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2 장 — 그리스도의 인성
 제 2장은 무관심에 대한 경고로 시작된다. 그것은 히브리서에 산재해 있는 많은 교훈들 중에 첫번째 것이며, 저자가 독자의 영적 축복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권고들의 성격으로 보아서 히브리서 독자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들은, 고린도 교회와는 달리 도덕적인 죄들이 아니고, 말씀에 몰두해서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열성의 부족과 아울러 그들이 들었던 것들로부터 점차로 떠 나 가려는 위험들이었다.

 제 2장의 상당 부분이 그린스도의 인성에 대한 논의에 할애되어 있다. 1장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외 신성에 대해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약하고 결함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으실 것인가? 그분은 모든 면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약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이 당하는 경험들을 친히 통과해 보셔야 되었기 때문이다.

히 2:1-4 (2:1-4)
 이 귀절들은 무감각과 등한히 여김 같은 미묘한 죄들에 대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신자들의 영적상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교회의 앞날에는 시련의 때가 놓여 있었다. 박해가 곧 다시 일어날 것이었다. 몇 년 안에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할 것이고 성전은 파괴되고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위해 도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외에도 교회는 충분히 깨어있지 못하였다. 그들은 확실한 닻이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이 그 위험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간절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첨가된 이유였다.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그리스도는 결코 지식을 나누어 준다는 단순한 목적으로만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가 드러내시는 진리들은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마음을 풍요하게 하는것 외에 더 깊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원하셨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주의하기를 바라셨으며 말씀을 듣고 흘려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또한 바울의 생각이기도 했다. 모든 들은 것에 대하여 교회가 좀 더 간절히 삼갈 것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완전히 등한히 여기는 것은 아님을 나타내고 있으나, 그들의 평안을 구성해주는 요소들에 대해 좀더 간절한 주의를 기울여줄 것을 갈망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필요한 지식을 갖추었다.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가진바 빛대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함이 틀림없다.
모든 들은 것을
 사도는 새로운 빛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 빛은 그가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깊은 것 중의 몇 가지를 그들에게 드러낼때 제시할 것이었다. 먼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더욱 간절히 삼갈것을 원하고 있다. 그들은 위험한 상태에 있으며 무기력으로 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혹 흘러 떠내려갈까
 좀 더 문자적으로는, “그것을 지나서 떠내려갈까” 혹은 “그것을 지나서 표류할까”이다. 이것은 승객들은 배가 표류하고 있는 것을 알아 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배가 조류에 밀려가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깨닫기 전에 배는 옛 이정표들을 멀리 지나서 큰 폭포 가까이 와버렸고 위험은 다가왔다. 십중 팔구 그것은 파멸이었다.

 떠내려 가는 것은 가장 쉽고 유쾌한 여행 방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믿을 수 없고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떠내려 가는 것은 노력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확실한 죽음을 향하여 강을 미끄러지듯이 떠내려 갈때에도 안락하며 만족스럽고 기분좋은 졸음이 오는 것이다. 흘러 떠내려가는 것은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배가 떠내려 갈때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결이 배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그처럼 속는 것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지 않는 한 위험은 확실하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묘사하는 교회의 상태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떠내려 가고 있으면서도 위험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천천히 그들은 절벽에 가까이 가고 있고 곧 너무나 늦게 될 것이었다.

 큰 죄에 빠져 들어가는 한 사람이 있기 전에 떠내려가는 열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죄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때라도 그것은 흔히 그사람이 이미 그전부터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내려온 경우이다. 대부분의 공공연한 죄들은 처음에는 천천히 띠내려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깨어 있도록 하자.

 “지나서 떠내려 간다”, “표류한다”, “흘러내려간다”. 이 말들은 각기 다른 표현이지만 모두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더욱 진지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ought to)는 것은 우리는 하지 않으면 안 되며(must),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owe), 명령적이라는 것을(imperative) 의미한다. 우리는 지나서 떠내려 가지 않도록, 또 하나님의 말씀의 정박지(旋泊地)로 부터 표류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런 위험을 생각해서 각 사람은 위기를 알지도 못하는 채 표류하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도를 게을리하는 것, 드리다 말다하는 가정 예배, 예배 시간에 빠지는 것, 교회 활동이나 영적활동에 미지근한 것, 성경연구나 개인적인 헌신을 소홀히 하는 것, 주의 성전의 규례들을 회피하는 것, 십일조나 헌금에 태만한 것—이것들과 많은 다른 징조들은 조심스럽게 관찰되어야만 한다. 위의 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들이 표류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 얼마나 발리 표류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흘러 떠내려 가는 것에 대한 사도의 권고는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2: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천사들로 하신 말씀
 오히려 “천사들을 통하여”, “천사들에 의하여”의 뜻이다. 이 말씀은 의심없이 바울이 “천사들로 말미암아 ∙∙∙ 베푸신 것”(갈 3:19)이라고 한 그 율법에 관한 언급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견고하게” 되었다. 즉 율법을 범하든지 그 규정의 준수에 태만한 것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시내산에서 천사가 나타난 것은 다음 귀절에 언급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신 33:2).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시 68:17). 이런 경우에 이 천사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위에 언급한 신약의 참고절에 포함된 사실 외에는 더이상 알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의 불구름, 폭풍우는 천사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 증거로 시편 104:4을 인용한다: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사역자를 삼으시며.”

 히브리서의 이 귀절에 대한 가장 가능한 설명은, 유대인들이 천사들을 높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이 신앙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즉 만일 천사들의 말이 그처럼 높은 존경을 얻었다면 천사보다 훨씬 높으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삼가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질분은 “우리들은 피할 수 없다”는 대답이 나오도록 짜여졌다. 여기에서 지적된 위험은 그리스도나 복음을 거절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절함으로 영원한 손실에 이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절하는 것보다 등한히 여김으로 더많은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렀음을 우리들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경고하는 것은 등한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거절하는 사람은 비교적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무들에 때때로 참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루고 등한히 여긴다.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추수할 때가 지나가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그들은 구원얻지 못한다(렘 8:20). 등한히 여기는 것은 항상 위험하다. 지금은 받으실 만한 때다.

 등한히 여기는 것과 미루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악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사람들은 불유쾌한 작업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둔다. 즉 자백을 오랫동안 미루어왔지만, 곧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지만 편지는 쓰여 지지 않는다. 청년들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할 때가 왔다는 것을 확신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미룬다. 그래서 때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선행을 하고 친절한 말을 하고 꽃다발을 보내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미루고 기다린다. 때로는 너무 오래 기다린다. 신속한 것이 좋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라는 말씀은 모두가 명심해야 할 기별이다(히 3:15).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바요
 주께서는 여기서 복음의 첫 설교자로 소개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으로 선포하신 분이 주님이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것이 최초의 약속된 복음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셨다.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바울은 열 두 사도중의 한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 이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은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들은 것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이라고 바울은 옳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열 두 사도 중 누군가가 히브리서의 저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 서신의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들은 일이 없는 사람이다.
히브리서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으니라
 이 증거의 처음 세 가지는 사도행전 2:22에 언급된 대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이다. 이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11, 28-31에서 일일이 열거되고 있다.

 이 말씀은 이러한 표적들이 마땅히 나타나야 할 만큼 명백히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오늘날의 교회를 책망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떤 시대적 제한도 가하지 않으셨다(막 16:17). 우리들은 많은 현대적 발명품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 중에 어떤 것도 영적 능력의 상실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오늘날 교희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 벗은 것은 알지 못하는”(계 3:17) 위험에 처해 있다.

 과거 시대에는 도움이 되고 적절했던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굉장한 의료기관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대학 교육을 이미 받았거나 쉽게 받을 수 있을 때도 왜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는가? 세상에는 인간이 이루어 놓은 경이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표적과 기사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나귀를 말하게 하실 수 있지만 사람은 밀랍 기둥(wax cylinder)을 말하게 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공중으로 이끌어 가까운 거리에 옮기실 수 있었지만, 사람은 훨씬 먼 거리를 비행기로 나를 수 있다. 하나님은 도끼, 머리가 떠오르게 하실 수 있지만 사람은 오만 톤의 철선이 물 위에 뜨게 만들었다. 사람이 할 수 없거나 적어도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좀더 시간을 주어라. 그러면 전능한자와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하나님은 과거 시대의 업적에 대해서만 경배를 받으실 때가 곧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틀이 있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필요되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실존과 맞부딪혔을 때를 제외하고서 하는 말이다.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때, 건물들이 붕괴되고 죽음의 비가 내릴 때, 구원의 손길은 먼데 대양에의 뗏목 위에 누워 있을때, 어둠속에서 빛을 더듬어 찾을 때, 그리고 삶과 죽음이 똑같이 이해할 수 없을때, 인생의 거친 바다에 밀려오는 산더미같은 파도 속에서 확실한 닻을 내릴 곳을 애타게 찾을때, 그림자가 길어지고 해가 질때, 그리고 저녁 별이 나타나며 바다로 출발하는데 당황한 중에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어야할 때, 그런 때를 제외하고서 하는 말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한 경우들을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해결할수 없다. 정든 근거지가 무너지고 근본이 사라져가고 폭풍이 막 우리를 엄습해 올때와 같은 그런 시간에, 갈망하는 눈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재림을 고대하며 지평선을 헛되이 응시하고 있을 때, 교회는 분명한 소리로 나팔을 불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가 이 지상을 메우고 있는 수백개의 교파와 분파들로부터 확실하게 일어서야만 할 때는 지금이다. 아니 이미 지났다. 방황하는 사람을 더 이상 의혹속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일어서서 비추어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셨다. 사도들이 보고 들은것을 증거할때에 하나님께서도 또한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과 나란히 일했을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했다. 표적과 기사가 설교에 따랐고 죄인이 멀었으며 위선이 폭로되고 병자가 나았으며 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교회는 강력하게 성장했다.

 오늘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초기 교회의 섞인것 없고 순수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바로 이 러한 때 하나님의백성들은 성령의 능력보다 인간의 지혜를 신뢰하는 위험에 빠져있다. 행위가 영적인 것을 대신하고 책략이 위로부터의 인정을 대신한다. 통계숫자와 목표, 캠페인들과 장려들이 성장을 평가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령의 열매들을 결코 평가할 수 없다.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과 사도들이 증거했을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였다. “회개하여 침례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을때 그들은 응답하여 수천명이 교회에 가담했다. 그들은 후에 곧 배교하지도 않았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뗴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continued stedfastly)”(행 2:42).

 그 결과로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3).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서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했을 때 이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오순절과 오늘날의 대중 부흥운동을 비교해 보면 우리들은 교회의 필요성을 더 잘 알 수 있다. 오순절에는 감정의 호소나, 반감을 무너뜨리는 찬송이나, 좋은 결과를 내는 잘 정비된 조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있었다. 몇 주일 전에 주님을 전주하고 맹세하며 배반한 비천하고 약해빠진 사람, 그러나 회개한-후 그가 지금 전하고 있는 용서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와 함께 증거하시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 결과 사람들은 도움을 받기 위해 고민에 찬 부르짖음을 발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셨다.

 우리는 조직이나, 강단에서의 초청이나 복음찬송이나. 감정적인 호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적으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으면 사용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현재 상태보다 더 큰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 이 능력을 갖게 되면 결과를 얻기 위해 지금 있는 것과 같은 많은 책략들이 필요없을 것이며 회심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잘 뿌리박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깊은 확신이다. 그 능을 우리는 갈망하고 그 능력을 위해 기도한다. 즉 마음을 변화시키고 감동시키는 능력, 배교를 끝낼 능력, 청년들을 진리에 대한 사랑속에 거하게 하는 능력,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는 능력, 봉사를 위한 기름부음의 능력, 세상을 복음화시킬 능력, 죄와 범죄를 종식시키고 영원한 의를 도래케 하는 능력이다. 늦은비의 때는 왔지만 비는 아직 내리지 않는다. “빗방울이 우리 주위에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소나기 같은 비를 우리는 간구하고 있다.”
히 2:5-8 (2:5-8)
 그리스도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시기는 했지만 여기서는 천사보다 낮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제일장에서 참된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여기서는 참된 인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의 인성은 그분이 사람이 필요로 하는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슬픔과 당혹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위로의 원천이 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우리가 직면하는 시험들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가난하고 버림받으며 미지의 미래에 직면해서 흘로 서 있는다는 것이 어떤 것임을 그분이 모르신다면,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결코 만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신다는것은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분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우리중의 하나같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분은 시험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아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의 모든 슬픔을 정말 아시고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으실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주저없이 대답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것을 아시며, 그가 가난하게 되심은 그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요 그가 고통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은 그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주신 실증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통 당하는 인성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죄가 하나님의 가슴에 가져다준 고통을 결코 알수 없었을 것이다. “온 하늘은 그리스도의 고뇌를 함께 당하였지마는 그러나 그 고뇌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나타나는 때에 시작되거나 마치어진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죄가 처음으로 생겼을 때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가져간 고통을 우리의 둔한 감각에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교육, 339).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2: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천사들에게는”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지 않으셨다. 죄 때문에 사람은 매우 낮은 단계로 떨어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을 때 우리는 새로운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천사들이 아는 것보다도 더욱 밀접한 교제를 하나님과 누리고 있다. 이 새로운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사의 지배아래 두지 않으셨다. 우리는 어떤 매개체 없이 곧 바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다.

히브리서 2: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이 무엇 이관대(what is man?)
 이 귀절은 사람에 대해 언급된 시편 8편에서 인용 되었다. 전체적인 창조나, 천사나, 하나님과 비교해서 인간은 너무나 하잘것 없고 무의미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결코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생각해 주시고 방문까지 해주신다. 그 말은 근본적으로는 말할 것 없이 성육신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속에 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시다.
히브리서 2: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사람은 많은점에 있어서 천사보다 못하다는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잠재력에 있어서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도 또한 확실하다.

 천사들은 능력에 있어 뛰어난다.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시 103:20; 단 9:21; 사 37:36; 왕하 19:35). 그들은 지상의 위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고 집행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성도들을 방어하고 둘러 진치 기도한다. 사단까지도 포박할 권세가 있다(단 4:13, 17; 시 37:7; 계 20:2).

 반면에 사람은 소유하고 있지만 천사에겐 허용되지 않은것들도 있다. 우리들이 아는바와 같이 천사들은 가정생활이 없는 독특한 존재들이다. 천사들은 부모도 없고 형제간도 없고 아들 딸도 없다.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의 가장 깊숙한 경험중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천사들은 어린 시절의 기쁨이나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결코 알 수 없다. 부모가 되었을 때의 우쭐한 기쁨도 모른다. 또한 앓아 누운 어린아이의 침대 옆에서 생명이 점점 사라져가는것을 애통하며 지켜보는 깊은 슬픔의 물결속을 지나본 일도 없다. 부부간의 깊고도 고양된 사랑의 경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경험, 또한 그들의 슬픔들은 천사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은것들이었다.

 천사들에게는 복음을 전과하는 일도 위탁되지 않았으며, 신앙을 위해 고통을 받고 순교하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천사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을 받는 일도 없으며. 죄의 수렁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비할데 없는 기쁨도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회심이란 천사들에게는 알 수 없는 영역이며 죄가 용서받았다는 복스러운 소식도 결코 듣지 못한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위에서 알게된 것 같은 가장 깊고도 신성한 삶의 경험들은 천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현자들은 지금도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점에 있어서는 사람이 지금도 천사들보다 우월한 것이다.

 천사들은 아마도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보상의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내정되어 있다. 이제 이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단지 우리들은 자녀요 상속자인데 비해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요 종이라는 사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다. 상속자는 아이일 때는 종의 관할 아래 있지만 장성한 다음에는 집 주인이 되는 것이다(히 1:14; 갈 4:1.2).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대신에 어떤 번역들에는 “잠깐 동안 하나님 보다 못하게” 혹은 “그러나 하나님 조금 못하게”라고 되어 있다. “잠깐 동안 하나님보다 못하게”도 가능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사도의 논증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라는 표현을 택한다.
영광과 존귀
 이 귀절은 직접적으로 창세기 일장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경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종이나 노예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왕으로 만드셨으며 영광과 존귀를 주셨다. 사람이 비록 죄 때문에 그의 첫 상속물을 잃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의 높은 운명에 대한 하나의 예언이었다. 사람은 타락하고, 주신 것들을 오용하고,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우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사람도 하나님의 경륜에 전혀 반대되게도 비열하게 되고, 스스로를 오용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그의 보고 속에 어떤 핑장한 것을 가지고 계시다. 구속의 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히브리서 2: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만물을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는 사람이 “당신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있도록 되어 있었다. 즉 사람은 지구의 통치자였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1:28).

 학자들은 이 처음의 통치의 범위에 대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범위에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행사하셨던 것처럼 천연계와 원소들까지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사람이 짐승보다 우월하며 그것들을 다스릴 통치권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사람은 지금 이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가 조절할 수 없는 세력들에 부딪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잃은 그 통치권을 예언에 기록된 약속에 따라서 회복시켜 주실 작정이시다. “이전 권능이∙∙∙네게로 돌아오리라”(미 4:8).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아직∙∙∙보지 못하고”의 뜻이며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의 참된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히 2:9-18 (2:9-18)
 그리스도의 고난은 언제나 연구와 명상을 할 때 소득을 많이 얻는 분야가 되어왔다. 앞의 귀절들에서 우리는 구속의 몇 가지 깊은 면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은 그 자체가 주목할 만한 진술이다.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완전케 되셨고—이것은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표현이다—그의 죽음이 사망의 세력을 잡은자 곧 사단이 멸망하게 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고난을 받으심으로서 같이 시험을 당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능히 구원 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의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독자들은 주제의 어떤 면이 더 철저하게 고찰되어 있는 이장의 마지막 부가적 설명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오직 우리가∙∙∙예수를 보니
 오직(but)이란 말은 여기서 대조를 의미한다. 사람은 “아직” 통치권을 갖지 못했으나 “오직”(but)우리가 “예수를 본”다. 그분은 이곳 세상에 계실 때도 통치권을 가지고 계셨다. 베드로를 보내시어 물고기를 잡게 하시고, 그 입에서 동전을 얻게 하셔서 필요한 일에 충당하셨다(마 17:27).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시고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다(요 21:6). 바람과 파도를 명령하시니 순종했다(마 8:26).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것이 말랐다(마 21:19).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막 5:13; 마 8:14; 요 11:43, 44). 보리떡과 물고기들을 불어나게 하셨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사단을 꾸짖으셨다(마 8:1-9; 마 14:25; 4:10, 11). 예수께서 주인이 되지 않으신 상황은 없었다. “우리가 아직은” 사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한 것을 보지 못하나 “오직 우리가∙∙∙ 예수를 보니” 그분은 사람의 가능성을 미리 보여 주셨다.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을때 그분은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비록 신성의 특권을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기는 하셨지만, 그의 신성을 잃음이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성을 취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으실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그는 신성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요 14:31; 5:19). 사람으로서 그는 항상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흠정역 성경은 예수께서 고통을 받고 돌아가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분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하여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 홈정역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것은 그의 죽으심에 대한 보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해석상의 차이는 전치사의 의미 때문인데 홈정역은“∙∙∙하기 위하여”(for)라고 번역했고 개혁 성경은 “∙∙∙때문에”(because of)로 번역했다. 희랍어로는 그 구분이 결정적인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번역이 다 가능하고 우리는 두개를 다 받아들인다. 흠정역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또한 개역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신실함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쓰셨다고 하는 것도 옳다. 두 견해 다 상당한 지지자들이 있다. 두 해석이 다 가능하고 옳다면 우리들은 논쟁할 거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고난은 여기서 그에게 내려진 벌로써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은 “하나님의 은해로 말미암아”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어떤 고대사본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대신에 “하나님을 떠나서”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함 없이 홀로 고통을 당하시며 죽음을 맞았다는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27:46에 기록된 그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생각케 해준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 귀절은 어떤 사람들이 암시하는 대로 그분이 단지 죽음을 가볍게 맛보시기만 하고 전체적인 고통은 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겟세마네는 그분이 죽음의 잔을 최후의 한방울까지 다 마셨으며 그 어떤 사람이 맛본 것보다도 더 심하게 죽음을 맛보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합당하도다
 그것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분의 특성이었다. 여기서 그분은(Him) 아버지시고. 주(captain)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시다.

 사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고 했을 때 그는 사실상 속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고찰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성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것이 도덕적으로도 합당하며 그분의 품성과도 조화된다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사람에 의해서 발해진 그런 견해는 지독하게 참람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행동을 달아보며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사도가 하나님의 계획에 찬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찬성할 권리라는 것은 불찬성의 권리도 수반하는 것이다. 사도는 대담하게도 하나님을 사람의 평가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평가하도록 허락하심으로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신 것처럼 보인다.

 모든일에서처럼 이 일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시다고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근본동기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의 도덕적인 적합성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을 주저함 없이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사리가 분명한 판단은 당신을 지지할 것임을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신 것은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허락하신다. 그런데 그 말은 죄가 들어온 것을 고려해 볼 때 또 죄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경험을 나누시는 것이 옳고 합당한 일이라고 하는 말의 단지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하나님의 확신 속으로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속성 중의 하나이다. 초청이 주어진 것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가 다음 귀절들에 나타나있는 것을 주목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딤후 2:7). “나는 지헤있는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오니”(고전 10:1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경우를 사람앞에 제시하시고 그들의 판단에 호소하신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며 그분의 속성이시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하심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전에는 온전치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든 하나님으로서 온전하셨다. 그분은 사람으로서도 온전하셨다. 고난을 통해서 그분은 구주로서도 온전케 되신 것이다. 이것은 예정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요. 경주를 끝마치는 것이요. 과업을 완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시기 전 그가 밟으시는 길은 평탄했다. 모든 계단이 명확했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께서는 내내 전진하셔야 했다. 주께서는 당신의 궁극적 목적을 중단하실 수 없으셨다. 그는 끝까지 인내하셔야만 했다. 그 성경 귀절이 의미하는 바는 온전케 되어야 할 어떤 도덕적 결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끝마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적지의 4분의 3까지 이정표도 없이 힘차게 달리는 경주하는 사람과도 같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마치지 않은 것이다. 경주가 끝날 때까지는 그는 상을 얻지 못한다. 점수를 얻는것은 마지막 4분의 1이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상을 얻는다. 그때 그는 그의 달려갈 길을 온전히 마친 것이다.

 여기서 “온전”이란, “표준에 도달하다. 육체적. 지적, 영적능력이 성숙하고 잘 발달되었다. 목적한 바 지위나 조건에 도달해서 그 특권을 즐긴다”라는 뜻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일정한 목적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행하셨다 하더라도. 또 한번도 실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흠없이 사셨다 하더라도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의 표준과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상을 얻는 것은 사람이 남자다운 강렬함이나 대중의 박수갈채 속에서 일하는것에 달린 것이 아니다. 참된 강함과 고결함이 평가되는 것은 역경과 고통과 몸과 마음의 고뇌 속에서이다.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밝히 드러난 것은 광야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였다. 주께서 잔을 드시는 충만한 의미를 경험하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은 온전하셨다. 주께서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 13:32)고 하실때 언급하신것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의 필생의 사업을 말씀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자
 “거룩하게 하시는자”는 그리스도시다.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의 형제들인 우리들이다. “하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의미에서 아들이시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가 계시다. 하나님의 의도는 많은 아들들이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전투로 인도하는 대장이시다. 그들은 그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그들은 그들의 대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대장께서도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얼마나 자상하게 그리스도께서 형 제들에게 말씀하시는지 보라.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49,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

 성화는 여기서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형제들을 하나로 만든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그리스도께서는 한 목적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셨는메 그 목적이란 그들을 “거룩하게” 하려하심이다. 그분은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있도록 모본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자는 성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는 말한다.

 “내가 이미 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2-15).

 바울은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직 측정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가 아니요. 우리가 가는 방향이 어딘가 하는 것이다. 대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인도하신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전진했다. 그러나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다”(빌 3:16).
히브리서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같은 법도와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스럽게 여기신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그는 예배할것이요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교회중에서” 주를 찬송할것이다.

 이 귀절은 시편 22:22에서 인용되었는데 교회에서 형제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분은 완전히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그분은 목소리를 높여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자비를 찬양하신다. 얼마나 아름다운 묘사인가! 실제로는 얼나나 더 아름다울 것인가!
히브리서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위의 두 인용절 (빌 3:16; 시 22:22 )은 이사야 8:17, 18에서 왔는데 첫절(빌 3:16)은 칠십인역에서 인용한 것이다. 두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분도 아버지를 신뢰하신다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사람과 하나가 되셨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것은 그분과 우리 사이의 온전한 교제에 대한 완전한 묘사다.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깊을 신뢰와 믿음을 주께서도 가지고 계시다.

 둘째 인용절에서 (시 22:22)는 비유가 형제들에게서 자녀들로 바뀐다. 자녀들이란 말은 특별히 애정 어린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소유에 대한 깊은 관심이나 사랑을 나타내실 때 이 말을 사용하시곤 했다(눅 13:34; 마 18:2). 그리스도께서 당신보다 연장자였던 그중 몇명의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5)고 물으신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중보 기도에서 여섯절 가운데 여덟번이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이라고 불렀다(요 17:2, 6, 9, 11, 12, 24). 그는 영예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의 생애의 결과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의 몫은 제자들이 신실하게 되는것이었다. 그분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12) 라는 사실로 용기를 얻으셨다.

 만일 부모가 하나님 앞에 서서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을”(사 8:18)하고 말할 수 있는 행복한 특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겠는가!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는떼는 어디 있느뇨?”(렘 13:20)라는 두려운 질문을 받는 것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실망하지 말 것이다. 잠언 22:6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돈아오리라”, “너희 자녀가 자기들의 성내로 돌아오리라”(렘 31:16. 17)는 좋은 소식은 뜻밖에도 이루어질지 모른다.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사도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생각하고 있다. 자녀들은 혈육에 속한 자이다. 그리스도도 역시 그렇다. 그분이 인간의 모든 경험에 동참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그의 날이 다했거나 소멸이 가까왔기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삶 속에서 하실 일이 있었던 것처럼 죽음으로도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기”위해 돌아가셨다.

 사단은 여기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사단은 사망이 죄로 인해 올때만 사망의 세력을 잡는다. 그의 왕국은 사망의 왕국이다. 그리고 그속에서 그는 통치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죄의 창시자로서 사단은 사망의 원인이다. 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면 사망이 다스리는 것이요 사단이 다스리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죄를 짓도록 만들고는 사망을 가져온다. 단지 이런 방법 안에서만 사단은 사망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는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성경에는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일반적 법칙에 예외인 두사람이 있는데 에녹과 엘리야이다(창 25:24; 왕하 2:11). 사람은 죄의 다스림안에 있으므로 사망아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사단은 승리한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사단의사망의 권세를 인정하고 굴복한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예로부터 이런 질문이 주어졌다. “용사의 뺴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사 49:24). 이것에 대한 답변도 주어졌다.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하는것임이라”(사 49:25). 이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집을 늑탈하리라”(막 3:27).

 그리스도는 강한자의 집에 들어가시어 그를 결박하고 포로를 석방하시는분이시며 이렇게 해서 성경에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 낼”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는 사단의 요새인 죽음에까지 들어가시어 그의 희생자들을 빼앗으셨다.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 봉인되어 그의 권세 아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단은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망의 속박을 깨뜨리고 무덤에서 걸어 나오셨다.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었다(행 2:24). 그리스도 자신만 일어나셨을 뿐 아니라 “무덤에서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마 27:52. 53). 그리고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다(엡 4:8). 그래서 “강한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집을 지킬때∙∙∙” 더 강한자가 와서 저를 이겼다(눅 11:21). 더 강한자,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영역에 들어 가시어 사망속에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자를 이기시고 “강포한자의 빼앗은 것”(사 49:25)을 건지시고 포로들을 석방하셨으며 그 집을 늑탈하셨다(마 12:29). 그리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오래전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하였다(유 9).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께서 사단의 영역을 늑탈하려 들어가셨을 때 어떤 변론도 없었다. 주께서는 단순히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로부터 열쇠를 빼앗으시고 사망의 속박을 깨뜨리고 “강포한 자의 빼앗은 것”을 건져내셨으며 사단의 조이는 족쇄를 푸셨다. 첫 열매로 그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들을 밝혀 드러내시고 승리하셨으며 그들을 하늘에 데리고 가셨다. 그때로부터 믿는자의 죽음은 잠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평화롭게 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축복이기조차 하였다(계 14:13).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폐하고”(딤후 1:10).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계 1:18; 고전 15:51-57 참조).
히브리서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이 시대에 혜택받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속박에 대해 어렴풋이 밖에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은 미신과 공포에 잠겨있다. 선한 신은 해를 끼치지 않고 악한 신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해를 끼친다는 가정아래 이러한 숭배들 중 많은 것들이 악한 신을 달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과로 악령숭배가 생겨났다.

 그들의 삶은 악령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무서움등 계속적인 두려움뿐이다. 그러나 무서워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방인뿐만이 아니다. 문명국에 사는 사람들 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신음하고 있거나 고통을 당하고 앞날을 두려워하고 있다. 수 백만의 사람들이 지구상에 임할 일들을 걱정스럽게 주시하면서 사실상의 노예 상태에서 계속적인 염려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그것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망의 쏘는 것을 막으시고 그 독아(毒芽)를 제거하시어 사망을 잠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그들은 기뻐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노인들이나 병약자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초창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사로잡는다. 이 두려움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증가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이라고 노래한 시편 23편의 귀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실감있는 말씀이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젊을 때부터 이르러온다. 경제적인 파산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 위험한 수술을 받을지도 모르고, 전쟁에서 죽음에 직면할지도 모르며, 복잡한 법적 문제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위안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은 단지 물질적인 두려움에 자극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도 들어주실 것이다. 기도속에서 현세의 위안뿐 아니라 지속적인 소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그에게 향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경험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없을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께 향할때 두려움은 물러가고 믿음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뭏든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이 성경절은 죄의 속박 아래 있으면서 구원을 갈망하는 수 백만의 귀중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현재를 두려워한다. 미래를 두려워하며, 삶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무서워 한다. 무슨 희망이나 위로나 구원이 있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망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모두를 구원하셨으며 또 구원하실 것이다.
히브리서 2: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우리 번역(흠정역)에 의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라 사람을 붙들어 주려 하신다. 좀더 나은 표현으로는 “그리스도께 서는 천사들을 도와주려 하심이 아니요 사람을 도와주려 하심이라”라고 할 수 있다. 천사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은 그 결과에 대해 잘 알았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자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그들을 위해 해주실 수 있는 일이 없으셨다. 하늘의 모든 빛이 다 그들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일을 다 하셨다. 그들의 발걸음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고 저들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었다.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마땅하도다(behoove)라는 단어는 도덕적인 의무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다음의 귀절들에서 똑같은 헬라어 단어가 여러가지로 번역되었다. “옳으니라”, “빚지다”, “마땅히 ∙∙∙한다”, “∙∙∙할 필요가 있다”, “빚”, “빚진 사람”,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ought)” (요 13:14), “얼마나(빚)졌느뇨(owest)”(눅 16:5, 7), 마땅히(bound to)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살후 2:13),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must) (고전 5:10)”, “지킬지라(He is a debtor)”(마 23:16), “저가 빚(debt)을 갚도록”(마 18:30), “그 빚(due)을 다 갚도록”(마 18:34).

 주석가들은 일개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할 일을 말하는 무례함에 놀란다. 저자는 물론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는것을 몰랐다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다. 그분은 창조되심을 거절할 수 있고 모든 의무를 피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일단 도덕적 피조물이 되신다면 어떤 의무든 다 그분도 담당하셔야한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도 의무를 가지고 계시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같이 하나님께서 사단을 죄 많은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루스벨은 창조하셨다. 그 루스벨이 사단이 되었다. 그래서 이 창조 때문에 이런 불가피성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게 되었다. 그분은 결코 그것을 피하거나 부인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에 대해 책임이 없으시지만 죄의 존재때문에 하셔야만 할 몇가지 일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마땅하도다”(behoove)라는 단어를 썼을 때 가진 생각이었다.

 그분이 “하셔야만 했던” 일은 무엇이었든가? “범사에” “형제들과 갈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그 뜻이 사람이 당하여야 하는 어떤 시험이나 슬픔, 시련이나 고통을 잘 모르신다는 말을 결코 듣지 않도록 그렇게도 철저하게 완전허 사람이 되셔야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그분의 경험이 우리의 것과 모든 점에서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 천년의 생애를 산다해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一그분의 시련이 원칙적으로 사람이 당해야 하는 모든 고통을 포함해야 하며 그 정도에 있어서도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벟게 고난을 당하셔야 할 이유는 그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자비와 충성의 두가지 특성은 올바른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자비만 가지고는 너무 관대하다. 그리고 공의를 무시할지도 모른다. 충성은 자비를 균형지게 한다.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반대자들에게도 친절하고 이해심이 있어야 한다. 그분은 또한 공의에 진실하고 율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충성심은 무조건적인 자비와 꺼어지지 않는 공의 사이에 아름다운 균형을 이룰 것이다. 대제사장은 죄인을 생각해야 하지만 죄에 저항한 자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죄인에게도 자비로우신 것처럼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신실하셔야 한다.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죄이므로 대제사장이 힘써야 할 화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모든 사람의 화해를 포함해야 한다. 이것은 의(義), 즉 그의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수반한다. 율법의 요구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는 참된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관계된 모든 면에 공의로우셨다.

화해 시키려 하심이라(make reconciliation)
 이 일은 제사장들, 특히 대제사장의 일이었다. 화해란 말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을 사람에게 화해시키신다는 의미로는 결코 쓰이지 않고 언제나 사람을 하나님에게 화해시킨다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은 주목할만 한 일이다.
히브리서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 시험의 성격에 대해 통찰력을 준다. 그분의 가진 육체는, 시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실상 그에게는 시험이 되지 않는 그런 육체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어떤 시험들이 그들에게는 시험 거리가 안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체험은 그런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런식의 시험을 받으셨다면 강력한 시험에 빠져 굴복하는 가련한 죄인들의 무서운 투쟁을 경험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다. 실제적으로 시험을 받아 고통을 당하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에 저항하시면서 광야에서, 겟세마네에서 골고다에서 얼마나 고통하셨는가? 광야나 겟세마네에서는 그 시험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천사가 힘을 돋우기 위해 오지 않았더라면 그 충격 때문에 그분은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잔은 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옮겨지지 않았다. 그는 그 잔을 마셔야 했다. 사도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의심없이 이 경험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셨다. 그리스도의 시험과 고통은 “시험을 받는 자, 시험중에 있는자, 시험아래 있는자 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가슴은 그 긴장 속에서 파열되었다.

 시편기자는 노래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과 통한다. 헬라어의 시제는그리스도께서 시험 가운데 있거나 계속적으로 시험 중에 있는 사람을 즉시 도우시려고 준비하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약속이다.
부가적 설명—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스도의 고난을 평가하는 데는 그 고뇌의 단지 육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면을 더 숙고해야한다.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 말하자면 더 많은 고통을 받은 사람도 있을뿐더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용기를 보인 사람도 많다.

 그러므로 단지 육체적 고통만으로는 구주의 입술에서 터져나온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하는 비통한 부르짖음은 설명할 수 없다. 오직 이 위기의 순간에 홀로 있으며 버림받았다는 느낌, 그런 정신적인 고통만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못이 그의 손을 뚫고 들어갈 때도, 십자가가 거칠게 구덩이에 세워질 때도 그분은 아무 불평도 없으셨다. 침뱉음을 당하시고 조롱과 욕설을 당하실때도 그는 침묵하셨다.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은 하나님의 숨으심이었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의 확증으로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못하셨다. 그분에게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것처럼 보였다.

 만일 십자가에만 제한시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충분한 사정을 알 수 없을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엘렌 G. 화잇의 글들로부터 뽑아내보자 “복음이 촉진되고 혹은 방해를 받을 때에 생기는 결과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 관련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죄로 인하여 우리의 창조주께서 받으시는 괴로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온 하늘은 그리스도의 고뇌를 함께 당하였지마는 그러나 그 고뇌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나타나는 때에 시작되거나 마치어진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죄가 처음으로 생겼을 때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가져 간 고통을 우리의 둔한 감각에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옳은데서 떠나는 때마다, 잔인한 행동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슬픔을 가져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필연적인 결과로 저희 원수에게 정복되고 잔악한 대접과 죽음의 재난이 이르게 된 바 여기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다고 하였다”(교육 338,339).

 “예수의 전 생애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생애였다. 시험의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혹은 마태가 베푼 잔치에서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면서 예수께서는 잃은 자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계셨던 것이다” (시대의 소망1권. 38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천사들은 구세주의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사들은 저희 주님께서 사단의 군대에 포위되어 그의 천성이 몸서리나고 신비스러운 공포에 눌리신 것을 보았다. 하늘에는 침묵이 흘렀다. 거문고는 모두 멈추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그 사랑하는 아들로 부터 그의 빛과 사랑과 영광을 거두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침묵의 슬픔 가운데 있는 수많은 천사들의 놀라움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저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불쾌하다는 것을 좀더 잘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민은 그치지 않았으나 억압과 실망은 그를 떠났다. 결코 폭풍이 경감된 것이 아니요 폭풍의 목표이신 그 분이 폭풍의 분노를 직면할 강한 힘을 얻은 것이었다. 그는 침착하고 평온하게 되셨다. 피에 젖은 그의 얼굴에는 하늘의 평화가 깃들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았으므로 그는 어떤 인간이라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신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III권, 192,193).

 “온 하늘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은 큰 쟁투를 목격해 왔다. 큰 흥미를 가지고 저들은 투쟁의 마지막 장면들을 뒤따랐다. 구세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사 그의 영혼이 큰 어둠의 공포 때문에 기가 죽는것을 저들은 바라보았다. 저들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는 그의 비통한 부르짖음을 들었다. 아버지의 임재하심이 물러 갔을에 저들은 죽음과의 마지막 큰 투쟁의 엄청난 슬픔 때문에 슬퍼하시는 그를 보았다. 피와 같은 땀이 많이 흘러서 방울방울 맺히고 땅에 떨어졌다.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가 세번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하늘은 그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으며 위로할 사자를 하나님의 아들에게 보내었다”(시대의 소망 III권. 297, 298).

 이 귀절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고동이 인성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고 끌난것이 아니라 죄의 시초부터 그 고통은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아버지의 고봉과 아들의 고통을 구별할 수도 없다. 한 분이 고통을 받으신것이 진실된것이라면 다른 한분도 그러하셨다. 이삭이 제단위에 눕혀지고 아버지가 아들의 가슴에 칼을 내려치려할 때 이삭만 고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만 오직 고통을 받았다고는 더더구나 믿을 수 없다.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두려움에 찬 말을 들으셨다. 그리고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여기있다”라고 대답해 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아들의 고통에다 비교할 수 밖에 없는 고뇌를 느끼셨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누가 더 고통을 당하셨는가 판단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전에 인용한 글에서 화잇부인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가슴을 채운것은 “죽음과의 마지막 극한 투쟁보다도 더 심한 엄청난 슬픔”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평가하면서 우리는 것세마네를 빼놓을 수 없다.

 겟세마네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가 바로 그곳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그분들은 분리되셨다. 아들은 최고의 결정을 하셨다. 그분은 비록 쓰디쓴 것이었지만 그 잔을 마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은 움츠러 들었다. 그는 땅에 죽은 것처럼 엎드러지셨다. 그리고 다가오는 고통을 위해 초인적인 힘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었을 것이었다. 만일 그가 거기서 죽었다면 죽음을 충분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모든것을 견디었으므로 그의 육체가 더 이상 견디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음이 고통을 끝내 주기 때문에 차라리 기다려지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죽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자연히 죽는 그 한계를 넘어서까지 살아계셔야만 했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 이르러서 죽음이 의미하는것, 즉 아버지와의 분리를 충분히 맛보아야 했다. 그 투쟁에서 일어섰을 때 그는 “각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다.” 십자가에서 그는 돌아가셨다. 겟세마네에서는 죽음을 맛보셨다. 이것에 대해서는 화잇부인의 글에서 발췌한 다음 글을 참고 할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인간 대신에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죄의 무서운 고통 때문에 떨리셨다. 그의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로부터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만일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강하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인성은 그때 무서운 죄의 느낌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인간의 대리자와 중보자에게 주어진 그 때의 능력은 죗된 세상위에 내린 무서운 분노의 무게 아래서 고통 당하는 분을 유지하고 받드는 힘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선고된 죽음의 고통을 받고 계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에게는 두려운것이다. 이것은 홍수로 멸망한 옛 세상의 파괴 역사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소돔의 거인들을 살렸던 기록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참으실 때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겟세마네 동산이 죄악 세상에서 그토록 큰 고통의 장소가 된 것은 죄 때문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슬픔이나 고뇌도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신 것을 측량하기에는 부족하다. 사람은 죄를 짊어지도록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구주께서 당하신 죄의 저주에 대한 공포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슬픔도 압도적인 힘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밀려올 때 그가 느꼈던 슬픔과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은 제한된 분량의 시험이나 시련만 참아낼 수 있다. 유한한 존재는 유한한 분량만 감당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은 죽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 큰 고통을 감당하셨다. 왜냐하면 신성 가운데 거하시는 인성이 잃어버린 세상의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을 참아 내는 능력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죄의 성격과 계속 죄짓는 자들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더 넓고 깊게하여 더 확대된 개념을 갖게 해준다. 죄의 값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르러 오는 영생이다” (영문목회지, 1938, 5월호,38,39).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꼭 죽음을 맛볼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임종이 가까왔을 때 자신의 행동을 검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동안은 의식이 없다. 혹시 자기 생애를 의식한다 할지라도 죽음의 순간에 그 의식은 사라진다. 만일 참으로 죽음을 맛보려면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처럼 보이지 마는 참으로 충분히 죽음을 맛본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임종의 순간에도 의식이 확실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갈은 의미에서 죽음의 고통을 충분히 맛본 사람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고통을 당했다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 고통은 끝난다.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 같이 많은 신체적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일찍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일정한 분량의 고통과 아픔만을 참을 수 있을 뿐이며 그도 죽는다. 만일 그가 초인적인 능력을 받아서 마땅히 죽었어야 할 한계를 넘어서까지 살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충분히 고통을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벌로서의 죽음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죽음의 순간이 전부가 아니다. 죽음이 형벌의 절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고통을 끝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선고를 받은 순간부터 3주일 후에 교수형을 받았다. 그 3 주일이야말로 그가 당하는 형벌의 절대적인 부분이다. 매일 그의 마지막 날이 하루씩 가까워지고 그의 불안과 고통도 날마다 증가한다. 마지막 순간이 와서 발 받침이 떨어져 나가고 그의 복이 부러지면 그의 고통은 끝난다. 죽음이란 고통의 절정임과 동시에 고통의 끝이다. 죽음의 고통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단지 죽음의 순간만을 고려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경우에도 적용시킨다면 겟세마네를 떠나서 그의 희생과 고봉을 평가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 동산에서의 경험은 골고다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받으시고 운명하셨다. 겟세마네에서 그는 또한 고통을 받으시고 어떤점에 있어서는 십자가에서 보다 더 깊은 고통에까지 내려 가셨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위에서 언급한 인용절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아버지의 임재하심이 물러 갔을 때에 저들은 죽음과의 마지막 극한 투쟁 보다도 더 심한 엄청난 슬픔 때문에 슬퍼하시는 그를 보았다” (시대의 소망, III권, 297).


부가적 설명—성경상의 삼위일체 교리(새뮤얼 T. 스피어)
 성경은 하나님의 영적인 통일성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정의를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다신론 형태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유일성을 가르쳐준다. 또한 성경은 사람이 예배와 순종을 통해 그 본질적인 유일성을 충분히 이해할 능력이 있다고 가정한다(요 17:3; 고전 8:6).

 또 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려진 존경할만한 인격을 명확히 가르쳐 주는데, 그분의 전체적인 성품을 생각해 볼 때 그분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진실로 신령한 분이시요 참된 하나님이시다(요 1:1-18; 요일 5:20; 롬 1:3, 4; 9:5; 딛 2:13).

 성경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성이 시기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되며, 종속된다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관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독생 자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고 아버지의 뚯을 행하는 자로 말씀하셨다. 그 분은 결코 아버지와 충돌되실 수 없으며 아버지의 자리를 취하지도 않으신다. “나의 아버지”란 말은 그 분의 입술에서 자주 발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자로 자신을 나타내셨다(요 8:29). 부활하신 후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다락방에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니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그의 지상 봉사 중 하나님 아버지를 어떤 면에서 자기와 다른 분, 우월하신 분, 그래서 자신이 종속되었다는 생각을 표현하신 많은 언급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같은 사실이 사도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허사”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분으로 언급된다(엡 1:20; 빌 2:9). 이런 귀절과 이와 유사한 말씀들은 의심할것 없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구별을 두며, 아들의 종속을 의미하는 어떤 종류의 우월함을 아버지께 돌리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우월함이 그리스도께 돌려진 일은 없다.

 다신(多神)을 배격하는 하나님의 절대 유일성,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나타날 때는 어떤 점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속성,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학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점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까? 다음의 관찰은 이 질문에 대답으로 제기된 것이다.

 1. 위에 진술된 모든 사실들은 다 같은 근거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그 근거를 부정하거나, 사용된 언어를 오역하지 않는 한 그들 중 단 하나도 부인 될 수가 없다.

 2. 성경은 그 사실들에 관한한, 그것들 사이에 어떤 명백한 불일치가 있다고 가정하지도 않으며 또한 직접적인 용어로 그것들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이름을 적용시키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떤 귀절에서는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해 보게 되고 다른 귀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을, 그리고 또 다른 귀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그리고 후자가 전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귀절들 중에서나,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도 이 서로 다른 진술들을 조화시켜 보려는 어떤 노력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단순하게 그들외 생각을 제한하기를 원한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상한 질문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대체적으로 추구 해야할 최상의 길일 것이다.

 3. 경건과 구원의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 문제에 대해 사색 하거나 성서학자들이 그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이라 말했는지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그대로 읽고 말씀 그대로 믿고 성경이 그치는 곳에서 그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4. 만일 어떤 사람들의 경향대로 삼위일체 문제에 관한 성경의 서로 다른 진술들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한 하나님 대신에 그리스도의 신성도 포함된 삼신(三神)이론을 채택해서는 안되며, 또 한편으로는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제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어떤 이론도 수긍해서는 안된다. 어떤 제한들이 서로 가해질지라도 성경의 모든 진술들은 다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한데 모여지기만 하면 전체적인 진리가 그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아리안(Arian)파는 그리스도를 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에 가깝다고 보며, 소시니안(Socinian)파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인간이라고 보는데, 두 파가 다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을 가르쳐 주는 귀절들은 적절하고 알맞은 강조를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종속되었다는 그런 귀절들에서만 근거를 삼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모든 증언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 잘못이 두 파를 일치된 결론이 아닌 그릇된 사상으로 이끌었다. 그리스도는 소시니안파의 주장대로 단순히 한 인간도 아니요, 아리안파의 주장대로 그의 지고한 본성에 있어서 신보다 못한 분이 아니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이신 그리스도시요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명명하자면 신인(神人)이시다. 신비롭기는 하지만 주님과 사도들의 교훈에 의하여 이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5.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종속됨은 단순히 그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가 취하신 인성이란 점에 있어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가 창조되고 의존적인 존재라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종속성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인성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에까지 미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 하셨으며 ‘저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셨느니라’고 말한다(엡 3:9; 히 1:2).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으며 두 귀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활동의 매개체로 나타난다. 역시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주시어 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시므로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갈 4:4; 요 3:16; 롬 8:32). 이 귀절들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신 이 아들이 그의 성육신 이전에 존재했으며 또한 존재하고 계시다가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고, 아낌을 받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구속을 위해 그 아들을 주시는 과정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 속에서 인성을 취하시기 전에 그와 관계를 가지셨으며, 아들을 주시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어떤 종류의 수위권을 가지고 계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또한 이 아들이 지상에 성육신 되시고 뒤를 이어 하늘에서 높임을 받으실 때 만물은 저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는 것을 바울을 통해 배우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아들편의 종속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종속성은그 정확할 성격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뿐 아니고 그의 더 높은 본성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의 베일속으로 내려오신 것도 이 더 높은 본성 안에서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실 때도 이 더 높은 본성 안에서였다(빌 2:9).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를 받으신 것으로 말씀하신다. 누구에게서 받으셨는가? 말 할 것도 없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부터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른 경우에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또 이런 귀절도 찾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속에 주셨으니’ (요 3:35).

 이 귀절들을 종합해 보면 성경에 진술된 대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속성은 그의 인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그의 더 높은 본성에까지 확장된다. 이것이 메이어(Meyer) 가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표현한 견해이다. 메이어는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서만 종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6. 모든 성경절들을 종합해 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종속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실체와 사역의 양식에 있어서 본질적이고도 내재(內在)적인 특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되게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특성이 무엇이든 간에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통일성의 교리와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이런 사실은 위대한 구속의 경륜 안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륜 안에서 사람에게 대한 직책 관계, 행동 등의 다양성과 함께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인격적인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 이 명칭들과 특별한 의미들은 바뀌어질 수 없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절대로 아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아들이라는 칭호도 결코 아버지에게 쓰여지지 않는다. 각 칭호는 각각의 영원한 적용과 쓰임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나타난 특성들은 삼위 하나님 교리의 근거가 된다. 이 교리는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지하고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삼신론(三神論)의 체계, 즉 세 하나님의 교리가 아니며 세 인격 안에서 존재하고 행동하는 한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여기서 인격(Person)이란 말의 의미는 이 관계를 나타내는 데 최선의 말이기는 하지마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어긋나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사람에게 적용될 때 쓰이는 일반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성서적인 삼위일체는 삼신론(三神論)이 아니다.

 우리 구주는 침례에 있어서 준수되어야 할 형식을 정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지시하셨다(마 28:1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가지 인격적 명칭에 있어서 구별된 세 요소를 보게된다. 이것은 그렇게 묘사된 인격들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문체는 세분 모두를 똑같이 신적(神的)인 분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침례 형식은 이 구별을 지지하는 강력한 논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곳에서 신성의 본질적인 통일성에 대해서 어떤 모순을 의미하거나 주장한다고 이해하는 삼위일체론자는 없다.

 바울은 신성의 통일성을 믿었다. 그렇지만 에베소서에서 그는 말한다. ‘이는 저(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하나님) 나아감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엡 2:18). 여기서 최소한 형식에 있어서는 세 인격(tri — personality)에 대한 인정이 명백해졌다. 위에 언급된 인격들 사이의 접근 방법에 관해서 생각하면 차이점이 있다. 그 접근 방법이란 성부는 통해서(through), 성자는 의해서(by)이며, 성령은 향해서(unto) 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와 있지만 이곳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는 사도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부수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사실상 삼위성(三位性)의 요소는 본질적인 통일성과 반대되지 않는 의미에서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언급 중에서 밝히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삼위성(三位性)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자, 도덕적 지배자, 섭리로 다스리는 통치자로 부르는 것처럼, 사벨리안(Sabellian)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단순히 하나님의 삼중성을 드러내는것이 아니다. 그런 이론은 성서 언어의 자연스럽고 적절한 중요성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그 언어에 적용시킨다면 중언 부언하거나 불합리하게 번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동시에 아버지며 한 시민이고 법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친숙하고 공정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명칭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과 같은 명칭은 인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분명히 그렇게 사용되었다. 그러한 사용에 제한을 받아야 되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통일성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만일 삼신론(tri-theism) 이 성경의 교리라면 이 명칭들은 어떤 제한도 받음이 없이 적절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7. 성경의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세 인격을 가지셨으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성이시지만 어떤 면에서 아버지께 종속 되었다는 이론을 가지고 삼위를 구별하는 품격을 정확히 설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전부 실패할 것이 틀림 없으므로 지금부터는 생략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주제는 인간의 사유 영역에 있지도 않으며 우리들이 알수 없는 오묘 숭에 포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혼란에 빠져서도 안 된다.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영원 발생(eternal generate)의 이론은 아버지로부터 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성령이 영원히 發現(eternal procession) 된다는 비슷한 이론과 함께 이해하기 힘들고 기껏해야 신비스런 추측이고, 현명해지고 싶은 하나의 노력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지식의 가능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의식(三重意識)에 대한 이론—아버지 하나님의 한 의식(意識)과 아들 하나님의 다른 의식,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또 다른 의식—도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결코 그것을 충분히 긍정하거나 부정할 만큼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나타난 삼위일체의 정확한 형태(mode)에 대해 우리가 전혀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신비이며 또 신비 임에 틀림없다. 나타난 사실을 믿기 위해서 우리가 꼭 이 형태를 이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8.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그 요소에 대해서는 집합적이든지 분산적이든지 간에, 메마르고 비실제적이고 쓸데없는 교리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죄인으로서의 사람의 조건과 갈망을 충족시켜준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리고 덧붙이기를 ‘주도 하나요’ 그와함께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고조되어 다시 말하기를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했다(엡 4:4-6). 어떤 그리스도인이 생각이나 마음 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 진술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는 말한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 13:13). 이 축복 기도속에 나타난 신성(神性)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누가 흠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사도는 또 고린도 교회에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 8:6).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of whom) 우리도 그를 위하여’라는 귀절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적용된 말씀이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by whom)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는 귀절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말씀이다. 사용된 전치사의 이런 차이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귀절에서 원초적인 근원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는 중개자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여기서 용서는 삼위의 한 인격이신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 그러나 그것은 삼위의 다른 인격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온다. 누가 이런 교리에 반대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할때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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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하나님은 성경에서 수위를 차지 하신다. 아들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구원하시는 을 맡으신다. 성령은 재 창조와 성화를 맡으신다. 그것이 집합적으로 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든지 각 사람의 구원에 관계되어 분산적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진실로 전능 하시고 편재하시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전체적인 계획에 참여하신다. 이 계획 속에는 불필요한 것도 없고 사람의 절실한 필요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없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필요를 생각하면서 신성한 삼위일체를 명상할 때 이 교리에 대한 어떤 난점도 성경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사상의 빛이며, 그의 경험의 은혜스러운 능력이다. 밝혀진 사실로 만족하면서 그것을 영적으로 사용하는 그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없다. 그는 경배하는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말씀에 나타난 그대로의 그분을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를 수 있다.

 만복 근원 주 하나님

 천하 사람 모두 찬송

 만만천사 음성 높여

 성부 성자 성령 찬송

 사람이 성경을 떠나서 그리고 성경 밖에서 추측하고 인간의 한계보다 더 지혜로워 지려고 할 때 어려운 문제들이 일어난다. 영광스러운 교리도 그때는 혼란이 되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혼돈 속으로 우리를 밀어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측은 덜하고 더 많이 믿는 것이다.

부가적 설명—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화잇 부인의 글들
 “하나님의 아들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중에 보여주신 신성의 겸비, 희생, 자기 부정, 그리고 당하신 굴욕과 반대등을 명상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고통을 명상할 때 그분의 놀라운 겸손에 대해 감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천사들은 놀라면서 깊은 흥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한발 한발 치욕의 길을 걸으시는 것을 본다. 그것은 신성(神性)의 신비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의 빛과 지식에 무식하게 함으로서가 아니요. 사람이 알 수 있는 지식의 최고 한계를 넘어서므로서 자신과 자신의 길을 감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셨다. 인성은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지식을 초월한다. 구속의 신비는 신비롭고 다함이 없는 과학이며 끝없는 영원의 노래이다. 사람들이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리요 하고 외치는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겉옷을 뒤집어 쓰고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의 메아리.1894.4.30. p. 133).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타락에서 건져 내시고 유리한 위치에 올려놓기 위하여 그의 왕복과 왕관을 벗어 놓으시고 그의 신성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궁전에서 가지셨던 영광을 지니시고 지상에 오실 수 없으셨다. 죄로 물든 인류는 그 광경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인성의 두루마기로 그의 신성을 가리우셨으나 신성(神性)을 떠나신 것은 아니었다. 신인(神人)이신 구주로서 그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유아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모든 경험을 나누면서 타락한 인류의 선두에 서셨다. 인류로 하여금 산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그는 이땅에 오셔서 순종의 생애를 사셨다.” (리뷰 앤드 혜럴드, 1905. 6.15. p.8).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되시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 하나님을 보증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하고 계셨기 때문에 오직 그 분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증보자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만 규정된 조건들을 이루시기 위하여 양편을 다 보증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분은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보증이 되신다. 영원한 말씀으로서, 아버지와 동등된 분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우리를 향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또한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변하지 않는 평화의 충고를 우리들에게 확신시켜 주시 기를 원하시어 당신의 독생자를 인간 가족의 한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약속으로서 그의 인성을 영원히 지니도록 하셨다.”(상게서, 1894. 4.3. p.210).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 가지신 인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에 관해서도 결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 말씀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는 했지만, 아버지와 동등되고 일체이신 분으로서 신령한 존재로 계셨다. 영원 전부터 유일하신분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그분을 영접하기만하면 축복을 받는다. ‘이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사람과 천사들이 창조되기 전에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 이’없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 하셨다면 그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셨다. 이것에 관한 말씀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셨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셨고, 영원토록 축복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신령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뚜렷한 인격을 가지셨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신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하늘의 지적 존재들의 사령관이시며 천사들의 찬탄어린 존경을 당연히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아버지와 하나이셨다는 사실에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것은 신령하고 본래적인 영광으로 찬란한 어둠을 뚫고 비치는 빛이다. 이 진리는 그 자체가 무한히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다른 신비스러운 것들과 설명할 수 없는 진리들을 설명해준다. 비록 그것이 접근하기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것이라 할찌라도 빛속에 거하기만 하면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상게서, 1906. 4. 5. p. 8).

 “사람과 하나님과는 얼마나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는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인성 속에 활력과 쇠하지 않는 생기를 부어 주심으로서 질병의 침입을 막아서 그의 인성을 도우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낮게 되셔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그가 정죄받고 신음하는 세상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내려 오셔야 한다는 그 계획은 굴욕의 모든 단계들을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시작하신 것이었다. 얼마나 큰 겸비인가! 그것은 천사도 놀라게 한다. 언어로는 결코 그것을 묘사할 수 없다. 상상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영원한 말씀이 육체가 되기를 동의 하시다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다니 그것은 얼마나 큰 겸비인가.” (상게서, 1900. 9.4. pp. 561, 56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오직 신성만이 뱀의 독이 스며든 상처로부터 사람을 구원하기에 효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의 독생자 속에서 인성을 취하시고 인성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확증하셨다. 모든 부면에서 그분이 거룩한 법을 옹호하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분노와 죽음의 선고를 감수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각인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불멸의 생명,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는 바로 그 생명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바로 하나님이셨던 말씀은 이러한 생명을 가지셨다. 육체적 생명은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것도 아니고 불멸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생명을 주시는 분인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다시 취하셨다. 사람은 그의 생명을 조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빌려 오거나 파생된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에게서 이 생명을 취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그 안에 빌려 오거나 파생되지 않은 본래적인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이 타고나지 않는다.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은 그것을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다. 그 생명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을때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사람에게 주어진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위한풍성한 샘물이다.”(영문 시조, 1887. 4. 8. p.214).

 ‘아브라함이 있기전에 내가 있었느니라’ 그리스도는 선재(先在)하시고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가 모세에게 말씀하시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한 기별은 이것이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선지자 미가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솔로몬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셨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임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22-25, 29. 30).”

 “그의 선재하심(pre-existence)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을 태초로 인도하신다. 그는 당신께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시지 않은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고 단언하신다. 유대인들이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었던 그 분은 하나님과 동반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바로 그 분이었다.”(영문 시조, 1900. 4. 29. pp. 2.3).

 “사도는 우리들의 주의를 우리 자신에게서 부터 우리 구원의 주에게로 이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의 성품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다음은 그의 신성에 대한 묘사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다해서는 다음과 갈이 말한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인성을 취하셨다. 그것은 그가 친히 동의하신, 스스로 택한 행위였다. 그는 그의 신성위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으로서 나타나시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우주에서 충성심과 찬탄을 일으키는 신성의 나타남을 가리우셨다. 지상에 계실 때도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하시고 사람의 형상과 모습을 취하셨다. 그는 지상에서 사람으로써 세상을 사셨다. 그의 빈곤을 통해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그는 그의 영광과 위엄을 보류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잠시동안 포기하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빈곤 하게 사셨지만 가는 곳마다 축복을 나누어 주셨으며 그가 말씀하시면 천사의 무리가 그들의 구주를 둘러싸고 그에게 경배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그의 피조물들에게 거의 예외없이 알려지지 않게, 공포되지 않게 사셨다. 분위기는 찬송 대신 죄와 저주로 더럽혀진 것이었다. 그가 담당해야 할 것은 빈곤과 굴욕이었다. 그가 이곳 저곳 다니시며 병자를 낫게 하시 고 눌린자를 자유케 하는 자비의 사명을 수행하실 때, 그에게 축복을 간구하는 외로운 목소리는 드물었고 나라의 최고 귀인들은 멸시하면서 그를 지나쳤다.”

 “이것들을 영광의 부요함과, 불멸의 언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찬양의 풍부함, 그리고 하나님의 우주에서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수 많은 목소리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낮추시고 죽을 육체를 취하셨다. 인류의 한 가족으로서 그는 죽을 육체이셨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세상에서 생명샘이 되셨다. 그의 신성으로서 죽음의 다가옴을 막고 죽음의 세력을 거절하실 수 있으셨으나 자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므로 우리에게 생명과 불멸을 주시려고 했다. 그는 세상죄를 짊어지시고 그의 신령한 영혼에 산더미 같이 밀려오는 죄의 형벌을 당하셨다. 그는 사람이 영원히 죽어 있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셨다. 그는 어쩔 수 없어서 돌아가신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그의 겸비였다. 하늘의 모든 보좌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 한 선물에 쏟아 부어졌다. 그는 인류에게 필요하고 받아야만되는, 생명을 주는 모든 에너지를 그의 인성속에 가져오셨다”(리뷰 앤드 헤럴드. 1887.6. 5. p. 417).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잠시동안 스스로 취하신 인성속에 감추어지고 가리워졌지만, 그는 사람이셨을 때도 하나님이신 것을 그만두신 것이 아니었다. 인성이 신성을 대신할 수 없고 신성이 인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신성의 신비다.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밀접하게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혀 구별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겸비하시어 사람이 되셨지만 신성은 여전히 그의 것이었다. 그의 신격 (神格)은 그가 신실하고 진실되게 충성하는 한 잃어버려질 수 없었다. 아픔과 고통 그리고 도덕적 타락으로 둘러싸여서, 하늘의 언약을 위탁받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거절을 당하면서도,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그는 지상 생애가 끌난 후 다시 한번 신성의 영광을 취하기 위해 준비하셨다”(영문 시조, 1899. 5.10. p. 306).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해 명상할 때, 우리는 사람의 지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량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놀라운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베들레헴 마굿간의 연약한 아기와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전능한 하나님과 무력한 아이 사이의 거리를 잴 수 있을까? 그러나 세상의 창조주께서, 충만한 신성(神性)으로 거하시는 그분이 마굿간의 무력한 아기로 현현(顯現)하셨다. 어떤 천사보다도 비할데 없이 높으시고 위엄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 인성의 두루마기를 취하시다니! 신성과 인성은 신비스럽게 결합 되었고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가 되었다. 바로 이 하나됨에서 타락한 인류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본체의 나타난 형상을 보는 것이다.”(영문 시조, 1896.6.30. p.5).

 “입법자로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하셨다. 그의 명령과 결정은 영원한 보좌의 위엄으로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 속에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성을 명백히 드러내셨다. 그는 참으로 완전히 하나님과 연결되었고 하나님의 두르시는 빛 속에 거하였으므로 아들을 보는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같았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0. 1.7. p.1).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었다. 신성은 인성에 의해 낮추어 지지 않았다. 신성은 그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성과 연합된 인성은 광야에서 극심한 시험을 견디셨다.”(리뷰 앤드 해럴드, 1890.2.18. p.97).

부가적 설명—도덕적 자유 기능의 권리와 댓가
 히브리서 저자가 10절17절에서 사용한 “합당 하도다”라는 말과 “마땅 하도다”라는 말은 사람의 자유 기능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각할 권리를 주셨다는것은 저자가 이 권리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 만일 생각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가 없다면 죄도 없고 구주도 필요 없으며 그리스도의 죽음도 있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면 이 문제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 만일 생각할 수 있는 권리와 행동의 규정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이 문제는 올바로 제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권리들을 사람에게 주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변하셨다.

 지적인 존재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결정하시므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셨음이 분명하다. 창조는 하나님께 지워진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창조의 결과를 담당하셔야 하셨고 그것들을 미리 아시고 그것에 대해 준비하셔야 했다. 하나님은 놀라 당황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강조해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창조할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창조하신다면 앞일을 미리 보시고 모든 사건에 대해 준비하셔야 했다. 이 필연성만은 하나님께 지워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무를 담당하셨다. 그분은 죄에 대해 책임이 없으시지만 창조하시면서, 죄가 마침내는 정복되도록 사건들을 잘 조정해 놓으셨다. 죄가 원래 육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자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루어야 할 것은, 그분이 창조하시고 도덕적 자유기능을 주신 사람의 마음이었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생각할 수 있는 권리속에 하나님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 권리를 사람에게 주시면서 그 권리를 축소하셨다면 하나님의 완전함이 의심받으실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을 강요하신다면 스스로를 부정하시는것이 되고 만다. 그분은 당신께서 사람에게 주신 그 권리를 무슨일이 있어도 존중하셔야 된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값진 선물이다. 사실상 그것은 사람을 야수보다 위에 올려놓은 바로 그것이다. 그 권리를 빼앗기거나 축소시킨다면 사람은 사람이기롤 그친다.

 생각의 권리는 사람에게 중대한 결과들을 가져왔지만 하나님께는 더욱 그랫다. 그 권리를 사용함으로 종교들과 철학들이 일어나서 번영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것들은 극적으로 반대하는 것들이 허용되었다. 하나님의 법과 상반되는 정부들이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신 생각하는 권리 때문에 그것들을 인정하신다. 바울이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 13:1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전제 위에서였다. 적절한 하나의 예는 바울 당시의 로마정부이다. 그것은 억압적이고 어느모로 보나 경건하지 못한 정부였다. 그러나 사람에게 생각의 권리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권리와 그것에 따른 행동의 권리도 존중하셨다.

 이것은 사실상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이 사람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유일한 수단은 설복이나 의논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변경시키는 길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이성에 호소하는 논의(論議)의 방법을 사용하게 만든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서만 하나님의 동기는 정당하게 된다.

 사람의 이성에 호소하시는 하나님은 바울의 글에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1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입장을 확실히 하셨으므로 바울이 이렇게 말하도록 시키신 것이다. “네가 결정하도록 놔 두겠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네가 재판관이다.” 이 말씀 중에서 바울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의 권리를 인식하고 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판단과 지성에 호소하신다. 하나님의 논의가 너무도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으시다. 생각을 왜곡시키는 그릇된 철학이나 잘못된 이론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침입하여 그들의 행동을 결정지을 때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은 그들 앞에 진리를 제시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듣지 않을 때는 그들의 이론을 실험해 보도록 하시고 그 결과를 보여주신다. 사람들과 정부들은 지금 그러한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실수들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황금률은 개선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좋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하신다. 충분한 수가 그렇게 결정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이 왕국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권리와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위에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그런 왕국을 세우셨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것은 수천년 동안 연기되어 왔다.

 우리는 이것이 사람에게 의미하는 엄청난 값을 늘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 값이 굉장하다는 것이 인정되었음이 를림없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창조 전에 그 값을 계산하시고 생각의 권리와 도덕적 자유기능의 권리가 그 값을 치룰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하셨다. 이 결정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기 전에, 도덕적 자유기능의 가치를 평가하려면 전체의 값을 고려해야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루셔야 할 값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

 사람에게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주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치루신 값은 무엇이 있는가? 바울이 말한대로 범사에 많다.

 성육신은 창조때 부터 예견된 결과다.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 올것을 예지하시고 예견하셨을 때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음도 또한 아셨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죄는 하나님에게도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창조가, 또 도덕적 자유기능이 과연 그런 값을 치를 만큼 가치있는 것이었던가?

 죄는 높임을 받을 천사 루스벨과 함께 시작되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으신 덮는 그룹이었다(겔 28:14).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the anointed cherub) 라는 표현은 루스벨이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존재이거나 혹은 아마도 기름부음을 받은 중에서 최고의 존재라는것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마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한 그룹임이여”(an anointed cherub)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높임을 받은 천사이며 아마도 최고의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상징적으로 두로왕으로 나타나지면서 루스벨은 “다니엘보다 지헤”롭다고 말해진다. 그는 완전하게 창조되기는 했지만 “마음이 교만 하였으며” 거만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겔 28:3, 9, 17). 그가 전쟁을 통해서 탐내던 자리를 얻기 위하여 시도한 후, 그의 교만과 권력의 침해 때문에 하늘에서 쫓겨났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쫒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쫒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7-9).

 이사야는 루스벨이 반역에 대한 위의 언급에 덧붙인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쩔어졌으며 너 열국을 덮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루스벨의 의도에 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뭇별”들, 즉 천사들을 다스리기를 원했다. 그는 “지극히 높은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북극 집회의 산위”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좌정하기를 원했다. 가장 절정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겔 29:9).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루스벨의 공공연한 반역에 대해 상세한 것은 모른다 해도 몇 가지 것은 확실하다.

 계시록 12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늘에서 있었던 전쟁은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1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해산하면 아이를 삼키고자”(4절)하던 원수의 시도가 역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5절). “그의 보좌 앞으로”란 귀절은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그는 “높은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히 1:3). 그러나 그 자리는 루스벨이 차지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고 “지극히 높은자”가 되기를 원했다(겔 28:2; 사 14:1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를 차지하시고 사단은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스도와 루스벨의 쟁투는 이 세상 창조 전부터 하늘에서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루스벨은 이미 사단이 되어 있었으며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을 유혹했다. 그 때가 이 세상창조보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반역이 폭동으로 익어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므로 루스벨이 타락한 것은 창조보다 어느정도 이전이었음이 틀림없다. 어쨋든 사단의 계획은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완전히 익어 있었다. 루스벨의 증오와 반역이 그리스도께 향한 것이었음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백해진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 쟁투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있었고 그것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쟁투는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게 되었고 그에 뒤따른 그의 돌아가심이 있게 되었지만, 창조하지 않았거나 혹은 창조하셨다 하더라도 피조물이 도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생각의 자유나 도덕적자유 기능을 부여받지 않았다면. 그 희생은 아주편리하게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잘 아시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 값을 치루어야 하는지 아시면서도 창조를 진행시켰다.

 창조에 포함된 다른 고찰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 아마도 제일 중요한 것은 피조물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부과시키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런 권세를 얻으셨는가. 무슨 권리로 복종을 요청하시는가. 사단은 하나님께서 단지 이러한 권세를 스스로 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사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연히 처음 존재하게 되었으며 아무도 하나님과 겨룰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다른 존재와 나누기를 거절하시고 루스벨이 하나님이 되기를 결심했을 때 그를 하늘에서 쫒아 내려는 시도가 가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임의로 행하시며 다른 존재에게 지워준 율법에 속박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화잇부인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정부의 계획을 곡해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거민들에게 규율과 율법들을 주신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부정적이 아니시고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부정적이 아니신데 왜 천사들만 자기 부정적이 될것을 요청받아야 하느냐고 주장하였다”(리뷰 앤드 헤럴드, 1886. 4. 9. p.145).

 “하늘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불필요하며 독단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불평하였다. 그는 하늘의 총사령관인 여호와 하나님을 그릇 나타내었다. 그는 자기가 율법 위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런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변호하는 원칙이 악한 것이고 해로운 것임을 밝히 드러내었다”(상게서, 1893. 4. 25.p. 257).

 “사단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자기 부정을 요청한다고 비난하였는데 자기 자신도 자기부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뿐더러 다른 존재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해 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단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행한 비난이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쫓겨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주께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봉사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거짓된 고소에 직면하셔서 아버지를 나타내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상게서, 1890. 2. 18. p.97).

 “하나님의 아들로 최상권에 항쟁하기 위하여 창조주의 지혜와 사랑을 비난하는 것이 천사장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부조와 선지자 上권, 23).

 “루스벨은 하늘에서 최고의 권세와 능력을 갖기를 소원했다. 그는 하나님이 되어서 하늘의 통치권을 갖기를 원하였다” (리뷰 앤드 헤럴드, 1913. 1. 16. p.52).

 “사단은 자기가 그리스보다도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많은 하늘 존재들의 생각이라고 선언하면서 하나님께 그 문제를 제기하였다”(상계서, 1909. 2. 4. p. 8).

 “사단은 하나님의 법령과 판단보다 더 나은 율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상게서, 1890. 6. 17. p. 370).

 만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이것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 놓지 않으셨다면 이것들은 당황하게 하는 문제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종을 아시므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생각하는 존재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이 사물들에 대한 이유를 물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행위가 사람들 앞에 공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사람이 그들의 행위에 나타난 그들의 성품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처럼 피조물들도 창조주를 그렇게 판단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넣어주신 정의와 공의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그들의 표준이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사셔야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고소에 대처하시는가? 더 낮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一사실상 영원 전부터一그 대답을 준비하셨는가? 비난이 있다고 해서 그의 계획을 수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맞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고 있다. 이런 비난들은 미리 예견되고 준비 되었음이 틀림없다. 환경과 상황이 변화를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 답지 않은 일이다. 지금 우리는 만세 전부터 감취어져 왔으나 적당한 때에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알게 되었다(골 1:26). 이 계획은 모든 가능한 비난에 해답을 주며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과 취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의 피조물 들에게 요청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드러내 준다. 이 경륜에는 이미 언급했지만 성육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희생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일시적인 성육신이 아니라 영원한 성육신이다. 이것은 당신의 소유와 존재 모두를 나누시려는 하나님의 뚯을 나타내주는 증거로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사단은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되며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것이 아닌 빼앗은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한번 획득한 권세는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하나님께서는 권세를 가지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빼앗은 것이지 하늘 거민들의 동의를 얻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고 사단은 주장한다. 만일 누가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 (눅 19:14)한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반역을 누르고 폭력으로 통치를 계속할 것이며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사단은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언급한 대로 이 모든 것을 미리 예견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영원 전부터 사람과 하나가 되시고 자기를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이 당하는 모든 것을 당하시는 것이 가능 하도록 한 계획을 촉진시키셨다. 만일 사람이 그 계획에 감동을 받아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자기의 통치자로 선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거민들의 동의를 얻어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후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앉게 하신다면 매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시고 차근 차근 실현해 나가셨으며 사단의 비난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셨다. 또한 사단의 도전에 성급히 응답하지도 않으셨다. 정해진 때가 되매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사단은 그 사이 4천년 동안을 하나님을 비웃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의 권세중 단 하나도 포기할 의향이 없으신 걸로 믿게 하기 위하여 활동해 왔다. 그러나 그의 단언과 주장들은 마침내 그 시간이 왔을 때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을 강조시켜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도들에게는 비교적 적은 부분만 알게 하셨지만 바울에게는 수많은 세월동안 감추어져 왔던 그의 경륜(經倫)을 알게 하셨다(엡 3:1-3). 이 경륜은 우리 모두에게 사단의 비난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도록 해주며 그 모든 것이 아무 근거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공의롭게 서셨다.

 이 모든것들이 하나님께 “합당”했다(히 2:10). 하나님께서 그렇게 잘 해주셨기 때문에 그 피조물들이 단지 하나님이 주신 삶 자체에만 만족하시는것이 아니라, 삶의 특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그분께 돌리는것이 합당하다. 피조물들의 생명이 당신의 생명같이 여겨지며 행복하고 만족스런 생명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바라신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히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이루시고, 또 이루시고 계시는 일만 “합당”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시는 것도 “마땅”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원해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 가셨다. 그리고 가장 잔인하고 어려운 환경 아래서도 사람이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사단에게 때가 왔을 때 그가 원하는 일을 나타낼 기회도 주셨다. 사단은 무엇을 했는가? 예수께서 그를 해치지도 않고 어떤일도 하지 않으셨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체포해서 모욕하고 침 뱉고 조롱하며 가시 면류관을 씌워 나무에 못박아 죽도록 했다. 반면에 성육신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하신일—사람을 위해 사시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셨으며 죄와 죄악을 용서하시고 마침내는 보좌에 당신과 함께 앉도록까지 하신—그 모든일이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가시기에 너무 비천한 곳은 없으셨다. 그는 기꺼이 동참하시고, 주시고,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사람과 함께 당신의 자리를 같이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결코 불경건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적은 범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헤아리고 인식하도록 이성을 주셨다는 것은 복된 축복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각하는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장려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이 특권으로 치루어야 할 값은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권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이 그 값을 치룰 만큼 가치 있다고 믿으셨다.

 하나님께서 치루신 값을 생각하면 사람이 선택의 자유 때문에 치루어야 할 값은 극히 적다. 사실상 영원의 빛에 비추어 보면 그 값이란 이득에 불과하다. 바울은 그것을 이러한 말로 표현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