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저자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평적 인 눈으로 볼 때에 우리 자신들은 더 이상의 진지한 고찰을 할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히브리서의 바울 저자설에 관한 찬반 양론은 다른 이들에 의해서 모조리 제기되어 왔으므로, 누차 반복해서 언급되지 않은 말이 전혀 없다. 우리는 내적인 증거, 문법적인 구조, 바울답지 않은 어귀(語句)의 사용, 그리고 저자의 논증 형식이나 그 표현 방식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어귀나 단어들이 바울이 기록한 다른 책들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별 다른 이유없이 그것은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은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러한 논쟁들은 기껏해야 부정적인 것이며, 불확실하며, 부정적인 가정에 긍정적인 철학을 구축한다는 것은 언제나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히브리서의 논지와 그 일반적인 진술들은 분명하게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바울은 레위 기에 있는 규칙들에 대한 “대다수 유대인”들의 고집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지금은 쓸모없는 예식들로부터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도와 장로들을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전과 그 봉사의 잠정적이고도 일시적인 성격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만약 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 필요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대치된 것뿐만 아니라, 지나간 것의 진정한 의미를 교회에 제시할 충동을 느낀 누군가가 그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히브리서의 논지와 사상들이 바울익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심지어 바울 저자설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받아 들여지고 있다. 우리가 초기 교회의 역사와 예루살렘 교회의 형편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이 히브리서가 다루고 있는 바로 그 문제들에 관하여 투쟁중에 있으며. 그는 경험이 풍부한 저자이며,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개인적으로 접할 수 없었으며. 그만이 그 교회안에 있던 유대주의 가르침에 맞설 수 있었거나 대항했으며, 심지어 베드로와도 맞서서 대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도임을 알게 될 때, 이러한 상황 아래서, 누구든 바울이 자신에게 중요한 주제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자 갈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바울이 쓰고자 하는 욕구를 억제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의식(儀式)의 모형적인 제도를 어느 누구보다 직시(直視)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늘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의 진정한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것의 대리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마침내, 스스로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높힐 그 권세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견해를 보아 누구보다도 바울이 유대인의 희생제사 제도의 무익함을 곧바로 보여주는 그리스도 중보 사업의 이해를 위한 확고한 기초를 놓아야겠다는 필요성을 가장 크게 절감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잠시 후에 나타나 자기를 가리켜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는 자에 의하여 만들어질 거짓 중보 체제에 대한 가장 큰 방어 벽을 구축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문서를 기록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람一우리는 대개 유일한 사람이라고 부름一은 바울일 것이었다. 그는 문제를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유대교도들과 직접 대 면하였었다. 그는 그러한 보고서를 쓰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비평가들의 논증
 이미 언급했듯이 히브리서의 바울 저자설을 부인하는 비평가들이 주로 내세우는 논지는 그 편지서의 언어와 관련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히브리서의 언어는, 논쟁할 여지가 없는 바울의 다른 편지서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품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논증들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바울이 정확하고 세련된 헬라어를 쓸 수 없다고 하는 것, 더 나아가 그는 논제의 변화에 따라 문체를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저들의 추측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논증도 역시 정당하다고 믿지 않는다.

 바울은 바쁜 생활의 긴장과 고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떤 편지서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정확한 문법 구문을 갖추지 못한 편지를 서둘러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옥중에 있었으므로, 글 쓰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정확한 헬라어를 쓸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교육받은 사람이고 헬라어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글로써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자 했을 때 히브리서와 같은 소논문은 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급한 사람일 것이다. 바울의 초기와 후기에 기록된 글들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그의 신조에는 변함이 없으나 해가 지남에 따라 문체에는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평가들은 역사적 배경에 별로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 같다. 클레멘트, 바나바, 누가, 아볼로와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몇 종의 논문들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아무도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없다. 특히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후에 바울이 가졌던 필요성은 아무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바울은 엄격하고 해롭기만한 의식을 준수해야 한다는 교회의 요구에 그 자신이 굴복했다는 것을 매우 슬퍼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고독한 감옥에 앉아서 투옥되기 전에 교회를 위해서 했어야 할 일들을 생각했을 때, 전에 없이 그의 유대인 형제들에게 무엇인가 빚진 자처럼 느껴졌음이 분명하다. 주님께서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행 9:15)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그를 택하신 그룻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셨지만 진정으로 말하면 그를 유대인들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바울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저들에게 빚진 자였고 이제 갚을 때가 온 것이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와 마지막 만났을 때, 그는 실패하였었다. 그는 그 실패를 만회해야만 했다.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따른 의식들을 올바로 평가하고, 구속의 경륜에 있어서 각 예식들의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필요한 통찰력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의 때가 되면 없어질 본성과 이제 그것이 폐지되어야 할 시기가 지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이러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진 유일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다른 사도들 중에는 아무도,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될 때 교회가 직면할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임박한 장래에 있을 일이었다. 그때는 교회가 경고를 받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저들의 대제사장의 봉사(奉司)에 관한 하나님의 보다 심오한 것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교훈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되고 저들의 성전이 황폐될 때 필요될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는, 예수님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될 날이 박두해 오고 있을 때였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66년 10월이었다.

 예루살렘 멸망 직전 바울이 마지막 방문했을 때 교회는 곧 저들에게 밀어닥칠 재난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전히 절기들을 준수했으며, 예년과 같이 희생 제사를 드렸고, 의식적(儀式的)인 율법에 몰두해 있었다. 저들은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에 관해 아주 희미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명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갈바리에서 치루어진 위대한 희생으로 저들의 희생 제사가 쓸모없게 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늘의 실체를 향하여 저들의 눈이 열려져야 할 때가 이른 것이다. 저들의 성전이 파괴될 때에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무엇인가 확고 부동한 신앙의 닻이 필요될 것이었다. 만일 저들의 마음을 하늘 대제사장과 성소로 향할 수 있다면, 수소나 염소로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희생 제사를 바라볼 수 있다면, 지상의 건물에 지나지 않는 성전이 파괴될 때 낙담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에게 그러한 소망이 없고 하늘 성소에 대한 이상을 갖지 못한다면 저들이 신뢰했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볼 때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갑작스런 멸망이 도래할 때 교회에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바울은 몹시 염려하였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의식 준수를 존중히 여기는 관념 그대로를 가지고 세계 사면으로 흩어질 경우 도처에 그가 세워놓은 교회들이 당면할 문제들이 더욱 염려되었다. 바울은 저들이 할례나 모세의 율법에 얼마나 끈질기게 밀착되어 있는지를 바로 목격하였다. 박해로 인하여 저들이 흩어질 경우 이러한 신자들은 그가 설립해 놓은 모든 교회로 유입되어 백성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거나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신자들은 바울이 경험한 바와 같이 여전히 율법에 대하여 열성적이었다. 그러한 때가 왔을 경우 바울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의식적(儀式的)인 율법에 관한 문제 때문에 전 그리스도 교회가 분열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루살렘의 교사들과 신자들이 저들의 주장을 가급시킬 경우 그리스도교국 내의 모든교회 안에는 파벌이 생겨날 것이었다. 사태는 매우 위급하였다. 바울은 수반되는 문제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여 교회가 분열되지 않기를 열망한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을 서둘러서 편지를 쓴것으로 충분히 표현돼 있다.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서와 같은 편지서를 쓴 더욱 강력한 이유는 예루살렘 멸망시 그 신자들이 흩어질 경우 그가 설립한 교회들이 당면하게 될 위험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을 한번 보고 이해한다면 저들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 예비된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 성소에서 저들의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만 있다면 그들은 확고부동한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낙담하는 대신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를 이해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여러 지역으로 훋어질 때 바울이 세운 교회의 신자들과 하나가 되어 귀중한 믿음의 사람들과 만나 같은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이다. 분쟁을 조장하는 대신에 교회들을 더욱 굳건하게 할 것이다.

 초기 교회가 당면했던 위기를 우리가 충분히 인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로마 군대가 저들의 아름다운 성전을 폐허로 만들 때 당혹과 절망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늘의 참 성소와 그곳에서의 봉사에 관한 개념을 명백히 아는 것이었다. 그것, 곧 그것만이 저들이 겪어야 할 경험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44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소 진리의 빛 가운데서 저들의 실망의 근원과 미래의 사업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사도 교회의 유일한 소망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성소에 대한 깨달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저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이 중대한 문제에 관한 빛이 저들에게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 빛이 이르렀다. 복스러운 성소의 진리가 포함된 히브리서는 바로 이 위급한 시기에 기록되어 나온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보다 위대하고 완전한 성소의 진리,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새 언약, “아벨의 피 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있는 안식 등에 관한 진리들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는 복스러운 소망이 기록돼 있다.

히브리서의 기록 시기
 어떤 비평가들은 히브리서가 기록된 것은 예루살렘 멸망 전이 아니라 멸망 후, 서기 90년대나 그 이후라고 하는 단순한 역설로 히브리서의 바울 저자설에 관한 논쟁을 간단히 처리한다. 물론, 히브리서가 그렇게 늦게 기록되었다면 바울이 그 책의 저자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서기 60년대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는 매우 중요하게 된다.

 늦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여기에 세 가지를 제시한다.

 만약 성전이 이미 파괴되었다면 레위기 규례들의 폐지를 다루고 있는 논문에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으로는 만물의 종말과도 비교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이 이미 폐허가 됐다면 저자가 성전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의 멸망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이미 폐허된 성전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므로, 저자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논증 가운데 하나를 간과해 버렸다고 생각해 보면 더욱 명백 해진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는 의식적(儀式的)인 법령들을 폐지하시고자 했을 뿐 아니라 성전의 파멸로 이미 적절하게 폐지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저자는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을 갖게되는 것이다. 또한, 그 편지서를 기록할 때, 성전은 이미 폐허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었다면, 저자는 분명히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여 하나님의 불쾌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가지고, 이미 그 기능이 끝나버린 장소에서의 새로운 제사장 직분에 관한 자신의 논증을 지지하는 버팀대로 삼았을 것이다. 그 편지서의 전체 요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저들의 성전을 훼파하시고 그 백성들을 흩어버리셨다고 하는 논박할 수 없는 사실 안에서 다른 방향으로 유도되어 결론지어졌을 것이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가장 유력한 논증을 빠뜨린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히브리서가 예루살렘 멸망 전에 기록된 것이라고 믿는 두번째 이유는, 히브리서에서는 아직도 성전 봉사가 계속 수행되고 있는 것으로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에 대한 여러가지 실례여(實例)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히 7:28). 이 말은 현재의 상태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만일 구시대의 습관을 회고했던 것이라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었거니와로 말했어야 할 것이다. 또,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는 말은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었음이라는 말로 바뀌어져야 했을 것이다(히 8:4).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말도 “저희가 섬겼던 것”으로 했을 것이 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진술하는 반면, 같은 관계 속에서 짐승의 피는(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영문(營門) 밖에서 불사름이니라고 말한다(히 13:11, 12). 그리스도의 고난은 과거 시제로 되어 있고, 피에 관한 일과 희생 제물의 처리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오로지 히브리서의 기록은 서기 70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논점은 예루살렘 이 함락되기 전 그 곳의 신자들에게 이르러 온 의식 준수에 대한 관념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마지막 방문했을 때 그 교회 안에는 “수만명의 유대인”이 있었다(행 21:20). 수만 명이 몇 만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2~3만명을 “수만명”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 외에도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있었으며 “바리새파들 중에 믿는자들”도 있었다(행 6:7; 15:5). 이들은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도 저들의 명령을 따라 결례를 행하고 폐지된 의식을 준수해야 했다(행 21:26). 이것은 저들이 여전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행 15:1)한다고 가르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수만 명의 신자들이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 각처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들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만일 그 때까지도 할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면 저들은 가는 곳마다 그들의 확신을 전했을 것이며.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모든 교회 안에 분열과 논쟁이 조장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계 전체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열은 없었다. 유대 지역이나 이방인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교계는 분열되지 않았다. 오직 교회가 있었을 뿐이며 그 교회는 할례를 요구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유대인 신자들과 율법에 대한 열심당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일은 분명히 서기 70년 이전에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히브리서의 기록이 전해짐으로 최선의 해결책이 주어진 것이다.

 초대 교회 역사가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서기 60년대 초기와 그 도시가 멸망한 서기 70년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관념의 갑작스런 변화를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저들은 불과 몇년 사이에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부터 참 사도적인 그리스도교로 전향했다. 이 엄청난 변화에는 분명히 어떤 배경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충분한 이유는 히브리 서 가 출관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예루살렘 멸망 후에 기록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멸망 전 유대적인 의식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그 강력하고 열성적인 집착,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의하여 유지된 상대적인 관념 가운데서 어떻게 교회의 교리적인 연합이 보존되었는지 그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 정확히, 히브리서가 기록되어 나오므로 모든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적절한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