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4 장 — 안식일
 바울은 이스라엘의 경험이 그의 독자들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갈망하였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이래로 거의 40년이 지나갔다.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처럼, 바울 시대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그 큰 사건이 임박해 있었다. 즉, 그들의 영광스런 도성과 성전이 폐허가 되기 직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새로운 질서에 그들 자신들을 순응시키기를 거의 40년을 기다려왔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비준되었고, 옛 언약은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성소와, 그 상징이 없어져야 할 때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도 옛 의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이 유효했던 이래로 한 세대가 지나갔음에도, 유대인들은 계속 그것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에게 있어서는, 옛 언약이 비준된 시기의 이스라엘과 새 언약이 성립된 시기의 이스라엘 사이의 비교가 명백하고도 확실하였다. 이스라엘이 부조들의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그들이 그러리 라는 많은 암시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호소도 없이, 그들이 이러한 것을 행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그들도 역시 운명을 단축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다.

 안식일에 관한 그들의 완전한 실패는 에스겔 20장을 읽어봄으로써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한 하나의 주된 요인이었다. 이것은 그날 자체를 준수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 안식일이 상징하는것—회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성화, 쉽, 교제, 거룩함—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히 4:1-5 (4:1-5)
 사도는 이스라엘이 들어가기에 실패한 하나님의 안식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을 제칠일 안식일과 연결하고 있다. 창조의 안식일과, 그것이 거룩한 생활에 미치는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이 신약의 언급은, 이 부분이 기독교 교리와 성화에 대해 하나의 주목할 만한 공헌을 하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한 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생활 즉 헌신과 거룩함의 생활에 대한 문제이다. 옛적 이스라엘은 이 생활을 거절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안식일과 또한 그것이 상징하는 성화도 거절해 버렸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being left)
 여기에 사용된 현재 시제는 약속이 현재도 계속 남아 있다는 것과, 들어오라는 초청과 권고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은 계속하여 유효하였지만 각 세대는 그 약속을 거절해 버렸다. 그래서 은혜의 시기는 닫혀져 버렸다. 바울의 세대도 같은 일을 하려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한 시도를 하려하고 있었다. 문이 아직은 열려 있었고 약속이 아직은 남아 있었지만 그러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옛적 이스라엘이 그랬던것처럼 그 시간을 단축시킬 위험에 놓여 있었다.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방지하려 하셨다.

그의 안식
 “그의 안식”은 일반적인 쉽도, 심지어는 그 쉼(the rest)도 아니고, “그분 즉, 하나님의 안식”이었다. 이것에 관해 우리는 더 살펴보게 된다.
히브리서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복음
 반가운 소식, 이것이 우리에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파되었었다. 이 절을 읽어보면 재미있다. 이 절은 “우리(us)와 같이 저희(them)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가 아니라, “저희(them)와 같이 우리(us)도 복음을 전함을 받은자”이다. 표상과 의식을 통해서, 그리고 희생과 예식 속에서 부조들은 복음의 지식을 받았다.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설교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말씀이 “믿음과 화합”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귀절이 전파되는 말씀(word preached)이 아니라, 듣는 말씀(the word heard) 또는 들음의 말씀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더욱 명백해진다.

 이 진술은 설교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청중에게도 엄숙한 책임을 던져 준다. 설교의 성공은 설교자에게만 의존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아마도 전혀 그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청중들의 반응에 의해 제한받으셨다. “저희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 청중들이 설교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있다. 이 사실을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설교자(the pulpit)가 회중(the pew)보다 덜 비난 받을만한 때가 있다.

 우리는 설교가 가져오는 빈약한 결과에 대해 설교자에게만 비난을 던지는 것이 예사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할 만한 생명력 있는 기별도 지니지 못했고, 그 자신들이 하늘의 불꽃에 닿아보지도 못하여 하나님과 인간 모두를 지치게 하는 무기력하고, 지루하며, 생명없는 설교를 하는, 어중간한 설교자들이 너무 많다고 하는것은 비난받을만 하다.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쟁기를 다루는 대신 설교를 해야할 사람들이 많이 있는 반면, 설교보다는 다른 직종에 참가하는 것이 인류를 위해 훨씬 더 유익할 많은 수의 설교자들이 있다.

 비록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불만족스런 결과에 대한 책임이 항상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그것은 청중에게도 단호한 비난을 던진다. 그들은 듣는 데에 믿음을 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듣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부족했다.

 노아는 단지 일꼽 사람만을 그와 함께 방주에 들어가도록 설득했다. 사실, 그것은 그 시간에 비해 작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노아가 오늘날 설교한다 하더라도, 책임을 질 자리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하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이 바울의 충고에 주의한다면 매우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분명히 더 훌륭하고 더 능력 있는 설교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꼭 같이 더 훌륭한 청중들도 필요로 하고 있다. 각자가 이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믿는 우리는 들어가는도다
 3장의 마지막 절은 이스라엘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믿는 우리는∙∙∙ 들어가는도다”라고 진술한다. 이 사실은 안식이 아직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바울이 기록하고 있던 바로 그 때에도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했다. 믿는 우리들은 확실히 들어간다.

 여기서 믿는 자가 들어가는 안식은 단순히 휴식(rest)이나 어떤 쉽(a rest)이 아니라 원래의 그 안식(the rest in the original)을 말한다. 정관사(the)가 빠진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1절에서 명백하게 하나님의 안식인 그의 안식(His rest)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것은 문이 아직 열려 있으며, 그래서 믿는 “우리들은 들어간다”(do enter)는것, 혹은 더 좋은 표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are entering)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 사도는 어떤 사람들은 지금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어들이지 못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안식으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계속되는 매 세대마다 반복하여 부르셨다. 심지어 바울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집은 아직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 갈 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들어갔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간다면
 이것은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번역된 3장 11절과 같은 내용이다. 그것은 단지 그와같은 일은 이루어 질수 없다는 말의 강조적 표현 방법 일뿐이다. 그리고 여기 5절에서와 같이 이 진술이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그것은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내용이다. 보통의 독자들은 같은 표현이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번역된 것을 보고 당황할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의 이 부분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결코 저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비록 그 일이 이루어졌을지라도
 이 세상이 창조된 바로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리라 계획하고 계셨다. 이것은 창조의 6일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또 인간을 그와 함께 안식하도록 초청한 사실로부터 명백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에게 쉴새 없이 일만 하는 노동의 생애를 주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존재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창조된 바로 그 다음 날, 즉, 그들 생애의 두번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식으로 초청하셨고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그 날을 보냈다. 그들은 노동의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 안식의 날이 다가왔다. 이 두 날 동안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목적하신 바대로의 완전한 생을 맛보았다. 그들은 지금 이성적으로 선택할 능력이 있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생명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그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들의 표본을 제공하셨다. 이것은 창조후 1천년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세상의 기초를 놓는 일이 끝나자마자” 이루어졌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태초로부터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명의 충만함, 완전하고 만족한 생활, 그리고 노동과 휴식이 가장 적당한 비율로 구성된 생활 등을 제공하시기로 계획하고 계셨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40년간의 광야의 방황동안 그들은 안식의 약속을 볼 수가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집도 있었고 정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비록 힘들게 일을 해야 했을지라도, 그들은 자녀들도 기를 수 있었고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기 단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의존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들이 그들의 현재의 생활과 애굽에서의 생활을 비교해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애굽이 광야보다 많은 잇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공하신 모든 것이라면,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안식은 보이지 않았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준비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끌어 들이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준비되기 전에는 할 수 없으셨다. 그들이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준비에 의존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때의 상황의 요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영혼 속에 안식을 갖는 순간, 그들에게 방황으로부터의 안식을, 원수로부터의 안식을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 앞서 행할 것이요, 너회에게 내가 안식을 주리라”(출 33:14)는 보증이 그들에게 주어 졌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마 18:28, 29)고 말씀하실때 의미하신 안식이다. 이것은 포로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초청이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향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너희 영혼을 위하여 안식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안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고 졔시건만, 그의 백성은 한번도 누려 보지 못한 그 안식이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의 방황으로부터 안식을 얻는데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안식의 조건은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었고, 그들의 영혼을 위한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우리는 광야에서 10년, 20년, 30년을 지내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는게 아닐까? 우리는 안식을 끝내 얻지 못하는게 아닐까? 바울은 이 귀절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들 앞에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고 말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이끌어들이실 것이다. 그는 너희들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세계의 기초를 놓는 작업이 끌난” 때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그의 역사(役事)가 끝난 후에 그는 안식하셨다. 분명히, 안식은 일과 마찬가지로 그의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었다. 네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에 굴복시키라. 그러면 그는 너에게 안식—너의 영혼을 위한 안식, 그리고 방황으로부터의 안식—을 주실 것이다.

 바울은 지금 이 진술을 그자신의 세대에다 적용시키고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다른 민족들보다도 더 고난을 당해온 것 같았다. 진실로 그들은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는것을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 부르심이 발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부르심에 귀기울여 그들의 영혼을 위한 안식을 찾기위해 그분께로 나아갈 것인가?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지 않았는가? 바울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어떤이들이 들어가고 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들어간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히브리서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제칠 일
 참으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영혼의 안식은 안식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그분께 전 존재를 드리는 온전한 헌신, 그리고 완전한 교제에 대한 모든 방해가 제거된 것을 의미한다. 영혼의 안식은 완전한 성화, 주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은 이러한 경험의 표징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고 말씀하신다. 그는 더 나아가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겔 20:20)고 말씀하신다.

 이 절들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성화의 상징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과 성화를 연결시키셨다. 이러한 진술은 이사야 56장“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사 52:2 )는 말과 병행되는 진술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4, 5절)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이 유대인만을 언급하고 있는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6, 7절)고 덧붙이신다.

 이러한 모든 진술은 안식일이 참된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과 성화와 밀접히,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화의 상징으로 부를 만큼 그렇게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 자신께서 첫 안식일을 쉬셨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완전함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산에는 해치는 것이나, 파괴하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칠일에 그의 일을 쉬실” 때에 그는 완성된 창조를 바라보셨다. 모든 세졔는 그의 찬양 속에 연합되어 있었다. 어디에든, 조화와 사랑이 있었다.

 안식일은 이러한 경우를 위한 완전한 기초였고, 다른 날들은 그 날을 위해 준비하는 날인, 모든 날 중의 진주같은 날이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3).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고”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창 2:3; 히 4:4). 태초에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고, 그가 안식하신 이날은 성화,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의 상징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그의 안식”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4절에서와 같이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말할 때에, 제칠일에 관심을 쏟고 계신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달리 어떻게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과, 성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히브리서 4: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또 다시 거기
 저자는 여기서 불순종한 자들은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한 앞에서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브리서 3:18의 진술의 확언이다.
히 4:6-11 (4:6-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하나님의 집이 채워지기에 필요한 숫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이다.

 이스라엘 시대에는 하나님의 집이 채워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기 못하였”(6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윗의 시대에도 채워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때에 채워졌다면 그들이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8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도시대에도 채워지지 않았다. 더우기 그때에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11절) 힘쓰라는 초청도 없었다. 그 때와 같이 지금도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9 절)것이 사실이다. 모두를 위한 방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문이 영원히 열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 중에는 운명적인 말이 기록되어 있다. “문은 닫힌지라”(마 25:10).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4: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거기 들어 갈 자들
 이것은 하나님의 남은 자들, 진정한 심령의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앞에서 주목한 바와 같이 비록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들중 아무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집을 채울 것이다. 사람들의 불신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역사의 방법을 바꾸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내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성취되어질 것이다.

히브리서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그는 어느 날을 정했다기 (appoint)보다 제한하였다(limit).” 이 날은,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오늘”이다. 원전에는 “어느 날”“오늘 날”은 동격으로 쓰였다. “오늘 날”“어느 날”“오늘 날”이 의미하는 것을 정의한다.
히브리서 4: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난하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호수아”(Joshua) 이어야 하는데, “예수”(Jesus)가 사용된 것은 잘못이다. 이것에 관해 앨포드(Alford)는 “우리 번역자들이 여기에 ‘예수’(여호수아의 헬라어 형태)를 남겨놓옴으로써, 보통의 영어 독자들의 마음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그것은 모든 올바른 이름은 그것이 통용되고 있는 바대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그들의 지시를 위반한 것이었다” (영어 독자를 위한 신약. 2권, p. 640).

 사도는 여기서 어떤 이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려는 반대, 즉 비록 모세가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호수아가 인도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인도했을때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되었다고 하는 반대를 만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확언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의중에 두시지 않으셨던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의 안식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인용된 시편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에 있었다. 그리고 여러 해를 거기서 지내왔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그 땅에 있었지마는 아직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때”에 다시 부르셨다.
다른 어느 날에
 만약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그들을 가나안에 인도했을 뿐이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만일”에 암시되어 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이러한 진술은 하나님께서 “안식”이라는 말로 뜻하시는 바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서는 만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시가 쓰여진 다윗의 시대에는 그들은 거기에서 수백년 지내왔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늘날 들어오라고 초청하신다.
히브리서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 절에서 “안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다른 곳에서의 “안식”에 해당하는 단어와 다르다. 여기서의 그 단어는 안식일(Sabbath)에서 파생되어, “안식일의 준수”혹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번역될 수 있는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란 단어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과 같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남아 있도다”.
남아 있도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안식으로 이끌어 들이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것이 남아있다. 혹은 프란츠 델리치(Franz Delitzsch)의 번역처럼 “아직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일의 쉽이 남아 있다”.

 델리치(Delitzsch)는 이것을 “약속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 성취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교회가.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ὸς),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일의 쉼을 즐기는 것처럼,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남겨져 있고, 아직 그들에 의해 기대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일이 모든 피조물의 안식일이 되도록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또 웅당 그렇게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주석, 1권, ρ. 197)고 설명하였다.

 “남아 있도다”는 충당되지 아니하고 남겨져 있는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기에 사용된 확실한 의미이다. 그것은 새로운 안식이 아니다. 그것은 에덴의 안식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 시대의 안식과, 예수님과 바울 시대의 안식과 같은 안식이다. 그것은 언제나 남겨져 왔고, 또 지금도 남아있는 같은 안식이다.

 파라르(Farrar)는 “여기에 사용된 ‘안식’이란 단어가 이 논증의 앞 부분에서 줄 곧 사용되어온 단어(카타파우시스—Kατάπαυσιs)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도 많은 필요없는 변형에 열중한 흠정역 번역자들이, 번역의 변화가 필요한 여기에서는 그것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그 단어는 안식일의 쉼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단어는 저자가 가지고 있는 ‘안식’의 견해가 하나님의 안식이며, 가나안이 적절히 상징한 어떤 안식보다 훨씬 더 높은 개념의 안식이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므로서, 이 논증에 있어서 중요한 고리를 제공하고 있다. 마카비 후서 15장 1절에서 ‘안식의 날’(Day of Rest)로 불린 안식일은 가나안이 상징한 것 보다 더욱 하늘의 모형에 더 가까운 것이다”(히브리서, p.68)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이 절은 뒷 부분의 “자”의 의미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어떤이들은 “자”가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이라 한다. 즉 그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자”가 일반적인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누구든지”가 된다. 문맥상 “자”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 스스로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이 있고, 그들 중 어느 것도 훌륭한 주석을 해치지 않는것이라면 대개는 그것들 각각이 모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말한 예증에서의 이 “자”의 해석은 참되다. 만약 “자”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면,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쉬신 것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그의 일을 쉬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 하나님의 안식을 성도의 유산인 안식, 그리고 회개함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안식—히브리서의 이 부분에 기록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주 문제 삼으셨던 그 같은 인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하든지 혹은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은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란 그 안식이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러한 안식에 들어가셨다(마 11 :28, 29; 눅 4:16).

 반면에, 만약 우리가 “자”를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해석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쉬신 것 같이, 그도 또한 그 자신의 일을 쉰다”가 된다. “쉰다”(ceased)란 단어는 4절“하나님께서 쉬셨다”와 같이, 이 부분에 있는 다른 예들에서, “쉼”(rest), 혹은 “쉬는”(rested)으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며, 앞절에서 “안식”(rests)으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므로 그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쉬신 것 같이 그도 또한 쉰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어떻게 쉬셨냐고 묻게되면, 우리는 4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제칠 일에 그의 일을 쉬셨다.” 우리가 이 대답을 본문 해석속에 함께 집어넣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참으로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서 쉬신 것처럼, 제칠일에 쉰다.” 안식일은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표이다. (겔 20:12). 그러나 표는 그것이 나타내는 실재가 없이는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자는 누구든지, 그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일을 쉬는것(resting), 혹은 멈추는 것(ceasing from)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진정한 회개와 성화와 연결시킬 의도를 지니고 계셨다는 것을 믿는다. 에스겔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이야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에 대한 실패가, 하나님에 의해 거절받는 것을 크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한 날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 날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적인 경험, 거룩함의 표, 성화의 표의 외적인 상징에 불과하다. 안식일을 인식하고 준수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실패는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적인 반역상태, 하나님을 불순종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겔 20:38).

 수 년동안, 수 세 기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참아 왔다. 그리고 지금 바울의 시대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호소를 하고 계신다. 그는 그들의 부조들이 실패한 이야기를 거듭해서 말씀하시며, 자녀들에게, 왜 부모들이 참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부조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말고, 아직 부르시고 계신 오늘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계신다.

 이 호소는 비록 사도 시대의 교회에 전달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어디에서든 발견되는 모든 일반적인 기독교인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의 안식에 들어가라고 하는 호소인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 완전히 돌아가는 것, 그의 안식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의 영광스러운 안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위한 호소이다.
히브리서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찌니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이고, 진지해야한다.
그 같은 본을 따라
 본(Vaughan)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누구든지 출애굽 세대의 발걸음에 의해 남겨진 특징에(그의 발을 둠으로써)멸망받지 않기 위해.” 이것은 앞에서 감명을 준 교훈에 힘을 더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한 그들의 발걸음을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히 4:12-16 (4:12-16)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말해졌을 때, 그 특별한 언급은 구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신약이 아직 기록되지도 않았고, 경전의 한 부분으로 채택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한, 1장의 말을 강조하고 있다.

 델리치(Delitzsch)는 12절13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넘치고, 힘이 넘쳐서,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며, 관절과 골수뿐만 아니라 혼과 영도 심지어 두 동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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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나누어 쪼개며, 생각과, 마음의 의도를 심판하나니, 그것으로 부터 숨을 수 있는 어떤 피조물도 없고, 우리를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고, 또 드러나게 된다”
(히브리서 주석, V.p.202).

 여기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구전된 말씀, 특별히 기록된 말씀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 대한 죽은 기록이 아니다. “살아있는(quick)”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살아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다(히 4:12). 이것이 비록 일반적인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말한 것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그것을 단축시킬”(1절) 사람들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다. A. Τ. 로버트슨(A. Τ. Robertson)은 어휘 사전(Word Pictures)에서,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사실이지만, 쉽과 하나님의 안식의 약속에 관하여 인용된”것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5권, p. 363). 랑에(Lange)의 주석“문맥상으로 볼때, 이 구문은, 그것이 암시하는 아페이쎄이아스(απειθειας 불신, 불순종)로서 단호하고도 의도적으로 끝을 내려고 한 앞에서의 경고를(11절) 정당화하고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것임이 분명하다”(히브리서 p. 93)고 한다. 빈센트(Vincent)는 단어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서 비슷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안식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찾으라고 촉구한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것이나, 형식적인 교훈이 아니라 살아있는 힘을 가진 분명한 것이다”(4권, p. 426). 델리치(Delitzsch)는 매우 명백하다. 그는 12절13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갈이 주석하였다. “앞부분뿐만 아니라, 뒷 부분과도 연결된 이 두절의 유일한 논리적 연결은, 이전에 말씀의 명령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모세 당대에 죽음이 이르른 것 같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약속의 구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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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 열렬히 노력하라는 의무를 나타내는, 바로 그 말씀이 살아 있고 단호한 힘이 있다고 하는 표현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부인할 수없이 당연한 것이다”
(히브리서 주석, 1권, P.202).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힘이 있다고 말할 때에,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르켜 한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 말해온 것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형벌이 이르러 온다고 말해온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용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조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명, 특별히 제칠일을 다룬 계명을 경시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이 여기서 고려되고 있고, 사도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확언하는 바로 이 말씀이고, 이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훈계와 경고를 읽는 자들이 계명을 율법의 죽은 문자로 간주하여 무시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제4 계명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확언하신 것은 그러한자들을 위한 것이고, 또 모듣 자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12절에 처음 나오는 “있어”(for)도 중요하다. 그는 누구든, 불순종한 출애굽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for)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 살아있고 능력이 있으며, 계명이 쇠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말씀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힘이 있다.

 지금 고려하고 있는 이 말씀들을 적용함에 있어, 우리가 안식일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견강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들로부터, 우리만이 이러한 번역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실, 이 절들을 일반적인 이론으로 고정시키고, 현안문제에 적용시키지 않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실패했으며, 어떻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이스라엘의 경험으로부터 실례를 이끌어냈다. 저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매우 타당한 요점인 제칠일과 연결시켰다. 왜냐하면, 에스겔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거절당한 이유 중에 하나가 안식일을 더럽힌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남아있다고 상기시키면서 광야 사람들의 모본을 따르지 말고, 아직 부르시고 계신 오늘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라고 그의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아무도 경고와 훈계가 현재에는 적용이 안되며, 제칠일 안식일은 죽은 문자라고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우리에게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검 같이 날카롭고, 찌르는 것이지, 무력하며, 의례적인 요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힘 있는”이란 헬라어 단어는, 영어 단어 “에너지”(energy)를 파생시킨 에네르게스(energes)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것 같이 살아있고, 또한 운동력이 있고, 힘있으며, 강력하다. 이러한 말들은 말씀을 인격화한다. 그리고 그것에 우리가 보통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특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을 닫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재앙으로 땅을 치는 권세를 지닌(3-6절)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을 생각나게 한다.

 말씀은 살았고 힘 있을 뿐만 아니라,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다. 예리한 검은 관절과 골수를 헤쳐 놓는다. 그와 같이, 말씀은 혼과 영의 더 깊은 작용을 찌르며, 생각과 마음의 의도를 벌거벗겨 놓는다.

 외과의사가 사람의 피부를 잘라서 이식시키기를 결정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과 마음의 동기를 실패함이 없이 정확하게 판단한다.

 “분별자”(discerner)란 말은 원전에서 점치다, 분별하다, 판단하다 등의 개념이 혼합된, 동사의 형용사형이다. 말씀이 인간의 동기와 생각에 행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 재판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감추려고 하는 숨겨진 의도와 동기를 벌거벗겨 놓는다.

히브리서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으로 단정되어 오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께 적용이 된다. 그 형상은 놀랍고 힘이있다. 하나님께로부터 감추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 앞에는 펼쳐진 책이다. 영혼은 그분의 면전 앞에서는 벌거벗은 채 서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사람이 모든것을 심판하시는 분과 맺는 관계에 따라 두렵기도 한 것이며,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위선, 교만. 부정, 자기 의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생각 앞에 떨게 될 것이다. 신뢰하며, 열렬하고. 정직하며, 겸비하고 겸손한 영혼은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아시고 이해하신 다는 것을 즐거워한다. 결코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 분은 성소의 저울로 사람의 행동과 동기를 다신다. 그리고 그분의 판결은 공의롭다.
히브리서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하늘로 돌아가신 자 into the heavens). “하늘을 통하여(through the heavens)”가 오히려 더 좋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히 1:3)에 계신 분으로 제시되셨다. 그는 여기서 “아들”이라는 칭호로서 신성과 인성을 조화시킨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불리운다. 이 본문은 어떤 이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속성을 회복했다는 증거로써 사용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신성으로서 지녔던 모든 특권을 이제, 그의 인성 속에서 사용하고 계신다. “굳게 잡을 지어다” 꼭 매달려라. 계속 붙들고 있어라. “도리(profession)”는 고백, 신앙, 교리를 의미한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대제사장
 앞 절에서 “큰” 대제사장을 언급했다.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서신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다. 그는 천사보다도, 모세보다도, 여호수와보다도 더 위대하시다. 그리고 지금 그는 사도와 대제사장으로서(3:1) 뿐만 아니라, 크신 대제사장으로 제시 되셨다.

 그는 사실상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론보다도 더 크신가? 저자는 곧 이것을 토의하려고 한다. 이야기를 바꾸어, 저자는 비록 예수가 크시긴 하지만 우리의 약점을 체흘하신 분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 자주, 높은 지위나, 자리에 선출되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동료의식을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이 그에게 친철히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하였을 때, 자기의 동료 죄수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창 40). 비록 이것이 보통 사람의 실패이지만, 예수님은 그와같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와의 접촉을 잊어버리지 않으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에게 친절히 하시며, 우리를 동정하신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는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하나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약함(weakness)”“연약함(infirmities)”보다 더 좋은 말일 듯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 이상의 것을 하신다. 우리의 고난의 많은 것들이 노골적인 반역이나, 사악한 고집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저항하는 대신, 포기하게 해서,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안타까운 연약함의 결과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이러한 상황도 이해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변명하실 수는 없을른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느끼며, 우리를 이해한다고 확신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혹은 문자적인 번역이 주는 바와같이, “같은 모양(in the way of resemblance)”으로 시험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연약하셨는가? 그렇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연약하셨다. 그와 함께 광야로 가보라, 그리고, 시험이 증가됨에 따라, 그의 육신의 힘은 점차 감소되어 가면서, 40일간의 금식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졌음에도 악한자와 함께 죽기까지 싸우시는, 그 분을 보라, 장정의 힘을 가진 사람은 육체적으로 연약한 자보다 훨씬 더 잘 저항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 서는 완전히 기진하기에 이를 만큼 육체적으로 약해 지셨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도덕적으로 약해지지 않으셨다.

 연약함은 비록 종종 죄 때문에 초래되긴 하지만, 비교적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실패의 이유를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시험 받으셨다. 그래서 그 분은 치료를 갖고 계신다.

 진정한 생애는 사건의 결과에 의해서 측정되지 않고, 원칙을 향한 태도에 의해 측정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눅 16:10)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하기 위해서 그가 당한 똑 같은 방법과 세목 세목으로 시험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인간사의 표상적인 시험과 고난은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한 날카로운 책망은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그리스도의 내적인 유혹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특별한 인식과 이해하시는 동정을 나타낸다. 이것은 단지 생활의 모든 조건에서 시험을 함께 받은 것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
 기독교 용어에 있어서 이 표현은 항상 기도, 그래서 속죄소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왔다.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하나님께 용서를 탄원하는 곳은 속죄소에서였다. 우리는 필요한 때에 도와줄 은혜를 찾기위해 거기 나아오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
부가적 설명—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고 말씀하셨다.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복된 소식이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고 거주할 정착지도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갔음에도, 그들은 아직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에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여행이 끝난 후에 이르러 올 안식, 각 사람이 자기 소유의 포도 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앉을 수 있는 그런 안식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이 안식은 단순히 그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원수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모리족, 아말렉족 브리스족, 블레셋족 그리고 다른 족속의 거인들이 거기에 있었다. 비록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앞으로 여러 해를 싸워야 하였다. 단순히 요단강을 건넌다고 해서 약속된 안식을 얻을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이것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쫒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쫒아내리라”(출 23:23-30)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조건적으로 주어졌다.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찌라”(22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채우기 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은 기억했지만, 조건은 잊어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발견해서, 조건을 채우고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방황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었고, 약속의 땅을 결코 보지 못하였다. 히브리서에는 이러한 경험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제칠일 안식일에 관심을 불러일으키셨다. 그리고 그것을 “저 믿지 아니하는 본을 따라 멸망”(히 4:11)당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것과 연결시키셨다. 이스라엘의 경험의 역사를 연구하여 보면, 안식일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도 전적으로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임이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참된 안식

 하나님의 안식은 영혼이 회개할 때 얻어지는 영적인 경험이다.

 새로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안과 투쟁이 있다. 악한 양심은 인생을 짐으로 만든다. 마음은 사악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세상적인 야심은 동요를 계속한다. 질투와 교만은 번민과 슬픔을 가져온다.

 부정이 마음을 지배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기 동료와, 자기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다. 그때 축복된 굴복의 날이 온다. 영혼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내 맡기고, 하나님께 의해 받아드림 바 된다. 전의 것은 지나갔다. 모든 것이 새로와졌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는 새 세계로 들어갔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새 이름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이 되 었다.

 마침내 그의 심령 속에는 평화가 왔다. 그의 죄는 용서되었다. 마침내 그의 영혼은 쉽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양심의 비난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의 사악한 야망, 그의 질투와 교만, 그의 세상에 대한 사랑, 그의 죄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유의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하리라” (출 33:14)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안식이었다. 예레미야가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렘 6:16)고 했을때 말한 것도 이 안식이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너의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사 14:3)리라고 말한다.

 이 안식에의 부름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들려졌으며, 아직도 들려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자들이 그것을 거절하였다. 부르심은 모든 세대에 울려 퍼졌다. “길과 산을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 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안식을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히 4:34)고한 창조 때의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시켰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초청해 들이신 그 안식과 창조 때의 하나님 자신의 안식과의 연결은 직접적으로 명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업을 마치셨을 때, 영원한 때로부터 계획되어 온 것이 마침내 볼 수 있게 되었다.

 땅은 청결한 아름다움으로 섰다. 천사들은 즐거워하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고,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 천사들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고, 명하시매 견고히 섰을 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단계적인 펼침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빛이 어둠을 뚧고 들어가는 것과,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절정으로서, 하나님께서 생명없는 진흙을 취하여 그것으로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을 때, 남자와 여자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허 상호보완하며 만났을 때, 천사들이 지금껏 창조된 것은 방금 창조된 존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였을 때 그들이 비록 아직은 희미하긴 하지만, 이 모든것이 그렇게 신비스럽게 우주에 나타나 전에 있던 하늘의 조화를 깨뜨리려 위협하는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그들이 신성의 거룩한 최상의 특권인, 생명의 창조를 증거하도록 허락하셨고, 그들 자신들이 우주로부터 죄를 씻어내는 드라마를 펼치는데. 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그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세계를 창조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 높임을 받게 되었다(히 1:2). 그들은 그분이 창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가 생명없는 형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의 형상을 따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그리고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기이하시다. 그리고, 그들이 방금 본,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신 자도 똑 같이 기이하시다.

 인간을 창조한 그 다음 날은, 모든 날들 숭에서 가장 큰 날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 창소의 의미와 가치를 희미하게 이해하였고,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모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 분은 미래를 보셨다. 그 분은 죄와 암흑의 날이 다가올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 분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옹호와, 죄로부터 온 우주의 최종적인 정결로 끝나게 될 최상의 조치가 취해질 것도 아셨다. 그 분은 모든 창조계에 한 약동이 있으며 모든 입술로부터 한 화음의 노래가, 그리고 하늘과 땅의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올리게 될 그 때를 기대하셨다.


 첫 안식일

 이 땅에서의 첫 안식일은 창조 역사에 있어서 절정이었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가족들이 그날 에덴에서 만났을 때, 모두는 생명의 미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더 깊은 개념을 얻었다.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는, 역사(役事)와 활동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조화와, 사랑과 사회적 생활과, 예배를 보여주신다. 여기에 다른 모든날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밝히는, 모든 날의 극치, 영광, 진주같은 날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에다 당신의 승인의 인을 치셨다. 그분은 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첫 안식일이 이 땅에 이르렀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엿새동안 일하셨다. 천사들은 경이와 경외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제 육일에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천사도 인간도 엿새 동안 일하지 않았다. 사실 아담은 그가 창조되던 날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껏해야 하루동안, 단 한가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개념에서, 에덴에서의 첫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엿새동안 일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 날은 그의 거룩한 날이었고 그의 쉽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강하고도 분명하게 “제칠 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 “나의 거룩한 날”(사 58:13). “나의 안식”(히 3:11; 4:3,5), “그의 안식”(히 3:18; 4:1, 10)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창 2:2). “마치니(ended)”란 말은 그 원전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이루니(finished)”가 더 가깝다. 사실, 앞 절에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finished)”라고 하는데, “이루니(finished)”2절에서 “마치니(ended)”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단순히 그의 일을 마치는 것 이상을 하셨다. 사람은 자기 일을 이루지 않고 멈출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의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꼽째 날에 이루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육일째 되는 날에 그의 일을 이루셨다면, 인간을 위한 안식은 없을 것이 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창조 주간에 포함시키셨다. 그래서 그의 이루어진 일이 일과 쉽을 포함하도록 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일하시고, 제칠일에 쉬셨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내가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일에 쉰 것 같이, 이제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 일에 쉴지니라. 이는 일곱째 날은 나 여호와 안식일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창조후 2천년이 지난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제칠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 었다고(was) 하지 않고, 이라고(is)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인자는 안식 일의 주인이 었다고(was) 하지 않고, 이라고(is) 한 것과도 일치한다.

 완전한 생애, 완전한 조화, 완전한 사랑, 기쁨,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에덴에서의 첫 안식일의 표현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특수하고도 분명한 개념으로 주목한 바와 같이, 그 날은 그의 안식 일이 었고, 그의 쉼이었다. 그 첫 안식일이 하나님 자신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훗날 그분께서 그 날을 언급하시는 방법에서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안식에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며, 탄원하실 때 “나의 안식”은 세상을 창조할 때 그가(하나님이) 들어간 안식이며,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히 4:3, 4)고 진술하면서, 그의 안식이 의미하는 것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에덴의 안식일에서부터 시작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일반적인 쉽을 의미했다면, 그는 그렇게 진술했을 것이다. 그 분이 일곱째 날을 지적하고, 특별히 이 날이 그가 태초에 안식한 날이며, 이 날이 모든 자들을 들어오라고 초청하는 “그의 안식”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죽음이래로 30년도 더 지난 신약성경, 히브리서에 기록되었다는 것도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첫 안식일에 생각을 고정시켜 보자.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이루시고 그것을 바라보셨을 때 그는 그것이 “매우 좋음”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셨다. 왜냐하면 땅과 그가 만드신 것들이 대단히 아름다왔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바라보셨을 때, 강건함과 남자다움을 지닌 완전한 아담과 사랑스러운 하와를 보셨을 때, 천사들과 사람, 하나님의 아들들, 그룹과 스랍들을 바라보셨을 때, 그리고 “땅과 하늘의 모든 가족”이 감미로운 조화와 친교 아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가 뜻한 바 이상적이며, 순결하며, 완전하며 그리고 만족스러운 것으로서의 그 생명을 보셨다. 그래서, 그 분께서는 이 모든 장면을 음미하셨을 때, 그 분은 쉬어 평안하셨다(출 31:17). 이상(理想)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에 대해 선지자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he wi ll rest in his love)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고 말한다.

 아담은 결코 첫 안식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한, 그의 자녀들과, 일곱세대에 이르는 그의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첫 안식일의 영광을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그리고 아담이 잊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의 마음 속에는 그 영광스럽던 땅의 첫 안식일에 대한 기억이 언제나 생생하다. 혹, 사람은 그 안식일을 잊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 안식일은 한번 있었던, 그리고 다시 있을 것의 기념비로 서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있어서 그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됨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준수하게 함으로써, 혹은 더 좋은 표현으로 인간이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 자신과 연합하기를 초청하여, 인간을 명예롭도록 한, 한 계명이었다. 그것은 율법으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본에 의해 인간에게 전달된 한 명령이다. 십계명 중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이상, 거룩함, 쉼, 하나님과의 이상적 생활의 상징으로서, 독특하게 서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상징하기 위해 히브리서에 제시된 것이 바로 이 제칠일 안식일의 개념이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제칠일을 그의 안식(히 4:3, 4)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는 제칠일一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마치셨을 때, 있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의 원래의 제칠일一을 그의 안식에 들어오는 것과 연결시키셨음이 명백하다.

 이 장에서 쓰인 “안식”에 대한, 세개의 분명한 개념이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안식에 대한 이해였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둘째, 죄로부터의 안식, 하나님안에서 쉬고, 심령에 평화를 갖는 것 영혼을 위한 쉼, 참된 회개, 셋째, 하나님 자신에 의해 고안된 안식일一거짓이나 새 안식일이 아니라, “남아 있으며”. 하나님이 복 주셨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사람에게 성화의 표로 주신, 창조시의 원래의 제칠 일(겔 20:12, 20) —그 안식에 대한 완전한 표상과 상징.


 이스라엘의 경험

 여기에서는 히브리서 4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배경을 형성하는, 안식일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경험을 주의하는 것은 재미있다. 이 역사는 명백하게 제칠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히브리서의 논술에 있어서, 안식일의 제시를 핵심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히 4:11) 말라고 경고하는 견해에서 볼때 매우 중요하다.

 이 역사는 에스겔 20장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과 연관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에스겔은 B.C. 600년경 느브갓네살에 의한 유다 침공 시대에 살았고, 예언하였다. 바벨론 왕은 이미, 예루살렘에 한번 왔다 갔다. 그리고 약간의 유대 인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 도성과 성전은 그렇게 오랫동안 보존되어 왔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발견했을 때, 히브리서가 쓰여지고, 로마가 침입하여 그 성전을 결국 파괴하려 할때는, 그 때와 다를 바가 없는 때였다. 이 위기의 때에 어떤 이스라엘 장로들이 주께 물으러 나아와, 선지자 에스겔 앞에 앉았다(겔 20:1). 주께서는 즉시로, 그들에게 그는 그들이 묻기를 용납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신, 그는 백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는 선지자에게 “그 열조의 가증한 것을 알게하라”(14절)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 열조와의 경험, 그들이 어떻게 그를 대적하여 반역하였으며, 그의 훈계를 거절하였는지 되풀이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닥친 재난은 그를 거절한 결과이며,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6절),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해 들이기로 했을 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 자신을 처음 알게 했다고 말하시면서 시작한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우상과 다른 가중한 것들을 버리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져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8절)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 남겨두고, 구원하지 않으려 하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대신에, 그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여 내었다(10절). 거기서 그는 하늘로 부터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주셨다.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11, 12절).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반역한 것 같이, 지금 광야에서도, 반역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13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쫓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렵혔”(16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관계를 끝낼, 적당함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들을 아껴보아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 하지 아니하였”(17절)다.

 출애굽했던 대부분의 세대가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은 여러 해 동안 사막에서 유리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열조의 율례를 좇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인줄 알게 하리라” (18, 20절)는 경고와 함께, 그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가 그의 열조들에게 준 똑 같은 약속을 그들에게도 주었다.

 그러나 자녀들도 그들의 열조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그들도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그러나 그 자손이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좇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는지라”(21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더 이상 하실 수 없으셨다. 그는 열조들과 자손들 모두 시험하였고, 그들 모두 실패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결정하셨다.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을 사모”(23, 24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가 그들에게 묻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리라고, 장로들에게 말하라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조의 죄로부터 돌아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의 목소리를 주의한다면, 그는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너희 가운데서 패역한 자와 내게 범죄한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찌라”(37, 38절)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중 패역한 자를 제하여 버리신 후 내가 다시 “그들을 기쁘게 받을찌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훌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가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 (40, 41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이방 중에 흩으리라던 하나님의 경고는 부분적으로 에스겔 시대에 성취되었다. 몇 년 후에,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와, 그 도성과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접하게 된다(대하 36:13, 20).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냈으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대하 36:16)하였다.

 “만회할 수 없게(No remedy).”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바벨론으로 포로잡혀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더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7년 후에, 그들은 돌아가서, 그 도성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은해의 시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앞에서와 같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무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였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 그리스도시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멓게 하였느뇨” (마 21:33-40).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선포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고 말씀하심으로 확증하셨다.

 바울이 히브리서를 쓸 때, 클라이막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성전이 파괴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이었다. 왕국은 유대인에게서 취하여져, 열매맺는 다른 나라에 주어질 것이었다. 마지막 부르심이 바울의 호소 속에서 주어졌다. 그 후에는, “만회할 수” 없을 것이었다.

 히브리서 3장,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긴 불신과 불순종의 역사이다. 이것으로서 왜 사도가 제칠일 안식일을 논의하는지가 마음 속에 명백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단축한 이유에서 언급된 특별한 계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절하고 그들에게 진노를 내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20장에서 “나의 안식일”을 여섯번이나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준수를 중요시 한다는것을 암시한다(겔 20:12, 13, 16, 20, 21, 24).


 이스라엘을 위한 마지막 부르심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안식일 준수에 주의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그들은 주의 이상의 것을 했다고 분명히 답할 수 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적으로 곡해시킨 다른 방향의 극단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안식일이 종의 멍에와, 견딜수 없는 짐이 되었다. 성화의 상징이 되는 대신에 그것은 독선과 편협한 바리새주의, 그리고 영적 교만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상징으로서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의(義)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과 그것을 지키는 것의 참된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거절하였고, 마침내는 그를 죽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판단을 호소하시며, 거의 절망하여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 5:3, 4)고 물으시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더 하실 수 없으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아직 남은 자가 있었다. 그 도성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별을 보내셨다. 그는 부조들이 안식일을 멸시한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부조들의 실패의 역사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절했는 지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는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히 4:11)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을”(히 4:4)때의 안식일, 즉 창조의 안식일에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다. 그는 이 진술을 회개에로의 부르심과 밀접히 연결시키셨다. 그래서 그가 그의 백성에게 말한 안식一하나님 안에서의 쉼, 참된 회개一을 제칠일 안식일과 연결시켰다.

 히브리서에 제시된 이 안식일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포도원을 취하여 “열매 맺는 백성”(마 21:43)에게 주려 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 “백성”이 유대인들이 한 것보다 더 멀리 나가게 될 때, 곧 전적으로 안식일을 거절하고, 거짓 안식일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날 대신 사용하려 할 때가 올 것을 아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환난 이래로 40년이지나, 성전이 파괴되고, 새 “백성”이 인수받으려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안식일, 제칠일 안식일에 관심을 불러 일으기셨고. 그것을 참된 회개와 연결시키셨다. 그래서 신약적 배경에서의 안식일 준수를 중생과, 참된 성화의 표로서 확립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창조주와 함께 새로운 언약 관계에 들어가려는 남녀 동료들을 모으고 계신다. 그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에덴이 회복되도록 인간이 그들의 첫 에덴 가정을 떠나간 이래로 돌아오라고 계속 불러오셨다. 그는 그들에게 세계가 창조되던 때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된 안식에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라는 부름은 필경 거룩함, 헌신, 성화에의 부름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거할 수는 더 더욱 없다. 이스라엘이 단순히 거주지를 옮김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은 명백하였다. 그들은 마음의 변화가 필요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불순종하고, 반역적인 백성을 받아들일 수 없으셨다. 우리는 저 불순종의 모본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