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5 장 —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자질
 유대인에게, 온화하고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란 기이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그 신성한 직책이 저급으로 멀어졌다. 오만과 자만심과 거드름빼는 태도는 지도자들 간의 흔한 특징이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고 한 바리새인의 말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약하고 죄많은 자에게 동정하는 것은 대제사장 직분의 자격 중의 하나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동정과 이해가 필요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자격들을 지니고 계셨다는 사실은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한 전환점을 그들로 갖게 하는 소인陳因)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 5장에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이상적인 제사장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분 안에서, 이스라엘은 심령의 소망을 가질 수 있고, 동정심 많고 변함없는 대제사장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데, 그분은 덜 가치있는 자로 말미암아 결코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었다.

히 5:1-10 (5:1-10)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하나님께 속한 일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취하여지고 사람을 위하여 임명되어진다(출 28:1).

 “하나님께 속한 일”이란 인간 관계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죄, 용서, 명상, 기도, 감사등을 뜻하는 것이다.

예물과 제사
 예물은 피없이 드리는 것이고 제사는 피와 함께 드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제사장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물과 제사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치게 되어 있다.
히브리서 5: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용납
 “용납”이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온유한 마음을 품고, 그와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이 말은 “열정과 무관심 사이의 중간 정도의 차이”의 감정을 표시한다. 제사장은 이러한 성향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자신도 완전치 못하고 용납이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식하고
 사람은 흔히 무식한자들에게 동정이 필요할 때, 경멸을 보낸다. 대제사장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
무식하고 미혹한 자
 과오를 범한 자는 근본적으로, 알지 못하고 죄 지은 자와 사소한 일들에 죄 지은 자들을 말한다.
히브리서 5: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땅하니라
 그는 자기를 위하여 드려야만 하고,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용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그는 자신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 더 높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는 백성과 하나이므로, 백성의 죄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 5: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대제사장 직분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 하나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와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다면, 그는 부르심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거룩히 준비되어 있고, 따라서 사람들은 합당한 존귀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
히브리서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前) 세기에는 대제사장 직분의 후보자를 선택하는 일이 불규칙하고, 아론의 가계에만 한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악한 자들이 영예를 구했고, 종종 그 직분은 가장 비열한 방법에 의하여 취하여지곤 하였다. 원래 그 직분은 종신제였고,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해졌으나, 이제는 각 대제사장이 불과 몇 년간 봉사하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는데, 아마도 그자는 사기술이나 심지어는 암살을 통해 그 직분을 취했을 것이다.

 기원전의 125년 동안, 모두 29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 현명한 대제사장은 그의 돈궤를 채울 때 까지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는다는 것은 폭력에 의해 제거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습관이 그리스도 당시에 여러 대제사장이 동시에 살아 있었던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들은 사임했거나, 다른 사람 때문에 억지로 쫓겨나거나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이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라는 말씀을 더욱 적절하게 해 준다.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요 8:54). 그리스도는 스스로 임명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임명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고 잔인한 주인이시고, 용서하지 않으시며, 마지막까지 강요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논박한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자로 정하셨고, 따라서 사람의 구원에 대한 그분의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다음의 인용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대제사장으로 명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것의 행사도 승천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상, 즉 대관식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일어나셨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언약’의 대제사장 직무 수행자로 완전하게 제정되어 있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하셨을 때, 스스로 ‘존귀와 영광’으로 옷입으셨으며 그의 직무 수행이 시작되었다”(Bishop’s Commentary note on Hebrews 5 6).

 “부활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사실상의 서임식이었다. 그것의 행사는 승천 때까지 기다렸지만, 부활이 군주의 취임이라면, 승천은 대관식이었다”(C. J. Vaughan, The Epistle to the Hebr-ews, p. 92).

히브리서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들로서, 또한 대제사장으로서 선포하시는 두 귀절은 시편 2:7110:4 이다. 앞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말하고, 둘째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라도 완전하였으므로,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아버지의 명하심을 기다리셨고,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직분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셨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직분의 권리를 가지신 자로서,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시지 아니하셨다(히 5:5)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심으로서 인성을 높이시고,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세우사 중보자로 삼으셨다(행 3:13).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것은 겟세마네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다. 비록, 십자가 상의 경험이 이것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마 26:36-44; 눅 22:39-44; 막 14:32-41; 마 27:46; 막 15:34; 눅 23:46).
들으심
 이 말씀은 좀 문제를 야기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구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기도가 들으신바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줄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기도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공관복음에 분명히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는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막 14:35) 기도하신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마 26:42). 이러한 말씀들은 그것이 만일 가능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보전되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에 비추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탄원이 들어진 바 되지 않았는데,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도 중에 죽음에서 구원되어야 한다고 독단적으로 요구하셨을 것 같으면, 그것은 그의 요구가 거절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순종의 말씀,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덧붙이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께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시는 대로 행하시도록 길을 열어 드렸고.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기로 스스로 서약하셨다. 그리스도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결정하시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결정이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들으심을 얻었고, 또한 이와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들으신 바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현명치 못한 기도로 인하여, 불필요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기 어렵도록 만든다. 한 착한 토기장이는 토기가 잘 마르도록, 햇빛과 따뜻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한 착한 농부는 좋은 수확을 위해 비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항해하는 네 사람의 선원이 각각 자기 쪽으로 바람이 불기를 기도한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다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 만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일 비를 내려주면 나의 착한 토기장이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며, 내가 건조한 날씨를 주면, 내 착한 농부는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나의 선원들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문제를 전부 생각해 본다면, 모두를 다 기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것을 깨닫고 나에게 좀 여유를 주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가 이 교훈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는 것과 우리가 굉장히 원하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 저는 이것을 대단히 원합니다. 또한 당신께서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원한다 해도 저에게 좋지 않게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배웠읍니다. 그래도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시니 이 문제를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기도가 들으신 바 되지 않았다고 생각지 않도록 하라. 비록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니오”“예”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대답이다. 비록 때때로 “예”“아니오”도 아닌 “기다리라”는 응답이 나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 못해 “아니오”라고 하실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분께서는 우리가 순응하며 “당신의 뜻대로 하옵서소”라고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해방되시고 안도케 되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대로 일하실 수 있고 우리의 협력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가장 효과있는 기도의 비밀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동산에서 지녔던 고뇌와 그의 기도가 들으신 바 된 것에 관해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과연 왜 기도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4)하는 그의 십자가 상의 비통한 울부짖음에 암시된 것은 일시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받기 위한 소원이었는가 아니면 아버지와의 분리에 대한 더 큰 의문이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후자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예견하셨고 예언하셨다. 그 값을 헤아리셨다. 여기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동산에서의 그의 기도는 일시적 죽음에서의 구원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바로 그 때를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그분께서 원하신 것은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니요, 죽음 너머의 승리였으며, 부활의 확신이었고, 아버지와의 분리가 영원할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뜻에서 들으심을 얻었다.

 이러한 견해는 “죽음에서 구원(from death)”이란 헬라어가 문자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구원(out of death) ”이란 사실에서 확신할 수 있다. 흔히, 단지 으로부터라고 번역되지만, 에서라는 것이 여기서는 가장 알맞게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했다기 보다는—그 분은 흑암으로 내려가기를 예상했다—죽음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하셨다. 이렇게 볼 때에 요한복음 12:27과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라는 뜻은 “그가 경외하셨기 때문에”이다. 여기에 경외라는 것은 존경하는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다. 즉 경건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그의 경건으로”“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심으로”, “그의 존경으로”,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므로” 등으로 번역된다. 그 뜻은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생애로,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함으로 들으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3절과 연결할 때에 이 절은 그리스도찌서 스스로를 인성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개념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

 옛날의 대제사장들은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위하여 드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어떤 면으로든지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정도로 오셔서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게 된다. 과연 그분께서는 죄인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죄를 지으셨는가? 그래서 죄인이 가야할 길을 밟아야만 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죄가 그 분의 죄가 되었는가?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드렸고, 여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에서, 또는 죄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병행귀절은 우리가 경건하게 연구하도록 제공된 것인가?

 우리가 해결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여기에서 논의하기에 적당치 않은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시대의 소망」의 “겟세마네” 장을 추천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가치 있는것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주의하고 싶은 것은 모든 가능한 사실을 다 얻기 전에는 결론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또 죄없는 분으로서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더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한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죽음에서 구원되기를 기도하셨다는 것을 찾는다면, 우리는 또한 수천, 수백만의 순교자들이 기쁨으로 환호하였던 공포보다 더 깊은 그 무엇인가를 그 분의 기도의 근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갈은 말씀들을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가 전에 항상 서시던 바와는 다른 태도로 서 계셨다∙∙∙· 죄 많은 인간의 대리자 그리고 보증인으로서 그리스도는 거룩한 공의 아래 고통을 받고 계셨다. 그는공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되셨으나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한 중보자를 가지고자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III권, 183, 184).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함을 배워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순종하셨고, 그것을 다시 배우실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기 고난으로 배웠다고 나와있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에게 순종을 위한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상 생애에 있어서 그 분께서는 더해가는 어려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데 수반되는 고난을 알게 되셨다. 순종이란 그분에게 값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겟세마네와 골고다를 의미한다(빌 2:8). 그것은 순종을 배우는데 아주 어려운 방법이었지만, 그 분은 움추러들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순종의 값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다음의 말씀에도 나타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히브리서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온전하게 되었은즉
 (being made perfect; perfected)이 말씀은 목적하는 것에 도달했다는 개념이다. 과업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이 목표는 그 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고 하셨을 때, 도달하였다. 그 분께서는 죽음의 지점까지 순종하시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럼으로 완전하게 되셨다.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이와같이 순종하도록 이제 요구하실 수 있다. 그래서 그 분께서는 그 분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이며 원인이 되셨다. 그 분 스스로 순종의 대가를 배우심으로 그 분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따라오라고 요청하실 권리가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칭하심
 “칭하심”4절“부르심”이라고 번역된 원전의 단어와는 다른 단어이다. 4절에서는 그 단어는 단지 불리워지다. 또는 직책에 임명되다는 뜻이다. 10절에서는 “이름을 불리우다” “칭호를 받다”, “경례를 받다”등의 뜻으로 어떤 직책을 받거나, 영예의 타이틀을 얻은 때, 인정으로 그렇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 적용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을 차지하신 것과 하나님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선포되신 것을 뜻한다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신 위치에 대한 아버지의 인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제부터 봉사하실 새로운 직분을 인정하심을 표현하고 계시다.
반차(班次)
 헬라어 단어는 “규정된 배열,” “정하여진 차례(계급 또는 지위의), 공적인 위엄(威嚴)”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히 5:11-14 (5:11-14)
 이 귀절은 믿는 자들을 괴롭히고, 또 저자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서 해 주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게 하는 나태함을 제하여 버리라는 권고를 포함하고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관하여는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둘 다에 관하여 바울은 문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해석을 위해서는 영적인 지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울이 이 편지의 독자들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또 그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듣는 것이 둔하고,” 또 그것 때문에 바울로 하여금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게 한다.

 그의 어려움은 두가지인데, 어려운 문제와 둔한 상대방이다.

히브리서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그들은 새로운 개종자가 아니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말씀은 거짓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그들이 받은 특권만큼 많이, 그리고 빠르게 진보하지 못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그들은 전에 가르침을 받았으나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니, 그들이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잊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이었다.

 바울의 독자는 나태함의 죄를 지은 자들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어야 할터인데, 아직도 가르침을 받아야할 필요에 있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허 비하고, 그들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기독교 원칙의 초보를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미 선생이 되어야 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애통할 형편이다.
젖, 단단한 식물
 바울은 교회에게 과업을 주고 있다. 그는 말씀을 젖이라고 부름으로 가볍게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어쨋든 그 가치를 저하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너무 가벼운 음식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거북함을 느낀다. 이제라면 그들은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기 음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순전하고 신령한젖”이 있지만, 이것은 “갓난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자라게”하려 함인 것이다(벧전 2:2). 어린 아기는 좋은것이지만, 60세 난 아기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자는 젖을 떼고, 자기 음식을 씹고, 소화시켜야 한다. 남이 해주기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영적인 생계를 전적으로 목사에게 의지하고, 스스로의 공부가 요구되는 것을 완전히 제쳐 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만을 기뻐하여 마치 품안의 어린 아기처럼 돌보고 안고 다니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바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엡 4:14) 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자라서,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엡 4:13)기를 원하신다.
히브리서 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경험하지 못한 자, 어린 아이
 사람이 상업이나 직업에 익숙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의 사용에 익숙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어린 아이는 보통 귀여운 표현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질책의 표현이다. 여기에는 평신도에 적용된다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목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적어도 그들의 현재 상태와 그들이 되었어야 했을 또는 될수 있었던 상태와 비교할 때 말이다. 그러나 각자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하자.
히브리서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저자는 분명히 독자들에게 심각한 권고를 주려고 하고 있다. 그는 단단한 음식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것은 장성한 자의 것인데, 장성한 자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는 교인들로 하여금, 사도가 알았으면 하는 것에 대한 더 큰 관심을 흥기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교회가 이제 앞으로 자라날 때가 왔으며, 유치한 버릇을 떨쳐버리고 어른이 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간계를 쓰기를 계속 좋아하고 자극적인 모든 일을 재미있어 한다. 어른들은 이러한 일에서 벗어 났어야 하며, 유치한 일들을 치워 버리고 10대나, 사춘기적인 책략과 수단들을 다 포기하고. 어른답게 그들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할 것이다. 바울의 훈계는 오늘날에도 진실되다.
부가적 설명 성경—연구에 관한 화잇 부인의 글들
 히브리서 5장은 성경 연구에 부지런하지 못한 데 대하여, 교회에 대한 견책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들은 바울이 이제는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라고 말할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히 5:12)되었다.

 이러한 견책을 볼 때, 의심없이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의와 권고는 다시 한번 읽혀져서 우리에게 성경연구에 대한 더 큰 신실성을 불러 일으켜야 할 것이다


 무릎을 꿇고

 “무지가 젊은이나 노인에게 하나님의 법을 범한데 대한 핑계가 되거나 형벌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 안에, 율법이 성실히 증거하고, 그 원칙과 요구들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가 옮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목사가 옳다고 말해 주는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그의 영혼의 구원은 위태로우며, 그는 스스로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그의 확신이 얼마나 강하든지, 목사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그가 확신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그는 하늘로 향하는 여행의 모든 이정표가 제시된 도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아무것도 추측해서가 아니요, 진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성경을 연구해야만 하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가 올라가야 할 것 이며, 그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진리로 이끌어 주시기 위한 계속적인 기도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성경의 메아리, 1886. 5).


 기둥을 깊게 내려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의 최고 상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라. 영감된 말씀을 단지 피상적으로 읽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페이지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사려 깊은 명상을 요구한다. 어떤 귀절들은 다른 귀절 만큼이나 깊은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있다. 왜냐하면 뜻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자들은 한 귀절의 의미를 다른 귀절과 연결하여 이해하여서 진리의 사슬들이 그의 시각에 완전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보석의 광맥들이 지표 밑에 숨어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 부요한 것들이 거룩한 말씀 귀절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감추어진 뜻을 찾으려면 지적인 노력과 기도하는 집중이 요구된다. 하늘의 보물들을 찾는 모든 학생들은 그들의 지적, 영적 능력을 모두 동원하여 진리의 금광에 자루를 깊게 내려 정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도록 지헤롭게하는 지혜”이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169, 170).

 “성경에는 사람들이 현세와 다가오는 세상을 위해서 적합하도록 하는 모든 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원칙들은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다. 그 가르침을 감사하는 정신으로 읽는 사람은 누구라도 어떤 유용한 사상을 얻어내지 않고는 한 귀절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장 귀중한 가르침은 우연한 또는 연결되지 않는 연구로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위대한 진리의 체계는 부주의하고 급한 독자에게는 분별되도록 드러나 있지 않다. 그 보화의 많은 것은 표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어서, 부지런한 탐구와 계속적인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전체를 이루는 진리들은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발굴되고 모아져야만 한다.

 성경의 연구는 우리의 가장 부지런한 노력과 끈기있는 생각을 요구한다. 마치 광부가 땅 속에서 금은 보화를 캐내듯이, 그렇게 열심히 끈기있게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매일의 연구에 있어서, 한 절, 한 절 읽는 방법은 혼히 가장 유익하다. 학생으로 하여금 한 절을 취하여 그 절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넣어 놓으신 사상을 확인하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그리고 나서 그 사상이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숙고하도록 하라. 그 중요성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연구된 한 귀절은, 많은 장을 숙독하면서도 분명한 목적을 보지 못하고 명백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Ed 189).

 “예수님은 오래된, 익숙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을 경멸하지 않으셨다. 바로 그 분이 이러한 진리들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전의 영광이셨다. 잃어버린 바 된, 잘못 자리잡은, 잘못 해석된, 원래의 위치와 잘못 연결된 진리들, 이러한 오류와의 연락을 그 분께서는 분리시키셨다. 그리고 원래의 빛나는 광택으로 이 보석들을 보였으며, 알맞은 형체로 고쳐 박아서, 영원토록 단단히 서 있도록 명하셨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그러한 성격의 일이다. 오직 신성의 손길만이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를 위해 봉사하던 오류속에서 진리를 취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인류에게 구원되는 위치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진리의 원래의 신선함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분은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을, 천연계의 사물과 경험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그 분께서는 갈하는 영혼에게 신선한 만나를 내려 주셨으니, 그것은 사람 가운데 세워질, 새로운 왕국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237).

 “참되고 진실되며 자아 희생적인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비밀을 더욱 더 깨달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동역자이며, 구주께서는 그 분의 목적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성격의 결함과 연약성과, 병약함을 남기는 표면적인 일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매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난다. 그들은 꾸지람을 베풀기도 하고, 악을 억제하도록 손을 뻗치는 자비를 깨닫는다.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말한다”(영문 시조,1901. 5. 15. P. 308).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말씀을 연구하는 자는 누구도 보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어린 아이처럼 배우려고 하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복종하면, 그는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찾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순종만 한다면, 하나님의 정부의 계획을 이해할 것이다. 하늘 세계는 은혜와 영광의 보화를 탐구하도록 열어놓을 것이다. 인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이다. 진리의 보화를 탐구함으로 그들은 고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속의 비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희생 등은 지금처럼 우리 마음에 어렴풋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더 잘 이해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더욱 더 감사케 될 것이다.”(상게서, 1906. 9. 12. P. 523).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진리를 성실하게 찾는 자에게는 영원히 드러나도록 하셨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드러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이해될 수 없다는 생각은 가장 중요한 진리 중의 몇을 무시하게 한다. 성경의 오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감추시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요, 우리의 연약성이나 무지함이 진리를 이해하고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때로 반복되어야 한다. 그 한계는 목적된 바가 아니요, 우리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흔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나치는, 바로 그 성경 부분에 대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상게서, 1906. 4. 25. p. 264).

 “성경의 중심 주제는 모든 각 책이 그 주제에 한덩어리 되는 구속의 계획인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에덴에서 발표된 첫번째 희망적인 암시의 말씀으로부터 계시록의 마지막 영광스러운 약속,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도다’까지 성경의 모든 책과 모든 절의 일은, 이 놀라운 주제一인간의 향상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김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사상을 품고 있는 바로 그 사람 앞에는 끊임없는 연구 분야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를 가진 것이다.”(Ed 125).

 “모든 사람은 구속의 계획의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도록 해야할 것이니, 누구든지 그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을 줄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함이다. 당신은 아담의 타락의 원인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도 똑같은 죄를 범하여서, 아담이 낙원을 잃어버린 것처럼 하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함이다. 당신은 부조와 선지자의 생애를 연구하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신 역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연구하여 그 깊이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중요성과 불변성을 인식할 때까지 명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주의 생애를 연구해야 할 것이니, 그 분이야말로 유일한 모본이시다. 갈바리의 다함없는 희생을 깊이 명상하고, 죄의 넘치는 죄악성과 율법의 의로움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구속의 주제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강하여지고 고상하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구속의 계획 전체를 분명하게 마음속에 새기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더욱 더 잘 성취하게 될 것이다”(리뷰 앤드 헤럴드, 1888.4.24.p. 258)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추어 두신 것이 무엇이었을까?一그것은 구속의 계획에 대한 더욱 더 영적이고, 영광된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보혜사가 그들의 마음에 깨우쳐 준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깨닫고,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더욱 깊이 생각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도록 했다. 오직 성령만이 그들로 구속의 계획의 중요성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제자들의 영감된 증언을 통하여 세상에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교훈은 말씀을 무심히 읽는 자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큰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훈을 예증과 비유를 통하여 분명하게 하셨다. 그 분은 성경의 진리란 밭에 감추어진 보화 같아서, 어떤 사람이 발견하고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밭을 샀다고 말씀하셨다. 그 분께서는 진리의 보물은 표면에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요, 땅 속에 깊숙이 묻혀 있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찾아야만 될 감추어진 보화로 우리는 마치 금광을 캐는 것처럼 진리의 값진 보물을 캐어내야 할 것이다”(상게서. 1890.10. 14.ρ. 625).

 “이 말세를 마치는 사업으로 주어진 위대한 구속의 경륜은,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 성소에 관련된 장면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아로 새겨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두는 더욱 더 지적으로,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속 사업을 이해해야 한다. 이 위대한 진리가 보여지고 이해되어질때,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여서 하나님의 큰 날에 설 수 있도록 백성들을 준비시키게 될 것이오, 그들의 노력은 성공할 것이다. 연구와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널리 퍼져 있는 땅의 생각과 감각으로부터 향상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조화될 수 있을 것이며 하늘 성소에서 백성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그분의 위대한 사업과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성소로 들어갈 것이며, 지상의 경배자들은 그들의 생애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그들의 품성을 의의 위대한 원칙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들 스스로의 잘못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대사들에 주어진 엄숙하고 위대한 사업에 적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증언 5권, 575).

 “구속의 과학은 모든 과학 중의 과학이다. 천사들의 연구하는 과학이요, 모든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지성적인 존재들이 연구하는 과학이다. 우리의 주님, 구세주에게 주의를 돌리는 과학이다. 무한하신 분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목적으로 들어 가보는 과학이다. 영원한 시대에 걸쳐 침묵 속에 보관된,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들이 영원한 세대에 걸쳐 연구할 과학이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학문이다. 다른 어떠한 학문으로도 할 수 없는 마음을 각성시키고 영혼을 향상시킬 것이다∙∙∙∙∙∙

 구속의 주제는 천사들도 알아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대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의 끊임없는 영원의 과학과 노래가 될 것이다. 하물며 현재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할 가치가 없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분의 사명의 성격이 임하게 될 때에, 진리를 찾는 모든 노력에 더욱 분명하게 빛줄기가 비추이게 될 것이다. 새롭게 비추일 때마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더욱 깊은 흥미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 주제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분의 대속적인 희생과 중보의 사업에 대한 연구는 시간이 다 할 때까지 부지런히 연구하는 자의 마음을 사로 잡을 것이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세대에 걸친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빛을 받았더라면 가질 수도 있었던 우리의 이해를 열어주는 것들을 영원히 배우게 될 것이다. 구속의 주제는 영원한 세대에 걸쳐 구원받은 자들의 마음과 정신과 입술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 그렇게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믿음이 없어 받지 못했던 그 진리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원무궁토록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영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나타날 것이다. 끝없는 세대에 걸쳐, 신실한 청지기는 그의 보화로부터 새롭고 오래된 것들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영문 시조, 1906. 4. 18. p.246).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신성, 그의 대속, 우리의 중보로서의 하늘에서의 놀라운 생애, 성령의 사역一이러한 모든 생생하고 살아있는 기독교의 주제들이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까지 나타나 있다. 진리의 황금 고리는 복음의 진리의 줄을 이루고 있고, 최우선의 주요소는 그리스도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 안에 있는 것이다”(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385).

 “사람들이 지상의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그렇게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진리는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야하며, 진리를 찾는 자는 그 어떠한 희생이나 값을 치르고서라도 사려고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금광이며, 주님은 우리 각자가 말씀을 연구하여서, 구속의 위대한 경륜과 익숙해지며,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가능한 한 인간의 마음의 최대의 주제로 잡아,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도록 하신다. 그분은 그의 아들을 주셔서 악을 없애고, 하나님의 작품으로부터 죄로 더럽혀진 얼룩을 제거하고 잃은 자를 회복시켜서, 향상시키고 영혼을 고양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입혀 주신 의를 통하여 원래의 순결함을 찾도록 돌아가시게 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도록 하신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2. 11.8.P.690).


 연구의 태도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출발점에서, 진리를 찾는 자는 모든 편견을 제하여 버리고, 모든 선입관을 잠시 미뤄두고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야 할 것이다. 마음에 품고 있는 견해, 오랫동안 굳어져 온 습관과 버룻은 말씀의 시험을 거쳐야 할 것이며,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의 견해와 반대된다 할지라도, 그대의 영혼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자신들의 죄악에 그럴듯하게 돌려서 영혼의 파멸로 이끌듯이, 말씀을 견강부화하지 말 것이다. 무엇이 진리인가?가 그대의 질문이 되도록 하라. 무엇이 진리라고 지금까지 믿어왔는가가 아니다. 말씀을 과거의 믿음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유한한 인간의 어떤 교리가 진리라고 단언하지 말 것이다. 그대의 질문은 말씀에 무엇이라고 나왔는가? 가 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그대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고, 그대의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라”(상게서, 1902.5. 25. ρ. 177).

 “그대의 이론을 증명하려고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의 귀절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말씀을 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멸망으로 말씀을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대는 스스로 모든 편견을 비우고 기도하는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에로 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308).

 “만일 그대의 견해를 옹호하려고 말씀을 찾는다면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배우기 위해 찾으라”(COL 112).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말씀을 연구할 것인가? 우리의 주장을 하나씩 하나씩 내기에 걸어서 모든 말씀을 우리가 세워 놓은 견해에 맞도록 만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들을 말씀에 비추어 보고, 우리의 이론들을 모든 면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재어 볼 것인가? 성경을 읽고, 심지어는 가르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귀중한 진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가 확실히 드러나 있음에도, 오류를 즐기고 있으며, 만일 그들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져 오기만 한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교리에 비추어 읽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흑암과 무지 속에서 걷지 않을것이며, 오류를 품지도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자신들의 견해에 맞도록 이해하고 있으며, 그럼으로 해서 자신들을 그룻 인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말씀의 해석으로 기만하고 있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92. 7. 26.p. 46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려 할 때는, 우리의 마음을 먼저 겸손하게 할 것이다. 모든 이기심, 모든 기발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오래 가지고 있던 견해라고 해도 전혀 틀림없는 것이라고 생각지 말 것이다. 유대인들이 오래 세워 놓은 유전을 포기하기를 싫어한 것이 바로 그들의 파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견해나 성경의 해석에 전혀 흠이 없다고 보기로 결심했었으나, 사람들이 아무리 오랫동안 그러한 견해에 만족했다 할지라도 기록된 바 말씀에 의해 지지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진리를 원하는 자라면, 연구 조사와 비평에 대하여 열린 입장을 취하기를 꺼리지 말 것이며. 그들의 견해와 생각에 반대된다 할지라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40년 전에 우리 가운데 있었던 정신이다” (상게서. P·465).

 “나는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따르라고 말하련다. 성경의 풍요한 진리에 거하도록 하라. 그럼으로해서만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대들에게는 곤충을 죽이는 문제에 대해 논쟁에 빠질 시간이 없다. 이러한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지워주지 않으셨다. ‘밀에게 있어서 겨가 무엇인가?’ 지금 일어나는 이러한 부수적인 문제들은 이 마지막 시대의 진리들에 비하면 건초요, 나무요, 그루터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문제들을 말하느라고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진리들을 놔두는 사람들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쓸데없는 궤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영원한 복지와 관련된 진리로부터 돌려내려고 사단이 가져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설을 옹호할 아무런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문제를 논의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어떠한 주제에 머물러야 할지, 이러한 질문이 있다면 곧바로 위대하신 교사에게로 달려가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권위와는 관계없는 잘못된 이론들이 좌우편에서 나올 것이며, 약한 자들에게는 이러한 이론들이 지혜롭게 할 만한 진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가치한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교인들은 너무 값싼 음식에 익숙해 있어서 소화 불량성 종교를 가지고 있다. 왜 남녀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모으고, 또 그것을 주의할만 한 것처럼 내어놓음으로 그들의 경험을 적게 할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막연하고 하찮은 질문들, 하나님의 요구와 관계없는 문제들에 머무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상게서, 1901. 8.13. PP. 517,518).


 성소를 연구해야 함

 “구세주의 중보 사업의 유익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완전한 거룩함의 의무에서 아무것도 방해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향락이나 자랑이나 원하는 것을 얻고자 보내어지는 그 귀중한 시간들을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진실하고 기도하는 연구에 바쳐져야 할 것이다. 성소 제도와 조사 심판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와 크신 대제사장의 사업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시대의 필요한 믿음을 행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모든 개인들은 구원될지 혹은 잃어버릴지 모를 영혼을 가지고 있다. 각자는 하나님의 법정에 미해결인 채로 있다. 모든 사람이 크신 재판관을 얼굴을 맞대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책들이 펼쳐지고, 다니엘이 말한 바, 마지막 시대에 각 운명대로 서 있는 때의 엄숙한 장면을 자주 명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GC 488).

 “장래에 모든 종류의 기만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서야 할 튼튼한 땅을 원한다. 우리는 건물의 튼튼한 기둥들을 원한다. 주님께서 세우신 것에서 바늘 하나라도 옮겨서는 안 될 것이다. 원수는 성소가 없다는 교리 등의 거짓 이론들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주어 오신 진리 가운데 그것이 없었다면 어디에서 우리가 안전을 찾을 수 있을까?”(리뷰 앤드 헤럴드, 1905.5.25.p. 17).

 “하늘에 있는 성소는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의 바로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살아 있는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구속의 경륜에 대한 눈을 밝혀 주고 바로 종말에까지 데리고 가며, 의와 죄의 대결에서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그들 가운데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늘 성소에서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에서 죽으심 만큼,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GC 488, 489)

 “유대인의 섭리의 중요성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막대하고 심원한 진리들이 의식과 표상 가운데 감추어져 있다. 복음이야말로 그 비밀들을 밝혀내는 열쇠이다. 구속의 경륜을 이해함으로 그 진리들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더 많이 이러한 놀라운 주제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 천사도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오직 그분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지식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진리들을 살펴보기 원한다”(COL 133).

 “사단은 끊임없이 환상적인 가설을 동원하여 성소 제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발현을 낮추려고 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봉사를, 세속적인 마음에 맞는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그 진리의 힘을 제거하고, 대속의 진리를 무효시키는 환상적 이론들을 발명하여 그 자리를 대신 채우며, 세째 천사의 기별이 처음 주어진 이래로 우리가 거룩하게 가지고 있는 진리들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사업의 특징과 힘이 되게 하고, 선택된 백성이 되게 한 바로 그 기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려 한다”(Special Testimonies, Series B. No. 7,1905· 12.20. p. 17).


 성경 연구의 결과

 “분명한 성실성이 모든 학생들에게 요구된다. 모든 마음이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경건한 집중이 돌려져야 할 것이다. 빛과 은혜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서 놀라운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오순절의 날 이래로 드러나지 않고, 보여지지 않았던 위대한 진리들이 그 본래의 순수성을 가지고 비추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어두워졌던 진리들을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전혀 새로운 진리들도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된 진리들을 다니엘과 계시록으로부터 가져다 주실 것이다. 그들은 억제할 수 없는 힘들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입술이 열려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감추어진 진리들을 선포할 것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로운 자들을 책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자들을 책하신다”(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473).

 “응당 있어야 할 만큼의 부지런한 성경 연구가 있게 되는 그순간,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특징적인 다른 성품을 분명하게 나타내게 될 것이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89.4 · 9· p.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