이 언약은 출 19~24장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사자를 통한 언급이 있다.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출 23:21).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며, 모세를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로 은혜스럽게 받아주신다. 이 언약은 구약 성경 시대의 상황 아래 이뤄진 새 언약의 모든 모형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 가운데로 들어오시고, 모든 의식이 용서를 가리키는 성소 봉사가 시작되었으며, 대제사장으로 포상된 중보자가 세워졌으며,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 부정과 과실과 죄를 용서받는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모형이라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보자가 되실, 보다 나은 언약에 대한 예언적인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죄들이 진실로 사함을 받고 도말된다.

부가적 설명—언약에 관한 화잇 부인의 글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인간의 구원은 지대한 계획으로써, 신성의 모든 속성이 총동원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정복자 이상으로 만들어주시기로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고 오래 참으시며,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였다”(리뷰 앤드 헤럴드. 1903. 1. 27. p. 8).

 자비의 언약“인류의 구원은 하늘 회의의 주제가 되어왔다.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자비의 언약이 제정되었다. 이 언약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영원한 언약이라고 불리워졌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셨던 때가 결코 없었던 것처럼,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는 영원한 마음의 기쁨이 없었던 적은 결코 한 순간도 없다”(영문 시조,1901. 6.12. p. 371).

 은혜의 언약“성경이 두 가지 율법 곧 변함없고 영원한 율법과 잠정적이요, 임시적인 율법을 제시하는 것처럼 언약에도 두 가지가 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때에 은혜의 언약은 에덴에서 처음으로 사람과 맺으셨다. 이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하여 장래의 순종을 위한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저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부조들은 구원의 소망을 받았다”(부조와 선지자, 上권,489, 490).

 손을 굳게 잡으심“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은 인류가 사단에게 정복당하는 경우 그를 구속하실 언약을 함께 세우셨다. 저들은 손을 굳게 잡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보증인이 될 것이라는 엄숙한 서약을 하셨었다. 이 서약을 그리스도께서 성취시킨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다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그는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신 것이었다. 계약은 완전히 수행되었다. 아버지여 다이루었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의 뜻을 이루었나이다. 나는 구속 사업을 완성시켰습니다. 만일 당신의 공의가 충족되었다면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오」게 하옵소서”(요 19:30; 17:24)(시대의 소망, III권, 403, 404).

 사후적 고안이 아님“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안을 세운 사후적 고안(事後的考案)이 아니었다. 이 경륜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였다(롬 16:25).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람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로 말미암아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시었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하여 놓으시지는 아니하셨으나 그는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 사태를 위하여 대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심이 너무도 커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로 언약하셨던 바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시대의 소망, I권, 17).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풍성히 주신 은혜를 통하여 품성이 거룩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된 자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언약이 맺어졌다. 영원 전에 세워진 이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수백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어떠한 관심으로 인성을 쓰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이 저희들에게 주어진 제도를 쓸모있게 사용하였는지 보시기를 원하고 계시는가”(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403).

 아버지께서 사형 선고를 미루심“하나님의 아들은 타락한 인류를 동정하신다. 그는 아버지의 율법이 당신 자신처럼 불변임을 알고 계신다. 그는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피할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아셨다. 그는 당신 자신을 인간을 위한 제물로 아버지께 바쳐져 당신 위에 죄와 형벌을 지시고 저들 대신에 죽으심으로 저들을 구속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주시기로 동의하셨으며, 아들의 공로와 중보를 통하여 이처럼 자비스럽게 제공된 속죄를 즐겨 받아들이며 당신의 율법을 순종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회복시키며 다시 한번 당신의 은혜 가운데로 인류를 받아들이신 것을 약속하신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잠시 동안 사형 선고를 미루시고 그리스도에게 타락한 인류를 위탁하신다”(영적 선물, 3 권, 46, 47).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간청하심“당신의 강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취하시고, 자신을 인간 가족의 대표자로 취급해주시기를 만유의 통치자에게 간청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관심을 가지셨으며, 당신의 가슴에 죽음의 찔리심을 감당하시고, 인간의 죄와 운명을 취하셨으며, 인간의 입장에서 온전한 희생을 하나님께 바치셨다. 이 속죄의 공로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의와 충만한 구원을 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3. 4. 18. pp. 241, 242).

 당신의 봉사를 마치시는 그리스도“예수께서는 당신의 희생이 아버지께 가납되었다는 보증을 받기까지는 당신의 백성들이 드리는 경의를 거절하였다. 그는 하늘 궁정에 올라가서 하나님에게서 친히 사람들의 죄에 대한 당신의 속죄는 충분하고 당신의 피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는 보증의 말씀을 들으셨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인정하셔서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받으시며 당신의 아드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저들을 사랑하실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업을 완성하시고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사 13: 12)하신 그의 언약은 성취시켜야만 하였다. 하늘이나 땅의 모든 권세가 생명의 임금에게 주어졌으며 그는 당신의 권세와 영광을 나누어 주려고 죄의 세상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아오셨다”(시대의 소망, III권, 340).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심“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올리는 중보의 기도 가운데서, 타락한 인간에 관하여 하늘에서 제정된 계약중 당신의 몫을 성취시키셨노라고 주장하셨다”(구속—부활, 77, 78).

 관계가 분명히 정의됨“그는 지상에서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에 대하여 한가지 요청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구원한 백성들이 이후 하늘과 당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분명하게 정의될 것을 원하였다. 당신께서 하늘의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당신의 교회는 의롭게 되고 받으심바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계신 곳에 당신의 교회가 있어야 하며,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면, 당신의 백성도 당신과 함께 영광을 받아야함이 당신의 뜻임을 선포하셨다. 지상에서 그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은 마침내 그의 나라에서 그와 더불어 다스리게 된다.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호소하시며, 당신의 관심을 저들의 관심과 동일시하시고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과 성실로서 당신을 통하여 얻은 저들의 권리와 칭호를 옹호하신다”(예언의 신, 3 권, 203).

 언약의 약속을 따라서“저들이 그분과 함께 거하는 것은 아버지와 맺은 언약의 약속과 동의에 따른 것이라”(리뷰 앤드 헤럴드. 1893. 10. 17. p. 645).

 무한한 진리“하늘의 회의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생각하신 필수적인 요소는 유한한 존재가 이해 할 수 있는 무한한 진리에 의하여 영원 전부터 규정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408).

 단순한 일치“비록 이 언약은 아담과 세워지고 아브라함에게 되풀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 비준될 수 없었다. 그것은 구속에 대한 첫 통고가 주어졌던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존재했고 믿음에 의하여 받아들여 졌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준하신 때부터 그것은 새 언약이라고 불리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 언약의 기초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히 저들을 다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하는 것이며 저희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는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上권, 491).

 아담과 하와가 천사에게 배움“우리의 첫번째 시조들은 저들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하늘의 사자들은 그들 부부에게 사단의 타락과, 파괴를 위한 그의 음모의 역사를 알려 주었으며, 악의 주재가 넘어뜨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성질을 제시하여 주었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명령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율법을 존중해야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며 율법에 의해서만 질서와, 공평의 유지가 가능하다”(전게서, 52).

 자유를 가진 도덕적 존재“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조상에게 선악 간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으며, 사단의 타락과 그의 말을 듣는 위험에 대하여도 주의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금지된 실과를 따먹는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하나님의 말을 믿고 당신의 계명을 순종하여 생명을 누리든지 아니면 속이는 자를 믿어 불순종하고 죽든지 저들을 도덕적으로 자유한 존재로 주셨다”(예언의 신, 1권, 40).

 아담과 하와가 천사들에게 보장합“천사들은 친절하고도 애정을 기울여서 아담과 하와가 바라는 지식들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저들은 또한 사단의 반역과 타락의 슬픈 역사를 들려주었다. 동산에 있는 선악과가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충성과 사랑의 서약이 될 것임을 그들 부부에게 알려주었으며 거룩한 천사들의 고귀하고 행복한 신분이 순종의 조건 아래서만 유지될 것이며, 비슷한 환경 아래 있는 그들 부부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 행복할 것이며, 불순종하면 저들의 고상한 지위를 잃고 소망없는 절망에 빠지게 될 것 이었다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저들의 최상의 기쁨이 되기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명령을 결코 범하지 않겠다고 천사들에게 보장하였다.”(전게서, pp. 33-35).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아담의 실패와 타락, 그리고 이로 인한 저주와 수치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당신의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교통하실 것이다”(구속—시험, p.17).

 또 다른 시련“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심으로 머리를 숙이셨다. 이제 공의와 자비가 함께 섞이었다. 이제 의로우신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자가 되셨다. 십자가 위에서 숨져가는 희생 제물을 바라다 보시면서 ‘다 이루었도다 인류는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청년 지도자, 1900. 6. 21. p. 195).

 “범죄자는 또 다른 시련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께서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개입시키셨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8. 2. 8. p.85).

 “무한한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입장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며, 인간은 또 다른 시험과 시련을 갖게 될 것이다”(리뷰 앤드 헤럴드사에 증거하신 특별 담화 p. 28)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하며, 인간에게 또 다른 시련을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더 유예의 기간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안하셨다”(구속—시험, 14).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그 시험이 인간 가족의 모든 자에게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담에게 요구되었으며, 우리도 또한 똑같은 위치에 서서 우리가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지 두번째 시험을 받게 되었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0. 6. 10. p. 354).

 하나님의 요구“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 낙원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그것, 곧 당신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지금 이 순간에 요구하신다.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요구는 낙원에서 하셨던 것과 똑 같은 요구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워진 하나님의 주장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전게서, 1890. 7. 15. p. 433).

 율법을 지킬 수 있음“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천사들 앞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표하셨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생애하고, 하나님의 율법이 눈동자처럼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목사들에게 보내는 특별증언 3권 59).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주심“자기 자신의 힘으로 죄인은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신 그 분에게 도움을 구하러 나아가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며,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구주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셨다”(영문 시조,1901. 7. 31. p. 48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십자가의 계획“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시험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다. 자유의지를 가진 자로서, 사단의 시험에 복종할 자유와 하나님과 맺으신 십자가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자유를 함께 갖고 시험을 받으셨다.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였다면, 만일 예수께서 실수하실 가능성이 없었다면, 모든 인간이 받은 모든 시험을 받으실 수 없었다”(청년 지도자, 1899. 10. 26. p. 519).

 아담의 수치스러운 실패“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당신의 존귀와 왕권, 그리고 영광을 떠나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시며, 힘센 암흑의 왕과 싸우시기를 동의하셨다. 당신의 겸손과 가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타락한 인간의 연약성과 동일시하셨으며, 확고한 순종에 의하여 인간이 아담의 실태에서 구속될 수 있음을 보이셨고, 겸손한 순종에 의하여 잃은 에덴을 되찾으셨다”(구속—시험, p. 14).

 죽기를 간청함“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존귀하며 거룩한가를 깨닫고, 또한 율법을 범한 죄가 완전한 멸망으로부터 저희를 자신과 후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매우 비싼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죽기를 간청하였다. 그렇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 큰 희생을 당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희들 자신과 저희의 후손들이 죄의 형벌을 받게 해주시기를 간청하였다”(예언의 신, 1권, 50).

 형벌을 경험함“온 우주 앞에서, 율법의 형벌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이룬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저들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리뷰 앤드 헤럴드사에 증거하신 특별담화, 29).

 자신의 책임으로 승리자가 됨“인간이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시던 광야에서 대적과 싸우신 경험으로 주신 모본처럼, 하늘의 능력을 붙들고 결심과 인내를 가지고 사단과 대항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거스리며 사단의 계교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저항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스스로의 힘으로 일해야 한다. 요컨대,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해야 한다. 그후에 예수의 전능하신 이름으로 얻는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자 모든 승리를 거두셨다면 좋은 예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몫을 감당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능력과 은혜를 통하여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승리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역자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당신의 영광을 나누게 된다”(교회증언, 4 권, 32, 33).

 인성으로 승리하심“그리스도께서 머리를 숙이시고 운명하셨을 때, 그는 사단의 왕국의 기둥들을 사단과 함께 땅으로 내리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에덴에서 승리했던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사단을 이기셨다. 대적은 인성을 쓰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구세주의 신성의 능력은 감춰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으로 승리하시고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능력을 구하셨다. 이것은 모든자의 특권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승리를 거둔다.”(청년 지도자, 1901. 4. 24. p. 130).

 “구세주께서는 인간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승리하셨다. 사단의 모든 시험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맞서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으며, 속이는 자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였다”(치료 봉사,191).

 율법의 원칙“네째 계명의 안식일은 에덴에서 제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땅 위에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위하여 안식일을 두셨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라도 제하여 지지 아니하였다. 십계명의 원칙은 타락하기 전부터 존재하였으며, 거룩한 존재의 질서의 조건에 적합한 성질로 되어 있었다. 타락 후에도 이 계명들의 원칙은 변경되지 아니하였으며, 타락한 인간의 처지에 맞도록 추가적인 계명이 주어졌다”(영적 선물, 3 권, 295).

 율법이 적용됨“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율법은 거룩한 존재들에게도 적용되어 천사들도 율법에 의하여 다스려졌다. 타락후에도 의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율법에서 한 부분도 제외되지 않았으며, 거룩한 계명의 한 부분도 변경되지 아니 하였다. 또한 율법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당신께서 영원전부터 세우신 증거에 대하여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영문 시조 , 1896. 4. 15, p. 226).

 조정되어 발표됨“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창조 전 혹은 아담이 죄를 지을 수 없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아담의 범죄 후 율법의 원칙은 변경되지 아니 하였으나 타락한 인간의 조건에 맞추기 위하여 조정되어 발표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의논하시는 가운데 희생 제사의 제도를 세우셨다. 사망이 범죄자에게 즉시 임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고 완전한 제물을 표상하는 희생 제물에 게로 옮겨져야만 했다.”(전게서, 1878. 3. 14. p. 21).

 보다 명백히 설명됨—창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호와의 율법은 두개의 커다란 원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 21). 이 두가지 위대한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를 보여줌으로써 첫부분의 네계 명을 포함하며, 동료 인간에 대한 의무를 보여줌으로 나머지 여섯 계명을 포함하고 있다. 타락 후에 이 원칙들은 보다 명백하게 설명되었으며, 타락한 지성들에게 적합하도록 말이 덧붙여졌다. 범죄로 인하여 눈이 가리워진 인간의 마음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전게서, 1875. 4. 15. p. 181).

 종교적인 계명“계속적인 범죄로 인하여 도덕의 율법이 시내산에서 장엄하게 반복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에게 매일의 생애를 지배할 종교적인 계명을 주셨다. 이 계명들은 분명히 십계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없어질 그림자와 같은 모형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시간이 계속되는 한 모든 시대를 사는 인간들의 마음에 밀착되어 있어야 한다. 이 계명들은 도덕적의 율법의 힘에 의하여 강조되었으며 율법을 보다 분명하고 명백하게 설명하였다”(전게서).

 인간 육체의 옷“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통곡하셨다. 그분께서는 자기 옷을 찢음으로 가장한 가야바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의 위선을 아셨으면서도 가야바의 죄까지도 담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옷을 찢지 않으시고, 당신의 영혼을 찢으셨다. 당신의 인간 육체의 옷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에 찢어졌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새롭고도 살길이 열리었다.”(리뷰 앤드 헤럴드, 1900, 6. 12. p. 370).

 언약의 약속을 따라서“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변자의 기도를 들어보라.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로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오 거룩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가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얼마나 원하셨는지! 제자들은 당신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를 나누었으며, 당신의 제자들이 영광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최상의 기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가 당신과 함께 하는 특권을 주장하신다.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 17:24).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되는 것은 아버지의 언약의 약속과 협약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이루신 시은소에 경건하게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탄원을 쏟으시며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실 때 약속의 무지개는 대속이 되시며 보장이 되시는 분을 둘러싼다. 우리들은 아름다우신 왕과 영광스럽게 된 교회를 보게 될 것이다”(전게서, 1893. 10. 17. p. 645).

 이적을 행치 아니하심“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는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셨는데 인간들 가운데서 한 인간으로 서셔야 했던 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약속의 일 부분이다”(써던 왓치맨, 1904. 3. 1. p.142).

 언약의 책“모세가 기록한 것은 10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지키게 하신 법조문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부 약속이었다. 모세는 이를 백성들에게 읽어주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스스로 지키겠노라라고 맹세하였다. 모세는 백성들의 엄숙한 맹세를 책에 기록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7, 8).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되풀이하였다.”(영적 선물, 3권,270,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