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은 그리스도를
“영광의 광채”로 소개한다. 분사
“∙∙∙임”(being)은 영원한, 시간 없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 1:1의
“계시니라”와 같은 의미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시다(
14절). 그는 태초에 그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니다. 태초에 그는
계셨다. 그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육신이
되셨다. 그 이전에는 육신이 아니셨다. 대조시킨다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지 않으셨다. 그는 언제나
계셨다. 이것은 그의 개성의 핵심적이며 영원한 근거를 형성한다.
“광채”는 밝허 빛남(outshining), 광휘(outraying), 반사(reflection)등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일광이 태양과 갖는 똑같은 관계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다. 빛은 태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태양 역시 그 빛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들은 아버지를 나타내며, 아버지의 광채이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 우리가 태양을 볼 때 태양보다는 그 빛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가시적이시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
딤전 6:16)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출 33:18; 34:6, 7 참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도장이 밀납 위에 그대로 도장 모양을 부각시키듯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이시다.
“형상”은 헬라어
카락테르의 번역인데, 이 말에서 우리는
“성품”(character)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원래
카락테르는 조각 또는 각인(刻印)을 위한 도구를 의미했다. 후에 와서 각인(marking)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같은 발달을 영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인”(seal)은 인(印)받는 물건에 자국을 남기는 도구를 뜻한다. 역시 도장 자국도 의미한다. 그래서
“도장(stamp)”은 도장과 도장 자국을 의미한다.
헬라어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는
“개체”(person)로 번역되는데,
히브리서 11:1에
“실상”이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한편,
고린도후서 11:17, 히브리서 3:14에
“기한없이, 확실한”으로 번역되었다. 그 본래의 의미는
“아래서는 것”으로 그 위에 무엇인가 놓을 수 있는 바 하부 구조, 지주, 기초를 말한다. 그러므로 견고함, 확실함, 확신, 확고함 등을 뜻한다. 상상과 공상과는 대조적으로 실재를 의미하며 사물의 본질과 사람의 내밀한 본성인 참 자아를 말할때 사용된다.
시편 69:2에서는
“설 곳”(standing) 이란 말로 그 의미가 잘 표현되어 있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 가니 큰 물이 내게 넘 치나이다.” 에스겔 26:11에서는 같은 말이지만
“거리”(ground)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와 형상이라고 일컬어질 때, 우리는 외적인 닮음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내밀한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형상이다. 그 위에 인간은 확신있게 세울 수도 있고,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신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러하신 대로 아들도 그러하시다. 본질과 품성과,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도 보았느니라”(
요 14:9).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라”(
요 10:30).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붙드시고” 계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붙든다”는 말은 단지 무엇인가를 넘어지지 않게 잡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하여 지고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 단어는 지탱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한편, 운동. 인도, 목적있는 전진 등의 추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붙드시고 천체를 지정한 길로 다니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다른 곳에 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7)고 말씀한다.
“붙든다”(upholding)는 말은 단지
“서 있다”(consist)는 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 목적을 향해 계획하며, 예정된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포함한다. 설계된 건물을 완성해 가고 있는 한 일군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잘 나타낸다.
이 정의는 물질 세계를 붙드는 단순한 능력이란 개념으로부터 계획을 가지시고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계신 지적인 존재의 개념으로 변한다. 그리스도가 붙드신다고 하는 바
“만물”이 란 말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을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무게만 나가는 저울추를 나르는 것 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의
“붙드심”은 수 백만 개의 세계들과 그들의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에 대한 감독을 포함한다.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수없는 세계를 만드시고 공간에서 돌도록 보내신 것으로 끝장나버린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 특별한 어떤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롬 16:25) 나타난 비밀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이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9, 10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이 포함하는 것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고, 때가 이르면 그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한다. 최선의 사본에서
“우리의”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생략되어야 한다.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가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 더 나은 것은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신 것은 진리다. 그러나 기자는 한층 더 포괄적인 관점에 선다. 그는 나중에
“우리의” 죄를 충분히 다루어 논의할 것이다.
“그 혼자서”(by himself: 한글 성경에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음)는 어떤 이들에겐 의심의 여지를 던져주기에 주목해 볼만 하다.
“죄의 정결”이라는 헬라어 형태는
“그 혼자서”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그가 혼자서 하셨다. 그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조력자가 없었다. 그는 포도즙틀을 홀로 밟았다(
사 63:3).
“죄의 정결”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중간태로 쓰였다. 중간태에서는 동작이 주어에게로 돌아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정결케” 하셨다고 말할 때, 첫 의미는 그것이 그 자신을 언급하고,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그는 시험을 극복하셨다. 비록 세상의 죄가 그 위에 놓였다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악의 제안을 물리치셨다. 사단은 아무데서도 발붙일 곳을 얻지 못했다. 일천번의 공격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이것이
“죄의 정결”의 첫 의미다. 주지된 바와 같이 최고(最古) 사본에
“혼자서”라는 말이 없다하더라도 헬라어 중간태에서는 같은 의미가 함축된다. 그래서
“혼자서”나
“스스로”라고 넉넉히 번역될 수 있다.
이 귀절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속격(屬格)
죄의 정결은,
“첫째, 죄를 깨끗게 함, 즉 죄를 제거함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8:3과 욥기 7:21(출 30:10)을 비교하라. 둘째, (사람을) 죄로부터 깨꿋게함을 뜻할 수도 있다. 히브리서 9:14과 비교하라”라고 말한다(B. F. 웨스트코트, 히브리서, p. 15).
그리스도는 그의 속죄로서 죄의 정결과 죄
로부터 사람을 정결케 하는 일을 성취하셨다. 죄를 씻는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죄인의 정결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마지막 영혼이 구원받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희생자와 제물로서의 그의 일을 마치셨다. 그는 그의 피를 흘리셨고 그래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도록 마련하셨다(
눅 13:1). 그러나 중보자로서 그의 사업은 십자가 위에서 결말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변호자이시다. 그분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분이시다(
히 7:25). 그리스도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또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사업을 마치셨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속에 대한 매우 제한된 그리고 불완전한 견해를 가진 것이다.
구속의 어떤 면들은 더 깊은 숙고를 요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정결을 이루셨는데도 죄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죄의 정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그리스도는 죄의 정결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끝장내게 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은 예언상 칠십 주일 기간 내에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때, 위의 문제는 한층 더 중요하게 된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끌나며 최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단 9:24).
죄를 끝낸다는 말은 단지 용서한다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생애에서부터 죄를 뿌리채 뽑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성화, 모든 악의 근절, 완전히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생애를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이었고, 천사가 말한 바 정해진 시간 내에 그는 이 일을 이루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셨다. 그를 위해 준비된 육체 안에서 인간이 시험당하듯이 시험 받으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여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고” 위와 같이 함으로 그는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수 있었다(
사 53).
이것은 그리스도를 죄지고 가는 자로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그는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그를 위해 예비된 몸 안에서 모든 시험을 대해 승리하셨고 사단의 모든 전진을 물리치셨고, 모든 장애물을 이기셨기에 마침 내 사탄의 화살통에는 그를 겨눌 살이 남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상관할 것이 없”도다(
요 14:30).
그리스도께서는 자진해서 우리의 죄들을 취하셨다. 우리가 당해야 만하는 모든 시험을 당하셨다. 사탄의 화살이 모자라게 되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바 하나님께로부터 온 바로 그 도움으로 그는 죄를 저항하는 것과 계속해서 모든 시험을 승리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셨다. 사단이 그토록 더럽히려고 시도했던 그리스도의 몸—성전(body temple)은 오점이 없었다.
그의 사업의 이 부분은 십자가 사건 전에 마무리를 지었다. 그는 그의 몸에서 죄를 무효화시켰고 힘없게, 무능하게 만들었다. 사단은 모든 악한 조작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였다.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밀사들에게 도전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요 8:46)고 그의 공중 봉사 막바지에 이르러 겟세마네와 골고다를 앞두고 그는 확신있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나이다(
요 17:4). 정해진 시간 안에 그에게 주어진 대로
“죄를 끝”장 내셨다. 이 일을 그는 육체 가운데서 십자가 사건 전에 이루셨다. 이것이 그의 중보사업의 첫 국면이다.
그의 사업의 둘째 국면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소리쳤을 때 끝이 났다(
요 19:30). 이 둘째 국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대신해 고통당하시고 죄값에 합당한 벌을 치루시는 목적으로 그들의 죄를 지셨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를 향했을 때, 그는 아버지와의 예전 관계와는 다른 관계 하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버지의 보호와 돌보심에 의존했었다. 비록 심하게 시련을 당했지만 항상 그는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서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그는 죄인이 받아야 마땅한 대우를 받게 되어 있었고 영혼의 고뇌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친 후에 마침내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막 15:34).
그리스도께서 이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과거에 시험당했 때에 하나님은 항상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소망과 위로가 제거되어야만 하였다.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식이 여태까지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는데 바로 이 동기가 제거된다면, 모든 동기를 자극하는 것들이 제거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길 때 뒷속셈이 있다고 하며 하나님께 도전한 적이 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하면서 그는 냉소적으로 물었다(
욥 1:9). 사단의 고소가 거짓됨을 보여주시려고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용인하셨다. 그는 가능한 모든 고초를 가했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았다. 마침내 사단은 패배하여 뒤로 물러갔다. 욥은 시험을 견디고 사단의 고소가 거짓임을 증명하였다.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그는 외쳤다(
욥 13:15, 난외주).
비슷한 시험을 그리스도는 통과해야만 하셨다. 모든 동기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욥이 시험받은 대로 그도 당해야 했다. 오히려 욥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시험을 당하셨다. 겟세마네와 골고다는 그 시험의 극심함과 결과를 증거하고 있다. 어느 모로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린 바 되어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다. 다음 말씀을 들어 보자.
“구세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다. 그가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도 그에게 주어진 바 되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그 희생을 가납하셨다는 것도 그에게 말해진 바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히 미워하시므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가 더 간청되지 않게 될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민을 느끼셨다. 그가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멸시킨 것은 인류의 대리자이신 그에게 아버지의 분노를 가져오게 한 죄의식이었다”(시대의 소망, II권, 28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패배의 느낌으로 죽으셨다고 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승리자로 죽으셨다.
“하나님께 표면상으로 버림받은 무서운 암흑 중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고통의 잔을 남김 없이 마시셨다. 이 무서운 시간 동안 그는 전에 그에게 주신 바 아버지께서 받으신다는 증거에 의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품성을 잘 알고 계셨으며 그의 공의와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는 순종하는 것을 그의 기름으로 삼아오던 그분에게 믿음으로 의지하였다. 그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었을 때 아버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은 없어졌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는 승리자가 되셨다”(시대의 소망, III권, 292. 293).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을 때 그는 그의 사업의 둘째 국면을 완성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셋째 국면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그의 법정과 이 땅에 있는 의의 성도들 중에 그가 반드시 해야 하는 시범을 포함한다. 이 일은 하늘 성소에서 그가 해야할 일과 밀접히 관계되는, 우리의 구원에 핵심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완전히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의 몸으로써 시범 보이셨다. 그러나 그의 승리가 아버지와 갖는 유일한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게끔 된 단 하나의 시범이었는가 아니면 남들도 그가 한 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유발시킨다. 인간이 그가 극복한 것처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사업을 종결짓고 그것을 인간에게 유효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시범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도 그리스도가 이긴 것같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시범은 영원전부터 오랫동안 구상되어 온 것이었지만 실행단계는 늦추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할 때가 찼다. 144,000명 가운데서 최종적 시범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랐고, 따르고 있다(
계 14:4). 그들은 중보자 없이 서서 죽음을 대하지만 신실하게 남는다.
“그가 성소를 떠나실 때 어둠은 지상 거민 위에 덮인다. 그 무서운 시간에 의인들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증보자 없이 살아야만 한다”(각시대의 대 쟁투 614, 영문). 그들은 욥이 말한 것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음흉한 동기가 있다는 사단의 소송에 충분히 답한다. 사단의 조소하는 도전은 마지막 세대의 성도들과 맞닥뜨려질 것이다. 대답이 주어지면 마침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업을 성취하게 되고 그의 성도들로 인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언은 이루어진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에는 세 국면이 있다. 첫째로 그는 죄를 직면했고 정복했다. 단 한번도 그는 지지 않았다. 그의 순결한 영혼은 한점 죄의 더러움으로도 더렵혀지지 않았다. 그의 몸—성전은 거룩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이 단계는 겟세마네 동산 전에서 끝이 났다.
둘째 국면은 겟세마네와 골고다를 포함한다. 거기서 그가 맞서서 정복한 죄가 그의 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그는 죄를 십자가까지 지고 가서 없애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히브리서 9:26의
“없게 하”신다는 뜻이다. 첫째 국면에서 죄를 정복하고, 생애 가운데서 제거하는 목적으로 죄를 지셨다. 둘째 국면에서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죽으시려는 목적으로 죄를 지셨다(
히 2:14).
제 3 국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가졌던 같은 도움으로 인간도 그가 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범하신다. 이 국면은 하나님 우편에서 그의 하시는 일 즉 대제사장 봉사와 사단과의 최후 투쟁에서 그의 성도들을 최종적으로 나타내심과,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포함한다. 그 후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동산에서 뱀에게 선포된 사형 명령이 수행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시간의 모든 전진을 물리쳤을 때 확실하게 되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그것은 이중적으로 확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망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망시켰다. 사단이 변화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죽인 것같이 성도들을 죽일 것이며. 하나님의 성 아니 하나님까지라도 공격하려는 거리낌 없는 태도를 사단이 나타내 보일 때 그는 마침내 처형당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죄도 죄인도 없게 될 것이고 죄의 완전한 끝이 이를 것이다.
히브리서 1:13이 언급하는 바는 첫째와 둘째 국면이다. 이 두 국면은 죄를 깨꿋이 하는 것에 포함한다. 제3국면은 하늘 성소와 지상 교회에서 현재 진행중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생애를 통해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죄와 사단을 멸망시켰다. 그는 지금 지상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죄를 제거하시고 멸망시키신다. 이것이 참 성소를 정결케 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그의 사업을 마치셨을 때 그는
“권능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앉는다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공식적인 것으로 취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권한을 위임하는뜻의 단어다. 공무를 집행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 대관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일을 마치고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좀 엉뚱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대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선포하시고 그의 우편의 가장높은 자리를 주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중보자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권한을 주신다. 이것에 세째 국민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하늘 성소와 지상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을 포함한다. 그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바 7장 25절의 국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그리스도의 대관식은 그의 승천 직후에 있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조건을 성취했다. 그는 완전한 생애를 사셨고, 사단을 이겼다. 그는 고통당했고 결국 갈바리에서 죽었다. 피를 흘렸고, 그 피에 의해, 그 피를 통해 하늘의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제사장으로서 그의 사업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대관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직에 대한 그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그를 우편에 앉허셨다. 신인(神人:God-man)은 우주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자리를 취하신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은 존귀와 권세의 자리이다. 이 자리는 그리스도가 죄를 정결케 한 후에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지상에서 할바 그의 사업을 마쳤다. 그는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인간을 대신해서 말하고 대신해서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리고 물론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 후까지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히 8:14).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었더라면,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3절). 이
“무슨 드릴 것”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였다(
히 9:12). 갈바리에서 그가 피를 흘리자마자 그는
“드릴 무엇”을 갖게 되었다. 그제사 그는 제사장 봉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승천하자마자 그를 그의 우편에 세우셨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다. 그리고 하늘 성소에서 인간을 위해 중재하시려고 준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