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영적인
통일성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정의를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다신론 형태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유일성을 가르쳐준다. 또한 성경은 사람이 예배와 순종을 통해 그 본질적인
유일성을 충분히 이해할 능력이 있다고 가정한다(
요 17:3; 고전 8:6).
또 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려진 존경할만한 인격을 명확히 가르쳐 주는데, 그분의
전체적인 성품을 생각해 볼 때 그분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진실로 신령한 분이시요 참된 하나님이시다(
요 1:1-18; 요일 5:20; 롬 1:3, 4; 9:5; 딛 2:13).
성경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성이 시기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되며, 종속된다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관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독생 자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고 아버지의 뚯을 행하는 자로 말씀하셨다. 그 분은 결코 아버지와 충돌되실 수 없으며 아버지의 자리를 취하지도 않으신다.
“나의 아버지”란 말은 그 분의 입술에서 자주 발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자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요 8:29). 부활하신 후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 20:17)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다락방에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니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요 14:28). 그의 지상 봉사 중 하나님 아버지를 어떤 면에서 자기와 다른 분, 우월하신 분, 그래서 자신이 종속되었다는 생각을 표현하신 많은 언급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같은 사실이 사도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23).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3).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허사”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분으로 언급된다(
엡 1:20; 빌 2:9). 이런 귀절과 이와 유사한 말씀들은 의심할것 없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구별을 두며, 아들의 종속을 의미하는 어떤 종류의 우월함을 아버지께 돌리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우월함이 그리스도께 돌려진 일은 없다.
다신(多神)을 배격하는 하나님의 절대 유일성,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나타날 때는 어떤 점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속성,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학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점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까? 다음의 관찰은 이 질문에 대답으로 제기된 것이다.
1. 위에 진술된 모든 사실들은 다 같은 근거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그 근거를 부정하거나, 사용된 언어를 오역하지 않는 한 그들 중 단 하나도 부인 될 수가 없다.
2. 성경은 그 사실들에 관한한, 그것들 사이에 어떤 명백한 불일치가 있다고 가정하지도 않으며 또한 직접적인 용어로 그것들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이름을 적용시키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떤 귀절에서는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해 보게 되고 다른 귀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을, 그리고 또 다른 귀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그리고 후자가 전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귀절들 중에서나,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도 이 서로 다른 진술들을 조화시켜 보려는 어떤 노력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단순하게 그들외 생각을 제한하기를 원한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상한 질문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대체적으로 추구 해야할 최상의 길일 것이다.
3. 경건과 구원의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 문제에 대해 사색 하거나 성서학자들이 그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이라 말했는지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그대로 읽고 말씀 그대로 믿고 성경이 그치는 곳에서 그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4. 만일 어떤 사람들의 경향대로 삼위일체 문제에 관한 성경의 서로 다른 진술들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한 하나님 대신에 그리스도의 신성도 포함된 삼신(三神)이론을 채택해서는 안되며, 또 한편으로는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제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어떤 이론도 수긍해서는 안된다. 어떤 제한들이 서로 가해질지라도 성경의 모든 진술들은 다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한데 모여지기만 하면 전체적인 진리가 그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아리안(Arian)파는 그리스도를 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에 가깝다고 보며, 소시니안(Socinian)파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인간이라고 보는데, 두 파가 다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을 가르쳐 주는 귀절들은 적절하고 알맞은 강조를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종속되었다는 그런 귀절들에서만 근거를 삼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모든 증언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 잘못이 두 파를 일치된 결론이 아닌 그릇된 사상으로 이끌었다. 그리스도는 소시니안파의 주장대로 단순히 한 인간도 아니요, 아리안파의 주장대로 그의 지고한 본성에 있어서 신보다 못한 분이 아니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이신 그리스도시요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명명하자면 신인(神人)이시다. 신비롭기는 하지만 주님과 사도들의 교훈에 의하여 이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5.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종속됨은 단순히 그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가 취하신 인성이란 점에 있어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가 창조되고 의존적인 존재라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종속성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인성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에까지 미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 하셨으며
‘저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셨느니라’고 말한다(
엡 3:9; 히 1:2).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으며 두 귀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활동의 매개체로 나타난다. 역시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주시어 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시므로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갈 4:4; 요 3:16; 롬 8:32). 이 귀절들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신 이 아들이 그의 성육신 이전에 존재했으며 또한 존재하고 계시다가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고, 아낌을 받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구속을 위해 그 아들을 주시는 과정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 속에서 인성을 취하시기 전에 그와 관계를 가지셨으며, 아들을 주시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어떤 종류의
수위권을 가지고 계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또한 이 아들이 지상에 성육신 되시고 뒤를 이어 하늘에서 높임을 받으실 때 만물은 저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8)는 것을 바울을 통해 배우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아들편의 종속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종속성은그 정확할 성격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뿐 아니고 그의 더 높은 본성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의 베일속으로 내려오신 것도 이 더 높은 본성 안에서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실 때도 이 더 높은 본성 안에서였다(
빌 2:9).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를 받으신 것으로 말씀하신다. 누구에게서 받으셨는가? 말 할 것도 없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부터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른 경우에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마 11:27). 또 이런 귀절도 찾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속에 주셨으니’ (
요 3:35).
이 귀절들을 종합해 보면 성경에 진술된 대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속성은 그의 인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그의 더 높은 본성에까지 확장된다. 이것이 메이어(Meyer) 가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23)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표현한 견해이다. 메이어는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서만 종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6. 모든 성경절들을 종합해 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종속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실체와 사역의 양식에 있어서 본질적이고도 내재(內在)적인 특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되게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특성이 무엇이든 간에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통일성의 교리와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이런 사실은 위대한 구속의 경륜 안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륜 안에서 사람에게 대한 직책 관계, 행동 등의 다양성과 함께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인격적인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 이 명칭들과 특별한 의미들은 바뀌어질 수 없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절대로 아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아들이라는 칭호도 결코 아버지에게 쓰여지지 않는다. 각 칭호는 각각의 영원한 적용과 쓰임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나타난 특성들은 삼위 하나님 교리의 근거가 된다. 이 교리는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지하고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삼신론(三神論)의 체계, 즉 세 하나님의 교리가 아니며 세 인격 안에서 존재하고 행동하는 한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여기서 인격(Person)이란 말의 의미는 이 관계를 나타내는 데 최선의 말이기는 하지마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어긋나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사람에게 적용될 때 쓰이는 일반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성서적인 삼위일체는 삼신론(三神論)이 아니다.
우리 구주는 침례에 있어서 준수되어야 할 형식을 정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지시하셨다(
마 28:1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가지 인격적 명칭에 있어서 구별된 세 요소를 보게된다. 이것은 그렇게 묘사된 인격들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문체는 세분 모두를 똑같이 신적(神的)인 분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침례 형식은 이 구별을 지지하는 강력한 논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곳에서 신성의 본질적인 통일성에 대해서 어떤 모순을 의미하거나 주장한다고 이해하는 삼위일체론자는 없다.
바울은 신성의 통일성을 믿었다. 그렇지만 에베소서에서 그는 말한다.
‘이는 저(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하나님) 나아감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엡 2:18). 여기서 최소한 형식에 있어서는
세 인격(tri — personality)에 대한 인정이 명백해졌다. 위에 언급된 인격들 사이의 접근 방법에 관해서 생각하면 차이점이 있다. 그 접근 방법이란 성부는
‘통해서’(through), 성자는
‘의해서’(by)이며, 성령은
‘향해서’(unto) 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와 있지만 이곳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는 사도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부수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사실상
삼위성(三位性)의 요소는 본질적인 통일성과 반대되지 않는 의미에서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언급 중에서 밝히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삼위성(三位性)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자, 도덕적 지배자, 섭리로 다스리는 통치자로 부르는 것처럼, 사벨리안(Sabellian)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단순히 하나님의 삼중성을 드러내는것이 아니다. 그런 이론은 성서 언어의 자연스럽고 적절한 중요성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그 언어에 적용시킨다면 중언 부언하거나 불합리하게 번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동시에 아버지며 한 시민이고 법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친숙하고 공정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명칭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과 같은 명칭은
인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분명히 그렇게 사용되었다. 그러한 사용에 제한을 받아야 되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통일성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만일 삼신론(tri-theism) 이 성경의 교리라면 이 명칭들은 어떤 제한도 받음이 없이 적절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7. 성경의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세 인격을 가지셨으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성이시지만 어떤 면에서 아버지께
종속 되었다는 이론을 가지고 삼위를 구별하는
품격을 정확히 설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전부 실패할 것이 틀림 없으므로 지금부터는 생략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주제는 인간의 사유 영역에 있지도 않으며 우리들이 알수 없는 오묘 숭에 포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혼란에 빠져서도 안 된다.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영원 발생(eternal generate)의 이론은 아버지로부터 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성령이
영원히 發現(eternal procession) 된다는 비슷한 이론과 함께 이해하기 힘들고 기껏해야 신비스런 추측이고, 현명해지고 싶은 하나의 노력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지식의 가능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의식(三重意識)에 대한 이론—아버지 하나님의 한 의식(意識)과 아들 하나님의 다른 의식,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또 다른 의식—도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결코 그것을 충분히 긍정하거나 부정할 만큼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나타난 삼위일체의 정확한 형태(mode)에 대해 우리가 전혀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신비이며 또 신비 임에 틀림없다. 나타난 사실을 믿기 위해서 우리가 꼭 이 형태를 이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8.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그 요소에 대해서는 집합적이든지 분산적이든지 간에, 메마르고 비실제적이고 쓸데없는 교리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죄인으로서의 사람의 조건과 갈망을 충족시켜준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리고 덧붙이기를
‘주도 하나요’ 그와함께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고조되어 다시 말하기를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했다(
엡 4:4-6). 어떤 그리스도인이 생각이나 마음 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 진술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는 말한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이 축복 기도속에 나타난 신성(神性)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누가 흠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사도는 또 고린도 교회에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
고전 8:6).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of whom) 우리도 그를 위하여’라는 귀절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적용된 말씀이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by whom)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는 귀절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말씀이다. 사용된 전치사의 이런 차이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귀절에서
원초적인 근원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는
중개자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여기서 용서는 삼위의 한 인격이신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 그러나 그것은 삼위의 다른 인격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온다. 누가 이런 교리에 반대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할때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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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하나님은 성경에서
수위를 차지 하신다. 아들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맡으신다. 성령은 재 창조와 성화를 맡으신다. 그것이 집합적으로 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든지 각 사람의 구원에 관계되어 분산적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진실로 전능 하시고 편재하시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전체적인 계획에 참여하신다. 이 계획 속에는 불필요한 것도 없고 사람의 절실한
필요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없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필요를 생각하면서 신성한 삼위일체를 명상할 때 이 교리에 대한 어떤 난점도 성경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사상의 빛이며, 그의 경험의 은혜스러운 능력이다. 밝혀진 사실로 만족하면서 그것을 영적으로 사용하는 그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없다. 그는 경배하는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말씀에 나타난 그대로의 그분을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를 수 있다.
만복 근원 주 하나님
천하 사람 모두 찬송
만만천사 음성 높여
성부 성자 성령 찬송
사람이 성경을 떠나서 그리고 성경 밖에서 추측하고 인간의 한계보다 더 지혜로워 지려고 할 때 어려운 문제들이 일어난다. 영광스러운 교리도 그때는 혼란이 되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혼돈 속으로 우리를 밀어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측은 덜하고 더 많이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