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11 장 — 믿음
 앞서 나온 장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달 해야하는 대단히 높은 수준을 제시해 왔다. 그 수준은 실로 너무나 높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것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죄인이 어떻게 거룩함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새로운 생명의 길에 의해서 거룩한 장소들에 들어가기를 기대 할 수가 있을까?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다. 여기에 평범한 사람들로서 모두가 믿음으로 죽고 기쁜 소식을 받은 남녀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타인들이 선하다고 평가해 줄만큼 선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악한 사람이었다. 그 목록 속에는 계명들을 범한 사람들, 죄 가운데 살았던 여인들,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 어떤 살인자, 그의 이름은 천국을 위해서는 합당치 않다고 선고를 받은 바로 그러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이 믿음으로 죽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이적을 행하셨다.

 이 장을 읽을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이 기록된 요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록 어떠한 죄책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 목록 속에 있는 이름을 살펴 보면 “나는 악한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부끄러운 일들을 해왔으나 이 사람들보다는 더 나쁜 일들을 해왔다”고는 믿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나도 역시 희망이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가운데 이 장을 두신 것은 이러한 목적을 의미 해서이다.

히 11:1-3 (11:1-3)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에 관한 1장 3절의 주석을 보면, 여기에 “실상”으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 원문에는 “인격체”(person)와 똑같은 단어이다. 이 절은 믿음 그 자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만큼 믿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을 대단히 강하고 중요한 것으로 나타내어 그 사람이 지금까지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을 소유하는 것을 느낄 뿐만 아니라, 보통 실제적인 줄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확신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약속된 축복들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지금 그것들을 소유하고 즐기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가올 세상의 권능들”이 현재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즉 하늘의 왕국은 단순히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믿음은 진정한 실체인 “장차 올 좋은 것들”을 그 영혼과 마음 속에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미래에 성취될 꿈들이 아니다. 즉 그것들은 그 영혼이 즐기고 인식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실체인 것이다. 그것들은 멀리 떨어진 이상이기를 멈추고 실체가 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고대 시리아어 성경 사본은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잘 번역하고 있다. 믿음은 마치 그것들이 사실인 것처럼,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타난 것처럼 바라는 것들을 지금 확신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여기에서 “증거”란 말은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입증된 증거를 확신하고 그 진리에 설복된 그 영혼이 그 믿음안에서 안전하게 쉬는 것이다.

히브리서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이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 장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이 증거를 얻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이 장은 가장 연약한 사람까지라도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믿도록 용기를 주기 위해서, 히브리서 가운데 이 장소에 삽입시킨 사실을 올바로 믿는다면 그 목측은 자연적으로 우리들이 어떤 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약 믿음의 용사들만이 여기에 있다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용기를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만약 우리들이 이 사람들도 기쁜 소식을 얻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 장은 그것이 의도하려고 하는 목적을 다 이룬 셈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우리가 아나니
 오늘날 사람들은 창조에 대한 두 가지의 학설에 직면해 있다. 즉 하나는 진화론을 믿는 과학적이라는 근거요 다른 하나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성경적인 근거일 것이다. 이 이론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정반대로 극과 극이다. 그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시도해 왔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는 거절해야 한다. 거기에는 중간 지점이 없다.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비신앙적인 사실과 탐구에 근거한 과학적인 결론들을 확언함으로써, 또 한편으로는 순수한 성경의 근거를 고지식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과학의 발견과 모든 과학적인 증거를 거절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그와같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특별한 창조주를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들과 어떠한 논쟁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 불일치의 논쟁은 그와같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이끌어 낸 연역에 있는 것이다. 똑 같은 사실로부터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진화론에 관한 경우이다. 어떠한 사람도 확인되고 증명된 사실들과는 논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유도된 연역은 심각한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 상호간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비록 다윈의 원래의 학설을 더 이상 논란하지 않더라도, 어떤 다른 학설일지라도 만장 일치로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들을 근소화시켜서 모든 진화론자들이 실제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사실들은 그러한 낙관주의를 정당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그 차이점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론의 사닥다리에는 잃어버린 계단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간격들이 너무나 커서 도무지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자들은 그 잃어버린 계단들을 계속 탐색하면서 그들을 발견하기를 바랬지만 지금까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평신도들에게는 이것이 대단한 혼란을 가져다주는 문제이다. 현재까지 과학자들은 어떤 확신 있는 답변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혼란된 장면으로부터 돌아서서 성경적인 설명을 숙고하여 보기로 하자. 창세기 제1장과 제2장의 34개의 짧은 절이 그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하셨나에 대한 단순하고도 솔직한 설명이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그분 자신의 음성으로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고 인류에게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을 확인하셨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흔히 시내산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동의 근본 법칙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십계명의 일 부분이며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그 말씀들은 모든 인간의 율법과 공의의 기초이다. 그 말씀들은 “유대인식의” 혹은 “지역적인” 것으로 가볍게 제쳐둘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씀들은 역시 사회와 국가 양쪽의 중요한 기둥들로서 굳게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 율법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신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이 이 세상에서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까지도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시어 사람들에게 창조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명한 의도외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말씀들을 선언하신데 대한 어떠한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다.

 창세기에 기록된 모세의 설명을 믿을 수 없는 말로써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세는 단순히 널리 알려져 있는 유전을 기록하였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창세기 첫장 만은 아니다. 그것은 십계명인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그 유일한 시간에 하늘로부터 선언하신 계시의 내용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는다면 그는 십계명도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면 역시 진화론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엿새 동안 주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하신다. 진화론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 엿새는 육일이 아니었고 수백 억년의 긴 시간의 기간들이었다. 역시 하늘들이나 땅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진화되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무의식의 세력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나중에 생명체가 나타났다. 이 생명체가 사람이 될 때까지 계속하여 진화되었다. 우리들도 역시 발전 단계에 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을 볼 수가 없다”라고 한다. 진화론과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창조론을 믿는 것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양쪽도 아니고 양쪽 부분들도 아닌,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다. 그 경계선은 분명한 것이다. 진화론은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그 진술을 명백히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의 방법에 관한 진술이 그 우주를 헌법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심상치않은 일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앞서 진술한 것처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는 가장 높은 권위로 그것을 선언하신 공언된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처럼 보이며, 이 일에 있어서 인간의 상반된 의견들은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 독특한 방법으로 창조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서 학자답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답변을 요구하시면서 물으시기를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역설적인 말씀으로 이렇게 덧붙이신다.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년수가 많음이니라”(Knowest thou it, because thou wast then born? or because the number of thy days is great?)(욥 38:21).

 하나님께서는 자주 풍자를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풍자적이고 날카롭다. 우리들은 그 책망이 욥만을 위해서 있었던 것으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오늘날 그것을 적용시키면 대단히 적합할 사람들을 위해서도 있는 것이다. 그 책망은 그것에 적합한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의 동기들을 하나님께 전가시키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박식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데 틀림없이 실증이 나셨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우리들은 느낀다. 그들에 관해서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다 하는 도다”(말 2:17)라는 말씀이 진실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창조의 주제를 조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창조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논쟁하는 것을 가장 어리석고 건방진 생각처럼 보신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다. 그 분께서 그 말씀을 하 셨다. 그 분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지금 미약한 인간이 와서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어떤 창조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도전하다니!

 그것이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그 분으로 하여금 풍자적인 말씀들을 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욥기가 시내산 이전에 기록된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 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요 엿새 동안에 그 분께서 창세기 첫장에 기록된 일을 행하셨다는 진술을 하늘로부터 선포하신 그 계명들 가운데 포함시키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과학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정 사실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의 이론에 불가할 진화론에 대해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적인 것으로만 보인다.

 그것이 하나의 이론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이 오직 이론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만약 과학이 그것의 의견을 전환할 경우에 편리한 변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것은 항상 하나의 이론만으로 취급받아올 것으로 널리 전파될 것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이 사실을 그때 가서 할 바에야 그들이 지금 큰 소리로 선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내가 창조했다고, 즉 내가 육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진술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은 모든 사실을 해명하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선언이다. 사실 그것은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깨달을 수 없는 말씀에 대한 믿음,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어떤 세력들이 지적인 생명과 도덕적인 창조물과 영적인 존재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믿는 것보다 확실히 지적인 것이다.

보이는 것들은
 이 말씀은 그안에 만물이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우주를 포함한다. 이것들에 관해서 그들은 “나타난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들은 그들이 기원을 말하는데 어설픈 말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마음에 간직하고 계셨던 것을 주의 깊고 정확한 설명으로 채택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씀들은 우리들이 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들어졌다고 직접 단언하지 않지만 나타난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는 적합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므로 그 물질은 시작이 있었다. 만약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즉 그것이 아니였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명령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이전에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와 어떤 다른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물질을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그 분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을 존재하게 하셨다. 그것은 전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무”에서의 “창조” 혹은 “나타나지 않은 것에서의 창조”였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에서 창조하셨는지 이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화론은 만물의 시작에 즉,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 지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진화론자들은 만일 그들이 물질의 영원성을 오히려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에 못지않게 물질을 창조하는 어떤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쉽지 않다. 어느 쪽이고 믿음이 필요하다. 창조할 수 있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스스로 생긴 물질을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생명체의 무의식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생물체가 되었다는 그 지점까지 실제적으로 도달함으로써 어떤 방법으로 그 심연을 뛰어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 11:4 (11:4)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자기 양폐의 첫 열매로부터 가져왔다”(창 4:4). 그는 자기 소유의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단순히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 분명히 그는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오려고 시도하지 않고 손에 닥치는 대로 가지고 왔다(3절). 아벨은 단순히 죽임을 당한 동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 아니고 믿음으로 그것을 드렸기 때문에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히브리서는 모두 믿음을 취급하는 장들이므로 저자가 제물의 성질보다도 믿음을 더 강조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벨의 믿음은 그의 행위로 보여준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들은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자기를 위해 죽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았고, 믿음으로 자기 자신의 어린 양을 가지고 왔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가인이 땅의 열매를 가져온 것처럼 “역시”라는 말이 암시해주듯이 아벨도 역시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것을 드렸다. 믿음으로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아벨의 믿음과 그의 예물의 본질은 가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사를 형성했다. “그는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아벨” 혹은 더욱더 정확하게 마태복음 23:35절에는 “의인 아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아벨은 그의 행위로 증거된 것처럼 믿음으로 이 증거를 얻었다. 우리들은 그의 제사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나 그가 행한 어떤 위대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올바른 형식들을 중요하게 여기 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들은 가인이 이전부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예배의 형식, 그의 제물의 본질과 종류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다. 가인은 예배를 드렸지마는 필수적인 믿음이 부족했다. 이것이 가인이 실패한 진정한 이유였다.

하나님이 그의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예물로 인해 동요하시지 않으신다. 언덕위에 있는 수많은 가축들은 그분의 소유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한 마리의 어린 양을 들의 소산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분은 아벨은 기뻐하시고 가인은 불쾌히 여겼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 차이점은 그러한 예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자의 품성과 사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아벨은 믿음이 있었고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상징하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을 드렸다.
저가 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의 교훈은 믿음과 예배와 제물의 교훈이다. 그는 거의 육천년 동안 죽어 있지만 그의 감화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소유의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즉 그의 예물에는 믿음이 섞여 있었다. 그의 믿음과 그의 행위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움을 입증하셨고 그의 신실함의 결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5, 6 (11:5, 6)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에녹은 믿음에 의해서 혹은 그의 믿음 때문에 승천되었다. 아벨처럼 에녹도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그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구약에서 죽지 않고 승천한 두 사람 중의 하나인데 또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였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둘 사이에 끼여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망서리고 있는 것(빌 1:23, 24)은 그가 승천할 가능성이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신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영광을 받은 사람의 기록이 없다. 에녹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의 논증이다. 그의 생애의 기록은 간단하다. 그것은 오직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라고 말할 뿐이다. 에녹의 승천의 기록과 아담의 죽음과를 대조해 볼 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한 아름다운 실물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아담은 에녹을 낳았을 때 622세였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을 때에 녹은 300년 이상을 같은 시대에 살았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아버지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필요를 더욱더 실감나게 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성경에는 죽임을 당한 아벨을 제외하고는 아담 전에 죽은 어떠한 사람의 기록도 없다. 물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게 된 첫 인간 아담은 역시 위에 언급한 아벨을 제외하고는, 경건한 계통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였다. 아담이 죽었을 때 모든 그의 후손들도 그 당시에 56세였던 노아의 아버지 라멕을 포함하여 아직 살아 있었다. 이와같이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에덴동산에서 천사들과 하나님과 함께 교제한 그 사람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타락하기 전에 있었던 사건들에 관해서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아담으로부터 직접들은 것들이었고 그들이 하나님과 교통한 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틀림없이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대면하여 말씀하셨던 그 첫 안식일에 관해서 이야기 했을때 말할 수 없는 흥미를 가지고 들었을 것이다. 아담이 자기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야기를 했을 때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한 대화들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담은 죽었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였으며 그의 장례식은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장례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지구에 거주한 모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지마는 그 첫 인간의 죽음에 모두 참석하기를 원했음에 틀림없었다. 아담의 경우에는 예외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생명을 버릴 필요가 없을 것이라 기대해 왔던 경건한 자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었다. 그러나 예외가 없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아담까지도 그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 첫 인간의 죽음은 성도와 죄인에게 똑같이 깊은 감화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그들의 사악함의 결과들에 대해서 방탕하는 사람들에게 수 없는 경고를 주었다. 지금 그의 음성은 그쳤지만 그의 죽음 자체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아담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경고했으며 지금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편애하시지 않는 것을 보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끼지 않으신다면 확실히 그들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아담의 죽음은 그들에게 하나의 엄숙한 경고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에게도 못지않게 엄숙한 것이었다. 그들은 아담에게 수 없는 질문을 했으며 지금도 그들이 묻고 싶은 수 천가지의 다른 질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낙원에 관한 영광의 독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더 이상 그들은 그 동산으로부터 쫓겨난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갔다.

 틀림없이 에녹은 슬퍼하면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아담이 낙원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으며 그들이 함께 보낸 귀중한 시간들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아담이 죽었을 당시에 에녹은 약 삼백세가 되었으며 그 동안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 그는 날마다 그 분과 함께 교제했을 때 하나님과 대단히 가까이 있는 것이 느꼈을 것이며 에녹의 동행은 틀림없이 그의 노년의 시기에 아담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자들이 개인적인 사별로 느꼈던 그 이상으로 아담의 죽음은 모든 미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왔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든 혹은 섬기지 않든지 간에 죽음이 모든 살아있는 사람의 운명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는 자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시지 않으시는가? 아담은 범죄했지만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오듯이 그에게도 필연적으로 왔다. 부활의 분명한 소망도 없이 미래는 그들에게 암담하게 보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자기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강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경우에는 전혀 예외를 만들어서는 안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의 교훈은 유명무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로 모든 사람들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그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아담이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다 더 좋은 것에 대한 확신, 부활에 대한 확신, 나중에는 생명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이것을 에녹의 경우에서 성취시켰다.

 에녹은 수많은 세월을 하나님과 신실히 동행해 왔다.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실을 아담의 경우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온 애정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논증은 아담의 죽음이 그의 공의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친절은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소망을 줄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더 이상 여기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11 단어는 한 인생의 전 이야기, 그것의 성공적인 결론, 하나님께서 그를 가납하심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철저히 하나가 될 정도로 그 분과 함께 동행하였다.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기쁨에 들어갔다.

 에녹의 승천으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저가 그의 창조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켰지만 이 분리가 무효화 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주에 보여주 셨다. 이것은 그들이 미래를 쳐다 볼 때마다 옛날 부조들에게 용기를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죄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그 사실은 피할 수 없었다. 즉 그들은 아담의 죽음에서 그 논증을 보았다. 그러나 에녹의 교훈은 분명했다. 인간은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수 있고 마침내는 수정같은 처소로 옮겨질 것이다.

 에녹은 마지막 시대에 승천할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고 마침내는 그 분과 함께 집으로 갔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용기를 가지자. 하나님께서는 탄생이나 나이의 이유로 어떤 사람을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낙원에 충분히 들어갈 것이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 귀절에 의하면 믿음에는 두 가지 일이 필요하다. 즉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믿음과 그분께서 도덕적인 가치의 수준, 즉 거룩한 정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그 정부의 통치에 의해서 그분을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은 보상을 갖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차별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 분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으며 그가 선택하고자 하는 종류에 대해서는 간섭하시지 않으신다. 이 귀절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상은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선택하는 것에 주의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부는 도덕적인 정부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으며 이에 관해서 우리들은 여기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

히 11:7 (11:7)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노아는∙∙∙방주를 예비하였다
 노아의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시에 살고 있을 자들의 표상인 것처럼 이 세대를 위한 특별한 관심이다(마 24:37-39).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마침내 승천한 에녹의 증손이었다. 그의 아버지 라멕은 에녹과 동시대에 113년을 살았으며 그러므로 그를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라멕은 아담이 죽었을 때 56세였으며 그는 친히 그 인류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그 이야기들을 자기 아들에게 수 없이 이야기해 주었을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당시에 있어서 가족의 결연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 웠으며 자주 여러 세대들이 한 지붕 아래 살았다. 틀림없이 아담은 그 가계의 존경받는 아버지였고—그 당시의 노인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는 낙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대화했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초청을 받을 때가 수 없이 있었다. 노아는 자기 아 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고 자기 아버지는 아담이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예날 사람들은 지금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념보다도 그 타락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직접 관계된 사람들로부터 그 설명을 들었고, 그들은 눈으로 본 증인들이었고 그들이 이야기한 것에 관해 첫 손을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노아에 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너는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느니라”(창 7:1)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생애의 첫 5백년 동안의 기록이 전혀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창 6:18). 그러므로 우리들은 노아는 선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평범한 생애를 살았고 노아 홍수 때까지 그에게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가 온전히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가 당세에 완전한 자”(창 6:9).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창 7:1)고 하는 하나님의 진술에 의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고 그렇게 하셨다. 틀림없이 노아의 시대에는 성행하는 악의 감화가 그 성도들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그가 완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마는 노아를 의롭다고 부르신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복음의 빛이 결코 완전히 침투하지 못한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빛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거룩한 수준에 의하면 완전하지 않지만 그들의 환경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그들의 세대에 완전한 것이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특권들을 고려해 볼 때 완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을 훨씬 더 큰 특권들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빛에 따르면 훨씬 더 완전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를 낮은 종류의 것으로 계산하지 않했던 사실은 그것이 다른 곳에서도 언급된 그 방법으로부터 온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14:14에 말씀하시기를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은 18절에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진정한 경험에 합당한 명예를 주시면서 다니엘과 욥과 같은 그러한 사람들과 같이 노아를 헤아리신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상대적인 완전함으로 인정하시지마는 이것은 그분의 요구를 낮춤으로써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똑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시편 87:4-6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 그 원칙을 적용시키고 있다.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증가된 빛이 더 큰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빛이 아니라 즉 그것은 우리들이 그 빛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흑암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동정할지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영광스러운 빛과 그들의 위치와 비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훨씬 더 큰 기회들을 가지고 축복을 받고 있는 자들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실 수 있다. “노아의 때와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경고하시기 위해서 선택한 그 방법이 꿈인지 이상인지 혹은 직접적인 계시인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어떤 사건에 관해서 경고함을 받은 그 일들이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두려움에 떨려 자기 집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의 방주를 준비하였다.

 그를 움직이게 한 그 두려움은 다가올 홍수에 관한 공포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공포”란 말은 히브리서 12:28“거룩한 두려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록 그에게 나타난 그 일들이 아직 미래에 있었지마는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로 하여금 그의 믿음을 행사하게 하였으며 그러한 행동으로써 그는 그 세상을 정죄하였다. 다가올 사건들은 보이지 않지만 노아의 믿음은 그가 행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세상을 정죄한 똑같은 믿음이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인의 후사가 되게 하였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행위가 그 세상을 정죄하는 그러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그들의 행위가 세상의 동의를 얻고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지 어떤지에 관해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진정한 사건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 세상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해서” 경고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노아가 했던 것처럼 효과적인 일을 해야 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히브리서 11장이 주로 믿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행위를 삭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로 그들의 믿음을 보여준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아벨은 희생을 당했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노아는 방주를 지었다. 그리고 이 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모두 믿음을 가졌고 모두 어떤 일을 행하였다.
히 11:8-12 (11:8-12)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갔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는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았지마는 그곳으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사가기로 결심했다. 따라서 그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창 11:31) 자기 가족을 함께 모았지마는 그들은 결코 거기에 도착하지 못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1, 32).

 하란은 약속의 땅까지 우르로부터 거의 중간지점 되는 먼 곳에 떨어져 있다. 우리들은 데라가 그렇게 멀리 가서 그 곳에서 멈추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는 하란에서 단순히 쉬기 위해서 머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마침내 그는 그 곳에서 죽었다.

 데라가 죽은 후 주님의 말씀이 그가 아직 하란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따라서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게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두 문장을 비교하여 같은 말씀을 기록해 보아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 11:31).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아브람이 그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창 12:5). 데라와 아브라함은 둘 다 똑같은 목적을 위해 출발했다. 데라는 반쯤되는 곳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갔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의 여행은 순전히 믿음으로 한 일이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고 그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즉 그가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가 기대해 왔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었다. 그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 새로운 손님에게 친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임시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순전히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는 하란에게 부유하게 잘 살았다. 즉 그는 많은 재물과 그곳에 있는 수많은 종들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가 어느 곳으로 떠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그는 하란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했다.

히브리서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브리서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그의 새로운 환경 가운데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는 이국 나라인 약속의 땅에 유리하면서 천막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하란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결코 굴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그 나라로부터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고 기근이 왔을 때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영화롭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된 것은 이 방황하는 시기 동안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거할 어떠한 장소도 어떠한 정착된 집도 없었음으로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땅의 것들을 잊어버리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히브리서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히브리서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사라 자신도∙∙∙ 힘을 얻었더라
 사라는 이삭을 낳았을 때 나이 구십 세였다. 그녀는 “단산이 된 연령”이었음으로 그녀가 아들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사라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더라.” 히브리서 6:13, 14 이하의 주석을 보라.

 어떠한 사람도 이삭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들의 아들이 탄생하기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행동했던 믿음의 부족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아브라함은 처음에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갔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의 믿음은 식어지기 시작했다. 사라의 제안에 그는 스스로 다른 아내를 취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이는 약속된 후사가 아니라는 말씀을 주님께 들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일년안에 사라가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공공연히 비웃었다. 그리고 나중에 사라도 역시 웃었다(창 17:17; 18:12). 그러나 그 해에 아들이 태어났으며 히브리서 앞 귀절에서 “믿음으로” 행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에 대한 완전한 의미를 깨닫도록 하자. 이십 오년 동안이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의심을 했으며 아들이 그들에게 태어날 것이라고 암시했을 때 비웃었다. 그때 기적이 그들의 믿음에 일어났다. 사라는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삭은 기적의 아이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더 큰 기적은 그녀로 하여금 잉태할 수 있는 믿음으로 사라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었다. 그것에 관한 그 이상의 어떠한 정보도 우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기적이 아브라함과 사라 양쪽에 다 일어났다. 며칠전에 그들은 믿음이 없었고 둘 다 그들이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그 때 기적이 그들의 믿음 즉, 부족한 믿음에 일어났으며 또 하나의 기적은 그 첫 기적에 근거하여 그 아들이 태어난 것이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견책과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분께서 행동하시기 전에 충만한 믿음의 열매를 기다리시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수십년 동안을 준비했지마는 완전히 그 약속들을 붙잡지 못하고 불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믿음이 생겼고 하나님께서 행동하셨다. 그분은 일 년 혹은 십 년을 기다리시지 않으신다. 즉 그 분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아들였으며 적당한 시기에 그 후사가 태어났다.

 베드로는 중한 죄를 범했으며 저주와 맹세로 자기 주님을 부인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버릴 수도 있었고 혹은 그를 다시 받아주기 전에 적어도 일 년이나 이년 동안이 지나게 한 다음 그에게 겸손한 자리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여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고 삼천명을 회개시키게 하셨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 모세가 실수를 범했을 때, 엘리야가 겁이나서 이세벨로부터 도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똑같이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 분께서는 그들을 다시 받아주셨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하늘로 승천했으며 세번째 사람은 그 분께서 오실 때 자기 아버지 다윗의 보좌에 앉게 될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눅 1:32).

 우리들이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돌아오자마자 즉시 돌변적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 삼손이 언급될 때 그가 어떻게 해서 마침내 그 왕국을 획득한 사람들의 목록 속에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선 그 순간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킨 사실을 기억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라는 “단산”이었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기적이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모든 과거는 잊혀진 바 되었다. 전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는 자들도 믿음의 빛나는 모본이 되었으며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위해서 이것을 행할 수 있다면 그 분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있는 삼손의 회개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히 11:13-16 (11:13-16)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지금까지 언급된 자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이다. 틀림없이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지만 특별히 이 사람들만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믿고 죽었다. 그들에 관한 네 가지 사실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확신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환영했다; 그리고 그들은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증거했다.

히브리서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롯처럼 정착을 해서 영구적인 가정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그네처럼 그 땅에서 이리저리 유리하였음에 틀림없다. 천막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잠간 동안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들이 방황 생활을 끝내고 정착하는 데는 얼마나 큰 시험이 있었는 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가옥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들이 경험했던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천막은 기초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기초가 있는 한 성을 갈망했다는 그 사실은 그들이 영구적인 한 집을 사모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그 약속을 얻지 못한 채 소망 가운데 죽었다. 하늘 도성의 기초들은 그들에게는 어떠한 다른 사람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은 틀림없이 하란에 훌륭한 저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있었다. 애굽으로 여행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곳으로 가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하란에서 그들은 저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즉시 이전의 지위로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이 단 한번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심정을 표현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했으며 결코 뒤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가치있는 모본이다.

히브리서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더 나은 본향
 누구나 다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본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본향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집이라고 하는 사실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이 세상 것들에 매혹되어 너무 만족해하는 나머지 더 나은 본향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 말은 우리들이 더 나은 어떤 것, 즉 어떤 그리스도인 생활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이 곳에서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늘 본향을 잊어버릴 정도로 소돔에 너무 가까운 곳에 우리의 장막을 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부끄러워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을 부끄러워 아니 하신다. 그들을 위해서 그 분께서는 한 성을 예비해 두셨다.
히 11:17-19 (11:17-19)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렸으니
 히브리서 6:15 주석 참조. 우리는 자기의 독생자를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그가 준비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측량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에게 아들을 약속한 이후로 무려 사십년 후에 이루어졌는데 지금 그는 그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일까? 만약 그가 자기 아들을 드린다면 바다 모래알 같이 무수히 많아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고 계시며 죽음으로 부터 이삭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까지도 자기 아들 못지않게 아브라함에게 무서운 시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시간까지 믿음과 절대적인 순종의 공과를 배워갔다. 이 한번의 시험에서 그는 과거에 믿음이 부족했던 모든 것을 보충시켰다. 비록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마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다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히브리서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모든 의도와 목적을 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자기 손을 치켜들고 서 있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으며 이삭도 역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그 와같이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표상적으로 죽은 자로부터 도로 받았다. 그는 그 시험을 견디었다. 그는 신실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히 11:20-22 (11:20-22)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에서는 쌍둥이 중에서 손위였으며 그에게 당연히 부모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 이삭이 그 축복을 야곱에게 주었을 때는 이미 자기 아내와 아들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록 그가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히브리서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이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보통 장자만이 그 축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축복할 때에 야곱은 그의 오른손을 더 나이가 어린 에브라임 위에 얹고 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었다.

 “요셉이 그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 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7-19).

 야곱은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흠정역에서 이 탤릭체로 쓴 “의지한다”는 말은 원문에 없는 보충된 말임을 지시해 준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야곱은 그의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지팡이 머리를 경배했다고 주장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 언급이 창세기 47:31절에 있으며 “이스라엘은 그 침대의 머리 위에서 잡으니라.” 이스라엘, 혹은 그의 이전 이름인 야곱은 그의 침대에 죽어 있었다. 그가 예배 드릴 때마다 그는 그 침대의 머리 위에 몸을 굽히고 엎드려 기도했다. 로마 교회가 우상 숭배의 한 실례로 사용하게 된 것이 이 사건이다.

 그 원어는 지팡이와 침대 양쪽 의미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번역상의 차이가 있다. 어떤 사건에서는 야곱이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기도했다. 혹은 침대의 머리에 기대어 기도했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우상 숭배를 위한 논쟁으로 화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관습을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을 지지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를 지적해 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명하였으며
 저자는 그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었기 때문에 요셉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이야기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작은 사건을 선택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소유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땅에 매장될 것이라고 지시한 그 약속을 믿는 것을 보여주셨다.

히 11:23-28 (11:23-28)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가 석달 동안 숨겨
 모세의 부모가 그 왕의 명백한 명령을 거슬려 그 아이를 숨긴 것은 믿음과 용기가 없는 탓이었다. 만약 그 부모들이 모세를 숨기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를 보호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부모들은 하나님과 협력함으로 믿음을 통해서 그 약속들을 상속받은 자들의 명예로운 명단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름다운 아이
 출 2:2에 그는 준수한 아이로 불리워지고 있다. 사도행전 7:20에는 아름다운 아이”라 했다. 그 의미는 전혀 흠이 없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이를 뜻한다.

히브리서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브리서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브리서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어서 여기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장성했을 때 궁전과의 그의 관계를 거절하고 그가 가졌던 명성이나 직무를 포기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이 말씀들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왕의 궁전에는 수많은 쾌락들이 있었다. 동양의 궁전들은 부패와 아울러 음란한 쾌락의 본산지로 기록되어 왔으니 이 특별한 궁전도 예외로 할 수가 없었다. 모세는 비록 고난을 예상했지만 자기 백성과 함께 있기 위해서 안일과 쾌락의 생애를 포기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세는 사실상 많은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쌓아두신 더 좋은 어떤 것을 가지고 계셨다. 모세는 죄악의 쾌락들은 오직 잠간 동안 뿐이고 계수하시는 날이 곧 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상주심을 바라보았다.”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견책은 애굽의 어떤 보화보다도 더 큰 재물이었다. 후년에 사람들이 애굽의 피라밋에서 발견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보화들은 상당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계산해 보면 그것들은 예술적인 가치를 제외하고도 거대한 금액을 환산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것들 중 어떠한 것에도 매력이 없었다. 그는 애굽의 보화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었지만은 보다 더 큰 보물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자기 운명을 같이 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

히브리서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애굽을 떠나
 애굽은 그의 고향이었지마는 출애굽기 2: 11-15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해 자기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도피를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낸 그 시점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스데반도 역시 행 7:23-29에 암시해 주고 있듯이 그가 애굽인을 살인한 후에 그가 도망했다고 전에 언급한 말이 더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히브리서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그는 유월절을 지켰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12:11-27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문설주에 뿌린 피를 보았을 때 장자를 살려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피뿌림은 순전히 믿음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죽은 어린양의 피 속에는 어떠한 미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덕이 있었다면 순종과 어린 양의 상징 속에 있게 될 것이었다. 피 뿌림은 믿음의 일이었고 육적인 의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을 믿는 데까지 끌어 올렸다.
히 11:29-31 (11:29-31)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영어로 번역된 이 귀절의 이십 단어 속에는 역사 속에 가장 큰 사건들 가운데 몇 개가 요약되어 있다. 모세와 애굽 왕과의 대면: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서 바로의 원치않는 동의를 마침내 얻게한 재앙들; 그 땅을 지나간 죽음의 천사; 민족의 이동; 바로의 추격;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가 열림; 추격해 오던 군대의 몰사—이 모든 것이 속박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포함되어 있다.

히브리서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이
 또 이 몇 마디의 말씀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압축되어 있는가!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거대한 성을 무너뜨릴만큼 강한 군대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라고 명령하신 그 수단들에 의해서 어떤 일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믿는 그 믿음이 문제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아무리 약한 성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전략을 가지고 그 성을 무너뜨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되었다. 이적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은 비평가들은 그들이 그 성을 포위했을 때 모든 백성의 연합된 함성이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러한 공기의 압력을 일으켰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졌다는 단순한 설명보다 더 믿기가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건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마음 속에 어떠한 과학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그들이 자연적인 원인으로 그러한 결과들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단순히 말씀을 들은 대로 행동했으며 그들이 들어온 말씀이 이루어 진일이 또 일어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행하셨다고 천진난만하게 믿었다.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기생 라합은
 만약 우리가 이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빼버리듯이 이 이름도 빼버렸을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데 관한 것만큼 라합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알고 계신다고 믿는다.

 여기에 언급된 정탐군들은 민수기 13, 14장에 기록된 것처럼 보냄을 받은 정탐군들이 아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두 청년들이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1-24; 6:22-25에 기록되어 있다.

 라합은 기생이 아니라 술집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해 왔다. 그 이유는 그 여자가 문제성 있는 성격의 여자였다든지 혹은 그러한 여자가 되어왔다고 의심할 만한 하등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죄들은 특별히 악하고 또 다른 죄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진리는 모든 죄는 다 악하며 남자나 여자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라합이 자기의 과거 생애가 어떠 했던지 간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버리고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용서를 받은것처럼 그녀도 역시 자기 죄들을 버릴 수 있었다. 만약 라합이 평판이 좋지 못한 여자였었더라면 그녀의 회개는 그만큼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죄인이었던 한 여자를 택하여 그녀를 자비의 기념물로 삼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도 똑 같은 일을 하실 수 없겠는가? 그분께서 그러한 생 애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게 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까지 받으시지 않겠는가?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라합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해주고 있으며 히브리서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중에 그 여자를 포함시키고 있다(약 2:25; 히 11:38). 라합은 나중에 살몬과 결혼했으며 살몬은 보아스의 아버지요, 보아스는 오벳의 아버지요, 오벳은 이새의 아 버지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요, 다윗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였다(마 1:5; 눅 1:32).

 우리들은 지금 이 가치 있는 사람들의 명단 속에 라합을 포함시키지 않고 싶다고 위에서 언급한 그 진술을 취소하려고 한다. 우리들은 그 여자에 대해서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그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분께서는 결코 사람을 차별 대우하시지 않으신다. 말하자면 가장 낮은 자라도 가장 높은 데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히 11:32 (11:32)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 이름들 하나하나마다 교훈과 설교가 들어있다.

기드온
 우리들은 그를 믿음없는 자, 불신하는 자, 구약의 도마라고 부른다. 그는 양털이 이슬로 젖고 나머지 모두는 마른 상태가 되도록 하는 표적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되었다. 그는 “양털을 위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삿 6:38).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이전의 다른 증거들을 제하고서 이번 표적이 주어졌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그 기적이 반대로 되어서 이 번에는 그 양털이 마르게 되기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렇게 되었다(39, 40절). 그는 도마보다도 더 믿음이 없었다.

 이것은 이 장에서 주님께서 일부러 본성적으로 믿음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을 모본적으로 택하게 된 것은 그들의 모본으로 우리가 용기를 얻고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그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에 언급된 경우들이 탁월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만 제한되었더라면 우리들은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즉 거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선택해서 그 분께서는 그러한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도 역시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드온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기뻐한다. 그는 많은 믿음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을 사용하셨고 그와 함께 그를 통해서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다.

바락
 바락의 이야기는 사사기 4장5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대변자요. 바락이 충실히 따라다녔던 주님의 여선지자 드보라의 이름과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드온이 그 왕국을 거절하는데 있어서 사심없는 믿음의 모본이 되었던 것처럼 바락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전혀 명예도 받지 못하는 장소에서 즐겨 공적있는 일들을 행한 겸손한 믿음의 모본이었다(삿 8:23; 4:9).

삼손
 삼손은 그 믿음의 영웅들 속에 포함시키기에는 이상한 이름같이 보인다. 우리들은 그를 추천하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의 이름이 이 명단 속에 나타난 사실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그가 정말 구원을 받았을까 하고 의심을 품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들이 마지막 심판이 그와 같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보다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 왕국에는 우리들이 지금 의심할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을 읽고난 후에는 우리들이 제외했던 어떤 이름들이 포함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자비

 바다와 같이 넓구나.

 그 분의 공의에는 자비가 있음이여

 이보다 더 큰 자유 어디 있으랴.


 하늘에서 보다 지상의 슬픔을 더 크게

 느낄 곳 또 없겠네..

 지상의 실패도 그곳에 없겠네,

 자비의 심판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넓고도 넓어

 인간의 마음으로 측량할 수 없네.

 영원하신 자의 마음이여,

 가장 놀라운 자비일세.


 틀림없이 삼손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 분의 명단 속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문제를 결정해 준다. 삼손이 거기에 속해 있든지 아니면 그가 거기에 없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수정해야 할지 모른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마음 속에 개의치 않으신다면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여 그들을 파멸시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지 모른다. 우리들은 받을 사람이 당연히 멸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우리는 심판을 보류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
 바울은 그가 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다고 그가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들이 그 이름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한 사람들임을 인정한다. 그들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여 결국에는 승리를 했다.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명단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니다. 그는 적어도 그들이 자기들의 여정을 끝마치기 전에 그들 모두는 믿음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믿음을 소유한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실패한 것으로 경고를 받고 믿음에 대한 그들의 모본을 따라 용기를 얻고 우리의 이름도 그들의 이름과 함께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것이다.

히 11:33-37 (11:33-37)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우리들은 이러한 언급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지적해서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들이 행한 일이나 그들의 시련에 관한 완전한 기록이 없다. 다윗, 여호수아, 바락, 기드온은 왕국들을 정복했다. 아브라함, 엘리야 그리고 선지자들은 일반적으로 의를 행했고 다니엘은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

히브리서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세 사람의 히브리 청년들은 격렬한 화염을 소멸시켰다(단 3:1-30). 모세는 칼날을 피했다(출 18:4). 엘리야와 다윗도 그렇게 했다. 육체적인 허약으로 부터 히스기야는 건강을 회복했다(사 38장). 요나단과 다윗은 전쟁에서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삼상 14:4, 27; 삼하 22:30).

히브리서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사렙다의 과부와 수넴 여인은 둘 다 죽은 자기 아들들을 도로 받았다(왕상 17:22; 왕하 4:31-37). 고문이 사용된 것은 틀림없이 있었지마는 고문에 관한 기록은 구약에 없다. 우리들이 신약에 볼 것 같으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고통 중에 있었던 수 많은 실례들을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서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우리들은 희롱과 채찍질에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으로 요셉, 삼손, 예레미야 같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대우로 돌리고 있다.

히브리서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돌에 맞은 두가지 실례들이 역대하 24:20-22에 나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와 나봇에 관한 이야기가 열왕기상 21:1-14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이사야는 톱으으로 베임을 당하였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것에 대한 믿을만한 기록이 없다. “유혹을 받고”란 틀림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거짓됨이 판명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선사 시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팔십오명의 제사장들이, 아니 놉성 전체가 도엑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검으로 살육을 당했다(삼상 22:18,19). 우리들은 궁핍과 멸시를 받으며 양의 가죽을 입고 만족했던,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다 들수 없다.

히 11:38 (11:38)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말은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과 그들의 모든 것을 그들 동료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했으며 그 대가로 채찍 질과 나쁜 대우를 받았다. 그러한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저희는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 사람들이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그들을 영접치 아니하였다. 이와같이 그러한 일은 항상 있어 왔다.

히 11:39 (11:39)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들이다
 이것은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가 끝나기 전에 기쁜 소식을 얻었다는 전에 언급된 그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믿음이 연약하고 믿음이 거의 없기 까지도 한 그러한 사람들을 강하게 하여서 그들을 승리하겠끔 하신 일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 약속을 받지 못했지마는 증거를 얻었으며 그 약속의 성취가 그들에게 보장된 것이다.

히 11:40 (11:40)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더 좋은 것
 그들은 소망의 성취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 분께서는 기약이 찰 때까지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잠잘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를 가지고 때가 이를 때에 우리와 함께 완전히 변화될 것이다. 많은 점에서 이 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은 용기를 주는 장이다. 이 장의 첫 부분은 성경에서 우리 앞에 제시해 놓은 그 수준들이 히브리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높아서 그들이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어떠한 인간도 자기 앞에 제시된 그 목표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언급되어 있다. 우리들은 그 휘장을 통해서 그 분과 함께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나도록 초청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뒤로 움추리고 물러선다. 즉 우리들 자신은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우리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제시해 놓은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의 높은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고 우리들은 아무런 공적도 없고 부정한 입술뿐이라고 철저하게 확신이 들때 우리들은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만사를 해결시켜 준다. 그 수준이 낮아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볼 때 용기를 가진다. 만약 믿음이 거의 없었던 기드온이 증거를 얻었다면 우리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만약 라합이 승리를 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역시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만약 삼손이 마침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다면 그 분께서는 우리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다윗이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만약 야곱이 마침내 천국을 얻었다면 우리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소망을 불어 넣어주는 곳인 히브리서 11장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