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성화는 성경 가운데서 가장 적게 이해되고 있는 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온갖 종교적인 극단들이 성화라는 이름을 빌렸으며 진실된 성경의 교리로서 가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곡해함으로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많은 손상을 당하였다. 불건전한 교리와 종교적인 극단에 희생물이 된 사람들에게 있어 더욱 그러하다.
성화에 대한 지나친 주장과 거짓 교리 때문에 곁길로 나간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열렬한 정신의 소유자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그러한 경우가 때때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릇된 관념과 거짓 사상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건전한 가르침을 등한히 하므로 그들의 기독교인 경험은 천박하고 외양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 분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보다는 감성과 감정에 의존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오로지 한량없는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그들은 구출될 수 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믿지만 악한 자의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경건하게 보이기 때문에 회복이 더욱 힘들다.
극단적으로 경건을 추구하는 신앙 운동으로 인하여 수많은 훼방꾼들이 신성을 모독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해독은 이에 헌신한 바로 당사자들에게 미쳤다. 이미 살핀 것처럼 그들은 진심으로 봉사하기를 원하는 영혼들을 오도하였지만 정직한 사람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에 기독교의 중대 국면인 이 점에 관하여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화야말로 기독교인 체험의 목표와 절정이며 모든 사람이 이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10장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열려진 휘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격려한다(
히 10:19, 20). 책 전체를 통하여 그는 거듭거듭 독자들에게 온전함의 이상을 제시한다. 이것은 규례와 의식들이 이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복음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
히 6:1; 7:19; 9:9; 10:1, 2; 12:10, 14; 13:21). 히브리서의 저자가 의도한 바는 독자들 안에 성결과 성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신학적인 논문을 쓰는 것 보다도 이 일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다.
회심과 칭의 성화를 논의하기에 앞서 회심과 칭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독교인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회심으로 부터 시작하여 성결로 끝나는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회심의 때에 인간은 죄로부터 의로, 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한 때 사랑하던 것들을 그는 이제 미워한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한번의 결정하는 일을 통하여 그의 전 인생 방향은 변경되어 그는 그의 주인을 따르고 모방하기 시작한다.
회심은 일순간에, 혹은 시간이 걸려서 일어날 수 있다. 바울의 생애는 다메섹 도상에서 급변하였다. 그는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자기가 한 때 증오하던 바로 그 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심이 순간에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장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니고데모가 그러한 예이다. 어느 날 밤에 그리스도는 그와 장시간에 걸쳐 대화하셨다. 그 분은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요 3:1-13).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못박히기까지는 그에게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며 그 때에야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다(
요 19:39).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뚜렷한 회심의 때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들 가운데 침례 요한과 예레미야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성화된 자들로 알려진다(
눅 1:15; 렘 1:5).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때 자기가 언제 거듭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말할 수 없다할지라도 낙담할 필요는 아무에게도 없다. 바울은 자기의 회심에 관한 정확한 때를 주저없이 말할 수 있었다. 니고데모가 언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주춤거릴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던 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여 보면 회심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일어났다. 침례 요한과 예레미야는 자기들이 한번도 회심한 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경건한 사람이었다.
위의 사실을 기록하는 이유는 성화를 주장하는 어떤 자들이 모든 사람은 자기가 회심하고 성화한 정확한 날과 시간을 알아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회심에 대한 히브리어는
“돌아옴”,
“회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돌아서다”,
“다시 돌다”란 의미의 다른말로 부터 파생된 것이다. 헬라어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두 말 모두 한 인간이 과거의 죗된 인생에서 돌아서서 왕국을 향하여 출발하는 급격한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회심을 단순히 마음의 변화로만 정의하는 일은 주의를 요한다. 회심이 마음의 변화라 할지라도 이것은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로서 단순히 의견을 바꾸는 것이나 어떤 신학으로부터 다른 신학으로 전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적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기독교인은 결코 이전 방식대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회심 때에 그는 다른 방향을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호, 습관, 즐거움이 변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간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진정한 회심은 온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깨닫는 일, 죄를 슬퍼하는 일, 고백,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정직하게 보상하려는 노력, 영광스러운 용서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 자신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위에 서게 되었음을 침례와 신도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공적으로 표명하는 일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 있는 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엄숙한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 8:11).
많은 사람들에게 회심이란 단순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하는 감정적인 결단에 지나지 않으며 생애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의미하거나 그러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시된 일곱 단계를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모두는 회심을 온전히 이루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그 단계들이 여기 제시된 순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반복해서 그것들을 강조하여 보자.
1. 죄를 깨달음.
죄로 부터 벗어나려면 죄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죄를 분별하기 위하여 체험적으로 죄를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죄를 피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죄의 모습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것들은 순결하게 보이기 때문에 부주의한 자를 속이기 쉽다. 개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그러한 것이다. 이 기준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에 구현되어 있다. 이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요한은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요일 3:4). 아물든 율법은 영적인 것으로 그것을 얼핏 읽을 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 율법 안에 더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외적인 행실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와 의도 까지도 다루고 있다.
2. 죄를 슬퍼함.
이것은 각자가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슬픔을 느끼지 않으면서 세상에 있는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선지의자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였을 때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죄를 깨닫는 일은 곧장 각 영혼에게 이르러 와야만 한다(
삼하 12:7).
3. 고백.
고백에 이르도록 하지 않는 죄에 대한 슬픔은 진정한 슬픔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께, 그리고 인간에게 고백해야 한다. 고백의 성격은 고백의 깊이와 진실성을 가늠하도록 한다. 이것은 진실 되게, 자발적으로, 강요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런 것 들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지켜지지 아니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4. 보상.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회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국면이다. 이는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어떤 것들을 기억해내는 것을 뜻하 기 때문이다. 돈이나 다른 귀중품을 훔친 것에 대하여 고백하는 일은 영혼을 살피는 경험이다. 이렇게 훔친 것들을 관계자에게 되돌리는 일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가장 복된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 앞에서 영혼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높이는 일이다.
5. 하나님께 대한 신앙.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
히 11:6).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후에 때때로 인간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시험에 빠지는 일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죄는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셨으며 온전히 용서하실 수 없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실 수 있다(
사 1:18; 요일 1:9).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6. 공중 앞에서의 시인.
회심의 사실을 숨기거나 비밀로 간직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변화된 태도를 공중 앞에서 시인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는 귀신들렸던 자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족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셨다(
막 5:19). 이것은 구원받은 영혼의 개인적인 증언이었다. 공중적인 시인은 침례, 그리고 신도들과의 연합을 포함한다(
행 2: 38, 41, 47).
7.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음.
이것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마치시리라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회심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죄있는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요 8:11). 각 죄에 대한 미래의 온전한 승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죄를 용서받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는 각 영혼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믿음으로 인간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뿐 아니라 생애의 성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주장하여야 한다.
성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주제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이 땅 위에서 기독교인이 누리는 최고의 인생 체험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지나간 죄들을 용서하는데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더욱 큰 능력을 보유하고 계신다. 즉 우리를 타락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다.
458 페이지의 도표는 회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결에 이르는 성화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늘을 얻으려는 자는 이 길을 걸어야만 한다.
성결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천천히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는 과정으로 맨 처음에는 이겨내기 어려운듯이 보일런지 모르나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한 걸음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인내하고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를 받음으로 이 과업을 완수할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또는 과정으로서 이에 의하여 인간의 애정이 정화되고 죄와, 세상으로 부터 떠나게 되어 하나님의 가장 크신 사랑에 이르기까지 고양(高揚)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또 하나의 정의는
“성령의 역사로서 이에 의하여 신자가 죄로부터 자유케 되어 생애의 성결에까지 고양되는 것”이다. 두 정의는 본질적으로 같다.
성화와 성결은 일반적으로 동일시되고 있으며 사실상 두 말은 맞 바꾸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또는 과정으로서 이에 의하여 인간의 애정이 정화되고 죄로 부터 떠나는 것”이다. 성화가 행위, 또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이에는 결과적인 산물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한 것이 성결에 해당한다. 성결이란 성화의 결과로 된 상태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정이라기 보다는 결과이다. 이것은 완성된 성화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회심은 기독교인 경주에서 시작이다. 성화는 기독교인이 목표에 다달으기 위한 길, 또는 통로이다. 성결은 목표, 또는 길의 종착지이다. 온전함과 대등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온전하시다. 그분은 그렇게 되지 않으신다. 항상 그러하시다. 인간은 이 동일한 덕성을 위하여 분투하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했다고 주장하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이 회심할 때 그는 자신의 과거의 악한 생애가 용서되었다는 생각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그는 가책을 느껴왔던 많은 악행들을 알고 있으며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하여 기뻐한다. 그의 기쁨은 한이 없다. 그는 술 마시는 일과 다른 죗 된 습관에 노예로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유케 되었다.
그나 다른 어떤 이들은 결코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직도 시험을 당하며 매일마다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그들은 유혹자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갈망감은 있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를 얻고자 결심하며 인내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워야만 할지라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결국 그들은 자유케 되며 사단이 그들을 떠난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며 얼마나 놀라운 날인가! 더 이상의 유혹이 없다.
그러나 아무도 사단의 전술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떠나서 멀리 가버릴지 모르나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 4:13). 사단은 인간에게 이와 같이 행동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권면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고전 10:12). 자신들의 성취에 대하여 자축하 던 사람들이 바로 그 순간에 가장 큰 타락에 빠질 위험에 처한 적이 여러번 있어 왔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죄에 대하여 분투하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만큼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것보다도 더 높은 체험을 포함하고 있다. 죄가 더 이상 유혹거리가 되지 않을 만큼 죄에 대하여 증오를 갖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흡연과 음주에 대하여 승리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매 유혹을 용감하게 저항하고 한번이라도 결코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승리를 보장받고 있으며 그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를 타락으로부터 지켜주신 동일한 하나님이 악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시고 그것을 미워하도록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이르러 온다. 그는 이전에는 미워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결코 드려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 매력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자기에게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소원을 주시고 그는 온전히 승리한다. 한때 그가 사랑하던 것을 이제 그는 미워한다. 그는 그 지점에 이르러 온전히 성화된다.
구원을 갈망하는 기독교인에게 있는 한가지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어떤 기이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하늘 나라를 위해 준비시켜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승리 주시기를 기도드려왔다. 그렇게 하고는 자기들의 할바는 다 하였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조력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어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권면한다(
빌 2: 12, 13, 공동번역).
어떤 이들은 한번에 열명의 적을 감당하여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음주라는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이 마귀 하나와 싸우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다른 대 여섯의 마귀와는 대항할 수가 없다. 그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여야만 한다. 하나의 적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을 때에 나 다른 적을 위하여 준비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므로 그에게 다음의 싸움을 위하여 능력을 다시 얻도록 잠시 동안이 나마 숨돌릴 틈을 주시는 것이 보통이다.
기독교인들은 한꺼번에 모든 악의 군대들과 싸우려는 실수를 범할 위험이 있다. 오로지 소수의 사람만이, 만일 있다손쳐도, 이렇게 할 수 있다. 다윗 조차도 단번에 블레셋 전체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재난을 초래할 것이었다. 그는 골리앗과 맞서는 것 만으로 충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주셨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노력을 분산하는 대신에 어떤 특정죄나 약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온 세상이 회개하기를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개인적인 의무로서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영혼에게 우리 일을 제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영원들을 한 사람씩 구원하듯 악도 하나씩 공격하자.
이렇게 성화의 길을 걸어 갈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의 문제를 만나서 성화 안에서 전진을 하며 성결이란 목적지에 가까이 나아간다. 우리가 출발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입혀주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온전케되지 못하였지만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기를 살피셔서 우리에게 기회가 있었더라면 우리가 이루었을 것으로 보아주신다.
나무의 과일이 하루 아침에 완전케 되지 않는다. 처음 꽃 봉오리가 나타나서 나무에 과일이 익기까지 여러 주, 여러 달이 걸린다. 그러나 각 단계는 온전함을 나타낸다. 꽃 봉오리는 온전하다. 마찬가지로 첫번째의 익지 않은 과일도 그러하며 또한 익은 과일도 마찬 가지이다. 인간도 이와 같다. 어린 아기는 온전하다. 유년도, 자라 나는 젊은이도, 성인도 마찬가지로 온전하다. 그러나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온전한”(perfect)이란 단어를 두 가지 것을 내포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록 온전하기는 하나 완성되지 아니한 것, 완성된 온전함. 바울이
빌립보서 3:12에서 한 말을 유의하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공동번역). 그러나
15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12절에서는 자기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15절에서는 온전하다고 한다. 영(Young)은
12절을
“또는 이미 온전하게 되었다함도 아니라”로 번역하고,
15절을
“그러므로 온전하게 된 자들은 누구든지”로 번역한다. 로버트슨(Robertson)은
12절의
“온전히”란 말을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단어는 텔레이오오의 완료 수동 직설법(완성된 상태)으로서 ∙∙∙ 바울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영적인 궁극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완강 히 부인하고 있다. 분명히 그는 어떤 하나의 체험에 의하여 갑자기 절대적인 온전함에 도달한다는 생각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일에 아주 큰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그 목표는 그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요 아직 그의 앞에 있다.” 15절의
“온전히”에 관하여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차용된 텔레이오이는 상대적인 온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12절에서 완강하게 부인한 절대적인 온전이 아니다”(Word Pictures, Vol 4, pp. 454, 455).
이것은 바울의 기록을 설명한다. 그는 절대적인 온전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는 상대적인 온전을 주장한다. 이 사실이
16절에 강조되어 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또는
“우리가 어미 얻은 곳에” 바울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 여정에서 동일하게 멀리 전진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온전하다. 바울이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말한 온전함에 도달 한 사람이 있을까? 만일 바울이 절대적인 온전을 주장하였더라면 우리는 실망하였을 것이다. 이에 도달한 사람치고 그렇게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또는 그 사실을 아마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시나 인간 그 자신은 그러한 주장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요한계시록 14:4, 5에서 144,000에 관한 묘사를 읽어 보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는 자들”임을 주목하라. 그들은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는 말이 발하여 질 자들 속에 있을 것이다(
계 22:11). 이 사람들은
12절에 언급된 대로 주께서 오시기 전에 사는 자들로 성결함을 얻은 자들이다. 그들이 이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진실되게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결의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누가 주장하든지 그는 성결하지 못한자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죗된 인간이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는 자신의 약점을 더욱 더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한다.
온전함을 얻는 일에 사람을 실망시키기 위하여 서가 아니라 온전함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성결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는 부르심이 명백하게 주어져 있다. 종말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선하지 않은 것 안에 당신의 백성을 갖고 계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하게 반사할 것이다.
144, 000인 바울이
히브리서 10:19, 20에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난외주,
“안에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언급할 때 그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144,000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계 14:4). 오로지 대제사장만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허용되었다. 보통 제사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144,000인을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말할 때, 또한 그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이 그 분과 함께 지성소에 들어간다면 144,000인은 대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과 제사장들인 것처럼 이 특별한 무리들도 왕과 대제사장들로 그분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 분을 따라 간다.
고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을 보는 일을 위임받았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막중한 의무를 졌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매우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일과는 비길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 황금패를 머리에 띠고 있었다. 그는 대속죄일에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날에 들어 가는 일도 아주 철저한 준비를 한 후에 이루어졌다. 그 큰 날이 이르기 칠일 전에 그는 자기의 집을 떠나 밤낮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며 지냈다. 대속죄일에 그는 떨면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자기의 왕복을 벗고 겸비의 옷을 입었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로부터 분리시켰던 휘장을 걷었다. 그의 안에는 개인적인 죄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존재는 도말되고 말 것이었다. 거룩한 자, 오직 그만이 죄를 짊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점이나 주름이 없어야만 하였다. 오로지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철저한 준비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 한가지 죄라도 그들에게 붙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대로 있게 될 것은 144,000인 안에서이다. 그들은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자들로 약하다 약한 자이다. 그들이 지나간 세대의 죄의 결과들을 지고 있다. 그들 안에서 하나님은 인성 가운데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분께서 죗된 인간 안에서 또한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나타내신다. 아주 오랜 동안 사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가 어디에 있나이까?”라고 하며 하나님께 빈정거려 왔다. 그 분 앞에 144,000인을 두고서 하나님은 조용히 대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가 여기에 있도다(
계 14:12).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실 때에 죽은 짐승의 피를 가지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다(
히 9:12).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안에서)(지)성소에 들어갈”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히 10:20).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호하고 가리기 위하여 피나 향이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생애는 순결하고 거룩하였으며 어디에서건 점이나 흠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분은 담력을 갖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으며 어떤 면에서건 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것은 당신의 생애의 공로 안에서, 또한 힘입어서 한 것이다. 바로 같은 공로를 힘입어 우리도 들어가는 것이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1).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한 것은 그분께서 생애 하셨던 생명이다. 당신의 신성 안에서 그는 들어가는 수단으로서 가능하게 하는 피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당신의 생명의 공로로 담력을 갖고 들어가셨다.
144, 000인은 성도의 인내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또한 예수의 믿음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하늘 문은 활짝 열려질 것이다. 그들은 생명 나무에 나아갈 권리를 가진 자로서 들어 갈 것이며 거룩한 담력을 갖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존전에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무리들 안에서 하나님은 구원하는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완성하신다. 가장 흉악한 죄인이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가장 연약한 최후의 시대에서 선택된 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아담의 타락에 대하여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아담은 온전한 능력을 갖고도 가장 작은 시험에 실패하였다. 이 사람들은 가장 연약한 인성을 갖고 무한히 큰 시험을 통과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 불멸을 위한 후보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최후의 논증이 되는데 필요한 구성원에 가담할 남녀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회심한 자, 성화된 자, 헌신한 자를 원하신다. 이들은 자기의 성취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가운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주님께서 행하셨던 믿음을 행사하고, 일을 마치는 데 필요한 인내를 갖고, 결국 그 분과 함께 하늘 도성의 문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