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1 장 — 그리스도의 신성
 주후 제 1세기의 60년대 초반에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사도들 중 몇은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고, 이곳 저곳을 다니시는 모습을 본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승천 현장에서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들은 이들도 있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사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예수께서는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제자들은 그의 돌아오심이 오래 지체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기록되던 그 때에는 이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주님께로부터 더 이상 다른 말씀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의 돌아오심에 관한 징조를 보기 위해 헛되이 하늘만 뚫어지게 바라보곤 하였다. 그는 왜 오시지 않았을까? 무엇 때문에 늦어지는 걸까? 과연 오실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에 대해 명백히 이해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전망도 알 길이 없었다. 그 계획은 수 세기, 아니 수천 년이 지나야 끝이 온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반드시 먼저 될 일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씀들은 겨우 희미하게나 이해되었을 따름이었다. 신자들은 속한 재림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에 집착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시고 그들 세대에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그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관해 충분히 아는 일은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를 밝힐 뿐만 아니라, 제전적(祭典的) 율법의 폐지와 성전 봉사의 종식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식들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것이며,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폐지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제전적 율법을 폐지하셨다면,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자는 제 1장에서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히 1:1-3 (1:1-3)
 이 절들은 전체 서신의 요약을 담고 있다. 이 말씀들은 만물의 후사로 세워진 뛰어난 아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 만물을 불드시는 자,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제사장—왕을 소개한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해 말씀하시고,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으며, 왕으로서는 높은 위엄의 보좌에 참여하신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옛적에······ 하나님이∙∙∙말씀하셨다
 많은 비평가들은 구약의 기록을 영감받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영감을 인정한다면 열등(劣等)한 영감만은 인정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시작하는 진술을 숙고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은 구약에서 말씀하신 분으로 소개된다. 단지 그 책들은 욥, 이사야, 말라기 등의 이름만 붙었을 따름이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히 12:25)는 권고가 여기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옛 사람들로 말씀하셨다면, 그들이 구약의 기록을 팽개쳐버릴 때 사람들이 거역하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의에 대해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6, 47).

 원어로는 선지자 말씀하셨다고 읽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팔을 불듯이 선지자들을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인간의 입술이 단어들을 구사했고 인간의 언어로 옷을 입혔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말씀하셨다. 영어에는 이 원어의 표현과 똑 같은 표현은 없지만, 옛적의 계시들은 단편적이고 많은 종류가 있었다는 사상만은 명확하다. 이상과 꿈을 통하여, 재난과 전쟁 속에서, 고통과 기근에서, 하늘로부터 직접적인 음성으로 벽에 글씨를 씀으로, 지진과 불로, 세미하고 작은 음성으로, 제사장과 선지자를 통하여, 왕과 농부를 통하여, 말못하는 짐승과 배도한 선지자를 통하여, 하늘의 징조와 땅의 재난을 통하여, 이런 것들과 다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분이 무슨 방법을 택해서 그의 기별을 전달했든지,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 이셨다. 바로 이것이 구약의 기록을 매우 높은 경지에 올려 놓는다.
히브리서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셨다. 전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같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의 아들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사자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선지자의 대열에 세운다.

 그 아들이 “후사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때가 오면 아버지께서 스스로 보좌에서 물러나서 제 2 인자의 자리에 앉고 아들이 영원히 왕국을 수중에 넣을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나님이 양도한 어떤 능력들이 있다. 그리고 아들이 현재로 그 능력을 구사하고 있으나 결국에 가서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할 것이고, 이로써 아버지는 만유의 주가 되실 것이다(고전 15:27, 28). 히 1:2에 대한 부가적 설명을 보시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만물은 그의 창조의 권리로 인해 그의 소유다. 그러므로 아들이 후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언급은 그를 새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급된 상속물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왕국을 말한다. 아담은 죄를 범함으로 그것을 잃었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구속하셨다.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그 인생의 첫 대표는 아담이었다(시 115:16). 아담이 범죄한 후,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권리를 상실했다. 그래서 그는 땅에서 주인이 되는 대신에 순례자와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순간 그리스도가 개입하였다. 그는 사람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생명의 조건을 충족시켰고, 아담의 수치스러운 실패를 구속하셨으며, 둘째 아담이 되셨다. 모든 요구를 이루셨으므로 그는 후사가 되었고, 후사로 세우심을 받았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도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갈 4:7). 아브라함이 “세계의 후사가”된 것은 바로 그런식이었고,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다(롬 4:13; 8:17). 약속은 이러하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여” 그리고 마침내 신실한 자들은 이런 환영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며, 나아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5:5; 25:34).

 그러므로 아들이 만유의 후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를 새 아담, 둘째 아담으로 받아들이시고, 넘어져 버린 첫째 아담 대신에 그를 인류의 대표로 취하시고, 아담이 상실한 나라가 그에게 임할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였다. 아담의 자리를 취하시고 후사로 세움을 받은 이가 바로 만유의 창조주이시다.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아들을 그의 중재인으로 사용하셨다. 도구 같이 사용하지 않으시고 동역자로 하셨다.

 그리스도가 창조주라는 것은 신성의 세 분이 일을 분담하셨다는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따로 할 일이 있고, 아들도, 그리고 아버지도 따로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는 인간의 구속주가 되어야 할 분은 역시 인간의 창조주이어야 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을 만드셨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세상”(worlds)은 물질적 창조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우주의 영적, 지적 힘까지도 포함한다. 그런 것은 바울의 진술에서 암시된다. “만물이 그에게서 하늘과 창조되데,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았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고”(골 1:16). 물질 세계의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정사와 질서와 법도 만드신 분이시다. “모든 것이 그로 인해 구성된다” 혹은 메이어(Meyer)와 앨포드(Alford)가 제시하는 대로 “그 안에서 우주는 그 지속성과 질서를 지닌다”(바리오룸(Variorum)성경 골 1:17 주석).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도록 지도한 모든 법과 목적이 그들의 조우점(遺遇點)인 영원한 말씀, 곧 그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M. R. 빈센트, 단어 연구 제 4 권, p. 381).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보좌 주위를 맴도는 수 백만, 수 억만 개의 세계들의 거대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개념이 폭 넓어진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훌륭하신 분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에 대해 언급된 바,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 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셨”(사 45:18)다는 명백한 일반적인 원칙을 우주에 적용시키면 우리의 생각은 더 넓은 구석까지 미치게 된다. 이 많은 세계들에 사람들이 거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곳에 보좌와 정사와 권세와 능력(골 1:16), 즉 질서잡힌 정부가 있으며, 그것들은 오로지 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를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어떤 느낌이 우리의 상상력에 도전해 온다. 바로 이 분이 상실한 사람들올 찾아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그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시인과 함께 경탄하며 소리를 높인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우주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천연계의 법칙도 정하셨고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본성을 지배하는 법칙도 만드셨다. 그는 또한 생애의 지침으로서의 십계명을 주신 바로 그분이시다.

 범죄자의 생명을 요구하는 법을, 후에 인간 범죄의 형벌을 몸소 당하셔야만 하는 그분이 제정했던 것은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법을 주시고 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남들을 위해 설정하신 처지에서 살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실패 위에, 바로 그가 제정하신 형벌을 당하려고 인간의 자리를 택하셨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하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분은 자신이 기꺼이 하지 않으신 것을 아무에게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인류의 최후의 심판자, 인간 운명의 조정자로서의 자격을 가지신 것이다.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절은 그리스도를 “영광의 광채”로 소개한다. 분사 “∙∙∙임”(being)은 영원한, 시간 없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1계시니라와 같은 의미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시다(14절). 그는 태초에 그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니다. 태초에 그는 계셨다. 그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육신이 되셨다. 그 이전에는 육신이 아니셨다. 대조시킨다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지 않으셨다. 그는 언제나 계셨다. 이것은 그의 개성의 핵심적이며 영원한 근거를 형성한다.

 “광채”는 밝허 빛남(outshining), 광휘(outraying), 반사(reflection)등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일광이 태양과 갖는 똑같은 관계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다. 빛은 태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태양 역시 그 빛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들은 아버지를 나타내며, 아버지의 광채이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 우리가 태양을 볼 때 태양보다는 그 빛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가시적이시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딤전 6:16)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속성들의 총체이다(출 33:18; 34:6, 7 참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도장이 밀납 위에 그대로 도장 모양을 부각시키듯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이시다. “형상”은 헬라어 카락테르의 번역인데, 이 말에서 우리는 “성품”(character)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원래 카락테르는 조각 또는 각인(刻印)을 위한 도구를 의미했다. 후에 와서 각인(marking)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같은 발달을 영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인”(seal)은 인(印)받는 물건에 자국을 남기는 도구를 뜻한다. 역시 도장 자국도 의미한다. 그래서 “도장(stamp)”은 도장과 도장 자국을 의미한다.

 헬라어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는 “개체”(person)로 번역되는데, 히브리서 11:1“실상”이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한편, 고린도후서 11:17, 히브리서 3:14“기한없이, 확실한”으로 번역되었다. 그 본래의 의미는 “아래서는 것”으로 그 위에 무엇인가 놓을 수 있는 바 하부 구조, 지주, 기초를 말한다. 그러므로 견고함, 확실함, 확신, 확고함 등을 뜻한다. 상상과 공상과는 대조적으로 실재를 의미하며 사물의 본질과 사람의 내밀한 본성인 참 자아를 말할때 사용된다. 시편 69:2에서는 “설 곳”(standing) 이란 말로 그 의미가 잘 표현되어 있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 가니 큰 물이 내게 넘 치나이다.” 에스겔 26:11에서는 같은 말이지만 “거리”(ground)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와 형상이라고 일컬어질 때, 우리는 외적인 닮음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내밀한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형상이다. 그 위에 인간은 확신있게 세울 수도 있고,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신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러하신 대로 아들도 그러하시다. 본질과 품성과,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도 보았느니라”(요 14:9).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라”(요 10:30).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붙드시고” 계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붙든다”는 말은 단지 무엇인가를 넘어지지 않게 잡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하여 지고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 단어는 지탱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한편, 운동. 인도, 목적있는 전진 등의 추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붙드시고 천체를 지정한 길로 다니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다른 곳에 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고 말씀한다. “붙든다”(upholding)는 말은 단지 “서 있다”(consist)는 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 목적을 향해 계획하며, 예정된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포함한다. 설계된 건물을 완성해 가고 있는 한 일군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잘 나타낸다.

 이 정의는 물질 세계를 붙드는 단순한 능력이란 개념으로부터 계획을 가지시고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계신 지적인 존재의 개념으로 변한다. 그리스도가 붙드신다고 하는 바 “만물”이 란 말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을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무게만 나가는 저울추를 나르는 것 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의 “붙드심”은 수 백만 개의 세계들과 그들의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에 대한 감독을 포함한다.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수없는 세계를 만드시고 공간에서 돌도록 보내신 것으로 끝장나버린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 특별한 어떤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롬 16:25) 나타난 비밀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이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9, 10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이 포함하는 것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고, 때가 이르면 그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한다. 최선의 사본에서 “우리의”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생략되어야 한다.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가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 더 나은 것은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신 것은 진리다. 그러나 기자는 한층 더 포괄적인 관점에 선다. 그는 나중에 “우리의” 죄를 충분히 다루어 논의할 것이다. “그 혼자서”(by himself: 한글 성경에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음)는 어떤 이들에겐 의심의 여지를 던져주기에 주목해 볼만 하다. “죄의 정결”이라는 헬라어 형태는 “그 혼자서”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그가 혼자서 하셨다. 그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조력자가 없었다. 그는 포도즙틀을 홀로 밟았다(사 63:3).

 “죄의 정결”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중간태로 쓰였다. 중간태에서는 동작이 주어에게로 돌아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정결케” 하셨다고 말할 때, 첫 의미는 그것이 그 자신을 언급하고,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그는 시험을 극복하셨다. 비록 세상의 죄가 그 위에 놓였다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악의 제안을 물리치셨다. 사단은 아무데서도 발붙일 곳을 얻지 못했다. 일천번의 공격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이것이 “죄의 정결”의 첫 의미다. 주지된 바와 같이 최고(最古) 사본에 “혼자서”라는 말이 없다하더라도 헬라어 중간태에서는 같은 의미가 함축된다. 그래서 “혼자서”“스스로”라고 넉넉히 번역될 수 있다.

 이 귀절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속격(屬格) 죄의 정결은, “첫째, 죄를 깨끗게 함, 즉 죄를 제거함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8:3욥기 7:21(출 30:10)을 비교하라. 둘째, (사람을) 죄로부터 깨꿋게함을 뜻할 수도 있다. 히브리서 9:14과 비교하라”라고 말한다(B. F. 웨스트코트, 히브리서, p. 15).

 그리스도는 그의 속죄로서 죄의 정결과 죄로부터 사람을 정결케 하는 일을 성취하셨다. 죄를 씻는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죄인의 정결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마지막 영혼이 구원받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희생자와 제물로서의 그의 일을 마치셨다. 그는 그의 피를 흘리셨고 그래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도록 마련하셨다(눅 13:1). 그러나 중보자로서 그의 사업은 십자가 위에서 결말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변호자이시다. 그분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분이시다(히 7:25). 그리스도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또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사업을 마치셨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속에 대한 매우 제한된 그리고 불완전한 견해를 가진 것이다.

 구속의 어떤 면들은 더 깊은 숙고를 요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정결을 이루셨는데도 죄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죄의 정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그리스도는 죄의 정결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끝장내게 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은 예언상 칠십 주일 기간 내에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때, 위의 문제는 한층 더 중요하게 된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끌나며 최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죄를 끝낸다는 말은 단지 용서한다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생애에서부터 죄를 뿌리채 뽑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성화, 모든 악의 근절, 완전히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생애를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이었고, 천사가 말한 바 정해진 시간 내에 그는 이 일을 이루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셨다. 그를 위해 준비된 육체 안에서 인간이 시험당하듯이 시험 받으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여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고” 위와 같이 함으로 그는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수 있었다(사 53).

 이것은 그리스도를 죄지고 가는 자로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는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를 위해 예비된 몸 안에서 모든 시험을 대해 승리하셨고 사단의 모든 전진을 물리치셨고, 모든 장애물을 이기셨기에 마침 내 사탄의 화살통에는 그를 겨눌 살이 남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상관할 것이 없”도다(요 14:30).

 그리스도께서는 자진해서 우리의 죄들을 취하셨다. 우리가 당해야 만하는 모든 시험을 당하셨다. 사탄의 화살이 모자라게 되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바 하나님께로부터 온 바로 그 도움으로 그는 죄를 저항하는 것과 계속해서 모든 시험을 승리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셨다. 사단이 그토록 더럽히려고 시도했던 그리스도의 몸—성전(body temple)은 오점이 없었다.

 그의 사업의 이 부분은 십자가 사건 전에 마무리를 지었다. 그는 그의 몸에서 죄를 무효화시켰고 힘없게, 무능하게 만들었다. 사단은 모든 악한 조작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였다.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밀사들에게 도전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요 8:46)고 그의 공중 봉사 막바지에 이르러 겟세마네와 골고다를 앞두고 그는 확신있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나이다(요 17:4). 정해진 시간 안에 그에게 주어진 대로 “죄를 끝”장 내셨다. 이 일을 그는 육체 가운데서 십자가 사건 전에 이루셨다. 이것이 그의 중보사업의 첫 국면이다.

 그의 사업의 둘째 국면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십자가에서“다 이루었다”고 소리쳤을 때 끝이 났다(요 19:30). 이 둘째 국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대신해 고통당하시고 죄값에 합당한 벌을 치루시는 목적으로 그들의 죄를 지셨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를 향했을 때, 그는 아버지와의 예전 관계와는 다른 관계 하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버지의 보호와 돌보심에 의존했었다. 비록 심하게 시련을 당했지만 항상 그는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서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그는 죄인이 받아야 마땅한 대우를 받게 되어 있었고 영혼의 고뇌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친 후에 마침내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막 15:34).

 그리스도께서 이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과거에 시험당했 때에 하나님은 항상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소망과 위로가 제거되어야만 하였다.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식이 여태까지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는데 바로 이 동기가 제거된다면, 모든 동기를 자극하는 것들이 제거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길 때 뒷속셈이 있다고 하며 하나님께 도전한 적이 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하면서 그는 냉소적으로 물었다(욥 1:9). 사단의 고소가 거짓됨을 보여주시려고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용인하셨다. 그는 가능한 모든 고초를 가했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았다. 마침내 사단은 패배하여 뒤로 물러갔다. 욥은 시험을 견디고 사단의 고소가 거짓임을 증명하였다.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그는 외쳤다(욥 13:15, 난외주).

 비슷한 시험을 그리스도는 통과해야만 하셨다. 모든 동기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욥이 시험받은 대로 그도 당해야 했다. 오히려 욥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시험을 당하셨다. 겟세마네와 골고다는 그 시험의 극심함과 결과를 증거하고 있다. 어느 모로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린 바 되어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다. 다음 말씀을 들어 보자.

 “구세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다. 그가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도 그에게 주어진 바 되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그 희생을 가납하셨다는 것도 그에게 말해진 바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히 미워하시므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가 더 간청되지 않게 될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민을 느끼셨다. 그가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멸시킨 것은 인류의 대리자이신 그에게 아버지의 분노를 가져오게 한 죄의식이었다”(시대의 소망, II권, 28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패배의 느낌으로 죽으셨다고 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승리자로 죽으셨다.

 “하나님께 표면상으로 버림받은 무서운 암흑 중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고통의 잔을 남김 없이 마시셨다. 이 무서운 시간 동안 그는 전에 그에게 주신 바 아버지께서 받으신다는 증거에 의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품성을 잘 알고 계셨으며 그의 공의와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는 순종하는 것을 그의 기름으로 삼아오던 그분에게 믿음으로 의지하였다. 그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었을 때 아버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은 없어졌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는 승리자가 되셨다”(시대의 소망, III권, 292. 293).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을 때 그는 그의 사업의 둘째 국면을 완성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셋째 국면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그의 법정과 이 땅에 있는 의의 성도들 중에 그가 반드시 해야 하는 시범을 포함한다. 이 일은 하늘 성소에서 그가 해야할 일과 밀접히 관계되는, 우리의 구원에 핵심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완전히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의 몸으로써 시범 보이셨다. 그러나 그의 승리가 아버지와 갖는 유일한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게끔 된 단 하나의 시범이었는가 아니면 남들도 그가 한 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유발시킨다. 인간이 그가 극복한 것처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사업을 종결짓고 그것을 인간에게 유효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시범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도 그리스도가 이긴 것같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시범은 영원전부터 오랫동안 구상되어 온 것이었지만 실행단계는 늦추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할 때가 찼다. 144,000명 가운데서 최종적 시범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랐고, 따르고 있다(계 14:4). 그들은 중보자 없이 서서 죽음을 대하지만 신실하게 남는다. “그가 성소를 떠나실 때 어둠은 지상 거민 위에 덮인다. 그 무서운 시간에 의인들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증보자 없이 살아야만 한다”(각시대의 대 쟁투 614, 영문). 그들은 욥이 말한 것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음흉한 동기가 있다는 사단의 소송에 충분히 답한다. 사단의 조소하는 도전은 마지막 세대의 성도들과 맞닥뜨려질 것이다. 대답이 주어지면 마침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업을 성취하게 되고 그의 성도들로 인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언은 이루어진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에는 세 국면이 있다. 첫째로 그는 죄를 직면했고 정복했다. 단 한번도 그는 지지 않았다. 그의 순결한 영혼은 한점 죄의 더러움으로도 더렵혀지지 않았다. 그의 몸—성전은 거룩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이 단계는 겟세마네 동산 전에서 끝이 났다.

 둘째 국면은 겟세마네와 골고다를 포함한다. 거기서 그가 맞서서 정복한 죄가 그의 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그는 죄를 십자가까지 지고 가서 없애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히브리서 9:26“없게 하”신다는 뜻이다. 첫째 국면에서 죄를 정복하고, 생애 가운데서 제거하는 목적으로 죄를 지셨다. 둘째 국면에서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죽으시려는 목적으로 죄를 지셨다(히 2:14).

 제 3 국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가졌던 같은 도움으로 인간도 그가 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범하신다. 이 국면은 하나님 우편에서 그의 하시는 일 즉 대제사장 봉사와 사단과의 최후 투쟁에서 그의 성도들을 최종적으로 나타내심과,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포함한다. 그 후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동산에서 뱀에게 선포된 사형 명령이 수행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시간의 모든 전진을 물리쳤을 때 확실하게 되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그것은 이중적으로 확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망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망시켰다. 사단이 변화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죽인 것같이 성도들을 죽일 것이며. 하나님의 성 아니 하나님까지라도 공격하려는 거리낌 없는 태도를 사단이 나타내 보일 때 그는 마침내 처형당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죄도 죄인도 없게 될 것이고 죄의 완전한 끝이 이를 것이다.

 히브리서 1:13이 언급하는 바는 첫째와 둘째 국면이다. 이 두 국면은 죄를 깨꿋이 하는 것에 포함한다. 제3국면은 하늘 성소와 지상 교회에서 현재 진행중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생애를 통해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죄와 사단을 멸망시켰다. 그는 지금 지상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죄를 제거하시고 멸망시키신다. 이것이 참 성소를 정결케 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그의 사업을 마치셨을 때 그는 “권능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앉는다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공식적인 것으로 취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권한을 위임하는뜻의 단어다. 공무를 집행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 대관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일을 마치고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좀 엉뚱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대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선포하시고 그의 우편의 가장높은 자리를 주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중보자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권한을 주신다. 이것에 세째 국민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하늘 성소와 지상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을 포함한다. 그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바 7장 25절의 국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의 대관식은 그의 승천 직후에 있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조건을 성취했다. 그는 완전한 생애를 사셨고, 사단을 이겼다. 그는 고통당했고 결국 갈바리에서 죽었다. 피를 흘렸고, 그 피에 의해, 그 피를 통해 하늘의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제사장으로서 그의 사업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대관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직에 대한 그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그를 우편에 앉허셨다. 신인(神人:God-man)은 우주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자리를 취하신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은 존귀와 권세의 자리이다. 이 자리는 그리스도가 죄를 정결케 한 후에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지상에서 할바 그의 사업을 마쳤다. 그는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인간을 대신해서 말하고 대신해서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리고 물론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 후까지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히 8:14).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었더라면,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3절). 이 “무슨 드릴 것”“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였다(히 9:12). 갈바리에서 그가 피를 흘리자마자 그는 “드릴 무엇”을 갖게 되었다. 그제사 그는 제사장 봉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승천하자마자 그를 그의 우편에 세우셨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다. 그리고 하늘 성소에서 인간을 위해 중재하시려고 준비되어 있다.

(1:4-14)
 그리스도의 신성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커다란 거침돌이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그의 유일신교를 자랑하여 왔었다. 다른 종교들은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신(神)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주 하나님은 한분이신 여호와시니라”(신 6:4)는 말씀은 1천년 이상이나 그들 주변 국가에 대한 도전이 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신성으로 주장되었다! 어떻게 이 신조가 성경과 조화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인정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수님이 참으로 신성이라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필요가 생겼다. 바로 이것을 바울은 히브리서 1:4-14에서 하는 것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뛰어)남(Being made)
 더 좋은 번역은 “(뛰어나게) 됨(having become)”. 이것은 3절에서 “이시라(being)”와 대조를 이룬다. 3절에서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영구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됨”은 상태의 변화인 성육신(incarnation)의 결과로 인한 조건을 의미한다.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대조를 논의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최고의 의미에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려고 착수한다.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깨끗게 하시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천사들이 위대하고, 유대인들이 천사들을 높이 생각하더라도. 천사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얼마큼(much better) 뛰어남”을 보여주고자 한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
 그리스도는 기업으로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다. 비록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이름이 많지만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이 기운다. 이것은 그의 탄생 때 주어진 이름이었다. “그의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 이름을 알려준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기에, 실제적으로그의 이름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마 1:21).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름이 “예수”인 것 같다.

 성육신(成肉身)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는 하나님이셨다(요 1:1).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마땅히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랑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7-11).

 사람이 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동안”자연히 천사보다 낮게 되셨다(히 2:7. 난외주). 그의 수치와 죽음 후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굻게 하셨다.” 이 이름이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다. “천사”“사자”, “종”을 의미하고 “예수”“구원자”를 의미하는데 어느모로나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다.
히브리서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네가 내 아들이라
 천사들은 결코 개별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불리운 곳은 있다(욥 2:1).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았고, 피조되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그의 권리대로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말한다(롬 1:3, 4). 안디윽에서의 연설 중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2, 33).

 이 성경절들은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 외 혈통에서 나셨고—이것은 그가 참으로 인간이 됨을 의미한다(롬 1:3)—“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롬 1:4)고 선포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졌다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예수가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되었을 따름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가 언제 이루어졌는가? 첫째로 예수의 탄생 때 천사가 선포했다. “오늘날 너희에게 다윗의 동리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다음 번은 침례식 때 하나님이 친허 선포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1). 그가 승천한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롬 1:4).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사도행전 13:32에 의하면, 이것은 죽은자로부터 부활함으로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지만 그가 죽음에서 일어났을 때 더 깊어진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인간으로 그는 인간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고, 그의 사업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을 때 하나님이 정하신 생애의 조건, 즉 “순종하면 살리라”를 수행했다고 그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었던 첫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순종의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하셨다(출 19:5; 눅 10:25-28). 그리스도는 주어진 조건을 충족시키므로 생명의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이 권리를 인정하시고 재가하셨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낳았다”는 말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성(generation)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믿는데 그것을 그리스도가 이땅에 처음 오심으로 적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특별히 5절“왜냐하면(for)”이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기업에 의해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기업”은 일정한 시간성 있는 사건을 지적함으로, “낳았다”는 말을 그리스도의 지상 경험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히브리서 1: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이 말씀은 히브리 성경에는 없고, 헬라어 칠십인역에는 신명기 32:43에 기록 되어 있다.

 천사를 향한 이 명령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정지어 주는 것이다. 신성의 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경배를 받으셨다. 그가 사람이 되었을 때 천사들 사이에는 그를 경배하는데 대한 문제가 자연히 일어나게 되었다. 만일 그가 사람이었다면, 사람만이라면 경배를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될 때 그의 신성을 상실했는가? 아버지께서 천사들을 명하셔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라고 했을 때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만 경배를 받을 수 있다(계 22:8, 9).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바 천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최종적인 것이다. 그는 성육신 전에 하나님이셨고, 그는 성육산 동안에도 하나님이셨고, 그는 성육신 후에도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를 경배하라는 이 명령은 그리스도가 일단 사람이 된 후에 하나님보다 조금은 낮아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반대에 맞서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믿을 수 밖에 없다. 피조물은 아무리 높이 추앙되더라도 섬길시는 우상숭배다. 그것은 창조자를 피조물로 대치하는 행위다. 요한이 천사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을 때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권고를 들었다(계 22:9).

 아버지께서 천사들에게 그리스도께 경배하라고 명하실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신다. 이 선포에서 실상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아들은 인성을 취했다. 그는 고통을 당했고, 죽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아무도 그의 신성이 침해를 당했다고 생각지 말 것이다. 이전에도 그가 하나님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본질적이며 의심되지 않은 신성은 더 이상 의심받지 않게 하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경배할 허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까지 하셨다.

히브리서 1: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그의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신다
 척사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의 뜻을 행하는 종들이다. 바람과 바다가 그를 순종하듯이 불이 그의 바램을 이루듯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대로 그의 천사들을 이용하신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 그룹과 스랍의 근거를 찾는다. “영들”은 다른 곳에서 바람이라 쓰인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룹에 대해 이렇게 쓰였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를 높이 뜨셨도다”(시 18:10). “스랍”은 불탐, 불, 빛나는 것들을 뚯한다. 개역(RV)에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로 번역돼 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의도는 천사들이 종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사역자로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아들은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경건하게 부르시며,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위치와 신성을 말하는 사도의 논증 가운데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 중에 아들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돈호법(頓呼法)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은 확충되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스스로 이 일을 하셨다.

 보좌와 홀을 언급한 것은 의미 깊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세력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국이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있으며 한창 가동 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보좌와 왕국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 홀—정부—은 의 가운데 있다.

히브리서 1: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네가 사랑하고 ∙∙∙ 미워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해 특별한 관련을 갖는데 이유는 그 이후 절이 이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덕목으로서 사랑을 강조하는 일은 잘하지만 우리는 현 상태에서 사랑뿐만 아니라 미움도 잘 발달시켜야 한다. 죄를 미워하도록 배우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죄를 미워하지 않고도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단지 그에게 죄로 충동되지 않고 시험이 되지도 않는다. 죄의 다른 국면들이 그에게 호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죄임을 알 때 바라보는 것도 거부한다. 그런 사람은 그의 저항력으로는 제일일 수도 있겠지만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죄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기를 배운 후에야 그는 실재적으로 안전한 것이다.

 죄를 열망하는 사람, 죄가 매력적이거나 흥미롭게 보이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의를 사랑하기를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기를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하셨다. 그가 사랑도 하고 미워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동류들 위에 그를 택하시고 기쁨의 기름을 부으셨다. 이 기름부음은 의심할 바 없이 승천 직후 그리스도의 대관식 마당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었으며, 미래의 봉사를 위한 임명이었다. 그리스도란 이름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만 하다.

 “동류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와 같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 혹은 그룸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기름 부음으로 그들의 사업에 봉헌되었다. “너는 덮는 그룹임이여”라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한다(겔 28:14). 이 모든 것 중에 그리스도는 탁월성을 가졌다.

히브리서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주여
 8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주(主)라고 부른다. 예수는 주(主)시며 하나님이시다.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행 2:36).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하나님이 바치는 또 하나의 찬사다.
히브리서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주는 영존할 것임이요
 이것 역시 그리스도외 신성의 증거다. 창조주로서 그리스도는 창조 전에 계셨다. 창조가 소멸한 후에도 그는 영존하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논증한다.
히브리서 1: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주는 여전하여
 11절이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주장한다면 12절은 신성의 다른 속성인 그의 불변성을 주장한다.
히브리서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천사들은 보좌 주위에 경외와 예배의 태도로 서 있으며 결코 하나님 우편에 앉도록 초청받지 못했다. 그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속받을 자들을 도우라고 보내 심을 받은 종들이다. “유업을 이을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갈 4:1.2). 인간은 현재 천사들보다 낮다. 그러나 자라서 그의 유업을 주장할 때가 곧 온다.

 제 1 장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려고 착수한다. 그리고는 성공적으로 이 일을 해 낸다. 이 책을 쓰는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의심할 바 없이 세우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모세가 설정한 예식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페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한다. 유대인들이 그들 종교의 중심으로 간주했던 예식들은 성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 규례를 건드리는 사람은 눈동자를 건드리는 셈이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시고 예식들을 제정하신 바로 그 하나님만이 추호의 변경을 할 권리를 갖는다고 격렬히 주장하곤 했다. 이 점을 바울은 양보한다. 그러므로 그의 첫 작업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하는데, 첫째,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구속주로 소개하고, 둘째, 천사들을 능가하는 우월성을 보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내세워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최고의 관건을 얻어 낸다. 이 증거들이 유대인들이 권위로 인정하는 구약에서부터의 인용들로 이루어졌으므로 사도는 그의 관점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확증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달리 신학적 도그마(dogma)만을 세우는 것 이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그리스도를 경배하라 하신 명령을 조용히 소개한다. 분별력 있는 유대인이라면 천사들이 경배하라고 명령을 받았으면 인간은 그보다 덜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곧 내리게 된다. 그러면 유대인은 그가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를 갖는가 하는 도전적인 질문에 즉시 직면하게 된다. 바울이 원하는 바는 독자들을 이 점까지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이 정의하신 바 그들의 의무에 직면하도록 한다.

부가적 설명—그리스도께서 후사로 지명됨(히브리서 1:2)
 신약성경에는 아버지가 얼마동안 어떤 능력을 아들에게 모두 맡겨 버렸으나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에 이 능력들을 아버지께 도로 돌려 드린다고 하는 투의 말씀들이 더러 있다(고전 15:24). 그러나 이것은 아들을 후사로 세우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 세우심은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업의 성공적인 성취를 인정하는데 불과한 것이 었다. 첫째 아담은 실패했다. 둘째 아담은 사람으로 그의 자리를 대신했고, 아담에게 처음 주어진 통치권에 대한 정당한 후사로서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둘째 아담은 첫째의 자리를 대신하고 공식적으로 세우심 받은 후사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의 존재로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죄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에 의해 아버지는 얼마동안 물러났고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능력을 취했고. 루스벨의 배도 때문에 일어났다.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는 루스벨과 그의 천사들을 처리해야 할 사업을 부여받게 되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계 12:7).

 예상된 대로 루스벨과 그의 천사들이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쏯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라”(계 12:8, 9).

 하늘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었을 때에도 계속되어, 두 대적자들은 광야에서 서로 대결하였다. 하늘에서는 그리스도가 루스벨을 이겼다. 땅에서 그리스도는 여리고 약했지만 적을 패퇴시켰다. 이 싸움의 마지막 사건들에서 사단의 정사와 권세와 능력이 최종적으로 깨어지고 영원히 종식될터인데, 바울은 이 사건들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5:23-28에 언급해 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 말씀 중에 문제점은 대명사 그가, 그의, 그를, 등을 사용한 데 있다.

 24절:“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그리스도)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절:“저〔그리스도〕가 모든 원수를 그(하나님의)발 아래 둘 때까지(그리스도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27절:“(하나님이)만물을 저(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하나님이)만물을(그리스도)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그리스도)의 아래 두신 이〔하나님〕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절:“만물을 저(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신 이(하나님)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主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4절에 의하면, 마지만이 되면 그리스도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 이 말은 분명하고 정확한 것으로 아들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는 말이다. 27절의 말이 분명하다. “그가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둔다.” 이것은 아버지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와 비슷한 말씀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그리스도의 발 아래 모든 것을 두었다는 것만을 뜻할수 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시고”(요 13:3).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

 현재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확히 언제 이 모든 것을 그 아들의 손에 맡겼는가? 하는 사실이나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죽음의 관점에서 아들이 수행해야 하는 일, 그가 중보자와 재판장으로서의 권리를 갖고 해야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은 하나님께 반대되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는” 것을 포함했다(고전 15:24).

 이 일이 이루어질 때, 그리스도는 “자신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8절)

부가적 설명—천사들(히브리서 1 :13, 14)
 유대인 사회에서 천사들은 높이 여김을 받았다. 그런만큼 바울은 천사숭배를 한번 경고했다(골 2:18). 천사를 경배하는 경향은 히브리서에 나타난 바울의 논의를 의심할 바 없이 매우 효과적으로 만들었다. 유대인들 모두가, 혹은 개중에 천사들을 경배할 가치있는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천사들을 명하여 그리스도를 경배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제공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훨씬 높아, 천사들이 그를 경배하도록 요구받는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 자신 밖에는 다른 분이 될 수 없다.

 천사들은—비록 사역자들이고 종들이지만—높은 자리가 주어지고, 큰 책임을 위탁받는다는 가르침이 신약성경에서나 구약성경에서나 명백히 나타난다.

 천사들은 창조 때와 율법을 주신 때, 거기 있었다(욥 38:7; 행 7:53). 그룹들이 생명 나무를 향하여 난 길을 지켰고,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을 방문해서 지시를 주었다(창 3:24; 18:2, 16). 천사들은 모든 부조들과 선지자들에게 기별을 전달하도록 보내졌다(창 32:1; 민 20:16; 왕상 19:5; 사 63:9; 단 9:21, 22; 슥 1:9; 행 27:23, 등등). 그리스도가 오실 때 천사들은 동행한다(마 25:31). 천사들은 이 세상 마지막에 가라지를 모은다. 그리고 선택된 자도 모은다(마 13:41; 막 13:27). 마지막에 한 천사가 사단을 결박하여 무저갱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계 20:1). 천사들은 하나님께 직접 접근할 수 있다(마 18:10). 계속적으로 하늘로부터 하늘로 향해 기별을 나른다(요 1:15). 그들은 자연력을 떠맡아 있다(계 14:18; 16:5). 루스벨도 공중(공기)에 권세를 잡았었다(엡 2:2). 그들은 마지막 칠 재앙을 쏟을 것이다(계 16:1). 성경은 천사들의 사역과 능력에 대한 예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 그러니만큼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사들을 그토록 존경하는 이유를 문제없이 이해할 수 있다.

 다니엘 4 장에 한 실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맡겨주신 큰 책임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계시해 준다.

 그 기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요점만을 간추리는 것 이상은 필요없다. 느부갓네 살은 꿈 속에서 하늘에 닿을 듯하고 온 땅을 덮을것 같이 큰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나무는 멋지고, 열매는 많았다. 모든 생물이 그 열매를 먹었다. 그러자 천사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나무둥치만 땅에 남겨두고 베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천사는 몇마디 더 첨가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단 4:16).

 이 꿈으로 인해 대왕은 몹시 불안하게 되었다. 박사들이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니엘이 드디어 들어왔다. 왕은 그에게 꿈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나라의 모든 박사가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18절).

 다니엘은 순간 그 꿈의 심각성을 감지했다. 심상치 않은 일을 예고하는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은 스스럼없이 말하라고 격려했다.

 다니엘은 꿈을 해석했다. 그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짐이니다”(22절). 그루터기만 땅에 남고 나무가 통째로 베임을 당하는 것이 왕이 그의 이성을 잃고 들의 짐승들과 칠년 동안 함께 지낼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25절).

 비록 이 일이 왕에게 임할지라도 심판에 자비가 섞여 있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울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26절). 그것은 왕이 이 교훈을 배운다면 그의 왕국이 도로 그에게 돌아올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후 다니엘은 왕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흘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27절).

 그러나 왕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생각할 기회로 일 년을 주셨지만. 결국엔 심판이 임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다”(33절).

 그러나 그의 치욕스런 상태에서 그는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하나님은 그를 받으셨다. 그의 회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여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36, 37절).

 이성을 박탈당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불행이라고 생각된다.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이성을 잃었고, 그가 기록하는 대로“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다(36절). 비록 형벌은 심했지만 느부갓네살이 참으로 회심했다는 점에서 바랬던 결과를 얻은 것이다.

 이 형벌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내려졌는가? 하늘로부터내려와 심판을 선언한 것은 거룩한 천사였다(23절). 그러나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요”(17절). 천사들은 무슨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했고, 그들이 그 명령을 수행했다.

 사람마다 동행하는 천사가 따라 다닌다(마 18:10). 그 천사는 개인을 맡으며, 어떤 한도 내에서 특정한 경우에 무엇을 해야할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 관계를 종이나 간호원 같이 어 린이들을 맡아서 마음 맞는데 따라 사소한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이 다음과 갈이 말할 때 의중에 둔 것이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갈 4:1, 2).

 우리는 그렇듯이 우리를 돌보는 천사 밑에 있다. 그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것이다(히 1:14).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천사가 그의 맡은 일에 크게 관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왕은 선한 가능성을 가졌으나, 자제력을 잃고, 교만하며 자만하게 되었다. 몇 가지 시험들이 지나갔다. 그는 다니엘과 그의 히브리인 동료 세 사람과 접촉했다. 그는 불붙는 풀무에서 세 젊은이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그는 풀무 속에서 세 사람 말고도 “하나님의 아들과도 같은 네째 형상”을 볼 기회도 허락되었다(단 3:25). 그러나 이 모든 감동도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예를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의 천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일까? 누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명백히 느부갓네살의 천사는 충고의 필요를 느꼈다. 왜냐하면 다른 천사들이 소집되어 그 문제가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특별한 조처가 내려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그의 왕국과 총명을 박탈한다고 하는 가혹한 판결을 내렸다. 이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문제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판결은 결재되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 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즉, 한 무리의 천사들이 의논하여 그들의 결론에 이른 것이다.一그러나 좀 뒤에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7, 24절). 주님께서 그 명령에 동의하시고, 된 일을 승인하셨다.

 이것은 천사들의 사업의 흥미 있는 측면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의 정부의 운영에 관한 일면도 보여준다. 천사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도 되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책임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결정들을 내리고 명령들을 수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부의 필수적인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