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출 33:14)고 말씀하셨다.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복된 소식이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고 거주할 정착지도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갔음에도, 그들은 아직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에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여행이 끝난 후에 이르러 올 안식, 각 사람이 자기 소유의 포도 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앉을 수 있는 그런 안식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이 안식은 단순히 그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원수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모리족, 아말렉족 브리스족, 블레셋족 그리고 다른 족속의 거인들이 거기에 있었다. 비록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앞으로 여러 해를 싸워야 하였다. 단순히 요단강을 건넌다고 해서 약속된 안식을 얻을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이것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쫒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쫒아내리라”(
출 23:23-30)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조건적으로 주어졌다.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찌라”(
22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채우기 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은 기억했지만, 조건은 잊어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발견해서, 조건을 채우고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방황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었고, 약속의 땅을 결코 보지 못하였다. 히브리서에는 이러한 경험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제칠일 안식일에 관심을 불러일으키셨다. 그리고 그것을
“저 믿지 아니하는 본을 따라 멸망”(
히 4:11)당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것과 연결시키셨다. 이스라엘의 경험의 역사를 연구하여 보면, 안식일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도 전적으로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임이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참된 안식 하나님의 안식은 영혼이 회개할 때 얻어지는 영적인 경험이다.
새로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안과 투쟁이 있다. 악한 양심은 인생을 짐으로 만든다. 마음은 사악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세상적인 야심은 동요를 계속한다. 질투와 교만은 번민과 슬픔을 가져온다.
부정이 마음을 지배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기 동료와, 자기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다. 그때 축복된 굴복의 날이 온다. 영혼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내 맡기고, 하나님께 의해 받아드림 바 된다. 전의 것은 지나갔다. 모든 것이 새로와졌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는 새 세계로 들어갔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새 이름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이 되 었다.
마침내 그의 심령 속에는 평화가 왔다. 그의 죄는 용서되었다. 마침내 그의 영혼은 쉽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양심의 비난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의 사악한 야망, 그의 질투와 교만, 그의 세상에 대한 사랑, 그의 죄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유의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하리라” (
출 33:14)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안식이었다. 예레미야가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렘 6:16)고 했을때 말한 것도 이 안식이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너의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
사 14:3)리라고 말한다.
이 안식에의 부름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들려졌으며, 아직도 들려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자들이 그것을 거절하였다. 부르심은 모든 세대에 울려 퍼졌다.
“길과 산을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 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안식을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히 4:34)고한 창조 때의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시켰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초청해 들이신 그 안식과 창조 때의 하나님 자신의 안식과의 연결은 직접적으로 명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업을 마치셨을 때, 영원한 때로부터 계획되어 온 것이 마침내 볼 수 있게 되었다.
땅은 청결한 아름다움으로 섰다. 천사들은 즐거워하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고,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 천사들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고, 명하시매 견고히 섰을 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단계적인 펼침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빛이 어둠을 뚧고 들어가는 것과,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절정으로서, 하나님께서 생명없는 진흙을 취하여 그것으로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을 때, 남자와 여자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허 상호보완하며 만났을 때, 천사들이 지금껏 창조된 것은 방금 창조된 존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였을 때 그들이 비록 아직은 희미하긴 하지만, 이 모든것이 그렇게 신비스럽게 우주에 나타나 전에 있던 하늘의 조화를 깨뜨리려 위협하는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그들이 신성의 거룩한 최상의 특권인, 생명의 창조를 증거하도록 허락하셨고, 그들 자신들이 우주로부터 죄를 씻어내는 드라마를 펼치는데. 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그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세계를 창조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 높임을 받게 되었다(
히 1:2). 그들은 그분이 창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가 생명없는 형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의 형상을 따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그리고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기이하시다. 그리고, 그들이 방금 본,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신 자도 똑 같이 기이하시다.
인간을 창조한 그 다음 날은, 모든 날들 숭에서 가장 큰 날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 창소의 의미와 가치를 희미하게 이해하였고,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모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 분은 미래를 보셨다. 그 분은 죄와 암흑의 날이 다가올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 분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옹호와, 죄로부터 온 우주의 최종적인 정결로 끝나게 될 최상의 조치가 취해질 것도 아셨다. 그 분은 모든 창조계에 한 약동이 있으며 모든 입술로부터 한 화음의 노래가, 그리고 하늘과 땅의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올리게 될 그 때를 기대하셨다.
첫 안식일 이 땅에서의 첫 안식일은 창조 역사에 있어서 절정이었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가족들이 그날 에덴에서 만났을 때, 모두는 생명의 미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더 깊은 개념을 얻었다.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는, 역사(役事)와 활동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조화와, 사랑과 사회적 생활과, 예배를 보여주신다. 여기에 다른 모든날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밝히는, 모든 날의 극치, 영광, 진주같은 날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에다 당신의 승인의 인을 치셨다. 그분은 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첫 안식일이 이 땅에 이르렀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엿새동안 일하셨다. 천사들은 경이와 경외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제 육일에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천사도 인간도 엿새 동안 일하지 않았다. 사실 아담은 그가 창조되던 날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껏해야 하루동안, 단 한가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개념에서, 에덴에서의 첫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엿새동안 일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 날은 그의 거룩한 날이었고 그의 쉽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강하고도 분명하게
“제칠 일은 여호와의 안식일”(
출 20:10).
“나의 거룩한 날”(
사 58:13).
“나의 안식”(
히 3:11; 4:3,5),
“그의 안식”(
히 3:18; 4:1, 10)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창 2:2).
“마치니(ended)”란 말은 그 원전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이루니(finished)”가 더 가깝다. 사실, 앞 절에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finished)”라고 하는데,
“이루니(finished)”는
2절에서
“마치니(ended)”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단순히 그의 일을 마치는 것 이상을 하셨다. 사람은 자기 일을 이루지 않고 멈출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의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꼽째 날에 이루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육일째 되는 날에 그의 일을 이루셨다면, 인간을 위한 안식은 없을 것이 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창조 주간에 포함시키셨다. 그래서 그의 이루어진 일이 일과 쉽을 포함하도록 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일하시고, 제칠일에 쉬셨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내가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일에 쉰 것 같이, 이제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 일에 쉴지니라. 이는 일곱째 날은 나 여호와 안식일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창조후 2천년이 지난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제칠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 었다고(was) 하지 않고, 이라고(is)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인자는 안식 일의 주인이 었다고(was) 하지 않고, 이라고(is) 한 것과도 일치한다.
완전한 생애, 완전한 조화, 완전한 사랑, 기쁨,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에덴에서의 첫 안식일의 표현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특수하고도 분명한 개념으로 주목한 바와 같이, 그 날은 그의 안식 일이 었고, 그의 쉼이었다. 그 첫 안식일이 하나님 자신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훗날 그분께서 그 날을 언급하시는 방법에서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안식에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며, 탄원하실 때
“나의 안식”은 세상을 창조할 때 그가(하나님이) 들어간 안식이며,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히 4:3, 4)고 진술하면서, 그의 안식이 의미하는 것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에덴의 안식일에서부터 시작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일반적인 쉽을 의미했다면, 그는 그렇게 진술했을 것이다. 그 분이 일곱째 날을 지적하고, 특별히 이 날이 그가 태초에 안식한 날이며, 이 날이 모든 자들을 들어오라고 초청하는
“그의 안식”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죽음이래로 30년도 더 지난 신약성경, 히브리서에 기록되었다는 것도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첫 안식일에 생각을 고정시켜 보자.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이루시고 그것을 바라보셨을 때 그는 그것이
“매우 좋음”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셨다. 왜냐하면 땅과 그가 만드신 것들이 대단히 아름다왔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바라보셨을 때, 강건함과 남자다움을 지닌 완전한 아담과 사랑스러운 하와를 보셨을 때, 천사들과 사람, 하나님의 아들들, 그룹과 스랍들을 바라보셨을 때, 그리고
“땅과 하늘의 모든 가족”이 감미로운 조화와 친교 아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가 뜻한 바 이상적이며, 순결하며, 완전하며 그리고 만족스러운 것으로서의 그 생명을 보셨다. 그래서, 그 분께서는 이 모든 장면을 음미하셨을 때, 그 분은 쉬어 평안하셨다(
출 31:17). 이상(理想)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에 대해 선지자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he wi ll rest in his love)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 3:17)고 말한다.
아담은 결코 첫 안식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한, 그의 자녀들과, 일곱세대에 이르는 그의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첫 안식일의 영광을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그리고 아담이 잊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의 마음 속에는 그 영광스럽던 땅의 첫 안식일에 대한 기억이 언제나 생생하다. 혹, 사람은 그 안식일을 잊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 안식일은 한번 있었던, 그리고 다시 있을 것의 기념비로 서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있어서 그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됨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준수하게 함으로써, 혹은 더 좋은 표현으로 인간이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 자신과 연합하기를 초청하여, 인간을 명예롭도록 한, 한 계명이었다. 그것은 율법으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본에 의해 인간에게 전달된 한 명령이다. 십계명 중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이상, 거룩함, 쉼, 하나님과의 이상적 생활의 상징으로서, 독특하게 서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상징하기 위해 히브리서에 제시된 것이 바로 이 제칠일 안식일의 개념이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제칠일을 그의 안식(
히 4:3, 4)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는 제칠일一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마치셨을 때, 있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의 원래의 제칠일一을 그의 안식에 들어오는 것과 연결시키셨음이 명백하다.
이 장에서 쓰인
“안식”에 대한, 세개의 분명한 개념이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안식에 대한 이해였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둘째, 죄로부터의 안식, 하나님안에서 쉬고, 심령에 평화를 갖는 것 영혼을 위한 쉼, 참된 회개, 셋째, 하나님 자신에 의해 고안된 안식일一거짓이나 새 안식일이 아니라,
“남아 있으며”. 하나님이 복 주셨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사람에게 성화의 표로 주신, 창조시의 원래의 제칠 일(
겔 20:12, 20) —그 안식에 대한 완전한 표상과 상징.
이스라엘의 경험 여기에서는
히브리서 4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배경을 형성하는, 안식일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경험을 주의하는 것은 재미있다. 이 역사는 명백하게 제칠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히브리서의 논술에 있어서, 안식일의 제시를 핵심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
히 4:11) 말라고 경고하는 견해에서 볼때 매우 중요하다.
이 역사는
에스겔 20장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과 연관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에스겔은 B.C. 600년경 느브갓네살에 의한 유다 침공 시대에 살았고, 예언하였다. 바벨론 왕은 이미, 예루살렘에 한번 왔다 갔다. 그리고 약간의 유대 인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 도성과 성전은 그렇게 오랫동안 보존되어 왔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발견했을 때, 히브리서가 쓰여지고, 로마가 침입하여 그 성전을 결국 파괴하려 할때는, 그 때와 다를 바가 없는 때였다. 이 위기의 때에 어떤 이스라엘 장로들이 주께 물으러 나아와, 선지자 에스겔 앞에 앉았다(
겔 20:1). 주께서는 즉시로, 그들에게 그는 그들이 묻기를 용납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신, 그는 백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는 선지자에게
“그 열조의 가증한 것을 알게하라”(
14절)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 열조와의 경험, 그들이 어떻게 그를 대적하여 반역하였으며, 그의 훈계를 거절하였는지 되풀이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닥친 재난은 그를 거절한 결과이며,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6절),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해 들이기로 했을 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 자신을 처음 알게 했다고 말하시면서 시작한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우상과 다른 가중한 것들을 버리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져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8절)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 남겨두고, 구원하지 않으려 하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대신에, 그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여 내었다(10절). 거기서 그는 하늘로 부터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주셨다.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11, 12절).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반역한 것 같이, 지금 광야에서도, 반역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13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쫓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렵혔”(
16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관계를 끝낼, 적당함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들을 아껴보아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 하지 아니하였”(
17절)다.
출애굽했던 대부분의 세대가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은 여러 해 동안 사막에서 유리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열조의 율례를 좇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인줄 알게 하리라” (
18, 20절)는 경고와 함께, 그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가 그의 열조들에게 준 똑 같은 약속을 그들에게도 주었다.
그러나 자녀들도 그들의 열조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그들도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그러나 그 자손이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좇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는지라”(
21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더 이상 하실 수 없으셨다. 그는 열조들과 자손들 모두 시험하였고, 그들 모두 실패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결정하셨다.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을 사모”(
23, 24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가 그들에게 묻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리라고, 장로들에게 말하라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조의 죄로부터 돌아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의 목소리를 주의한다면, 그는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너희 가운데서 패역한 자와 내게 범죄한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찌라”(
37, 38절)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중 패역한 자를 제하여 버리신 후 내가 다시
“그들을 기쁘게 받을찌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훌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가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 (
40, 41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이방 중에 흩으리라던 하나님의 경고는 부분적으로 에스겔 시대에 성취되었다. 몇 년 후에,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와, 그 도성과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접하게 된다(
대하 36:13, 20).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냈으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대하 36:16)하였다.
“만회할 수 없게(No remedy).”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바벨론으로 포로잡혀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더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7년 후에, 그들은 돌아가서, 그 도성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은해의 시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앞에서와 같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무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였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 그리스도시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멓게 하였느뇨” (
마 21:33-40).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선포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3)고 말씀하심으로 확증하셨다.
바울이 히브리서를 쓸 때, 클라이막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성전이 파괴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이었다. 왕국은 유대인에게서 취하여져, 열매맺는 다른 나라에 주어질 것이었다. 마지막 부르심이 바울의 호소 속에서 주어졌다. 그 후에는,
“만회할 수” 없을 것이었다.
히브리서 3장,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긴 불신과 불순종의 역사이다. 이것으로서 왜 사도가 제칠일 안식일을 논의하는지가 마음 속에 명백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단축한 이유에서 언급된 특별한 계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절하고 그들에게 진노를 내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20장에서
“나의 안식일”을 여섯번이나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준수를 중요시 한다는것을 암시한다(
겔 20:12, 13, 16, 20, 21, 24).
이스라엘을 위한 마지막 부르심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안식일 준수에 주의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그들은 주의 이상의 것을 했다고 분명히 답할 수 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적으로 곡해시킨 다른 방향의 극단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안식일이 종의 멍에와, 견딜수 없는 짐이 되었다. 성화의 상징이 되는 대신에 그것은 독선과 편협한 바리새주의, 그리고 영적 교만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상징으로서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의(義)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과 그것을 지키는 것의 참된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거절하였고, 마침내는 그를 죽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판단을 호소하시며, 거의 절망하여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사 5:3, 4)고 물으시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더 하실 수 없으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아직 남은 자가 있었다. 그 도성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별을 보내셨다. 그는 부조들이 안식일을 멸시한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부조들의 실패의 역사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절했는 지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는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히 4:11)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을”(
히 4:4)때의 안식일, 즉 창조의 안식일에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다. 그는 이 진술을 회개에로의 부르심과 밀접히 연결시키셨다. 그래서 그가 그의 백성에게 말한 안식一하나님 안에서의 쉼, 참된 회개一을 제칠일 안식일과 연결시켰다.
히브리서에 제시된 이 안식일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포도원을 취하여
“열매 맺는 백성”(
마 21:43)에게 주려 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
“백성”이 유대인들이 한 것보다 더 멀리 나가게 될 때, 곧 전적으로 안식일을 거절하고, 거짓 안식일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날 대신 사용하려 할 때가 올 것을 아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환난 이래로 40년이지나, 성전이 파괴되고, 새
“백성”이 인수받으려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안식일, 제칠일 안식일에 관심을 불러 일으기셨고. 그것을 참된 회개와 연결시키셨다. 그래서 신약적 배경에서의 안식일 준수를 중생과, 참된 성화의 표로서 확립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창조주와 함께 새로운 언약 관계에 들어가려는 남녀 동료들을 모으고 계신다. 그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에덴이 회복되도록 인간이 그들의 첫 에덴 가정을 떠나간 이래로 돌아오라고 계속 불러오셨다. 그는 그들에게 세계가 창조되던 때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된 안식에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라는 부름은 필경 거룩함, 헌신, 성화에의 부름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거할 수는 더 더욱 없다. 이스라엘이 단순히 거주지를 옮김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은 명백하였다. 그들은 마음의 변화가 필요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불순종하고, 반역적인 백성을 받아들일 수 없으셨다. 우리는 저 불순종의 모본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