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12 장 — 믿음과 인내에 대한 권고
 12장의 첫 부분은 경주의 실례를 들어 믿음의 지속성에 대한 권고를 주고 있다(1, 2절).

 그 다음에는 현재는 즐겁지 않으나 나중에는 부요한 보상을 가져다주는 징계의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것이 이상한 어떤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은 증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와는 정 반대이다. 징계는 아들됨의 증거이다(3-11절).

 이러한 징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은 더 용기를 가져야 하고 에서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한 조각의 빵에 그는 장자 상속권을 팔고 거절을 당했다(12-17절).

 18절에서 19절까지는 둘째 언약의 위임식과 대조를 이루는 첫 언약의 설립과 비준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불이 붙었으며 흑암과 폭풍이 있었다. 그 광경은 모세까지도 전율을 느낄 정도로 무서웠던 것이다. 둘째 언약의 취임식이 그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님과 함께 천만 천사와 장자들의 총회와 우리들이 만나는 장소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시온산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 두 장면 사상의 대조는 분명하고 심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한 번 말씀하셨다. 그 분께서는 다시 한번 말씀하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은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그 분을 거절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

히 12:1, 2 (12:1, 2)
 경주에 대한 묘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거민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리이스의 모든 운동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소개되었으며 마라톤은 일반적인 구경거리였다. 틀림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 운동 선수들이 해로운 것들은 사전에 절제를 하고 그 경기를 위해서 준비하는 모습과 그들이 경주를 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가장 필요한 의복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벗어 던져버리는 모습들을 관찰해 왔을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 경주에 대한 한 교훈을 주기 위하여 그들이 이러한 경주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하고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구름같은 증인들
 우리들에게 제시된 그 장면은 우리들이, 참석자들이 된 경주의 장면이다. 구름같은 증인들은 11장에 언급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종류의 방해와 불리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그들의 진로를 완성했으며 그리하여 그 경주는 빨리 가는 자가 아니라 견디는 자들(전 9:11)에게 승리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경주에 이기기 위해서 우리들은 보다더 쉽게 될 수 있도록 모든 무거운 것이나 방해물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뛰려고 하는 육상 선수가 거추장스러운 모든 의복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려야 한다.

죄를
 여기에서 뜻하는 죄의 종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다.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죄나 죄들로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뜻하는 그 죄는 각자에게 가장 관계가 많고 방해를 끼치는 특별한 죄라고 믿기 쉽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악한 생각일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불결한 생각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성급한 기질로 어려움 당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식욕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혹은 세상을 사랑함으로 괴로워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쉽사리 엄습해 오는 죄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들은 뛰는 사람이 경주를 위해서 겉옷을 모두 벗어 던져버리는 것처럼 그것을 치워버려야 한다. 우리들은 면류관을 얻는 데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를 방해하는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짐 모든 죄 즉 방해하는 모든 것은 없애버려야 한다.
인내로써 경주하며
 우리들은 앞서 “인내”란 견디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 바 있으며 이 귀절도 역시 그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에 있어서는 힘차게 출발했지만 끝까지 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때때로 출발이 힘들지 모르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승리를 할 것이다. 어떤 지점에 와서 포기하는 것은 경주에 있어서 패배를 의미한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
 경주에 있어서 그들의 눈을 그 목표에 계속 고정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의 경쟁자들을 쳐다보는 자들이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앞쪽에서 계속 있을 때는 기뻐한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어떤 사람이 그들을 앞질러 지나간다.

 경주를 하는 사람은 어떤 다른 곳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경주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경주에 실패했다. 검투사들이 위기의 순간에 그들의 주의력을 돌림으로 투쟁에서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사소한 일에 전 주의력을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를 해 온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에 힘과 용기와 도움을 달라고 예수님을 항상 쳐다보 아야 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이라기 보다 “대장 혹은 지도자”“믿음의 완성자”가 더 좋을 것이다. “주”란 단어는 사도행전 3:155:31“임금”히브리서 2:10“주”라고 언급된 말과 똑 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지도자 혹은 창설자를 의미한다. “완성자”란 마지막 손질을 하여 어떤 일을 완성시키는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그 전체인 것이다(계 1:8, 11).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이 기쁨은 구원받은 영혼들을 바라보는 기쁨이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기쁨이 었다(사 53:11; 요 4:34). 그 사업은 그의 고난의 댓가로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구속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사업으로 인하여 영혼들을 바라보실 때 그 분께서는 한없이 만족해하실 것이다. “위하여”란 말이 “대신에”란 말로 번역되었으면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마땅히 그 분의 것이 될 기쁨 때문에 그 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들은 그분께서 처음에는 비록 고통을 당하지만 나중에는 더 큰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임으로, 결국 그가 더 많은 기쁨을 얻기 위해, 이기적으로 선택했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자기가 해야할 일을 조용히 재어보았다는 생각을 반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의 것이 될 더 큰 기쁨이 다가올 흑암의 시간 동안에, 그 분께 전혀 고무적인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도 반대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함께 있기 위해, 자기 영혼의 수고를 보기 위해, 그들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 때, 구속받은 자들에게 임할 그 기쁨을 알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 분께서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시 16:11)는 것을 알고 계셨다.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게 될 때 참으로 천국이 될 것이다.

십자가를 참으사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어떤 군인에게 교수형을 처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죽음도 충분한 불행인데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수치를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것을 아시고 담대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고 말씀하셨다.

앉으셨느니라
 자리에 앉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공적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권능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시고 뺨을 맞으시며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바로 그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있는 우주의 영광의 보좌에 취임하시게 된다.
히 12:3-11 (12:3-11)
 저자는 모든 자녀에게 임하는 징계를 논의하려고 하면서 그의 독자들에게 “견디는 자”를 깊이 생각해 보라고 요청한다. 그들의 시련은 비교적 가벼운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차 임할 시련에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으로 행해진 것이며, 결국에는 그들이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이 세상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았을 때 자신들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당장에는 그것이 기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먼 훗날에 회상해보면 그것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그를 생각하라
 우리들은 전에 그리스도를 사도와 대제사장으로서 깊이 생각해 보라는 초청을 받았다(히 3:1). 지금 우리들은 “참으신 자”를 깊이 생각해 보라고 초청을 받고 있다. 사도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견딜 수 없는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용기를 잃거나 지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아마도 우리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마땅히 당해야 하는 그 이상의 시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경험과 비교 혹은 대조해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3:1에 사용된 것과는 다른 말씀이다. 여기에서는 헤아리는 것, 계산하는 것, 요약하는 것,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것, 수들의 합계를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각 항목별로 따로 분리하여, 하나씩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하나씩 하나씩 거듭거듭 조사하는 것을 의 미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모든 사람들이 해보면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고통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게 된 그 댓가를 깊이 생각해 보면서 때때로 명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대단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값으로도 구원은 값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우리들이 어떤 행위에 대해서 불찬성을 표현함으로써 온유한 태도로 시험에서 돌아서는 것과 “죄와 싸워”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히 2:18).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서 그분께서는 죄와 싸우시고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셨다. 우리들이 유혹을 당하여 굴복하려고 하는 위험 가운데 처해 있을 때,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히브리서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브리서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잊었도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들은 징계를 받고 있는 것을 마땅하다고 자주 생각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이 징계를 받고 있을 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우리들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했을 때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실에서 기인될 수도 있다. 반면에 우리들은 우리의 범죄와 허물로 인해서 그들이 노한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똑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을 숙고해 본다. 때때로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징계하는 그 특별한 순간에도 그들이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 채 징계하고 있다. 부모들 가운데는 개혁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고 사랑하실 수 있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주님께 징계를 받은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꼭 배울 필요성이 있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시도하고 계시는 것을 심사숙고 해보도록 하자.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신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인내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시든지 복종하고 그것에 대해서 그 분께 감사를 드리며 그것을 인해 그 분을 더욱더 사랑하자.

히브리서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를 참으며
 하나님의 징계하는 손이 그대에게 임할 때 투덜거리거나 불평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의 권고이다. 참으라. 그것을 인내성 있게 견뎌라. 그것을 남자답게 처리하라. 그대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대는 마땅히 되어야 할 인간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으며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것을 행하시고 있는 도중에 있다. 지금 복종하라. 아버지께서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알고 계신다.

 징계는 아들됨의 표시이다. “아버지께서 징계하지 않는 자가 어찌 아들이겠는가?” 만약 그러한 질문을 오늘날 받는다면 수많은 아버지들이 자기는 자기 아들을 징계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현대인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우리들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그 귀절들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무분별한 징계가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자부적인 징계를 하신다. 지금 가정의 규율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면의 빛 가운데서 자기 책임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히브리서 12: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우리들은 그들을 공경하였다
 아이가 경외하는 것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진실로 경외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라온 아이는 대단히 불리하다. 무엇에 대한 경외인가? 법과 권위와 종교와 여성과 연령에 대한 경외이다. 부모님들 손윗사람들, 생명,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외이다. 그 경외가 있는 한 희망이 있다. 경외가 사라질 때 그외 모든 것도 거의 사라진다. 말씀과 법적인 의무들과 결혼 서약과 생명과 죽음에 대한 경외 부족—즉 이러한 모든 부족들은 정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이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자기들을 보살펴 주신 것처럼 장성한 후에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많다. 이리하여 그들은 많은 비탄과 슬픔을 당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외성 없는 아이의 부모에게 이르러오는 슬픔은, 비참한 것이나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뿌린 대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눈물과 후회의 수확이다. 너무나 자주 아! 하고 후회의 한숨을 쉬지만 때는 너무 늦다. 어떤 아이들이 훈련을 통해서 경외를 배워야 한다는 그 사실이 작은 소득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소득이 될 수 있다. 조만간에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꼭 배워야 할 교훈이 될 것이다. 어릴 때 그것을 배우는 아이는 행복하다. 그는 징계를 받으므로 큰 유익을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 그것 자체가 큰 소득인 것이다. 세상은 바람의 씨를 뿌려왔다. 그 결과로 소용돌이 바람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무법, 범죄, 폭력이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존경심의 부족, 즉 경외가 부족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부모들이 “잠시 자기의 뜻대로” 자녀들을 징계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것은 견책 받을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아이들이 과거를 돌이켜 볼 때보다 더 큰 역경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신 그 제어의 손길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역시 우리들도 과거를 돌이켜보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섭리를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지 않겠는가? 확실히 그 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행하셨다.

히브리서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평강한 열매
 저자는 어떠한 징계도 그 당시에는 기쁘지 않다는 공인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교훈을 배우는 자들에게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우리들이 그 당시에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나중에 회고해 보면 알게 된다.

히 12:12-17 (12:12-17)
 우리들은 징계로 인해서 연약한 무릎이 되고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오히려 연약한 자들이 그 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우리의 길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미혹을 당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실패하지 않도록 우리의 감화를 경계해야 한다. 어떠한 쓴 뿌리도 돋아 나오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마침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경우에서처럼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하려고 노력했지만 너무나 멀리 떠나가버렸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연약한 무릎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약한 무릎 늘어진 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연약함과 병약에는 용기를 주시지 않으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만나기를 소홀히 하고 아무도 자기를 방문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만약에 그들이 영적 육체적 나태함을 조장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집에 머물면서 불평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고통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고 권면을 받고 있지만 역시 우리들도 우리 자신의 짐을 지라고 권면을 받고 있다(갈 6: 2, 5). 자기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은 그 짐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한 무릎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자기들을 데려다 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만약 이것이 행해지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그리스도인 신앙을 의심한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들과 그들의 형제들과 하나님께 부담이 되는 존재이다.

피곤한 손을 일으켜 세우고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동안 팔장을 끼고 앉아있는 것은 인내와 복종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나태함과 영적인 게으름을 가리킬 수도 있다.

 환자나 고령자나 연약한 자들에게 이것은 자기들을 책망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라. 하나님께서 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우리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용기를 주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그들을 두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에도 사랑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며 온유하게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우리들은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동정적이며 협조적이어야 한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만약 그들이 지친 손을 치켜올리고 그들의 연약한 무릎을 사용한다면 육체적 영적으로 건강하고 강하게 될 수 있는 자들이 연약한 것을 사랑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곧은 길을 만들어
 이 교훈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을 따르고 우리의 모본을 바라보는 자들을 위해서 곧은 길을 만들어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우리들 각자는 선악간에 감화를 끼치는 다른 사람들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는 전혀 감화를 끼치지 않으며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추종을 받고있다. 프로 복서, 육상 선수, 군인, 일반인, 목사, 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소원하는 것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인생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젊은 소녀나 성숙한 여자에게 자기는 어떠한 추종자들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자. 모방자들이 사방에 있으며 그들을 피할 어떠한 길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절름발이가 그 길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위해 곧은 길을 만들어야 한다.

고침을 받게 하라
 오늘날에도 우리의 이해 부족으로 인해 그 길에서 떠난 자들이 있다. 우리들은 사소한 일에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주목을 받는다. 모든 사소한 일 하나하나 상관이 있다. 우리의 부주의나 그릇된 모본으로 끼쳐온 상처들을 고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함을 좇으라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거룩함을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0번 나오고 여러번 “성화”란 말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내부적인 순결, 도덕적인 정직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는 어떠한 사람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히브리서 12: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너희는 돌아보아
 우리들은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실패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쓴 뿌리가 나와서 고통과 저주를 당하게 되는 다음의 말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어떠한 사람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방금 거룩함을 언급했다. 그는 지금 누구든지 얼마나 쉽게 은혜로부터 떨어져서 타락하게 되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그 영혼속에 남아 있는 어떤 쓴 뿌리에 의해서 고통뿐만 아니라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쓰라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게 하는 데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나, 영혼의 대적이 성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쓰라림은 그 자체가 어떤 외부적인 범죄의 행위나 허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계속 억제할 수 있으나 역시 그 뿌리는 남아서 고통을 야기시킨다. 우리들은 쉽게 병든다. 우리들은 마땅히 해야 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 불만은 쓰라림을 더하게 만들고 모든 그리스도인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쓰라림의 작은 뿌리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향긋한 사랑과 은혜를 상실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음행하는 자
 사도는 여기에서 그가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것에 관해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에서는 자기의 장자 명분을 가치 없게 여기고 그것을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팔아 버렸다. 그 장자 명분은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경험은 하나님의 축복들을 거절하고 그것을 무시하는 위험성에 대한 두려운 경고이다.

 “그는 그 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상속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고 그 거절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었더라”(창 25: 34). 그 장자 명분은 재물뿐만 아니라 특별히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장자의 권리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한 그 약속의 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하고 있었다. 나중에 에서가 자기가 경험한 큰 손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간청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장자의 권리를 행사하기에 부적합한 “망령된 자”가 되었다.

그는 회개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가 “그것을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란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심스럽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눈물을 흘리며 구한 것은 회개인가? 그것은 상속에 관계된 것인가? 그것은 축복인가?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선한 사람은 그 일에 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축복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인 의견이다. 이것도 역시 그가 자기 아버지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간청했을 때, 에서가 “방성대곡하며” 한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그가 다시 나중에 자기 아버지께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8) 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다. 에서는 그 축복을 원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통곡은 했지만 자기 생애에서 필요한 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는 회개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마태복음 25:1-3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도 비슷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그 혼인 잔치에 들어오기를 거절당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으나 그들의 등에는 충분한 기름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들어오고 싶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문을 닫지 않으시며 그리고 그는 혼인 예복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해 줄 수 있는 필요한 준비를 즐겨하지 않는 한 소원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상태 그대로 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필요에는 눈이 멀고 그들이 가고 싶은 대로 너무나 멀리 가버린다. 그들은 방성대곡하면서 들어가기를 간청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하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것이 에서의 교훈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기록되어 있다.

 미국개역 성경(ARV)이 다음과 같이 번역한 것은 흥미있다. “그가 나중에 그 축복을 상속받기 원했을 때 그는 거절을 당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눈물을 흘리며 구했으나 그의 아버지에게는 마음을 바꿀 여지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 12:18-29 (12:18-29)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의 경험에 관한 기록은 가장 인상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필요했던 경험인 그 분의 위엄과 능력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애굽으로부터 자기들을 인도해 내신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래 동안 우상 숭배자들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애굽신들의 용어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땅이 흔들리고 산이 진동할 때, 번개가 치고 뇌성이 울릴 때, 흑암과 폭풍이 그들을 엄습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이 서있는 바로 그 장소를 흔들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말라고 간청했으며 모세까지도 두려워했다.

 이와는 반대로 영광과 빛이 모두 충만한 가운데 새로운 언약의 비준 장면이 나타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서는 지구뿐만 아니라 하늘들 까지도 흔드시겠다는 경고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그 분”을 거절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


 시내산 12:18-21

 시온산 12:22-24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2: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히브리서 12: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히브리서 12: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시내산)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온”(출 19:17) 그 날은 흑암과 폭풍의 날이었다. “시내산에서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 19:18). “뇌우와 번개가 빽빽한 구름이 산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6절). 그 산 주위에 경계 표시가 되어 있었으며 누구든지 그 산을 만지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13절).

 칠흑같은 캄캄한 밤중에는 그들이 너무 멀리 가다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그 울타리를 더듬어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번개가 그들 주위에 번쩍였지만 그들을 계속 깊은 흑암 중에 머물게 할 뿐이었다. 우뢰가 울리면 백성들이 떨었고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 12:21)고 하였다.

 갑자기 산이 환하게 되면서 그것은 완전히 불에 휩싸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팔 소리가 심히 크게”(출 19:16) 들렸다.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 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19절).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다”(신 5:5)고 모세가 말했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함으로”(출 19:18) 떨면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율법의 말씀들, 즉 십계명을 들었다.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와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8, 19).

 모세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절).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1절).

 이것이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언급하는 율법을 주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20절) 하시기 위해서 그 분의 능력과 거룩함을 보여주신다. 진실로 이 보다 더 큰 영광과 위엄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 백성들은 율법을 주시는 자와 온 세상의 심판자와 함께 대변하여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타났으며 “주의 두려우심”(고후 5:11)을 지금 알았다. 그들은 두번 다시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심판의 공포를 경험했다.

 율법을 주시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백성들을 위협하여 그들을 무섭게 만드는 것 이상의 목적을 성취하셨다. 그 분께서는 그들에게 보호해 주시는 그 분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다. 아무리 그들의 대적들이 많고 강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편에 그러한 하나님을 모시고 계시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히브리서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브리서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시온산)
 만약에 저자가 옛 언약의 성취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다면 지금은 새 언약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시내산에서 일어난 권능의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치 않게 하려”(출 20:20)는 그 훈계에 주목을 끌게 한다.

 시내산에서 그 율법이 주어지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가장 놀라운 모습이 나타났다. 세상은 전무후무한 그와같은 장면을 결코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위엄과 장엄함에 있어서 어떤 다른 것보다도 능가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인 회중들에게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신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떠한 장면도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이 지상에서 세우실 때 일어난 것과 비교도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새 언약의 취임식도 옛 언약의 성립에 못지않는 영광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지구에서가 아니고 하늘에서 있었다. 시내산에서의 율법의 반포와 의식적인 준수와 함께 잇따른 언약의 설립은 이 지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 새 언약은 더욱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언약의 준비과 함께 이 사건의 기쁜 축복은 하늘로 옮겨졌다. 앞에 있는 귀절에서 우리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고 있으며 거기에서 중요한 사건을 축복하기 위해서 모인 무리를 보게 된다.

 우리들이 가야할 그 장소는 시내산과 대조를 이루는 시온산이다. 시온산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계시며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른다. 그 분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며 그러한 분으로서 아벨의 것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말해지는 피를 뿌리고 계신다.

 그 경우를 “총회,” 혹은 더 좋은 표현으로 “축제회”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의 무리, 즉 문자적으로 표현하자면 다니엘 7:10에 사용한 똑 같은 말씀인 “천천이요 만만”이다. 그 들과 함께 장자의 교회는 하늘에 기록되거나 등록되어 있으며 “의인의 영들이 온전케 되었다.”

 보다 더 명백한 설명을 위해서 두 가지 내용을 대조해 보면 좋을 것이다.


시내산의 만남 시온산의 만남
1. 시내산은 흑암과 폭풍 속에 휩싸인 지상의 산. 1. 시온산은 그것의 이름이 태양빛을 상징하는 바 하늘에 있는 산이며,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도성이다.
2. 천사들 (갈 3:19; 행 7:53; 신 23:2). 2. 축제일에 참석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
3. 이스라엘은 흑암으로 둘러싸임. 공포로 인해 도망가려고 했다. 3. 장자의 교회가 하늘에 등록됨. 의인의 영들이 온전케 됨.
4. 주님은 율법의 수여자로 흑암에 싸여 천둥같은 큰 소리로 계명들을 반포하심. 4. 주님은 심판자로서 빛의 언덕인 시온산에 좌정하심.
5. 모세는 중보자로 떨면서 서있음. 5.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심.
6. 죽은 동물들의 피가 그 책과 사람들에게 뿌려짐. 그 피는 결코 죄를 없앨 수 없음. 6.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속죄함 받을 수 없는 모든 죄들을, 살아계시는 구세주의 피에 의해서 사람들이 정결함을 받을 수 있음.
7. 아벨의 피보다 더 좋은 것을 말씀하시는 음성. 7. 나팔소리와 두렵게 울리는 말씀의 음성.

 필연적으로 우리들은 지상에서 옛 언약의 비준이 엄청난 영광 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상응하는 엄숙하고도 기쁜 새 언약의 비준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자로서 참석하시게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지상에서 행하신 사업의 결과를 틀림없이 거기에서 주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이 인정을 받을 수 있기 전에 있는 그대로 점검하시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친히 나타나셔야 한다. 그 분께서는 당신 사업의 본보기인 구원받을 자들의 첫 열매를 역시 제시해야 되며 그 분의 영광 앞에서 이 사람들이 온전케 된 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 분께서는 당신의 중보를 통해서 만이 그들이 가납될 수 있음으로 그들을 위한 중보의 역할을 위해서 나타날 것이다. 아벨의 피는 복수를 상기시키는 한편 예수님의 피는 보다 더 좋은 것들—화목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 앞에 제시된 기쁘고 엄숙한 장면이다. 그 대조는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들로 하여금 시내산의 엄숙한 장면을 회상해 보게 하는 어떤 놀라운 유사점도 있다. 양쪽 언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며 그분의 요구들도 똑 같은 것이다. 시내산에서의 언약의 기초가 되었던 그 율법은 역시 새 언약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이 있다. 새 언약에서는 그 율법이 단지 돌비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기록된 것이다.

히브리서 12: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말하신 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파라르(Farra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마도 그 저자는 그리스도를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내산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시는 분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때때로 유대인들까지도 시내산의 그 음성을 ‘세키나’ 혹은 ‘임재의 천사’와 동일시 한 미가엘의 음성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히브리인 들에게 보내는 사도바울의 서신, p. 161).

히브리서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또 한 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한번 말씀하셨을 때 땅이 진동했으며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출 19:18). 지금 그 분께서는 또 한 번 지구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또 한 번”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분께서 말씀하실 때 바로 그 하늘들까지도 진동할 것이다.

히브리서 12: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이 말씀”은 학개 선지자가 2장 6, 7절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장차 올 진동은 하나님의 음성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분께서는 한번 땅을 진동시켰고 또 한 번 그렇게 하실 것이다. 또 한 번 그 분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실 것이며 그 분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은 최후의 것이 될 것이다. 그 분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 일이 행해질 때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흔들림을 당할 것이다. 흔들릴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이것들이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지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분께서 말씀하실 것은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믿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옛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이상 더 필요한 말씀을 반복해 주신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계명들을 경홀히 여겨왔다. 즉 그들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부셔버리고 조롱을 해왔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이다.” 왜냐하면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시 119:126)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 하실때 그 율법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또 한 번 말씀하실 것이다.”

히브리서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은혜를 받자
 흔들릴 수 없는 것들 중에 하나는 그 왕국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이것을 간수해 오셨다. “감사함”“은혜”보다 더 좋은 말씀이다. “감사하자”는 것이 그 말씀이다.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은 왕국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우리들은 앞서 이러한 미덕들을 진술한 바 있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미덕들이다.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소멸하는 불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시내산으로 회상케 해 주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화염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곳에 너무 가까이 와서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은 소멸을 당하였다. 하나님께서 무분별한 모든 자에게 화를 입히신 것은 변덕스러운 형벌이 아니었다. 모세는 가까이 갔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그는 그 산을 만지면서 그 곳까지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그 산을 만지거나 그 곳에 가까이 오는 것을 금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죄가 있었고 그 분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은 그 분의 자비였다. 지금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똑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경고한다. 그 분은 지금도 역시 소멸하는 불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