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중요성과 내용
 히브리서는 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신약의 정경(正經) 가운데 중요하고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이 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과 그분의 현재의 지위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할 뻔하였고, 그분의 승천(昇天)은, 그분의 재림 때까지 우리가 그분에 관하여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온전한 모습이 될 뻔하였으며, 그분의 중보(中保) 사업은 거의 완전히 모호(模湖) 하게 될 뻔하였으며, 성소 정결에 대한 구약의 예언적 언급들은 신약의 확증을 얻지 못할 뻔하였고, 마침내는 아론 계통의 제사장직 봉사가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생생한 제시가 되는 것 대신에 하나의 말소(扶消)된 구약의 진기한 제도에 지나지 않을 뻔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영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이해력이 둔했기 때문에, 그분은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막 4:33) 한 마디 한 마디 헤아려 가며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분이 당신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거의 견책하시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요 16:5)라고 말씀하셨었다. 이것은 그분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미래의 사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도록 하시기를 기뻐하셨을 것과 만약 그들이 묻기만 했더라면 그분이 그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알려 주셨을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그 분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12절)고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던 것들 만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고, 그들에게 필요하긴 했지만 세월이 흘러서 그리스도교의 지식이 더욱 더 발전되어야만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될 다른 정보는 훗날을 위해서 남겨 두셨다.

 신약의 스물 여섯 책에서一우선 히브리서는 제쳐 두고—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들, 그분이 떠나신 후의 지상 사업의 진전, 사도 교회들 및 큼직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들의 설립과 성장 등에 관하여 전후가 잘 연결되고 비교적 완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는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교회가 악(惡)과의 투쟁에서 겪을 고투와 마침내 얻을 승리에 대한 예언적 묘사로써 막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포괄적인 전말서(單末書)에는 하나의 중요한 양상이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승천시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뒤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극히 적게—거의 아무것도 아니—기록되었고, 하늘에 지존자의 우편에서 행하시는 그분의 중보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언급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그 분께서 어리둥절하신 가운데 물으신 바,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이 언급하신 바로 그 주제였다.

 갈바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속죄(贖罪)를제공하시기위하여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성소의 표상의 성취였다. 그러나 어린 양을 죽이는 일은 그것 자체가 또는 그것으로 인하여 속죄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희생 제물의 죽음이 아니라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속죄를 위하여 효험이 있으려면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의 참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피에 있어서도 그와같은 봉사가 시행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주면서 그리스도를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곧 당신 자신의 피로써 봉사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히브리서의 특성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 그리고 아버지까지도 주와 하나님으로 호칭하시는 만물의 창조자와 유지자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는 단 하나의 책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아론의 그것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논하고 있는 단 하나의 책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그분의 제사장 직분을 위한 준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것으로 해석하며,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이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음을 선언하는 단 하나의 책이다. 그것은 “하늘의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니엘서에 언급된 성소의 정결을 하늘의 원형(archetype)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올바로 해석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단 하나의 책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봉사자로 수고하시는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하여, 하늘에 있는 “성소들”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 가시는 것을 묘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에서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하늘에서 그리스도께서 성소에 들어가시는 것 사이의 평행 관계를 수립하는 단 하나의 책이다. 그것은 신약 가운데서 시종일관 성소에 관계된 언어들을 사용하는 단 하나의 책이다. 예컨대, 첫 장막과 둘째 장막, 성소와 지성소, 속죄 제물, 번제물, 희생 제물, 피를 제단에 뿌림,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감, 휘장,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이 봉사를 수행함, 속죄 제물의 몸을 진영 바깥에서 불사름, 등등—이 모든 언급들은 그리스도의 사업과 레위인 제사장의 사업 사이의 평행 관계를 이루면서, 성소의 제단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과 하나님의 참된 어린 양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희생 제도는 심장(深長)한 의미와 함께 심지어는 영광스런 광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신약 가운데서 제 칠일 안식일을 창조 때의 하나님의 안식에 비추어 논의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아직 남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일한 책이다. 그것은 영혼의 안식과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제정하신 제 칠일 안식일의 안식을 연결하는 유일한 책 인데, 이 사실은 안식일을 성화(聖化)의 참된 표징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시내산으로부터 십계명을 반포하실 때 한번 땅을 흔드신 그 하나님께서 “한번 더” 땅만이 아니라 또한 하늘까지 흔드실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일한 책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성소 교리의 배경 가운데서 제시하는 유일한 책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실”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것은 한 무리의 사람들, 곧 그들의 결점들과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좋은 평판을 얻어서 그들의 이름들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에 관하여 논하면서 우리에게 격려를 주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그것은 성도들이 새롭고도 산 길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제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가리운 것 없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게 되는 높은 존귀와 말할수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 앞에 보여주는 유일한 책이다.

이 시대를 위한 책
 히브리서는 위와같이 성경 가운데서 매우 높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한 동안 가리워진 채로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한 책이다. 올바로 이해될 때, 그것은 세계를 향한 최후의 자비의 기별을 전파하기 위한 성소 무대를 제공해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안식일을 더욱 온전히 전파하는 일을 크게 도와준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하여 둥한시되어 있다. 우리가 곧잘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도, 이 일이 강조되어 있는 유일한 책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신약의 나머지 모든 책들에는 그분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업에 대한 논의가 없다. 사실에 있어서 히브리서 이외에는 “대제사장”이란 용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에, 히브리서에서는 매장마다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칭호는 열 번이나 직접적으로 그분에게 적용되었으며, 다른 일곱 번의 경우에서는 그분이 지상의 제사장들과 비교되거나 대조되어 있고, 그 밖에도 허다한 부수적인 언급들이 있다. 만약 이 책을 빼앗겨 버린다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그들의 기독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성소 문제에 관한 어떤 입장들에 대하여 성서적인 확증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히브리서는 지상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를 연결시킨다. 이 책의 전반부는 지상의 봉사에 관한 개관과 재검토를 하면서 하늘에서 수행되는 보다 높은 봉사에 대하여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 책은 지상의 제사장들의 자질들을,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위대한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그분의 더 큰 위엄과 월등한 영광과 비교하고 대조한다. 그 책은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을 올바로 이해함에 필요한 지상의 성소 봉사에 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갖기 위한 견고한 기초를 놓아준다. 거듭 거듭 그 책은 지상의 화막 및 그 봉사와 천상의 회막 및 그 봉사 사이의 평행 관계를 강조하면서 전자를 후자의 표상(俊象, type)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상의 제사장 직분과 봉사에 관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철저히 가르쳐 주고 나서, 제사장들이 날마다 첫째 칸에 들어간 것과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오직 한 번 들어간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나서, 이 책의 저자는 문득 성령께서 이것을 통하여 무엇인가 나타내신다고 주장함으로써 지상의 봉사에 조명과 생기를던져준다(히 9:8). 이것은, 자칫하면 폐기된 의식(儀式)으로 간주될 뻔한 것에 대하여 신격(神格)의 제 삼위의 인정의 도장을 찍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성령께서 성육신(成肉身)에 중대한 역할을 하셨듯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침례 때에 그분의 신성을 증거하셨듯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고별 시에 그분의 특별한 대리자가 되셨듯이, 그와 같이 성령께서 이제는 성소 봉사에 주의를 환기시키시고 그것에다 표상적인 의미를 입혀주고 계신다. 성소 봉사에 대한 이와같은 성령의 보증은 결코 경홀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성소 봉사를 유대인의 종교 의식의 수준을 초월하여, 구속의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것들의 표상적 예시(例示)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초기 교회의 상황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던 때의 신자들의 수는 많지 않고, “한 일백 이십 명”정도 되었으나. 오순절 날에는 그 수가 크게 늘어나서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여”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행 1:15; 2:41).

 예루살렘의 교회는 점점 성장하여 이윽고 크고도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었다. 사도들이 더하여.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고, 또한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행 6:7; 15:5). 삼십 년이 지난 뒤에 그 도성에는 핍박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그곳에는 아직도 “유대인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나 있었다(행 21:20).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는 가능한 한 속히 예루살렘에 예배당을 건립하여 신자들을 수용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듣기로는,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올라갔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행 2:44; 2:46). 비교적 작은 무리들이 “집에서 떡을 떼며” 또한 핍박 동안에는 “여러 사람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 기도” 하였으나, 교회는 계속해서 성전을 그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는데, 그곳은 아마도 큰 회중이 모이기에 충분한 공간을 가진 솔로몬 행각이었을 것이다(행 2:46; 12:12).

예식들과 의식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교회는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또한 할례를 포함하여 유대인들이 지키던 다수의 예식들과 의식들을 준수하였음이 분명하다(행 15:1). 큰 무리의 제사장들이 교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이 그들의 성전과의 관계에서 필요로 하던 변화들을 명백하게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는 명령을 주신 적이 없으셨고, 성전 봉사를 반대하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으셨다. 비록 그분이 친히 종교 의식들을 준수하셨다는 기록을 우리가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분은 백성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지키라고 명한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라고 훈계하심으로써, 그리고 또한 문둥병자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의식들의 유효성을 인정하셨다(마 23:2; 8:4).

 이러한 진술들은, 모세의 의례법(儀禮法)의 지속적인 유효성에 대한 증거로서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쉽사리 포착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새 언약 시대의 도래(到來)를 알리기는 하였으나, 바로 그 시각에 유대인들과 아예 끝장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했고 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그들에게 아직도 자비는 뻗쳐져 있었으며, 여러해 동안一적어도 예언 상의 칠십 주일이 끝나기까지—사도들의 주된 사업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오순절 날에 수천명이 개종했을 때, 그리고 또한 신자의 수가 날마다 증가되어 교회가 커 갔을 때, 제자들은 크게 용기를 얻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는 자연스럽게 교회 내에 그들의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위신을 드높이게 되었으며, 또한 “바리새파”도 그러하였다. 이 때로 말하면 교회가 성전과 그 봉사에 대하여 적대적(敵對的)인 태도를 취할 때는 분명히 아니었다. 불과 몇 달 동안에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나아오게 되었다. 또 다른 수만 명이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데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남아 있는 일이 참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누군가가 그와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실망을 당할수 밖에 없었다. 유대 민족은 예수를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사도들을 매질하였다(행 5:40; 7:58). 핍박이 증가됨에 따라 베드로는 투옥되어 처형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행 12:1~19). 유대 민족은 그 새로운 교리로부터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리라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유대 백성의 태도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행 8:1). 다수의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흩어졌다—이것은 그 지역들에 진리의 씨앗을 심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은 흩어졌을지라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바 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들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은 젊은 바리새인 사울이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그의 자신의 간증에 의하면, 그는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다(행 26:11).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다메섹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행 9:2), 그 자신이 하나님께 잡힌 바가 되어, 완전히 회심하고, 그 즉시로 그가 새로이 발견한 구세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고, 마침내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안되어 그는 아라비아로 물러나서, 그곳에서 한 동안, 어쩌면 몇 해동안, 은거(隱居) 생활을 하였고, 그 후에 그는 조용히 그의 공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다음 몇 해 동안에 바울이 무엇을 했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가 활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했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이란 사람은 결코 무위(無爲)로 오랜 세월을 허송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마음 속에 계획하신 그 일을 위한 준비의 해들이었다. 바울은 이 기간 동안에 많은 연구와 명상을 하면서 지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그가 마침 내본격적으로 봉사 활동을 개시하였을 때, 그의 모든 종교 개념이 성숙해 있었고, 그의 신학은 원숙해 있었음을 봐서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사유(思惟)하였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셔서 하도록 하신 그 사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 1 차 교회 회의
 바울이 몇 해 더 지난 후에 바나바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을 드러 내는 것은 안디옥에서이다. 여기서 그는 복음 사업 곧 목회를 위한 안수를 받았다(행 13:1-3). 안수 후에 바울은 그의 제 1차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에서 그는 이방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첫 여행에서 그는 성공도 하고, 또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그는 신(神)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또한 돌에 맞아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줄로 여겨 내어 버리는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와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해 주었다(행 14:27).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한 바울의 일은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서 의식법(儀式法)을 옹호하는 자들의 찬동을 받지 못하였다. 이것은 주로 그가 이방인들에게 할례 받는 일과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알려 졌을 때, 유대의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내려왔는데, 이들은 새 신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을 야기시켰고, 그리하여 마침내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2절).

 바울은 이 일에 동의하였고, 지정된 시간에 그와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그들은 사도들과 장로들을 만나,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4절). 그들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행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망하다”라고 하였다(5절).

 그 두 선교사의 활동에 베풀어진 축복에 대하여 그들이 듣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만족하게 되기를 사도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정을 내놓았을 때, 거기에는 공개적(公開的)인 토론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 결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었다(6, 7절). 바울과 바나바가 그 “변론”의 중심이 되었던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은 후에 그의 반대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그들에게〕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갈 2:5)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의 입장에 굳게 섰다. 그것은 참으로 흥미있으면서도 또한 생생한 논쟁이었다.

 결국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였다:“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 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 15:7-11).

 이 연설의 요지(要旨)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음을 보여 주셨으므로, 그는 의식법이 이방인들에게 강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연설은 하나의 타협적(妾協的)인 연설이어서, 유대인들의 할례 문제는 제기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제안은 이방인들만이 할례를 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연설이 끝난 뒤에,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들었다(12절).

회의의 결정
 그 회의의 사회를 맡아 보던 야고보가 이제 그의 결정을 진술하였다. 그는 베드로가 한 말이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15-18절).

 그리하여 그는 그의 의견을 이렇게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19-21절).

 이 회의의 결과로서 두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파송되었는데, 그들은 사도들과 장로들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24-29절).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십 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갈 2:1-3).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할례에 관하여 형제들과 의논하고, 또한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하여,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2절).

 그 회의의 이와같은 결정은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에다 흥미있는 측면적인 빛을 던져 준다. 신자들이 그리스도 이후의 여러 해 동안에도 의식법을 계속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의 다수의 구성원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정은 오직 이방인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식 법을 준수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었고, 한편 유대인들은 종전과 같이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은연중에 암시되었다. 이리하여 바울은 오직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가 이제 자유롭게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강제로 할례를 받게 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의 신분이 제 1차교회 회의에서 이와같이 확정되는 한편, 의식법의 기본 원칙은 인정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에도 그랬듯이, 하나의 발전적 거보(巨步)가 내 딛어진 것이었다. 이방인들은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행 15:10). 일단 이 걸음이 내딛어졌으므로, 그 원칙이 이방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보기까지는 과히 긴 세월이 소요될 수가 없었다.

제2차 예루살렘 회의
 그 다음 몇 해를 바울은 지중해 지역의 여러 곳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보냈다. 서기 60년경 또는 그보다 조금 늦게, 그는 자신이 행한 일을 보고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였다. 형제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 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행 21:20-25).

바울이 체포됨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율법에 열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사람 넷을 택하여 그들과 함께 어떤 지엽적인 의식(儀式)상의 요구들을 이행하도록 권고하였다. 이것들은 그 자체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규모 있게 행하고 율법을 지켰음을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울이 왜 이 요구를 응낙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고전 7:19). 어떻든 간에, 바울은 그 사람들과 함께 가서, 율법에 요구된 결례를 이행하였다.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에 관하여 성전 당국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오해의 결과로, 바울은 체포되어 구금되고 말았다(행 21:33).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삼십 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 믿는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 있었고, 그들은 아직도 의식법에 대하여 열심이 있었던 사실과, 교회 내의 이러한 요소는 그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야고보와 장로들과 심지어는 바울까지도 그들의 편견에 굴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껐던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구약의 예배 사상들로부터 완전히 떨쳐지지 않았으며, 바울이 제쳐놓아버린 의례(儀禮)들을 여전히 준수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교회들一적어도 바울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던곳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의 사례는 다른 곳에 있는 신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바울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레위 계통의 일시적이고도 잠정적인 성질을 명백하게 해 주는 교훈과 함께 레위 계통을 대신하게 된 새로운 계통에 대한 설명을 해 줄 필요를 느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따라서 친히 교회를 방문할 수가 없었다. 신자들과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는 도움을 필요로 했고, 그것도 너무 오래 지체되어서는 안 되었다. 로마는 진격해 오고 있었고,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퍼지고 있었으며, 제국의 군대가 문 앞에 이를 날이 멀지 않은 듯했다. 도성이 빼앗기게 되면, 때는 너무 늦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예언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 때 도망을 가야 할 것이고, 교회는 흘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눅 21:20, 21). 무슨 조처가 취해져야 한다면 그것도 속허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문득, 정확하게 바로 그 시간에, 히브리서가 나타나서 그 필요되던 도움을 제공하였다. 예루살렘의 교회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에 의하여 이뤄졌다. 히브리서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던가?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