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비평가들은 히브리서가 기록된 것은 예루살렘 멸망 전이 아니라 멸망 후, 서기 90년대나 그 이후라고 하는 단순한 역설로 히브리서의 바울 저자설에 관한 논쟁을 간단히 처리한다. 물론, 히브리서가 그렇게 늦게 기록되었다면 바울이 그 책의 저자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서기 60년대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는 매우 중요하게 된다.
늦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여기에 세 가지를 제시한다.
만약 성전이 이미 파괴되었다면 레위기 규례들의 폐지를 다루고 있는 논문에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으로는 만물의 종말과도 비교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이 이미 폐허가 됐다면 저자가 성전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의 멸망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이미 폐허된 성전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므로, 저자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논증 가운데 하나를 간과해 버렸다고 생각해 보면 더욱 명백 해진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는 의식적(儀式的)인 법령들을 폐지하시고자 했을 뿐 아니라 성전의 파멸로
이미 적절하게 폐지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저자는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을 갖게되는 것이다. 또한, 그 편지서를 기록할 때, 성전은 이미 폐허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었다면, 저자는 분명히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여 하나님의 불쾌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가지고, 이미 그 기능이 끝나버린 장소에서의 새로운 제사장 직분에 관한 자신의 논증을 지지하는 버팀대로 삼았을 것이다. 그 편지서의 전체 요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저들의 성전을 훼파하시고 그 백성들을 흩어버리셨다고 하는 논박할 수 없는 사실 안에서 다른 방향으로 유도되어 결론지어졌을 것이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가장 유력한 논증을 빠뜨린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히브리서가 예루살렘 멸망 전에 기록된 것이라고 믿는 두번째 이유는, 히브리서에서는 아직도 성전 봉사가 계속 수행되고 있는 것으로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에 대한 여러가지 실례여(實例)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히 7:28). 이 말은 현재의 상태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만일 구시대의 습관을 회고했던 것이라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었거니와”로 말했어야 할 것이다. 또,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는 말은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었음이라”는 말로 바뀌어져야 했을 것이다(
히 8:4).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말도
“저희가 섬겼던 것”으로 했을 것이 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진술하는 반면, 같은 관계 속에서 짐승의 피는(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營門) 밖에서 불사름이니라”고 말한다(
히 13:11, 12). 그리스도의 고난은 과거 시제로 되어 있고, 피에 관한 일과 희생 제물의 처리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오로지 히브리서의 기록은 서기 70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논점은 예루살렘 이 함락되기 전 그 곳의 신자들에게 이르러 온 의식 준수에 대한 관념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마지막 방문했을 때 그 교회 안에는
“수만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행 21:20). 수만 명이 몇 만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2~3만명을
“수만명”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 외에도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있었으며
“바리새파들 중에 믿는자들”도 있었다(
행 6:7; 15:5). 이들은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도 저들의 명령을 따라 결례를 행하고 폐지된 의식을 준수해야 했다(
행 21:26). 이것은 저들이 여전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
행 15:1)한다고 가르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수만 명의 신자들이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 각처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들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만일 그 때까지도 할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면 저들은 가는 곳마다 그들의 확신을 전했을 것이며.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모든 교회 안에 분열과 논쟁이 조장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계 전체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열은 없었다. 유대 지역이나 이방인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교계는 분열되지 않았다. 오직
한 교회가 있었을 뿐이며 그 교회는 할례를 요구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유대인 신자들과 율법에 대한 열심당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일은 분명히 서기 70년 이전에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히브리서의 기록이 전해짐으로 최선의 해결책이 주어진 것이다.
초대 교회 역사가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서기 60년대 초기와 그 도시가 멸망한 서기 70년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관념의 갑작스런 변화를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저들은 불과 몇년 사이에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부터 참 사도적인 그리스도교로 전향했다. 이 엄청난 변화에는 분명히 어떤 배경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충분한 이유는 히브리 서 가 출관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예루살렘 멸망 후에 기록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멸망 전 유대적인 의식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그 강력하고 열성적인 집착,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의하여 유지된 상대적인 관념 가운데서 어떻게 교회의 교리적인 연합이 보존되었는지 그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 정확히, 히브리서가 기록되어 나오므로 모든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적절한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