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10 장 — 완전한 성화
 10장은 계속해서 의문의 율법이 인간을 온전하게 하는 일에 어떤 효력도 갖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본 장에서 저자가 가장 큰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만일 율법이 나아온 자들을 온전하게 할 것 같으면 속죄제가 그쳤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이 더 이상 죄의식을 갖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어떤 속죄제도 갖고 오지 않을 것이었다(1-4절).

 이 점을 입증한 후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에 대하여 입증하고 있다. 그 첫번째 예증으로 그는 육체 속에 들어가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둘째 예증으로 그는 죄와 불법의 용서를 받은 자들 안으로 들어가신다. 이런 자들을 위하여는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5-18절).

 죄의 용서가 있고 죄 의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 앞에 담대함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앞서 가시는 분 그리스도와 함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19-22절).

 본 장의 나머지 부분은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과 하나님의 큰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관점에서 서로 격려하라는 권면이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23-39절).

히 10:1-4 (10:1-4)
 그리스도는 어디에서도 제사법의 폐지를 선언하지 않았다. 반면에 바울은 의문의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자기 입장에 대하여 유력한 논거를 대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온전함을 가져오셨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이것은 레위 율법이 할 수 없었고 하지도 못했다. 그것이야 말로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죄의 그침은 속죄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구한 율법을 불필요하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속죄제를 요구하는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율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었다.

 지상 성소의 첫 칸에서 행해지는 봉사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매일마다 그 일이 되풀이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사도는 둘째 칸에서 행해지는 봉사도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일시적으로 죄를 도말했지만 매년마다 그 봉사를 되풀이해야만 했으므로 영원한 봉사가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율법이란 물론 레위 율법을 말한다. 이것이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율법이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그림자와 그림자를 던지는 사물 간에 아주 밀접한 유사성을 기대할 수 없다. 형상, 사진, 동상, 이런 것은 그림자 보다 훨씬 자세하지만 이것들도 불완전하게 실체를 비추어 줄 뿐이다. 이 사실로 우리는 율법이 실체의 윤곽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너무 자세히 비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히브리서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성소 봉사의 가장 큰 취약점은 미리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도록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제도 자체 안에 명백했다. 매년 반복되도록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제사가 의도된 목적을 완수했더라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겠는가. 그러나 한 해의 봉사가 끝나자마자 또 한 해의 봉사가 시작되어 또 한 번의 대속죄일에 절정에 오른다. 대속죄일의 속죄 제사가 끝나자마자 저녁 제사가 시작되어 양이 죽임당하고 피가 뿌려진다. 이것은 모두 그날 행해진 대속죄가 그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경배자들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속죄가 필요하였다. 바로 그날로 부터 그들은 다시 모든 의식을 반복해야만 했으니 이는 온전함과 성화를 성취하기에 이것이 무능력함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이것은 폭넓고 흥미있는 질문이다. 저자는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하기 위하여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단번에 깨끗하게 된 예배자들은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계속해서 재물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히브리서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브리서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제사가 이것을 행하지 못한다고해서 제사를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간주할 수만은 없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이것은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다.
히브리서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해마다 생각하게 하는것이 있나니
 대속죄일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 자복과 규정된 제사를 통하여 일년내내 용서가 베풀어졌다. 대속죄일에 이 모든 죄를 다시 기억하였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혼자서 모든 의식을 수행하였다: 향을 드리고, 황소와 염소를 잡고, 법궤와 성소와 제단 위에 피를 뿌렸다. 백성들은 이 의식에 전혀 가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양을 가져오지 않았다. 제물 위에 손을 얹지 않았다. 제물을 죽이지 않았다. 매일의 의식과 대조적으로 이것은 모두 그들을 위하여 행해졌다.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경배자가 결코 온전해질 수 없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대속죄일의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제사가 그들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들이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므로 속죄제가 그쳐졌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레위 율법의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결코 선언을 그러한 하지 않으셨다. 그는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경우에는 속죄가 전혀 필요없었다. 죄짓기를 그친 사람의 경우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 짓기를 그쳤다면 속죄제는 그쳤을 것이었다. 의문의 율법을 폐지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러한 것이었다.
히 10:5-10 (10:5-10)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율법이 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셨는가?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온전함을 얻을 수 없게 했다면 제사법이 실패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그도 실패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나아진 점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낱낱이 행하심으로 어떻게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셨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온전함의 획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신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제사와 예물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없앨 수 없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했다.

 이 인용절은 칠십인역의 시편 40편에서 온 것으로 다윗의 시로 생각되고 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가 표제이다. 첫 다섯 절은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받을 때의 체험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6절로 8절까지는 너무나 명백하게 메시야적이므로 그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주제이며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흠정역의 시편 40편을 찾아보면 이곳은 “주께서 나의 귀를 여셨도다”라고 되어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칠십인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얼마 전에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성경이 그리스도 당시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여기에서 인용하였다. 히브리 성경은 “주께서 나의 귀를 여셨도다”이다. 칠십 인역은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조화시키고자 여러가지 시도를 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할 만한 충분한 사실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우리는 두 구절을 모두 연구하자. 먼저 히브리서 10:5에 있는 대로 칠십인 역을 살펴보자.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동물들을 제단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예물들 자체가 결코 영혼을 정결케 할 수 없음을 알았거나, 알아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값은 사망이며 가장 작은 죄일찌라도 형벌을 받아야 함을 인간들에게 가르치는 실물 교훈으로 이것들을 의도하셨다. 이 대신에 이스라엘은 예물을 일종의 죄를 갚아 주는 것으로 믿게 되었으며 지정된 제물을 가져오면 자기들의 죄가 지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더 잘 알아야만 하였다. 어떠한 짐승도 인간의 영혼과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황소나 염소를 드리는 것은 모욕이다. 이것은 인간을 짐승과 같은 수준에 놓기 때문에 속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어떤 짐승도 대속물로서 죽겠다고 승락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은 억지로 강요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죽음이 속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색적인 존재에게 가치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말 속에 요약되어 있다. 이것들은 더욱 고차원적인 어떤 것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 안에는 속죄의 가치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를 위하여 한 몸이 예비되었다. 하나님이 셨던 분이 인간이 되셨다. 두 본성이 신비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신인(神人)이 되었다. 그를 위하여 예비된 몸은 죽어야만 하였다. 이것은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으로서 최대의 고난까지 감수하도록 준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광야에서의 시험이나 겟세마네에서의 고뇌에서 살아 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곳까지 견딘 후 땅에 죽은듯 쓰러졌을때 한 천사가 보냄을 받았다. 이는 잔을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 잔을 마시도록 그분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위하여 힘을 얻으셨다. 그곳에서 그는 죽음을 맛보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는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와 구속이란 특정 목적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그 몸 안에서 예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고 아담의 불명예스러운 실패를 보상하셨다. 그 몸을 향하여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유혹이 닥쳤으며 그 몸 안에서 모든 유혹이 정복되었다.

 인간은 특정 유혹들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어떤 이들에게 어떤 유혹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저지된다. 똑 같은 유혹이 다른 이들에게는 아주 심각하기 때문에 무서운 투쟁을 겪게 되고 때때로 인간이 이에 정복을 당한다.

 지상에서 가장 심하게 시험받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만큼의 힘으로 각 시험이 그리스도에게 임하여야만 했다. 인간이 어떤 죄에서 그리스도보다 더 힘들게 시험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굴복하는 것을 용납하셔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결코 인간만큼 심하게 시험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시험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으므로 승리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는 자기만큼 시험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시험을 최대한 견디며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면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 누가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인간에게조차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여,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시험을 받았고 그대가 행한 것처럼 피 흘리기까지 이 저항하였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나아갔다. 너는 죽었다. 그리고 거기서 너의 고난은 끝이 났다. 나는 너처럼 죽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겟세마네에서 나는 잔을 마셨다.”

 어떤 기독교인도 위와 같이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도 위처럼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고난을 비교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의 시험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시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생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인간에게 닥쳐온 각 시험이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왔다. 각 시험은 그 어떤 인간에게 임한 것 보다도 더 격렬하게 그분에게 임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극심한 시험을 당한다 할찌라도 예수께서 이해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앞의 길을 다 걸어가 셨다.

 세상의 시험들이 한 몸 안으로 모여져서 충분히 느껴졌다면 그러한 몸은 고난을 종결 지을 생명의 파괴 없이 고난과 시험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는 육체적, 영적 자질을 소유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점을 확대시킬 마음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실제적이었으며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라는 구절은 그가 단순히 육체를 가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모든 사람이 깨달았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는 예비된 몸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 몸은 번제나 속죄제에 사용되는 짐승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셨다. 이는 인류를 대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에 신인(神人)으로서 드린 그의 예물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였으며 사실상 레위 제사가 약속 안에서 희미하게 미리 보여주었던 것을 완성하였다.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으므로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이 몸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의도가 성취되었으며 이 몸의 소유자에게 하늘의 시인이 이르러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우리가 히브리서 10:5에 있는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란 칠십인 역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이 말씀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육체 안에서 행하신 사역에 대한 중대한 언급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셨다.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여 주는 것이었다. 성전에 가져온 모든 예물마다 누군가가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중지하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죄를 짓기를 그칠 수 있었을까? 이것을 증명하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 그 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시험을 당할찌라도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셨다. 죽기까지 저항하셨다. 사실상 죽음 그 이상까지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승리하셨다. 온전한 증명이 이루어졌다. 인간은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몸 안에서 보여주셨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는 칠십인역을 옹호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는 히브리 성경에 따라 시편 40편 6절을 연구하자. “주께서 나의 귀를 여셨도다.” “여셨도다”라는 말이 난 외에는 “파다, 뚫다. 찌르다”로 나와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표현이 출애굽기 21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그곳에 있는 히브리 종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이 이것을 정당화한다.

 출애굽기의 설명을 보자:“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 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출 21:1-6).

 신명기의 대둥절은 다음과 같다. “종이 만약 너와 네 집을 사랑함으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신 15:16, 17).

 이것은 이스라엘에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종이나 노예로 내어 줄 수 있었는데 단 그 기간은 육년을 초과할 수 없었다. 그 기간이 끝나면 그는 자유롭게 될 것이었다. 그의 주인은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삶의 배나 받을만큼” 자기를 “섬겼은즉” 온갖 좋은 것을 그에게 주어야 했다(신 15:18).

 그러나 이 계약에는 어떤 조건들이 붙어 있었다. 한 남자가 종살 이를 시작할 당시에 독신이었다면 그는 육년이 끝날 때 혼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기혼이었다면 그와 그의 가족이 자유로 나갈 것이었다. 그러나 독신으로 왔지만 그 육년 동안에 결 혼을 하였다면 그의 소원에 따라 자기는 자유로 나갈 것이로되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주인에게 속하였으므로 남아 있어야만 하였다.

 종이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그러한 조건하에서의 자유를 자기를 위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주인과 바에 종은 자기 함께 머무는 것을 선택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주인은 종을 문으로 데리고 가서 문에다 그의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었다. 그러면 종은 영원히 섬겨야만 하였다. 귀에 난 구멍은 그가 종이라는 표시이다. 그 뿐 아니라 사랑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식구들을 그토록 사랑하여 그들로부터 떨어지기 보다는 영원히 종되기를 자원한 것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시 40:6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귀를 뚫은 자. 혹은 연인(戀人)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출애굽기 21:6, 신명기 15:17, 시편 40:6, 이 모두에 등장하는 귀를 뚫다는 단어는 모두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꿰뚫다, 파다. 찌르다라는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

 히브리 종과 그리스도를 대비하여 보면 매우 교훈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 그는 홀로 오셨다.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봉사 기간이 끝나갈 때에 그는 율법대로 혼자 떠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 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는 인간과 사랑에 빠지셨다. 그는 홀로 왔다. 그러나 홀로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출애굽기의 종은 “나는 주인과 나의 아내와 나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지 않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런 처지에서 주인은 종을 문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다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었으며 “종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길 것이었다(출 21:6).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시편 40편의 말씀대로 자기의 귀를 송곳으로 뚫고 이제 영원히 섬기게 되었다.

 물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귀를 뚫지는 않았다.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림을 받았다. 귀의 구멍이 종의 신분뿐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표를 갖고 계시며 영원히 갖고 계실 것이다. 그는 홀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십자가와 고난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기로 선택하셨으며 인간 가족과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줄로 자신을 동여 매셨다.

 이상은 히브리 성경에 따른 시편 40편의 이야기이다. 칠십인역은 인간을 위하여 짐승의 피가 이룰 수 없는 온전한 희생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두 성경 모두가 순종, 고난, 사랑, 자원하여 견디심과 참으심을 가리킨다. 어느 성경이 올바른지를 제시할 수 있는 권위자가 없으므로 양자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우리는 두 가지 모두가 근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히브리서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브리서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아셨다. 모든 길이 그 분 앞에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그분은 당신의 것이 될 고난과 고뇌를 아셨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리지 않으셨다. “보시옵소서(내가) 왔나이다.” 이 말은 도전에 대한 그분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그는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고 약속된 바대로 오셨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그가 폐하신 첫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세우신 둘째 것은 무엇인가?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죄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이것이 첫 것이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것이 둘째 것이다.

 그러므로 첫 것은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이다. 이것은 의문의 율법이다. 이것을 그가 폐하신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는 둘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것을 그는 세우신다.

 구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순종을 예물로 대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수천 마리의 양과 강물만큼 많은 기름을 갖고 왔다. 그러나 회개를 호소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유의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시도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악을 그치고 옳은 일 행하기를 배우라고 호소하셨다(삼상 15:22; 사 1:16).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제사의 교훈을 배우려고 하지 않음이 분명하였다. 그들은 제사의 의도를 왜곡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는 제사를 지내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또는 “보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려고 와 있나이다”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는 첫 것, 곧 제사와 제사 예식을 폐하셨다. 그는 둘째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세우셨다. 시편 기자가 기록한 그대로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오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일년 내내 범죄하였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일차적인 목적은 제사를 폐지하는데 있지 않고 제사를 순종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백성들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며, 죄를 지은 여인에게 그가 하신 말씀처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요 8:11). 죄를 피하면 자동적으로 제사와 제물은 그쳐지고 말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의문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믿고 가르치는 것은 그분의 사역을 적절하게 묘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죄를 폐하고 제사를 순종으로 대체하기 위하여 오셨다. 죄를 폐하므로 제물의 율법은 폐지되었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 40:8)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힘들거나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심중에 있었다. 그는 첫 것을—모든 과실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그에 따른 제사들과 예물들을—폐지하셨다. 그는 둘째 것을 자원하여 기쁘게 순종함으로 세우셨는데, 그것은 갈바리에서의 단 한 번의 위대한 희생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이것은 그보다 열등한 모든 제사들을 영원히 폐지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데살로니가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한다(살전 4:3). 이스라엘이 매년마다 거듭 거듭 드리는 제사는 경배자들을 결코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할 뿐이었다. 제사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수많은 제물들의 무용성을 강조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길을 보여주신다. 그는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기신다. 그리스도는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매년마다 끊임없이 드린 제사는 죄를 결코 제할 수 없었으며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 죄를 폐하고 우리들을 온전하게 하신다. 이것이 서로 대조되어 있다.
히 10:11-18 (10:11-18)
 앞 부분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율법을 마음 가운데 기록함으로 성취되는 바 그리스도는 바로 같은 방법으로 율법을 자신의 마음에 두었다(시 40:8). 그러므로 사도의 논증은 완벽하다. 그리스도는 마음 속에 율법을 기록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온전함의 표준을 충족시키셨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도 제시되어 있는 표준을 마찬가지로 충족하게 될 것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저자는 강조하기 위하여 문제를 재차 검토한다. 제사장은 매일 똑 같은 제사를 드린다. 의식을 끊임없이 돌아가며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성취하는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사들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앉으사
 그리스도는 죄들을 위하여 한 제사를 드렸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 “앉으사”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1:38:1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우편에 우리의 왕같은 대제사장으로서 공식적으로, 직무적으로 앉아계심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고린도전서 15:23-26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것들이 최종적으로 파멸될 때까지 그곳에 남아 계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는 말이 그가 하늘 성소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신다고 말한 편지서의 다른 부분과 상충되지 않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스데반은 앉아계신 모습이 아닌 서계신 모습을 보았다(행 7:55).

 주석가들은 이러한 난점을 발견하고 심사숙고하고 있다. 델리치(Delitzsch)는 8:1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리스도가 활동적인 성소 봉사자로 말해지고 있다. “이상의 언급들이 여기에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 직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드리는 일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직분이 그의 봉사 활동에 어떠한 변화도 초래하지 않으며 속죄 사업에 있어서 그 이상의 부담을 더 이상 지우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가 여기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과 앞으로도 그의 보좌에 앉으신 대제사장이 시다—사실은 접근할 수 없는 영원한 안식 가운데 앉아 계신 영원한 왕이시다”(히브리서 주석, 2권, p. 162).

 다시 그는 저자의 기록이 고린도전서 15:23-26에 있는 바울의 기록과 불일치하고 있지나 않는지 묻는다. 여기에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죽음을 폐지하시는 분으로서 그를 제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와 같다: 2:149:28을 언급함으로 우리의 저자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 줄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서의 노력과 열정을 위에서의 그 온전함의 변함없는 축복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싸우기 위하여 내려오지 않는다. 그의 투쟁은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에 관한한 하늘 아버지의 전능하신 통치에 참여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이 최종적으로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상게서).

 랑게 주석은 다음과 같다: “자기의 원수들을 온전히 굴복시키기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 왕같은 제사장이 기다리시는 것을 그의 재림 때까지 전혀 활동없이 지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상의 제사장들이 끝날줄 모르는 활동을 계속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모든 관계에서 온전함의 목표에 도달한 중보자가 고양된 휴식을 갖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중보자는 아론의 대제사장직에 표상적으로 선언된 이상적인 속죄를 실현한 후 이제는 멜기세덱에 의하여 표상적으로 예고된 왕같은 제사장직을 영원히 받는다. 이 위치는 미래의 제사로부터 면제되고 무한정의 경애와 명예, 그리고 축복들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히브리서, p. 172, par. 6).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자기의 원수들이 그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은 나태하게 고대하는 가운데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웨스트코트(Westcott)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의 위엄 가운데서 그리스도 그분은 농부가 천연계의 경과를 기다리듯(약 5:7), 부조들이 거룩한 약속을 기다리듯(11:10) 기다리신다”(히브리서, p. 34).

 농부나 부조나 팔장을 끼고 앉아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백일몽이나 꾸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기다리듯 같은 태도로 서 기다렸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기다리고 계신다. 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신다. 사단의 통치가 끝나기를 기다리신다. 모든 성도들이 죽음에서 일어날 부활을 기다리신다. 이곳에서 기다린다는 의미는 약속된 휴식, 죄의 종말, 이 세상 왕국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됨을 영원히 갈망하면서 기다린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제사와 예물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행하신 분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으며 죄를 폐할 수도 없었다(히 10:1). 제사장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같은 희생 제물을 드려도” 그들의 일은 효력이 없고 불완전하다(공동번역). 이제 그리스도는 한 제사를 드림으로 그것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룩하였다.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은 “한 제사”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제사가 이루어진 십자가를 지적하고 있다.
거룩하게 된 자들
 “거룩하게 되고 있는 자들”이란 말이 더욱 문 자적이다. 또는 블리크(Bleek)과 루네만(Lunemann)이 번역한 것처럼 “지금 그리고 미래에 거룩함을 받는 모든 자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을 위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그들은 아직 온전하게 성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다. 그리고 이 사역은 그분께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만드실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고 선언하였다(빌 3:12). 그는 자기의 소망을 표현하고 확신에 차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음을 지적해 내는 것은 불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수많은 마음 안에서 이 사역은 막 시작하였으며 어떤 사람들 안에서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므로 아들과 성령도 일하신다. 그리고 이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임시적으로, 또한 잠재적으로만 진실이다. 당시에 살고 있던 수많은 성도들은 아직 온전해지지 못하였다∙∙∙.. 바울도 그들 중 하나이다. 후에 구원받을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천만의 사람들이 후일에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이러한 영혼들을 온전케 하는 사역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를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그분은 당신의 사업을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그는 그곳에서 죽었고 다시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사역은 종결지어졌고 결코 반복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곳으로부터 그분은 쉬고 계신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 속에서 행해야 하는 그분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이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끝난 것에 관한한 그리스도는 그의 사업을 십자가 위에 서 끝냈다. 이것은 성소 봉사에 있어서 속죄물을 죽였을 때에 일이 제단 위에서 끝났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끝남이다. 제단 위에서의 일은 사실상 끝났다. 피 흘림이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이 피를 드리기까지는 죄인이 속죄함을 받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위에서 일이 끝났다. 속죄의 수단인 피가 준비되었다. 그리스도는 다시는 결코 죽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앞에 나타나시는 하늘 성소의 봉사에서 그분의 피를 드리는 일이 어떠한 속죄적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속죄를 온전히 십자가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건전한 교리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 십자가는 필수적인 것이며 십자가는 중심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 사역을 그 곳에서 끝내셨다. 그러나 그때 그분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위의 성소에서 구속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이 사역은 지금 진행 중이고 끝이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십자가에 제한하는 사람은 속죄를 제한한다.

 본문에 나타난 바대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한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으며 다시 반복될 필요가 결코 없다. 역사상 어느 때의 성도들이 어떠한 온전함을 얻든지 간에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효력의 넘치는 작용은 성화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아직 미치고 있다. 속죄의 총체성은 세상 끝날까지 미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시면서 지금 행하고 계시는 일이다.

히브리서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히브리서 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브리서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은 예레미야로 부터 인용한 구절로 히브리서 8:10-12에도 등장한다. 양편구절을 비교해 보면 16절 뒤에는 두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심 뿐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온전케 함에 대한 말을 증거한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여기에서 언약은 죄의 용서와 관련하여 언급되었다. 제사와 예물이 죄를 폐하거나 경배자들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사는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증거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이것이 언약의 약속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령께서도 역시 이것을 증거하신다.

 그렇다면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이 사업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실 것이다.

 돌비에가 아닌 마음과 생각에 법이 기록될 때에, 율법의 준수가 법적인 요구상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될 때에, 순종이 의무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것이 될 때에, 죄는 매력을 잃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마음 속에 들어가심으로 그 분과 함께 우리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시 40:8).

 마음 속의 율법이나 돌비 위의 율법, 이것은 새 언약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를 갖고 있다. 양편 경우에 율법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 경우에 이것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적인 법령이다. 다른 경우에는 마음에 새겨진 사랑의 율법이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이것은 “의에 이르는 순종”이다(롬 6:17, 16).

 새 언약의 약속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을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법들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간에 의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경우에 그러 했던 것처럼 율법이 마음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둘째 약속을 이루실 수 있고 이루실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조사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새 언약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율법을 간직할 것이며 사랑할 것이다. 율법을 미워하고 무시하는 사람,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은 새 언약에 전혀 자리잡지 않은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아니하시라는 약속을 주장할 수 없다. 그 약속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불법의 사람, 율법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결단코 분깃을 얻지 못할 것이다.

 17절 앞에 많은 번역가들은 “하신 후에 또”란 말을 놓는다. 의미가 통하도록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가라사대∙∙∙ 하신 후에 또”라고 읽을 수 있다. 몇몇 사본이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삽입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

히브리서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2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 있다. 죄가 그치면 마찬가지로 속죄 제물도 그친다.
히 10:19-25 (10:19-25)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신 분으로 제시하여 왔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입장을 취하셔서 인간을 위하여 아담의 불명예스러운 실패를 만회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어떤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셨다. 하나님과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인간의 담보와 중보자가 되셨다. 그리고 새 언약의 규정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원래의 지위로 회복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우리를 온전하게 드리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그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새 길, 산 길을 통하여 그분을 따라 하늘 성소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진 것처럼 우리들도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신다.

 이 성경절들에는 이토록 높은 요지가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보혈 공로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에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가 마련하신 새로운 길을 통하여 들어가기를 그 분은 원하신다. 휘장을 통하여, 곧 그분의 육체를 통하여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대제사장의 옷에 피를 뿌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들어 가기 전에 그가 자기 몸을 정결한 물로 씻어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도 심령에 피뿌림을 받고 우리의 육신이 씻겨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영적으로, 육적으로 깨끗하여야만 한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담력”이 편지서에 이 단어가 3회 나온다. 앞의 3:6에는 “담대함”, 4:16에는 “담대히”로 나와 있다. 이 땅의 대제사 장은 성소 안으로 담력을 갖고 들어갈 수가 결코 없었다. 떨림과 두려움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자녀로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 “우리가 가진 희망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 사람들입니다.”(히 3:16, 공동번역).

 성소 보다는 “지성소”이다. 또는 원어가 복수이므로 거룩한 장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여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그 길을 헌납하셨다. 이것은 한 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소를 말한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피 안에서”, “피 공로로”라는 뜻보다 이것이 더 낫다.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새로운 길
 사실을 말하자면 지상의 성소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각 칸의 앞에 쳐져있는 휘장을 통하여 들어가야만 하였다. 그외의 다른 길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말은 영적으로 적용되어져야만 한다. 가능한 해석은 들어가는 수단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하는 수단이다. 무엇이 제사장에게 들어갈 권리를 주었는가? 피, 이것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도 “피 없이는 아니하”였다(히 9:7). 그가 들어갈 때는 언제든지 “다른 것의 피”가 있었다(25절). 이것이 허락의 조건이었다.

 제사장들이 힘입어 들어가는 피는 죽은 짐승의 피였다. 그러한 피는 속죄의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제사장은 들어가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머물러 있는 시간은 짧았으며 즉시 출입문은 다음 해까지 닫혀졌다. 짐승의 피가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자체의 무능력을 나타내 보였다. 왜냐하면 문을 계속해서 열어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성소 봉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신성과의 짤막한 면담이었으며 곧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와야만 하였다.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에게 명백해져야만 하였다.

 그리스도의 길은 새로운 길이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곁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물도록 허락받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는 들어가셔서 거기에 머물러 계셨다. 그분이 갖고 들어간 피는 죽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끝없는 생명의 능력을 가진 살아있는 인격의 피였다. 새로운 길은 살아있는 길이었다. 헌신적인 생애의 권능을 힘입어 그리스도는 들어가셨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셨다.

 이것이 신성이 거하시는 보좌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길이다. 죽은 황소나 염소의 피를 벌벌 떨면서 갖고 오는 대제사장과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실체로서 자기의 보혈—자기의 생명을 드리시는 생명의 왕을 비교하여 보라. 그 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 잡은 자를 멸하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시험과 죄를 이기시고 자기의 몸을—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예비하신 몸을—하나님께서 마땅히 거하실 곳으로 지금 드리고 계신다.

 이렇게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은 문은 “휘장,”“저의 육체”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심으로 아버지께 나아갈 길을 얻게 된 것은 육체를 통하여서이다.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육체를 주셨으며 바로 그 육체를 그리스도는 지금 조사받고자 내어 놓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본절의 주해 참조).

 하나님께서는 결코 짐승의 피를 원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순종을 원하셨다. 그는 인간들이 죄를 지어 제물을 가져오는 것보다도 당신의 뜻 행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 10:5-7, 공동 번역).

 그 분의 사역이 이루어졌을 때 그는 자신을 가납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드렸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몸, 그 안에서 시험을 정복하고 온전한 승리를 얻은 몸, 그 안에서 고난당하고 죽은 몸, 죽음에 사로 잡혀있을 수 없던 몸,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승리하여 일어난 몸,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씻겨지고 청결케 된 몸, 삼일후에 일으키신 성전된 몸, 그 안에서 일천년 이상이나 예시하여 온 모든 봉사가 성취된 몸, 그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이 결국 실현을 본 깨끗하고 거룩하고 성화되고 헌신된 몸—이 몸을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앞에 드리시고 아버지는 이것을 받으신다. 이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들어감을 얻으신다. 아버지의 정의로우심이 굳건히 서며 율법이 존귀하게 되고 공의와 자비가 서로 입을 맞추고 하늘이 찬송으로 메아리친다.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산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신다. 그는 “저의 육체”를 통하여 나아가신다.

 이 “새롭고 산 길”은 순종의 길이다. 제사와 예물의 길과 대조되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들을 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셨다. “하나님이시여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그는 말씀하신다(9절).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되 그것을 아주 온전하게 행하므로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회복한다. 이제 더 이상 죽은 짐승의 피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생명,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것을 대신한다.

 이 새로운 길은 산 길, 생명의 길, 온전한 순종의 길이다. 이 길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봉헌하셨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들어갈 수 있다. 피는 생명이라는 것과 그의 피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은 그의 생명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이란 점을 항상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 생명의 능력 안으로, 그의 보혈안으로 보혈을 의지하여 들어갈 수 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몸, 그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완성하시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점없는 모습으로 드린 몸을 통하여 수단으로 하여 들어가셨다. 우리는 그의 보혈을 의지하여 들어 간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길을 보여주셨다. 길을 걸으셨고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도록 봉헌하셨다.

 “열어 놓으신” 델리치(Delitzsch)는 “헬레니즘적인 헬라어에서 미래에 사용하기 위하여 바치거나 구별해 놓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말한다(히브리서 주석, 2권, p. 170).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새 길을 구별하셨다. 우리는 불법의 증거를 손에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다—불법의 증거는 죽은 짐승의 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보혈을 힘입어 나아갈 것이다. 이렇게 나아올 때에 우리는 담력을 가질 수 있다. 이 새롭고 산길은 제사와 예물의 길과 대조되는 순종의 길임을 다시 반복하여 말해 보자. 이것은 새 언약의 길로서 그 안에서 율법이 마음에 기록된다.
히브리서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대제사장
 (흠정역). 문자적으로 “큰 제사장.”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것은 엄격하게 제사장의 용어이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사장들로 간주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관점에서 그들은 가까이 나아가도록 격려를 받는다.
참 마음, 온전한 믿음, 뿌림을 받은 마음, 씻겨진 몸
 이것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갖추어야할 네가지 자격이다.

 “참 마음”이란 위선이나 어떠한 거짓도 없는 정직한 마음이다. 이사야는 “온전한 마음”(perfect heart)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선한 것이 전혀 부족하지 않은 마음이다(사 38: 3, 흠정역) 충성심, 진실성, 목적의 단일성이 그러한 마음을 특징짓는다.

온전한 믿음
 의심, 불신임, 불신앙, 꺼리는 태도,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 경험에 자리잡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믿는 것을 확신하여야 하며 흔들림 없이 신뢰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히 11:6).
뿌림을 받은 마음
 시내에서 언약의 피가 책과 온 백성 위에 뿌려졌다(히 9:19). 성소를 봉헌할 때에 제사장들은 피 부음을 받았다. 이것은 임무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뿌림 받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봉사에 내심, 곧 가장 깊은 곳이 헌신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씻겨진 몸
 성소를 봉헌할 때 제사장들은 모세에게 씻김을 받았다(레 8:6). 또한 그들이 매일의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그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은 몸을 씻어야만 하였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여러 번 씻었다.
히브리서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굳게 잡아
 이 서신에 여러번 등장하는 권면들 중 하나이다. 요동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
 흠정역은 “소망”“믿음”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원래는 “소망”으로서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22절은 믿음을, 23절은 소망을, 24절은 사랑을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3:6에서 성도들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6:11“각 사람의 희망을 성취하기까지 끝내 같은 열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공동 번역). 같은 장 18, 19절을 보자. “그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우리는 큰 용기를 얻어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 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공동번역). 7:19“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 나님께서는 더 좋은 희망을 주셨고 우리는 그 희망을 안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공동번역).

 이것이 기록될 당시에 로마 군대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소망과 용기의 필요성을 더욱 잘 깨달을 수 있다. 사도는 이 지구상에서의 번영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영혼의 닻이 되는 소망을 굳게 붙잡기를 원하였다. 사실상 신자들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것이 이 편지서의 가장 중요한 목적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다가오늘 날에 그들이 닻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도는 어떻게 이 소망을 얻을 수 있는지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도들은 흔들림 없이 굳게 잡아야 한다. 시련의 날이 박두하였으며 그들에게는 흔들림의 시련이 임할 것이었다. 그들이, 또한 모든 사람이 약속하신 이는 신실하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때때로 우리가 쓰라린 시련을 당할찌라도 그분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히브리서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돌아보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권면에 유의하지 않는다. 자기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나머지 타인의 필요와 복리에 관하여는 합당한 만큼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친교에 있어서는 결코 높아지고자 부적절하게 다투지 말아야 한다. 일개인의 이익은 집단 모두의 번영과 관계를 맺고 있다. 보오트 경기에서 각 사람은 자기 능력이 미치는 데 까지 노를 저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함께 노력할 때에야 승리가 가능하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6:2에서 권면하고 있다. 다시 로마서 12:10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는 권면을 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예절은 너무 자주 소홀히는 그리스도인 덕성들 중에 하나이다. 예의의 원칙을 세상이 인정하고 있으며 교양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외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내적인 진정한 예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선봉에 서야만 한다.

 그러나 서로 돌아보라는 권면이 예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갈등하는 영혼에 대한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관심, 가난한 사람의 경제적 궁핍에 대한 깊은 관심, 믿음의 초보자들이 갖고 있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태도, 떼지어 다니는 어린이들과 청년들에 대한 동정적인 걱정, 노인, 환자, 연약한 자, 소외된 자, 외로운 자, 새로 온 자에 대한 관심—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권면 가운데 포함된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본을 따라 선한 사업에 참여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므로 각 교인들은 자기의 형제를 위하여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개인적인 명예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이기심을 나타내고 다투는 일은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교회, 그러한 지역 사회는 실로 하나의 기적이 될 것이다.

선행
 고상한 일이란 뜻이다. “좋은”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가 헬라어에는 두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덧붙여서 “아름다운”, “고상한”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가 여기에 소용되었다. 우리가 서로간에 권해야할 일은 자체적으로 볼때 선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아름다움을 구비하여야 한다. 선함의 뜻과 아울러 아름다움의 뜻을 갖고 있는 이 단어는 다음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다(마 5:16; 26:10; 마 14:6; 4:8, 20; 벧전 2:12). 선함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로서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의미를 가질 뿐 아름다움과는 거의 무관한 용어가 쓰인 예들은 다음과 같다(롬 2:4; 13:3; 고후 9: 8; 엡 2:10; 골 1:10; 살후 2:17; 딤전 2:10; 5:10; 딤후 2:21; 3:17; 딛 1:16; 3:1; 히 13:21).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이 권면은 일반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기록되었을 당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수많은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다는 것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의 박해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칙령이 반포되어 집회를 금지하였고 예루살렘에서조차 많은 장애가 있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공포심과 불안한 감정을 일으켰다. 서기 66년에 세스티우스(Cestius)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히브리서를 기록하였는 바 전쟁의 구름이 감돌고 있었다. 불안과 당혹감이 민중을 감싸고 있던 때라서 그들이 서로 모인다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야말로 서로간에 격려가 필요하였다. 그들은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용기를 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이 때야말로 교회 집회의 특권을 거부할 때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불참하므로 손해를 받고 있었다. 사도는 이들에게 더 이상 그러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권면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익하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떨어져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권하여
 이것은 설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교인들간의 개인적인 관계에 적용된다. 서로 격려하고, 경험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또한 함께 기도하는 것등을 가리킨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지 삼십여년이 흘러갔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이 일들이 그들 시대에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그들은 그 날이 다가옴을 보고 있었다. 예언이 막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믿는 데는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었다. 이때는 흩어질 때가 결코 아니었다. 서로 모여야 할 때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끝에 이르러 올 멸망을 상징한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제자들이 물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그리스도는 대답 가운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시고 마찬가지로 세상 끝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씀을 그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날이 신속히 다가오고 있음을 보고 있다.
히 10:26-31 (10:26-31)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짐짓 죄를 범한즉
 고의적인 죄를 다루고 있는 이 구절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당황해한다. 그들은 이 구절들이 알고 지었거나 약간 밖에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조심스럽고, 끈덕지고, 도전적이다. 이 죄는 결코 돌아설 수 없는 전적인 번역이요, 최종적인 반역이다. 이것은 선으로 부터 악으로 돌아서서 제공받은 자비를 멸시하고, 성령에 저항하며, 고집스러운 반역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결코 희망이 없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이 구절을 통해 보건대 여기에서 고려하는 대상은 한 때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히브리서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심판을 기다리는 것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 높이는 바람에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 되게 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형벌과 죄로 인한 악한 결과를 가볍게 생각한 나머지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든다. 저자는 범죄나 그 결과를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어긴 사람이 동정의 여지없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제시하면서 이 일로 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언약의 피를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성령을 멸시한 사람들이야말로 더욱 쓰라린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주께서 보응하시고 주께서 심판하시리니 이것은 결코 가벼운 형벌이 될 수 없다. 저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강경하고 좀 어려운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은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지식을 가장 엄숙한 의무로 간주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진리를 포기한 사람들은 가장 엄혹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우리는 확신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영향을 받는 것은 자기뿐이 아니라 재능과 진리의 지식을 가진 어떤 사람이 진리로 부터 떠나가면 그의 영혼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만을 잃어버린다면 아마 최소한의 손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본에 영향을 받던 수천의 사람들과 그가 배교함으로 더 이상 그의 수고가 미칠 수 없는 수천의 사람들은 더욱 큰 손실이다. 최후의 계산 때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여 온 일들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행사하였던 영향, 우리가 준 모본, 우리의 생애가 타인들에게 미친 결과이다.
히브리서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두 세 증인
 살인처럼 심각한 범죄인 경우에는 그 사람을 유죄로 판결하기 이전에 두 세 증인이 요구되었다(신 17:6). 이것은 자비스럽고 현명한 제도였다. 이것은 정의를 수호하고 거짓 고소를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동일한 원칙이 오늘날도 유효하다.
히브리서 10: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와 오늘날 훨씬 더 큰 진리의 빛 안에서 범죄한 자를 대조시키고 있다. 모든 사람은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피로 인친 언약은 가장 신성하고 두려운 것이다. 거룩하고 가장 신성한 것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위엄 가운데 말씀하셨다. 백성들은 공포심으로 인하여 도망쳤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두려움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성결을 의미하는 바로 그 피가 분명코 보응을 하게 될 것이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이것은 단지 성령을 거역하는 것, 틀이 잡힌 저항 상태, 생활 방식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결코 희망이 없다.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심판하는 일과 시비를 가리는 문제에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대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방도를 갖고 계시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그는 모든 비방, 모든 부당한 비난, 모든 사악한 행동을 아신다. 기다리는 일이 우리에게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은 보응을 하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하나님을 온유함과 선함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들은 이상스럽게 보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유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임을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는 다른 일면이 있다는 것을 잊는다.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잊는다(출 34:7). 인간들은 악행을 저지르지만 이생에서 형벌받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범죄의 결과에서 벗어났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들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무서 운 일이다.
히 10:32-39 (10:32-39)
 사도는 그들이 이전에 어떻게 고난을 당하였으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어떻게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는지 상기하라고 권한다. 사도는 그들에게 인내하기를 요구하는데 이는 오래지 않아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실히 행하라고 격려하며 뒤로 물러가지 말기를 권면하고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전날에
 데살로니가전서 2:14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유대에 있는 초대 교회는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참았다. 본 절에서 " 싸움”은 운동 선수들이 참여하는 것과 같은 시합을 의미한다. 레슬링, 검도, 또는 인내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사도행전 4-9장, 12장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당하였던 박해가 몇 가지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10: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구경거리
 이 용어는 범죄자를 차꼬에 채워서 대중의 시선과 모욕 앞에 내 놓았던 풍속에서 온 것이다. 때로는 투기장이나 극장에서 형벌과 사형에 처하여졌다. 비난과 환란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의 고난은 이범주에 한정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문과 사형이 혼하였다. 비방은 아마 교회에 대한 중상 모략을 말할 것이다. 박해는 범죄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들에게도 임하였다.

히브리서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이것은 바울의 경우에 합당하다. 그러나 이 곳에 나타나 있는 것보다 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박해와 재산의 박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늘에서 이 땅에서 받는 슬픔보다 더욱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담대함
 박해를 당하고 이 땅의 재산을 빼앗기게 되면 자연적으로 낙망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실망 가운데 빠지지 말고,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라는 권면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큰 상을 갖고 있다.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인내가 필요함
 인내를 언제나 소극적인 덕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내의 진정한 의미는 견딤, 참을 수 있는 능력,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끝까지 견디려는 결단이다. 이것은 환난 중에 불명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의미로부터 연약함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보조(步調)를 느슨하게 하지 아니하며 계속하려는 확고한 결심, 이러한 큰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달리기 선수가 자기의 노선을 성공적으로 달린 후에 상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기독교인은 상을 받을 것이다. 이 상은 그 분의 안식에 들어가는 상이다(히 4:1; 9:15; 11:13).

히브리서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잠시 잠간 후면
 초대 교회가 잠시 후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음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종말을 예루살렘의 멸망과 연관시켰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기대하였고 주께서 오심을 고대하였다. 바울이 분명한 견해를 갖고서 그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어떤 일들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살후 2:1-5) 그의 서신들 중에는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그들이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몇 가지 분명한 것들이 있었다(2절). 교회가 갖고 있는 이러한 소망에 대하여 기이하게 여기지 말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강림이 여러 세기, 여러 천년 후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을런지 의심스럽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행 1:7).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박국 2:3의 인용이다. 70인역에서 “기다리라”고 번역한 말은 히브리서 10:32“참다”라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 명사형이 36절에서 “인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참 의미는 인내의 미덕보다도 “견딤”을 뜻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이다(마 24:13).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절은 하박국 2:4에서 인용한 것으로 바울에 의하여 로마서 1:17갈라디아서 3:11에 사용되었다. 이 구절 자체내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아름다운 진리가 담겨 있으며 이것은 개신교 종교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뒤로 물러가면
 이것은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움츠러 들면, 우물쭈물거리고 숨어 버리면, 겁내어 피하면, 이것은 항해 용어로서 폭풍이 다가옴을 보면서 돛을 걷어 버릴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강풍에 배가 전복되지 아니하도록 돛을 말아 버리는 것은 현명하게 주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이런 말을 지나치게 주의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이 글을 기록할 때에 로마 군대가 성문에 설 때가 과히 멀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들이 있었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예수께서 예언하셨다. 사도들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제자들은 다가오는 사건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예언이 성취되려 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침묵을 지키고 예수께서 예고하신 것의 진실성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를 등한히 하였을 까닭이 없다. 이 때야 말로 예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다.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면 이는 그들이 매우 태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떤 이들은 겁이 났다. 표징들은 한결같이 멸망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려와 혼란스러운 시대를 이용하는 대신에 뒤로 물러가서 돛을 걷어 버리고 움추러 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조심성이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조심성이 있었으므로 그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자기들의 기별을 전달할 주 있었는데도 그러지를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주의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나칠 수 있다. 흉용하는 물 속에 뛰어들지 않는 한 고귀한 기회를 놓쳐 버릴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30년 이상을 기다려온 바로 그 때이다. 그들의 목전에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겁을 집어먹었다. 이 때는 뒤로 물러갈 때가 결코 아니었다.

 너무 담대하기 때문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천사들까지도 밟기를 두려워하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너무 담대한 사람이 한명 있는 곳에는 너무 소심한 사람이 열 명이나 있다. 소심한 것은 너무 담대한 것보다 결코 낫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뒤로 물러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좋은 때가 종종 있다. 전진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담대하라고 말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은 담대함을 아들됨의 특징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바울 자신은 담대한 사람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에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 결과는 모든 방면에서의 전진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다. 바울이 담대하지 않았다면 그가 한 것과 같은 일을 결코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감당하며 여건들을 활용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특권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어떤 처지와 환경 가운데 두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스더가 올바른 때에 담대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나단, 다니엘, 세명의 히브리 청년들, 골리앗 앞에서의 다윗, 이들의 경우도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께서는 여건들을 진전시키며 우리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여건 가운데에 우리를 두신다. 또한 그분께서 마련하신 기회를 우리들이 활용하게 하신다.

 바울은 환난의 때가 박두하였음을 알았다—우리들의 시대와 유사하다. 그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라고 호소하였다. 동일한 호소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하여 성취될 사건들 앞에 서 있었다. 우리들은 세상 끝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더욱 크게 성취되기 전에 서있다. 지금은 항복할 때가 아니다. 뒤로 물러가거나 두려워할 때가 아니며 소심해질 때가 결코 아니다.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시련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뒤로 물러가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믿는 자들과 함께 서서 영혼을 구원하여야 한다. “믿음을 가진 자”라는 말을 통하여 화제가 바뀌어 다음 장으로 유도되는데, 다음 장은 믿음을 다루고 있다.

부가적 설명—성화
 성화

 성화는 성경 가운데서 가장 적게 이해되고 있는 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온갖 종교적인 극단들이 성화라는 이름을 빌렸으며 진실된 성경의 교리로서 가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곡해함으로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많은 손상을 당하였다. 불건전한 교리와 종교적인 극단에 희생물이 된 사람들에게 있어 더욱 그러하다.

 성화에 대한 지나친 주장과 거짓 교리 때문에 곁길로 나간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열렬한 정신의 소유자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그러한 경우가 때때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릇된 관념과 거짓 사상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건전한 가르침을 등한히 하므로 그들의 기독교인 경험은 천박하고 외양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 분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보다는 감성과 감정에 의존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오로지 한량없는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그들은 구출될 수 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믿지만 악한 자의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경건하게 보이기 때문에 회복이 더욱 힘들다.

 극단적으로 경건을 추구하는 신앙 운동으로 인하여 수많은 훼방꾼들이 신성을 모독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해독은 이에 헌신한 바로 당사자들에게 미쳤다. 이미 살핀 것처럼 그들은 진심으로 봉사하기를 원하는 영혼들을 오도하였지만 정직한 사람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에 기독교의 중대 국면인 이 점에 관하여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화야말로 기독교인 체험의 목표와 절정이며 모든 사람이 이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10장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열려진 휘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격려한다(히 10:19, 20). 책 전체를 통하여 그는 거듭거듭 독자들에게 온전함의 이상을 제시한다. 이것은 규례와 의식들이 이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복음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히 6:1; 7:19; 9:9; 10:1, 2; 12:10, 14; 13:21). 히브리서의 저자가 의도한 바는 독자들 안에 성결과 성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신학적인 논문을 쓰는 것 보다도 이 일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다.


 회심과 칭의

 성화를 논의하기에 앞서 회심과 칭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독교인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회심으로 부터 시작하여 성결로 끝나는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회심의 때에 인간은 죄로부터 의로, 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한 때 사랑하던 것들을 그는 이제 미워한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한번의 결정하는 일을 통하여 그의 전 인생 방향은 변경되어 그는 그의 주인을 따르고 모방하기 시작한다.

 회심은 일순간에, 혹은 시간이 걸려서 일어날 수 있다. 바울의 생애는 다메섹 도상에서 급변하였다. 그는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자기가 한 때 증오하던 바로 그 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심이 순간에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장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니고데모가 그러한 예이다. 어느 날 밤에 그리스도는 그와 장시간에 걸쳐 대화하셨다. 그 분은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1-13).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못박히기까지는 그에게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며 그 때에야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다(요 19:39).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뚜렷한 회심의 때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들 가운데 침례 요한과 예레미야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성화된 자들로 알려진다(눅 1:15; 렘 1:5).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때 자기가 언제 거듭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말할 수 없다할지라도 낙담할 필요는 아무에게도 없다. 바울은 자기의 회심에 관한 정확한 때를 주저없이 말할 수 있었다. 니고데모가 언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주춤거릴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던 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여 보면 회심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일어났다. 침례 요한과 예레미야는 자기들이 한번도 회심한 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경건한 사람이었다.

 위의 사실을 기록하는 이유는 성화를 주장하는 어떤 자들이 모든 사람은 자기가 회심하고 성화한 정확한 날과 시간을 알아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회심에 대한 히브리어는 “돌아옴”, “회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돌아서다”, “다시 돌다”란 의미의 다른말로 부터 파생된 것이다. 헬라어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두 말 모두 한 인간이 과거의 죗된 인생에서 돌아서서 왕국을 향하여 출발하는 급격한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회심을 단순히 마음의 변화로만 정의하는 일은 주의를 요한다. 회심이 마음의 변화라 할지라도 이것은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로서 단순히 의견을 바꾸는 것이나 어떤 신학으로부터 다른 신학으로 전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적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기독교인은 결코 이전 방식대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회심 때에 그는 다른 방향을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호, 습관, 즐거움이 변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간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진정한 회심은 온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깨닫는 일, 죄를 슬퍼하는 일, 고백,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정직하게 보상하려는 노력, 영광스러운 용서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 자신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위에 서게 되었음을 침례와 신도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공적으로 표명하는 일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 있는 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엄숙한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많은 사람들에게 회심이란 단순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하는 감정적인 결단에 지나지 않으며 생애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의미하거나 그러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시된 일곱 단계를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모두는 회심을 온전히 이루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그 단계들이 여기 제시된 순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반복해서 그것들을 강조하여 보자.


 1. 죄를 깨달음.

 죄로 부터 벗어나려면 죄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죄를 분별하기 위하여 체험적으로 죄를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죄를 피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죄의 모습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것들은 순결하게 보이기 때문에 부주의한 자를 속이기 쉽다. 개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그러한 것이다. 이 기준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에 구현되어 있다. 이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요한은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요일 3:4). 아물든 율법은 영적인 것으로 그것을 얼핏 읽을 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 율법 안에 더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외적인 행실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와 의도 까지도 다루고 있다.


 2. 죄를 슬퍼함.

 이것은 각자가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슬픔을 느끼지 않으면서 세상에 있는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선지의자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였을 때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죄를 깨닫는 일은 곧장 각 영혼에게 이르러 와야만 한다(삼하 12:7).


 3. 고백.

 고백에 이르도록 하지 않는 죄에 대한 슬픔은 진정한 슬픔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께, 그리고 인간에게 고백해야 한다. 고백의 성격은 고백의 깊이와 진실성을 가늠하도록 한다. 이것은 진실 되게, 자발적으로, 강요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런 것 들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지켜지지 아니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4. 보상.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회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국면이다. 이는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어떤 것들을 기억해내는 것을 뜻하 기 때문이다. 돈이나 다른 귀중품을 훔친 것에 대하여 고백하는 일은 영혼을 살피는 경험이다. 이렇게 훔친 것들을 관계자에게 되돌리는 일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가장 복된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 앞에서 영혼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높이는 일이다.


 5. 하나님께 대한 신앙.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히 11:6).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후에 때때로 인간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시험에 빠지는 일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죄는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셨으며 온전히 용서하실 수 없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실 수 있다(사 1:18; 요일 1:9).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6. 공중 앞에서의 시인.

 회심의 사실을 숨기거나 비밀로 간직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변화된 태도를 공중 앞에서 시인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는 귀신들렸던 자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족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셨다(막 5:19). 이것은 구원받은 영혼의 개인적인 증언이었다. 공중적인 시인은 침례, 그리고 신도들과의 연합을 포함한다(행 2: 38, 41, 47).


 7.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음.

 이것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마치시리라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회심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죄있는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요 8:11). 각 죄에 대한 미래의 온전한 승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죄를 용서받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는 각 영혼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믿음으로 인간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뿐 아니라 생애의 성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주장하여야 한다.


 성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주제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이 땅 위에서 기독교인이 누리는 최고의 인생 체험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지나간 죄들을 용서하는데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더욱 큰 능력을 보유하고 계신다. 즉 우리를 타락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다.

 458 페이지의 도표는 회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결에 이르는 성화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늘을 얻으려는 자는 이 길을 걸어야만 한다.

 성결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천천히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는 과정으로 맨 처음에는 이겨내기 어려운듯이 보일런지 모르나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한 걸음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인내하고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를 받음으로 이 과업을 완수할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또는 과정으로서 이에 의하여 인간의 애정이 정화되고 죄와, 세상으로 부터 떠나게 되어 하나님의 가장 크신 사랑에 이르기까지 고양(高揚)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또 하나의 정의는 “성령의 역사로서 이에 의하여 신자가 죄로부터 자유케 되어 생애의 성결에까지 고양되는 것”이다. 두 정의는 본질적으로 같다.

 성화와 성결은 일반적으로 동일시되고 있으며 사실상 두 말은 맞 바꾸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또는 과정으로서 이에 의하여 인간의 애정이 정화되고 죄로 부터 떠나는 것”이다. 성화가 행위, 또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이에는 결과적인 산물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한 것이 성결에 해당한다. 성결이란 성화의 결과로 된 상태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정이라기 보다는 결과이다. 이것은 완성된 성화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회심은 기독교인 경주에서 시작이다. 성화는 기독교인이 목표에 다달으기 위한 길, 또는 통로이다. 성결은 목표, 또는 길의 종착지이다. 온전함과 대등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온전하시다. 그분은 그렇게 되지 않으신다. 항상 그러하시다. 인간은 이 동일한 덕성을 위하여 분투하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했다고 주장하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이 회심할 때 그는 자신의 과거의 악한 생애가 용서되었다는 생각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그는 가책을 느껴왔던 많은 악행들을 알고 있으며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하여 기뻐한다. 그의 기쁨은 한이 없다. 그는 술 마시는 일과 다른 죗 된 습관에 노예로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유케 되었다.

 그나 다른 어떤 이들은 결코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직도 시험을 당하며 매일마다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그들은 유혹자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갈망감은 있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를 얻고자 결심하며 인내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워야만 할지라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결국 그들은 자유케 되며 사단이 그들을 떠난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며 얼마나 놀라운 날인가! 더 이상의 유혹이 없다.

 그러나 아무도 사단의 전술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떠나서 멀리 가버릴지 모르나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사단은 인간에게 이와 같이 행동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권면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고전 10:12). 자신들의 성취에 대하여 자축하 던 사람들이 바로 그 순간에 가장 큰 타락에 빠질 위험에 처한 적이 여러번 있어 왔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죄에 대하여 분투하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만큼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것보다도 더 높은 체험을 포함하고 있다. 죄가 더 이상 유혹거리가 되지 않을 만큼 죄에 대하여 증오를 갖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흡연과 음주에 대하여 승리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매 유혹을 용감하게 저항하고 한번이라도 결코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승리를 보장받고 있으며 그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를 타락으로부터 지켜주신 동일한 하나님이 악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시고 그것을 미워하도록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이르러 온다. 그는 이전에는 미워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결코 드려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 매력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자기에게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소원을 주시고 그는 온전히 승리한다. 한때 그가 사랑하던 것을 이제 그는 미워한다. 그는 그 지점에 이르러 온전히 성화된다.

 구원을 갈망하는 기독교인에게 있는 한가지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어떤 기이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하늘 나라를 위해 준비시켜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승리 주시기를 기도드려왔다. 그렇게 하고는 자기들의 할바는 다 하였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조력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어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권면한다(빌 2: 12, 13, 공동번역).

 어떤 이들은 한번에 열명의 적을 감당하여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음주라는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이 마귀 하나와 싸우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다른 대 여섯의 마귀와는 대항할 수가 없다. 그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여야만 한다. 하나의 적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을 때에 나 다른 적을 위하여 준비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므로 그에게 다음의 싸움을 위하여 능력을 다시 얻도록 잠시 동안이 나마 숨돌릴 틈을 주시는 것이 보통이다.

 기독교인들은 한꺼번에 모든 악의 군대들과 싸우려는 실수를 범할 위험이 있다. 오로지 소수의 사람만이, 만일 있다손쳐도, 이렇게 할 수 있다. 다윗 조차도 단번에 블레셋 전체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재난을 초래할 것이었다. 그는 골리앗과 맞서는 것 만으로 충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주셨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노력을 분산하는 대신에 어떤 특정죄나 약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온 세상이 회개하기를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개인적인 의무로서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영혼에게 우리 일을 제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영원들을 한 사람씩 구원하듯 악도 하나씩 공격하자.

 이렇게 성화의 길을 걸어 갈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의 문제를 만나서 성화 안에서 전진을 하며 성결이란 목적지에 가까이 나아간다. 우리가 출발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입혀주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온전케되지 못하였지만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기를 살피셔서 우리에게 기회가 있었더라면 우리가 이루었을 것으로 보아주신다.

 나무의 과일이 하루 아침에 완전케 되지 않는다. 처음 꽃 봉오리가 나타나서 나무에 과일이 익기까지 여러 주, 여러 달이 걸린다. 그러나 각 단계는 온전함을 나타낸다. 꽃 봉오리는 온전하다. 마찬가지로 첫번째의 익지 않은 과일도 그러하며 또한 익은 과일도 마찬 가지이다. 인간도 이와 같다. 어린 아기는 온전하다. 유년도, 자라 나는 젊은이도, 성인도 마찬가지로 온전하다. 그러나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온전한”(perfect)이란 단어를 두 가지 것을 내포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록 온전하기는 하나 완성되지 아니한 것, 완성된 온전함. 바울이 빌립보서 3:12에서 한 말을 유의하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공동번역). 그러나 15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12절에서는 자기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15절에서는 온전하다고 한다. 영(Young)은 12절“또는 이미 온전하게 되었다함도 아니라”로 번역하고, 15절“그러므로 온전하게 된 자들은 누구든지”로 번역한다. 로버트슨(Robertson)은 12절“온전히”란 말을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단어는 텔레이오오의 완료 수동 직설법(완성된 상태)으로서 ∙∙∙ 바울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영적인 궁극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완강 히 부인하고 있다. 분명히 그는 어떤 하나의 체험에 의하여 갑자기 절대적인 온전함에 도달한다는 생각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일에 아주 큰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그 목표는 그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요 아직 그의 앞에 있다.” 15절“온전히”에 관하여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차용된 텔레이오이는 상대적인 온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12절에서 완강하게 부인한 절대적인 온전이 아니다”(Word Pictures, Vol 4, pp. 454, 455).

 이것은 바울의 기록을 설명한다. 그는 절대적인 온전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는 상대적인 온전을 주장한다. 이 사실이 16절에 강조되어 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또는 “우리가 어미 얻은 곳에” 바울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 여정에서 동일하게 멀리 전진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온전하다. 바울이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말한 온전함에 도달 한 사람이 있을까? 만일 바울이 절대적인 온전을 주장하였더라면 우리는 실망하였을 것이다. 이에 도달한 사람치고 그렇게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또는 그 사실을 아마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시나 인간 그 자신은 그러한 주장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요한계시록 14:4, 5에서 144,000에 관한 묘사를 읽어 보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는 자들”임을 주목하라. 그들은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는 말이 발하여 질 자들 속에 있을 것이다(계 22:11). 이 사람들은 12절에 언급된 대로 주께서 오시기 전에 사는 자들로 성결함을 얻은 자들이다. 그들이 이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진실되게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결의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누가 주장하든지 그는 성결하지 못한자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죗된 인간이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는 자신의 약점을 더욱 더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한다.

 온전함을 얻는 일에 사람을 실망시키기 위하여 서가 아니라 온전함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성결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는 부르심이 명백하게 주어져 있다. 종말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선하지 않은 것 안에 당신의 백성을 갖고 계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하게 반사할 것이다.


 144, 000인

 바울이 히브리서 10:19, 20에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난외주, “안에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언급할 때 그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144,000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계 14:4). 오로지 대제사장만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허용되었다. 보통 제사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144,000인을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말할 때, 또한 그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이 그 분과 함께 지성소에 들어간다면 144,000인은 대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과 제사장들인 것처럼 이 특별한 무리들도 왕과 대제사장들로 그분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 분을 따라 간다.

 고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을 보는 일을 위임받았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막중한 의무를 졌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매우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일과는 비길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 황금패를 머리에 띠고 있었다. 그는 대속죄일에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날에 들어 가는 일도 아주 철저한 준비를 한 후에 이루어졌다. 그 큰 날이 이르기 칠일 전에 그는 자기의 집을 떠나 밤낮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며 지냈다. 대속죄일에 그는 떨면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자기의 왕복을 벗고 겸비의 옷을 입었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로부터 분리시켰던 휘장을 걷었다. 그의 안에는 개인적인 죄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존재는 도말되고 말 것이었다. 거룩한 자, 오직 그만이 죄를 짊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점이나 주름이 없어야만 하였다. 오로지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철저한 준비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 한가지 죄라도 그들에게 붙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대로 있게 될 것은 144,000인 안에서이다. 그들은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자들로 약하다 약한 자이다. 그들이 지나간 세대의 죄의 결과들을 지고 있다. 그들 안에서 하나님은 인성 가운데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분께서 죗된 인간 안에서 또한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나타내신다. 아주 오랜 동안 사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가 어디에 있나이까?”라고 하며 하나님께 빈정거려 왔다. 그 분 앞에 144,000인을 두고서 하나님은 조용히 대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가 여기에 있도다(계 14:12).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실 때에 죽은 짐승의 피를 가지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다(히 9:12).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안에서)(지)성소에 들어갈”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히 10:20).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호하고 가리기 위하여 피나 향이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생애는 순결하고 거룩하였으며 어디에서건 점이나 흠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분은 담력을 갖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으며 어떤 면에서건 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것은 당신의 생애의 공로 안에서, 또한 힘입어서 한 것이다. 바로 같은 공로를 힘입어 우리도 들어가는 것이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한 것은 그분께서 생애 하셨던 생명이다. 당신의 신성 안에서 그는 들어가는 수단으로서 가능하게 하는 피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당신의 생명의 공로로 담력을 갖고 들어가셨다.

 144, 000인은 성도의 인내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또한 예수의 믿음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하늘 문은 활짝 열려질 것이다. 그들은 생명 나무에 나아갈 권리를 가진 자로서 들어 갈 것이며 거룩한 담력을 갖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존전에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무리들 안에서 하나님은 구원하는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완성하신다. 가장 흉악한 죄인이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가장 연약한 최후의 시대에서 선택된 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아담의 타락에 대하여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아담은 온전한 능력을 갖고도 가장 작은 시험에 실패하였다. 이 사람들은 가장 연약한 인성을 갖고 무한히 큰 시험을 통과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 불멸을 위한 후보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최후의 논증이 되는데 필요한 구성원에 가담할 남녀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회심한 자, 성화된 자, 헌신한 자를 원하신다. 이들은 자기의 성취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가운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주님께서 행하셨던 믿음을 행사하고, 일을 마치는 데 필요한 인내를 갖고, 결국 그 분과 함께 하늘 도성의 문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