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좀 문제를 야기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구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기도가 들으신바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줄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으로부터 구원
하실 수 있는 분에게 기도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공관복음에 분명히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는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
막 14:35) 기도하신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마 26:42). 이러한 말씀들은 그것이 만일 가능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보전되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에 비추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탄원이 들어진 바 되지 않았는데,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도 중에 죽음에서 구원되어야 한다고 독단적으로 요구하셨을 것 같으면, 그것은 그의 요구가 거절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순종의 말씀,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덧붙이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께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시는 대로 행하시도록 길을 열어 드렸고.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기로 스스로 서약하셨다. 그리스도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결정하시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결정이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들으심을
얻었고, 또한 이와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들으신 바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현명치 못한 기도로 인하여, 불필요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기 어렵도록 만든다. 한 착한 토기장이는 토기가 잘 마르도록, 햇빛과 따뜻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한 착한 농부는 좋은 수확을 위해 비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항해하는 네 사람의 선원이 각각 자기 쪽으로 바람이 불기를 기도한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다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 만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일 비를 내려주면 나의 착한 토기장이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며, 내가 건조한 날씨를 주면, 내 착한 농부는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나의 선원들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문제를 전부 생각해 본다면, 모두를 다 기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것을 깨닫고 나에게 좀 여유를 주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가 이 교훈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는 것과 우리가 굉장히 원하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 저는 이것을 대단히 원합니다. 또한 당신께서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원한다 해도 저에게 좋지 않게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배웠읍니다. 그래도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시니 이 문제를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기도가 들으신 바
되지 않았다고 생각지 않도록 하라. 비록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니오”는
“예”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대답이다. 비록 때때로
“예”도
“아니오”도 아닌
“기다리라”는 응답이 나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 못해
“아니오”라고 하실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분께서는 우리가 순응하며
“당신의 뜻대로 하옵서소”라고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해방되시고 안도케 되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대로 일하실 수 있고 우리의 협력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가장 효과있는 기도의 비밀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동산에서 지녔던 고뇌와 그의 기도가 들으신 바 된 것에 관해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과연 왜 기도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막 15:34)하는 그의 십자가 상의 비통한 울부짖음에 암시된 것은 일시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받기 위한 소원이었는가 아니면 아버지와의 분리에 대한 더 큰 의문이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후자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예견하셨고 예언하셨다. 그 값을 헤아리셨다. 여기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 12:27).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동산에서의 그의 기도는 일시적 죽음에서의 구원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바로 그 때를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그분께서 원하신 것은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니요, 죽음 너머의 승리였으며, 부활의 확신이었고, 아버지와의 분리가 영원할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뜻에서 들으심을 얻었다.
이러한 견해는
“죽음에서 구원(from death)”이란 헬라어가 문자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구원(out of death) ”이란 사실에서 확신할 수 있다. 흔히, 단지
“으로부터”라고 번역되지만,
“에서”라는 것이 여기서는 가장 알맞게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음
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했다기 보다는—그 분은 흑암으로 내려가기를 예상했다—죽음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하셨다. 이렇게 볼 때에
요한복음 12:27과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라는 뜻은
“그가 경외하셨기 때문에”이다. 여기에 경외라는 것은 존경하는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다. 즉 경건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그의 경건으로”,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심으로”,
“그의 존경으로”,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므로” 등으로 번역된다. 그 뜻은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생애로,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함으로 들으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3절과 연결할 때에 이 절은 그리스도찌서 스스로를 인성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개념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
옛날의 대제사장들은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위하여 드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어떤 면으로든지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정도로 오셔서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게 된다. 과연 그분께서는 죄인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죄를
지으셨는가? 그래서 죄인이 가야할 길을 밟아야만 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죄가
그 분의 죄가 되었는가?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드렸고, 여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에서, 또는 죄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병행귀절은 우리가 경건하게 연구하도록 제공된 것인가?
우리가 해결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여기에서 논의하기에 적당치 않은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시대의 소망」의
“겟세마네” 장을 추천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가치 있는것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주의하고 싶은 것은 모든 가능한 사실을 다 얻기 전에는 결론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또 죄없는 분으로서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더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한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죽음에서 구원되기를 기도하셨다는 것을 찾는다면, 우리는 또한 수천, 수백만의 순교자들이 기쁨으로 환호하였던 공포보다 더 깊은 그 무엇인가를 그 분의 기도의 근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갈은 말씀들을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가 전에 항상 서시던 바와는 다른 태도로 서 계셨다∙∙∙· 죄 많은 인간의 대리자 그리고 보증인으로서 그리스도는 거룩한 공의 아래 고통을 받고 계셨다. 그는공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되셨으나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한 중보자를 가지고자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III권, 183,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