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된 땅 (21:1-22:5)
 단과 회개치 않은 자들이 불못에서 멸망당하는 것을 끝으로, 요한계시록 20장17장에서 시작되었던 심판 주제를 결론짓는다. 갑자기 집행 심판의 장면에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그것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묵시로 바뀐다. 본 단원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요한계시록 21장 1-8절은 새 땅에 대한 전반적인 개괄이고, 21장 9절-22장 5절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다. 회복된 땅과 그 수도를 묘사하면서,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에서 거의 전적으로 빌려온 언어를 사용한다.

새 하늘과 새 땅 (21:1-8)
 요한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과 모든 악의 창시자인 사단의 멸망을 목격하였다. 땅은 죄와 죄인들로부터 정결케 되었다. 선견자 요한의 주의는 이제 회복된 땅을 그들의 거처로 삼는 구 속받은 자들의 상급으로 이끌린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new, 2절과 5절에도 나온다).
 헬라어 카이노스(kainos)는 ‘사용하지 않은’(마 9:17의 새 가죽부대), ‘이전에 없었던 어떤 것’(계 2:17의 새 이름), ‘낡은 것과 대조되는’, 또는 ‘옛 것은 쇠하여지고 새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새 것’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1)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는 마지막의 의미가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 21장 1-5절에서 네 번 사용되었는데, 근본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한다. 새 창조는 ‘단 순한 개량’이 아니다.2) 옛 하늘과 땅은 쇠하여졌고, 그것들은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었다. 베드로는 큰 불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바로 이 어서 신천 신지가 뒤따른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 13) 카이노스는(이전의 것보다) 시간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형태나 질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한다. 시간상으로 ‘새 것’은 헬라어 네오스(neos)로 표현되었다. 때때로 두 단어는 동의어인 것처럼 보인다(마 9:17; 고전 5:7; 골 3:10 참조),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네오스 대신 카이노스를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아마 새 창조는 ‘무(無)로부터의(ex nihilo) 창조’가 아니라 기존 요소들의 재창조임을 강조한다(벧후 3:10 참조).3)
바다.
 바다라는 비유적 표현이 주는 부정적 측면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13장 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여기서 ‘새(헬, 카이노스) 예루살렘’이라는 호칭은 예루살렘을 대체한다고 암시한다. 성전이 있었던 고대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으로 불렸다(사 52:1; 단 9:24; 마 27:53). 그러나 그 도성은 죄와 불순종으로 가득 찼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가 그 안에서 흘린바 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정죄되었고 파멸되었다(마 23:37 참조), 구약에서, 이제 소망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영광스러운 거처로 탈바꿈한 새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4) 예루살렘은 세상의 수도와 중심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사 45:14). 이사야는 회복된 예루살렘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으로 묘사하였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 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께서 네 영광이 되실 것이다(사 60:19-20). 에스겔은 열두 문으로 재건되고 회복된 예루살렘을 보았다(겔 48:31-35). 그 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위치할 것이며,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다(겔 43:7).

 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과 꿈은 유대 백성 중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메시야 시대와 관련하여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 특별히 각별하였다.5) 예를 들면, 외경서인 토빗(Tobit)은 요한계시록의 언어와 유사한 언어로 예루살렘의 미래의 영광을 묘사한다.6) 바룩2서에서, 새 예루살렘은 “영광중에 새롭게 되고 완전하여져서 영원히 있을 것”으로 언급되었다.7) 신약은 아브라함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 도성에 대한 꿈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히 11:10, 16; 12:22; 13:14),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새 땅의 중심을 전 역사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꿈과 소망과 그리움의 성취로 제시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는 유대인들의 꿈에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도시’에 대한 그레코로만 세계의 희 망에도 호소하였던 것 같다.8)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망.
 헬라어 원문에는 이 단어가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처음과 나중.
 헬라어 아르케(arche)는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시작’ (시점의), ‘통치자', ‘기원’, ‘출처(source)’ 또는 ‘제일 원인’ 등을 의미할 수 있다.9) 마지막 두 의미가 여기에서 사용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의 출처시다(계 3:14의 어구 해설 참조), 헬라에 텔로스(telos)는 끝(종결 혹은 중지의 의미로), ‘결론’, ‘목표’, ‘휴식’ 또는 ‘잔류자’ 등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10) 이 곳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시점의 ‘끝’이라기보다 ‘목표’인 것 같다. 요한은 아마도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시작하여 하나님 안에서 끝난” 다는 의미로 말하였을 것이다.11) 동일한 사상이 바울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6)
(주해)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요한은 없어져 버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대신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여기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늘들과 땅이(창 1:1) 인간의 거처가 되도록 창 조하셨다. 그러나 죄가 땅을 바꾸어 버렸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의 장소가 되게 하였다. 모든 창조물은 타락과 부패에 굴복하였다(롬 8:19-22 참조), 구약에서조차, 하나님께서는 땅을 죄와 타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약속하셨다.12) 예를 들면,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고대하였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요한은 처음 땅이 대기권 하늘과 함께 이제 새 창조에 의해 대체되고 원래 상태로 복원될 것을 강조한다.

 요한이 새 땅에서 제일 먼저 본 것은 더 이상 바다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새 땅에 엄청난 양의 물은 없을지라도, 그 말은 비유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유대인의 사고 속에서, 더 이상 바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적대적이었던 세력들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다.13) 요한은 여기서 모든 두려움과 위협이 제거되었음을 확인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바다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14) 이 말은 밧모 섬에서 있었던 요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 황량한 섬에 유배된 요한은 끝없는 바다에 둘러싸여 환난을 당하였다(1:9 참조), 그에게 바다는 위협적이고 파멸적인 악의 상징이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충성스러운 증거 때문에 겪는 고통은 전 역사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이 당할 일의 전조(前兆)가 된다. 바다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과 격랑의 상태에 있는” 은유적 장소로서, 이로부터 “통상적으로 폭군들이 생겨난다.”15)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짐승은 이 은유적 바다로부터 등장한다. 그의 마지막 묵시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새 땅에서는 “더 이상 바다가 없다”는 요한의 관찰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다가 무엇이든지 간에, 새 땅에 바다가 없다고 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을 안겨주는 악이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땅에서 영원한 왕국의 중심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요한은 이사야 65장 17-19절을 기반으로, 이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중 심이라고 묘사한다. 처음 땅이 새 땅으로 대체되는 것같이, 새 예루살렘, 즉 “거룩한 성”(21:10 에도 나온다) 역시 구약의 소망의 중심이었으며 거룩한 성으로 불렸던 옛 예루살렘을 대체한다 (사 52:1; 단 9:24). 로베르토 바데나스(Roberto Badenas)가 말하듯이, 새 예루살렘은 “옛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세상에게 결코 이루어주지 못했던 것을 새 하늘과 새 땅에게 이루어준다.16)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성을 보았다는 사실은, 이 성은 팔레스타 인에서 재건된 옛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서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도성이요(요 14:1-3), 천년기 끝에 땅에서 실현된 도성임을 가리킨다(계 20:9 참조),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이 도성의 건축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다(히 11:10; 12:22 참조), 영광으로 충만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실현되었고 안전과 보호를 염원한 모든 인간의 꿈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것 같다. 이것은 이사야 52장 1절을 반향한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요한계시록 21장 9절에서, 새 예루살렘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로 언급되어 있다. 이 동일한 말은 교회와 관련하여 일찍이 사용되었다(계 19:7-8). 성도들과 예루살렘 성은 둘 다 그리스도의 신부다. 그들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둘은 아름다운 옷을 차려 입은 신부로서 정렬해 있다. 교회는 흰 세마포 옷을 입고(계 19:8), 새 예루살렘은 금과 진주와 보석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하고 있다(계 21:18-21). 이것은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사치스럽게 차려 입은 바벨론의 자기 영광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 (계 17:4).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에게 속하며, 마침내 본향에 이른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으로 채워지는 곳이다.
요한계시록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은 하나님의 바로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라고 큰 음성으로 선언하는 소리를 듣는다. 구약에서 성막 후에는,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에 대한 상징이었다(출 25:8).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곳은 성막에서였다(출 40:34-35; 레 9:23 참조).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에게서 거두어진 것은 그분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충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사람들 중에 성막을 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이제 그 완결로서 새 예루살렘은 당신의 백성과 ‘궁극적인 연합’을 이루는 하나님의 장막이다. 그 곳에서 수세기에 걸쳐 성막을 통하여 예시되었던, 그분의 영광이 영원토록 나타난다.17) (요한계시록 21장 16~27절에서 새 예루살렘은 구약 성전의 모든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제 구속받은 자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면전에서 산다. 더 이상 장벽들은 없다.18) 거기에는 더 이상 “일반적인 하늘 성소나 성전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19)

 새 땅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원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 26:11-12; 출 29:45; 렘 30:22 참조) “내 처소가 그 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7), 요한은 “백성”을 단수 형태에서 복수 형태로 바꾼다. 복수 형태는 새 땅의 인구 중에 각 시대의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포함됨을 의미한다(계 7:9).

 새 예루살렘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 수 세기 전에 에스겔은 회복된 예루살렘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겔 48:35).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연합의 상징으로서, 그 곳은 구속받은 자들이 함께 모이는 완벽한 장소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 도성에 임재하심으로 이전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그들의) 눈에서 씻기실 것이다. 일찍이 요한계시록 7장 15-17절에서의 선언이 여기서 반복된다. 그 곳에서는(계 7:15-17) 하나님께서 당신의 장막을 구속받은 자들 위에 두르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실 것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슬픔, 고통, 그리고 사망에 의한 눈물은 타락의 결과다. 이제 모든 눈물의 원인은 사라진다. 회복된 낙원에서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은 수 세기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반향한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35:10; 65:19 참조) 요한계시록은 이 약속의 궁극적 성취를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눈물의 이유들을 처리하셨다. 처음 것들이 지나갔다. 이는 그것들이 “이김의 삼킨바” 고전 15:54)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사망과 관련하여 정관사를 사용한다. 그는 사망을 인간의 원수라 하였다. 이 우주적 쟁투가 종결되고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세워짐으로써 죄와 사망은 끝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고전 15:26)이라고 바울은 강조하였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새 땅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더 이상 사망이 없음을 보증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거하셨을 때(요 1:14), 모든 고통, 눈물, 그리고 사망은 그분의 임재로 말미암아 사라졌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그들의 오라비가 죽었을 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1, 32) 이 누이들은 예수님 면전에서는 눈물도 사망도 더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새 땅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은 고통, 눈물, 사망, 또는 그 어떠한 삶의 시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시점에서 땅의 회복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으로 듣는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 즉 일찍이 이사야를 통하여 선언되었던 것을 행하실 것이라고 서원하신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19) 바울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은 신음과 해산의 고통을 하면서 부패로부터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새 땅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롬 8:21), 이와 같이 새 땅은 “우리가 지금 알고 경험하는 땅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20)

 당신의 백성이 이 말씀들을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그것들을 쓰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되기 때문이다. 그 동일한 말씀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의 혼인 잔치에 초청하는 말로 끝맺는다(계 19:9). 그 말씀은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기 위하여 반복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6절에서 한 번 더 되풀이된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충신과 진실”이시며, (19:11; 3:14 참조), 또한 그분의 약속도 그러하다. 그분은 예언의 말씀의 신빙성을 보증하는 분이시다. 그 말씀들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신 것처럼 신뢰할 만하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이런 선언과 함께 요한계시록이 시작하고 끝난다(계 1:8; 22:13).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만물은 그분과 함께 시작하고 그분 안에서 끝난다. 그분은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시요 결론이시다. 그분의 약속은 그분의 영원한 본질과 계획들과 합치한다. 그분은 역사의 과정을 지배하고 계시고, 반역적인 세상 역사를 궁극적으로 끝내실 것이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땅의 원상 회복에는 “인간의 최대의 필요가 만족되는 것”이 포함된다.21) 내가 생명수 샘물 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말은 요한계시록 22장 1절을 예감하게 한다. 여기서 요한은 수 세기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빗대어 말한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사 41:17-18).
이 갈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염원을 상징한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시 42:2) 하였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요한계시록 21장 6절의 “생명수 샘물을 마신다는 것은 바벨론의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계 17:2), 온 인류의 구원에 대한 갈증은 하나님 안에서, 오직 그분 안에서만 완전히 해갈된다(마 5:6 참조).
요한계시록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 소단원의 결론은 구약의 축복들과 저주들과 관련하여 내려진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이것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모든 것들이다. 새 예루살렘은 입성 조건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약속은 일곱 교회의 기별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진 약속들을 상기시킨다(계 2-3장). 이기는 자들은 약속된 모든 것들을 받을 것이다. 생명나무로 접근할 수 있으며 (2:7),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며(2:11), 감추인 만나, 흰 돌 및 새 이름을 받으며(2:17),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이 주어질 것이며(2:26-28), 흰 옷을 입고 예수님과 동행할 것이며,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을 받을 것이다. (3:4-5). 그들은 아무도 결코 옮기지 못할 하나님 성전의 기둥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위에 쓰일 것이며(3:12),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3:21), 이 기는 자들은 신약에서 약속된 기타의 많은 것들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약속은 다른 약속들을 초월한다.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저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들은 상속자의 모든 권리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기는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단적 삼위를 따랐던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과 유업으로부터 배제된다.22)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계 14:12). 처음에 언급된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이것은 분명 “성도들의 인내”와 대조된다. 이 두려움은 “본성적인 소심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의 결여”를 가리킨다. 그들은 시련의 날에 불편함이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충성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들의 개인적 안전과 안위를 선택한 사람들이다(마 13:21; 요 12:42-43 참조). ‘두려워하는 자들’은 특히 최후의 위기의 때와 관련이 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과 순종을 포기하고 사단에게 복종하여 그를 섬김으로 사단적 삼위 편에 설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최후의 위기 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간 자들이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의 예수의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대조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사람들은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처럼 계명을 어긴 자들이다. 이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그룹에는 술객들, 즉 사단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도 포함된다. 최후의 위기에 대비한 준비를 기술하는 여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악인들은 그들의 복술과 살인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귀신들을 섬겼다(계 9:20-21), 그들이 하늘 도성과 하나님의 가족에게서 배제되는 것은 죄로 인해 강팍해진 그들의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계 20:6) 반면, 악인들은 둘째 사망, 즉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서 그들의 최후를 맞이한다(계 20:14-15 참조).
새 예루살렘 (21:9-22:5)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서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소개되었다. 그것을 자세히 묘사하기에 앞서, 요한은 하나님의 재창조 행위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곧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눈물과 고통과 사망을 영원히 추방하신다. 또한 그는 하늘 도성에 들어간 자들과 배제된 자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이제 다가오는 하늘 도성 자체에 눈을 돌려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는 예루살렘을 묘사한다(21:10-11). 그것이 더 가까워옴에 따라, 그는 그 도성의 성곽을 묘사하고(21:12-20) 마침내 도성의 문들을 묘사한다(21:21), 그 도성의 외곽을 묘사한 후, 요한은 이제 도성의 내부로 옮겨간다(21:22-22:5).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
 구약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은 혼인으로 묘사된다. 이사야는 회복된 예루살렘을 장신구로 치장한 신부처럼 묘사한다(사 49:18). 또한 그는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61:10 참조)고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크고 높은 산.
 헬라어 오로스는 ‘산’, ‘낮은 산, mount’ 또는 ‘구릉, hill’을 의미할 수 있으며, 또한 황량한 곳을 지칭할 수도 있다(마 18:12 참조).24) 신약에서, 도시는 높은 산 (mountain) 위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낮은 산(mount) 위에 시종여일하게 있다(마 5:14; 눅 4:29; 히 12:22 참조). 문맥이 제시하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아마도 멸망된 종말적 바벨론, 즉 큰 성의 폐허와 파편 더미로 형성된 크고 높은 인공 산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오늘날 고고학자들은 이 더미를 텔 tell이라 부른다). 이런 견해는 요한의 묵시가 에스겔이 경험한 유사한 묵시와 관련된다는 사실에서 지지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여 그를 높은 산에 세우시며, 파괴된 도시의 폐허 위에 재건되고 복원된 예루살렘 도성을 보여주셨다(겔 4:1-2). 이전 도시의 폐허로 형성된 산 위에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고대 관습이었다. 그러한 인공 산들이 여호수아서에 언급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수 11:13)다. 예레미야는 “그 폐허 위에 재건될” 도시에 대하여 말한다(렘 30:18), 요한을 인도하여 광야에서 종말적 바벨론의 멸망과(계 17:3) 산 위에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는 것을 목격하게 한 이는 동일한 천사였을 것이다. 이것은 이 산이 바벨론의 멸망의 장소로서 광야에 놓여 있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바벨론 자체는 요한계시록 17장 9절에서 일곱 산[헬, 오로이 oroi]으로 언급한다).
요한계시록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빛.
 헬라어 포스테르(phöstér)는 ‘발광체’ 또는 ‘광휘’라는 뜻으로,25) 빛이 발광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26)
요한계시록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열두.
 요한계시록 7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일만 이천 스다디온.
 한 스다디온은 길이가 대략 606피트 또는 185m 정도된다.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어림잡아 1,400마일 또는 2,250km가 될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고대 바벨론 성은 “넓은 평야 위에” 서 있었고, “정방형이었으며, 그 길이가 각 방향으로 120스다디아였다.”27) 쉬슬러 피오렌자의 제안에 의하면,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기 위하여 헤로도토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역사적 바벨론을 그 모델로 삼았다. “그가[요한] 말하기를 그 도시는 ‘정사각형’으로 서 있고, 그 크기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나오는 측량 수치인 스다디아로 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관한 요한의 묵시적 묘사가 역사적 바벨론에 빗대어 말하며, 그것에 의해 하나님의 도성을 반(反) 바벨론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음을 인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28)
요한계시록 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일백사십사 규빗.
 일 규빗은 약 일 야드의 절반 또는 44.5센티미터 정도다. 일백사 십사 규빗은 어림잡아 72야드나 64미터가 될 것이다(‘일백사십사’의 상징성에 대하여는 계 7:4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이 말의 의미는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과 천사의 표준에 따른 엄청난 규모의 크기를 가진 그 성의 성곽을 가리킬 것이다.
요한계시록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각색 보석.
 그 성의 성곽을 이루고 있는 열두 보석들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흉패를 장식하고 있었던 보석들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 보석들 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출 28:17-20; 39:10-19), 문제는 열두 보석 중 여덟 개만이 요한계시록 21장 19-20절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요한이 히브리 어로 된 보석들의 이름을 직접 번역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였다.29)
요한계시록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전능하신 이.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나서.
 여기서 말하는 ‘생명수’‘생명이 있는 물’을 의미한다. 도성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라는 비유적 표현은 여러 구약 성경절에서 끌어온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은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들 중 하나를 생각게 한다. 이 강은 동산에 물을 대주고 강가에 있는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게 하였다(창 2:9-10), 시편 기자는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라고 하였다. 에스겔은 묵시중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한 강을 보았는데, 그 강은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을 잉태하였다.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 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 47:12) 스가랴는 회복된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슥 14:8).

 어떤 이들은 생명의 강을 성령과 동일시하였다.30)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장래 회복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평행구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사 44: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 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8-39) 성령에 대한 인유는, 오라는 성령의 부르심에 이어 각자 와서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라는 초청이 뒤따르는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서도 확인된다.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하나님께서 새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토록 제공하시는 풍성한 생명을 상징한다. 요한은 이 생명강을 고대 바벨론에서 흘러나오는 유프라테스 강과 대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강변에서 하나님의 유랑민들은 그 원수들이 그들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동안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있었다(시 137:1-6).
보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늘 보좌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4장 2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길 가운데로.
 헬라어 원문은 구두점 없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곳의 본문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구두점을 찍을 수 있다. 1절“어린양” 다음에 마침표를 찍고 끝낼 수 있다. 이어서 “길 가운데로 그리고 ...”로 시작하는 새 문장이 뒤따른다(KJV, UBS, NE 헬라어 신약 성경은 이 독법을 따른다). 또한 “길 가운데로”1절 문장의 끝일 수 있다(NASB, RSV, TEV, NEB, NIV, 그리고 NRSV는 이 독법을 따른다). 만일 전자를 바른 독법으로 취한다면, 강은 거리와 나란히 흘러가고 생명나무는 그 중간에 있게 된다. 데이비드 아우니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둘째 독법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요한은 종종 새로운 문장을 그리고 (헬, 카이)로 시작하거나 때로는 전치사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4:1; 7:9; 18:1; 19:1에 나오는 “이 일 후에”등과 같이).31) 이 경우, 강은 그 도성의 넓은 거리를 관통하여 흘러내려 그 거민들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강 좌우의 “각종 과실수”를 언급하는 에스겔 47장 12절에 대한 직접적인 인유다. 나무 잎사귀들은 치료를 위한 것이다. 에스겔도 그 잎사귀들은 시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에스겔이 언급한 ‘치료’는, 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구약의 사상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 거한다는 것은 평화와 안정의 이상적인 기간을 가리킨다. 솔로몬의 치세하에서 백성이 누렸던 평화와 안정이 바로 이와 동일하였다(왕상 4:24-2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유수로 인하여 그러한 축복을 빼앗겼다. 예레미야는 배도의 땅에서 나무가 시드는 것을 말하였다(렘 8:13), 후기 선지자들은 장차 있을 메시야 시대의 평화와 안정과 관련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미가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미 4:4)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스가랴는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 예언하였다(슥 3:10). 앞의 말씀 들에 비추어, 에스겔이 말하는 “치료”는 아마도 유랑으로 인한 정서적 상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백성의 상처는 그들의 회복된 고국의 푸른 잎사귀 아래에서 치료되고 있었다. 요한계시록 22장 2절“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는 구절은 위에서 언급한 구약의 개념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나무의 가로수 길들을 언급하는 반면, 요한은 오직 하나 곧 생명나무만을 언급하는데, 이는 요한이 에스겔의 ‘치료하는 잎사귀들’‘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해)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계시록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일찍이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21:2 참조). 이제 마지막 일곱 재앙을 집행한 일곱 천사들 중 하나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주기 위하여 요한을 불러낸다. 일찍이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계 17:1) 보여주기 위하여 요한을 불러낸 천사가 사용했던 같은 어휘를 이 천사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동일한 하 늘 존재임을 암시한다.32) 이번에 그 천사는 영광으로 가득한 어린양의 아내를 요한에게 보여주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바벨론이 심판받을 때, 요한은 성령 안에서 광야로 이끌려갔다(계 17:3). 이제 그는 다시 성령 안에서 크고 높은 산으로 끌려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게 되었다. 두 묵시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요한은 두 도시 사이에, 전통적인 원수들 사이에, 그리고 그들의 운명 사이에 있는 대조를 그린다. 그 위에 새 예루살렘이 자리잡고 있는 큰 산은 종말적 음녀 바벨론, 곧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심판을 받았던 광야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 큰 산은 멸망된 바벨론, 즉 큰 성의 폐허와 더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요한이 상징적 언어로 전달하고자 애쓰는 기별은 새 예루살렘이 “오만하고 사악하고 타락한 바벨론”의 폐허 위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순결하고 찬란하게” 우뚝 솟아 있다는 것이다.33)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서, 하늘의 음성은 거룩한 성과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장막”을 동일시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계 21:22),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로 인해, 그 도성은 바로 성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구약 성전에 빗대어 묘사한다. 전체적인 묘사는 에스겔 40-48장의 회복된 성전에 기초되어 있다. 일찍이 에스겔이 본 것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 비록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로 인하여 한 성(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성전의 모든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요한은 그 도성에서 발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 먼저 본다. 하나님 영광의 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구약 성소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출 40:43-35; 레 9:23; 겔 43:1-5 참조),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은 새 예루살렘을 두른다(계 21:2). 이 영광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를 의미한다. 그 도성에서 발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인간의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요한에게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게 보였다(계 4:3 참조),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찬란한 영광은 하늘의 천체보다 더 밝아 그 빛들은 필요 없게 된다(계 21:23; 22:5 참조).
요한계시록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요한계시록 21: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요한계시록 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예루살렘 도성에 관한 추가적 묘사는 요한이 잘 알고 있었던 고대 도시들의 양식을 따랐다. 고대 도시들은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문들이 있는 성곽들로 둘려 있었다. 새 예루살렘에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다. 에스겔에 나오는 회복된 성전은 높은 담으로 둘려 있다(겔 40:5). 이것은 새 예루살렘 성전의 특징들을 더욱 확증해 준다. 새 예루살렘 주변의 성곽은 방어를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한 군대들은 멸망되었기 때문이다. 이 곳의 성곽은 안전과 안정에 대한 상징으로 서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회복된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새 땅의 수도는 그 성곽에 열두 문이 있다. 성곽의 각 면에는 세 개의 문들 곧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그리고 서편에 세 문이 있다. 이 곳의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의 묵시에 나오는 회복된 열두 문의 예루살렘과 그 방식에서 동일한 것 같다(겔 48:31-35). 여기서 말하는 열두 문은 세계적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다(눅 13:29), 예수님의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곳은 바로 이 곳이다. 새 예루살렘은 우주적인 도성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면전에 전혀 제한을 받지 않고 나아간다. 도성의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선지자 에스겔의 묵시 위에 구축되어 있다(겔 48:31-35), 더욱이 그 도성의 성곽은 열두 기초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열두 사도는 교회를 대표한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전반적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엡 2:2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나란히 놓는 것은, 구속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의 숫자 속에 이미 표시되어 있다(계 4:4). 이 곳의 사람들은 인침을 받은 144,000의 상징적 수에서 대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교회에서 나온 자들을 대표한다(계 7:4-8).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열두 문과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열두 기초라는 상징을 통하여,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구약과 신약 전체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의 거처로 묘사한다.

 문의 망루에는 열두 천사가 파수꾼으로 서 있다. 이렇게 묘사하므로,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새 예루살렘은 잘 보호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깨끗지 못한 자나 가증한 자는 그리로 들 어가지 못할 것이다(계 21:27 참조).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6-7)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인 도성 안전한 장소에 대하여 고대인들이 가졌던 꿈의 성취다. G. K. 빌이 언급하 였듯이, “각 시대를 통하여 구속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불가침의 새 땅에서 더 할 나위 없는 안전을 경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속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그 곳에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이다.”34)
요한계시록 21: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요한계시록 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요한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기 위하여 그 손에 금 갈대를 들고 있는 천사를 목격한다. 이것은 에스겔의 묵시와 비슷하다. 에스겔서에는 한 사람이 성전을 척량하기 위하여 갈대를 가지고 있다(겔 40-42장),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을 생각나게 한다. 요한은 성전을 척량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서 당신의 백성 중에 거하시는 성전임을 확증한다. 다른 한 편으로, 여기서 척량 행위와 “척량들이 언급된 것은 틀림없이 하늘 본향의 적합성과 풍성함을 보증하기 위함이다.”35)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 것처럼 보였다. 각 면은 그 길이가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척량은 고대 바벨론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묘사를 반영한다. 이 고대역사가에 의하면, 바벨론은 정사각형으로 건축되어 있었다.36) 그러나 척량의 결과 새 예루살렘의 실제 모양은 완벽한 정육면체이다. 그것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 정육면체는 열두 개의 모서리로 구성되어 있다. 새 예루살렘의 각 모서리는 길이가 일만 이천 스다디온으로서 도성 전체의 모서리는 총 144,000스다디온이 된다.37) 144,000은 하나님의 전체 백성의 수로(계 7:4), 이는 그 도성의 보편성(세계적임)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은 구약과 신약의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이상적인 집이다(계 7:4의 어구 해설 참조).

 이 거대한 도성의 모양이 주는 가장 중요한 상징성은, 구약 성전의 지성소가 그러했듯이, 그 도성이 완전한 입방체라는 사실에 있다(왕상 6:20).38) 진실로 새 예루살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거처로서 새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대 성전에서, 대제 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는 특권은 ... 이제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허락된다.”(계 22:3-4 참조)39)

 또한 도성의 성곽에 대한 척량은 숫자적 상징성을 드러낸다. 본문은 144규빗이 성곽의 높이인지 아니면 두께인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요한은 이미 그 도성의 성곽이 “크고 높다”고 하였다(12절), 더욱이 그는 그 도성의 높이가 12,000스다디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144규빗을 성곽의 두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확실히 새 예루살렘은 원수들로부터 그 도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곽이 필요 없다. 이 성곽의 상징적 두께는 새 예루살렘의 안전을 단언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그 도성의 척량을 기술하는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람천사척량 표준에 의하면,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새 땅의 수도는 거주하기에 안전하고 방어가 잘된 이상적인 장소라는 것을 보증한다.
요한계시록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요한계시록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요한계시록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요한계시록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이제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서 언급되었던 새 예루살렘의 광휘(光輝)를 다룬다. 심지어 벽옥으로 된 그 도성의 성벽도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다. 그 도성의 건물들은 정금으로 만들어졌는데, 맑은 유리 같았다. 이것은 헤롯의 성전에 대한 요세푸스 (Josephus)의 묘사를 반영한다. “성전 앞 부분의 외면(外面)은 온통 엄청난 양의 금판들로 씌워져 있어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할 만하였다. 그 벽은 이제 막 떠오른 태양 빛을 받아 활활 타는 듯한 광채를 반사하였다. 그 장면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마치 태양 자체의 광선을 본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려야만 하였다.”40) 더욱이 요한은 그 성의 성곽을 지탱하는 기초석들각종 보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계 21:14). 이 보석들은 그 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구약의 대제사장의 흉패의 열두 보석과 상응한다(출 28:17-20). 또한 그 도성은 열두 진주로 된 열두 문이 있다. 각 문은 하나의 거대한 진주다.

 마지막으로, 그 도성의 거리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 솔로몬 성전의 바닥도 금으로 입혀 있었다(왕상 6:30), 이 거리는 두 증인의 시체가 대중의 멸시와 모독을 받으면서 널려 있었던 ‘큰 성의 길’과 분명 대조된다. 이 두 증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증거로 인해 압제받고 핍박받았던 그분의 백성을 상징한다(계 11:8-10). 하늘 도성에서 압제받았던 하나님의 백성은 옹호되었다. 그들은 이제 새 예루살렘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밟았던 압제와 고통의 거리는 승리와 영광의 거리로 대체되었다.41)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런 묘사들은 예루살렘의 장래 회복을 말한 이사야의 예언을 반사한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 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사 54:11-12). 유사한 언어가 예루살렘의 장래 영광을 기술한 경외서 토빗(Tobit)에서 사용되었다.

이는 예루살렘이 청옥과 녹옥으로,
그 성곽은 보석으로,
그 망루와 성가퀴(battlement, 성위에 낮게 쌓는 담)는
정금으로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녹주석과 홍옥,
그리고 오빌의 보석으로 단장될 것이다.
그 모든 길들이 “할렐루야 하고 소리칠 것이며,
찬양하여 이르기를,
“너를 영원토록 높이시는 하나님은 복 되시도다.” 할 것이라.42)
회복된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새 예루살렘은 요한 당대에 살았던 유대 백성의 모든 꿈을 성취시킨다. 그 도성은 인간의 필설로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새 예루살렘의 단장에 대한 묘사를 마감하면서, 요한은 그가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요한계시록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하나님의 영광을 대표하는 모든 보석들과 건물들과 금으로 된 거리들은 일광과 월광이 필요 없다. 새 예루살렘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이 묵시는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한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께서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 60:19-20).
더욱이 요한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올 것이라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만국과 왕들은 아마도 전 세계의 구속받은 자들일 것이다(계 1:6; 5:9; 7:9에서 언급된 자들).43) 고대 이스라엘에 관하여 이사야가 했던 예언이 여기에서 성취되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3)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나아오는 열방과 열왕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말한다(사 2:2-4; 56:6-7; 렘 3:17; 슥 8:21-23), 외경서 토빗은 유대 백성이 가졌던 동일한 소망을 이렇게 표현한다. “많은 나라들이 먼 곳에서 그 손에 선물들, 곧 하늘의 왕을 위 한 선물들을 들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올 것이다.”44) 새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구약이 가졌던 모든 꿈의 성취이다.

 도성의 문들은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이것은 또 하나의 이사야 예언 인유이다.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사 60:11) 도성의 문들은 닫을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 도성에 원수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열린 문들은 모든 백성이 직접 그리고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면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45) 다시 한번, 요한은 이사야 60장을 들어 열방들과 열왕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그리로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문들이 계속적으로 열려 있어서 “사람들 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오고 ...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 게”하고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사 60:11b-13).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이 시점에 새 예루살렘에서 배제되는 또 다른 목록이 소개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부정(不淨)과 불충(不忠)은 고대 예루살렘의 특징이었다. 이사야는 부정과 불충은 새 예루살렘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사 52:1) 깨끗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구약의 성전에 들어가서는 아니 되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부정하거나 가증한 사람 또는 물건은 그 곳에 있을 자리가 없다.

 여기 언급된 부정한 자와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바벨론의 “금잔”으로부터 마신 자들이다(계 17:4). 즉, 그들은 마지막 때 기만에 굴복한 자들이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새 예루살렘에 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사단적 삼위의 편에 가담하여 짐승을 섬긴 자들은 그 곳에 있지 못할 것이다(계 13:8; 17:8 참조), 그들은 모두 불못에서 그들의 최후를 맞았다(계 20:15), 새 예루살렘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하고 충성하는 것이다(계 21:7 참조),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거의 인유한 것이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 다 칭함을 얻으리니.”(사 4:3)
요한계시록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이제 천사는 요한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준다. 이 강은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른다. 요한은 구약의 여러 구절들로부터 이 광경을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그것을 비옥하게 만든 한 강을 보여준다(창 2:10), 성전에서 발원하여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이 강에 대한 더 강력한 인유는 에스겔의 묵시에서 나오는 것 같다(겔 47:1-12), 이것은 또한 회복된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와 땅을 비옥하게 한 생명수의 강을 다룬 구약의 다른 구절들을 상기시킨다(욜 3:18: 슥 14:8 참조), 요한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시되었던 모든 것들이 성취된 것을 본다.46)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의 강과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바벨론이 이 곳에서 대조를 이룬다(계 17:1, 15 참조). 유프라테스 강은 고대 바벨론에 없어서는 안 되었다. 그 강은 도시 전체를 관통하여 흘렀다. 시편 137편 1-6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앉아 있었던 곳은 바로 바벨론의 이 유프라테스 강가였다. 이제 바벨론은 과거지사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유랑은 끝났다. 구속받은 자들이 마침내 그들의 안식을 찾을 곳은 새 예루살렘을 관통하여 흘러나가는 생명강의 생명 시냇가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좌가 처음으로 ‘어린양의 보좌’로 언급되었음은 특히 중요하다. 지금까지 보좌는 아버지 하나님의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분의 대권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21절은 그리스도께서 공동 통치자로서 아버지의 보좌에 좌정하셨음을 명백히 하였다. 악이 마침내 멸하여지고 천년기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보좌를 취하셨다고 볼 수 없다. 이제 보좌는 아버지와 어린양 두 분의 통치 자리로 소개되고 있다(계 22:1, 3; 7:17 참조),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분명히 하나의 나무가 강 좌우에 있다. 이것은 그 동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변에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 관한 인유다(창 2:9). 에덴에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다는 것은 ‘영생’을 의미하였다(창 3:22). 생명나무에 접근하여 그 실과를 먹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였다(창 3:23-24). 새 예루살렘의 생명나무는 사망과 고통이 없는 영생을 상징한다. 새 땅-회복된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는 더 이상 금지되지 않는다. 생명나무는 새 예루살렘의 중앙에 있으며, 구속받은 모든 자들이 그 나무에 가까이 간다. 한 번 더 인간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아담이 향유하였던 영생의 선물을 누릴 것이다. 아담을 통해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되었다.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을 공급하는 나무의 실과는 구속받은 자들이 새 땅에서 영원토록 얻을 수 있다. 요한은 이런 묘사를 에스겔의 묵시에서 이끌어온다.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 47:12) 그러나 에스겔과 달리, 요한은 그 잎들이 만국(혹은 이방인들)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다고 명시한다. 어떤 주석가들의 주장대로, 생명나무 잎사귀에 질병을 예방하는 치료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7) 악이 박멸됨으로 질병과 사망은 회복된 땅에서 영원히 제거되었다. ‘만국의 소성’이라는 표현은 모든 민족적, 언어적 장벽들과 구분이 제거되었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이나 기타의 다른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은 애굽인, 앗수르 인, 바벨론 인, 로마 인, 그리고 유대인 등을 포함하여 만국과, 족속들과 방언들의 백성이 거주하는 곳이다(계 5:9; 7:9).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나라들 사이의 불화를 치유한다. 만국은 더 이상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서 한 가족이 된다(21:24-26 참조), 수세기 전의 미가의 예견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미 4:3-4; 사 2:4 참조), 그곳 생명강가에서 구속받은 자는 생명나무 아래로 “그의 이웃[한글 성경에는 없음~역자 주]을 초대할 것이다(슥 3:10). 생명나무의 잎 사귀들이 주는 치료의 힘은 오랜 세월 인간을 찢고 분리시켰던 모든 상처-인종적, 윤리적, 종족적, 또는 언어적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요한계시록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구두점 때문에 문제가 되는 구절이다. 다시 저주가 없겠고. 앞 문장의 결론 역할을 하는 본 구절은 한층 의미를 더해준다. 죄로 인하여 땅에 저주가 임하였다(창 3:17-19; 5:29). 저주의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에덴동산과 생명나무로부터 추방되는 것이었다(창 3:22-24). 죄의 근절로 저주가 제거되었다. 구속받은 자들은 회복된 에덴으로 돌아와 생명나무에 마 음대로 접근한다. 스가랴의 예언은 마침내 성취될 것이다.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슥 14:11)

 새 땅의 중심 물체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갖는 중요성은 요한이 로마제국의 보좌에 의하여 주도된 핍박 아래 고통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의 권위와 권세의 상징인 보좌는 종종 사단에 의해 땅을 파멸시키고 타락시키는데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권세의 상징인 새 예루살렘의 보좌는 사단의 권세가 완전히 굴복되었고,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들 중에 영원히 함께 계심을 의미한다(겔 43:7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심판이 이루어지는” 그 보좌는 이제 “영생과 행복의 근원”이 된다.48)

 구속받은 자들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그분을 섬긴다.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들은 모세조차도 거절되었던 특권을 누린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그러나 “그의 계신 그대로 볼”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볼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을 것이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들이 또한 이 곳에서 성취된다. 3:12 참조). 이것은 일찍이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서 언급되었던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인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의 반복이다. 구속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지닌 표를 받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계 15:2), 하나님의 이름을 간직한 상급을 받는다. 성경에서 이름은 품성을 대표한다. 구속받은 자들은 영원토록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구속받은 자들의 거처에 대한 묘사를 끝맺으면서, 요한은 그가 일전에 말했던 것을 반복한다.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로 인한 영광의 빛은 천체의 빛을 무용지물로 전락시켜 버린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비 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1:23, 25 참조),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는 가운데서, 구속받은 자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말은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4:9-10; 10:6; 11:15; 15:7).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구속받은 자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었다(계 1:6; 5:10), 바울은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고 하였다. 이제 우주의 대 드라마 끝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속에 거하면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한다.
21:1-22:5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새 땅을 그 수도와 함께 묘사하면서 우주의 대 드라마의 전모를 결론 짓는다. 악은 영원히 사라졌고 평화와 기쁨과 안전이 태초와 같이 땅에서 회복되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의 거처로서 한 동산을 주신 것같이, 그분께서는 구속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거처로서 새 땅에서 한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을 주신다. 새 예루살렘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려왔던 도성이다. 아브라함 자신도 그 도성을 고대하였다(히 11:16),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은 이 세상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가졌던 모든 꿈과 소망의 성취로 묘사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런 질문이 제기된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에서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문자적인 도성인가, 아니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고상한 실체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실제 사람이 사는 실제 장소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가 상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은 특기할 만하다. “그림으로 된 예언에서 그림과 실체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해석하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49) 비록 미래의 실체일지라도,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었던 고대의 도시들에 빗대어 묘사되었다. 바데나스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킨다. “요한 당시에 도시는 문명으로 인간적, 사회적 통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도시에 속하였다. 고대인들은 백성과 그들의 수도를 동일시하였다. 왕들의 영광은 그들이 세웠거나 정복한 도시들이었다.... 하나님의 도성은 아마도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을 대표하는 최상의 상징일 것이다.”50)

 그러나 새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문자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어디에 정확한 구분선을 그어야 할 지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 도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그림 같은 언어는 여러 출처에서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 배경을 조금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를 이해함은 불가능하다.

 먼저, 새 예루살렘은 실낙원이 된 에덴동산을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창 2-3장 참조), 에덴 동산 바로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고, 그 곳에 강이 있었던 것같이(창 2:9-10 참조), 새 예루살렘에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있고, 그 도성의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다(계 22:1).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한 것같이(창 1:27), 새 예루살렘에서도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한다(계 22:4). 창세기에 최초의 저주가 나타나는데, 저주의 가장 고통스런 장면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생명나무 접근 금지였다(창 3:22-24), 새 예루살렘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다(계 22:3). 구속받은 자들은 회복된 낙원으로 되돌아왔으며 방해를 받지 않고 생명나무에 접근한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새 땅에 관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질문에 답한다. 새 예루살렘은 잃어버린 낙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한다.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것이다.51) 하나님의 백성, “그토록 오랜 세월 순례자들이었고 방랑자들이었던 그들”이 거할 곳은 생명수 강가와 생명나무 아래다.52)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 가운데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계 2-3장)의 모든 궁극적인 성취를 그 동산-도시(garden-city)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 묘사는 에덴동산 주제와 선지자 에스겔이 묵시(겔 40-48장)에서 자세히 묘사한 회복된 지상 성소를 결합시킴으로 계속된다. 에스겔과 요한은 높은 산으로 데려감을 받아 그 곳에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았다(겔 40:2; 계 21:9-10), 에스겔의 묵시에서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던 것같이,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에 가득하다. 두 묵시들에서, 그 도성은 열두 문을 가진 높은 성곽으로 되어 있었다. 그 도성의 각 편에는 세 개의 문들이 있었고, 그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겔 48:31-35; 계 21:12-13). 에스겔과 요한은 그 도성과 문들, 그리고 성곽을 측량하기 위하여 갈대를 가진 하늘의 존재를 보았다(겔 40:3-42:20), 두 사람은 그 도성이 정방형으로 위치해 있는 것을 보았다(겔 48:20; 계 21:16), 두 묵시에서, 그 도성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중에 거하신다(겔 43:7; 계 21:3, 5; 22:1), 마지막으로, 두 본문은 장차 그 도성의 거주민이 될 사람들의 자격에 대하여 서술한다(겔 44:6-14; 계 21:8, 27), 바데나스의 언급처럼, 이 묘사들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예루살렘의 회복이 하늘 도성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53)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이상적인 도시에 대한 선지자들의 꿈과 소망, 즉 구약의 예루살렘으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었던 꿈의 성취로 제시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여러 구절에서 요한계시록 17-18장의 바벨론에 대한 묘사와 평행을 이룬다. 두 묘사 사이의 평행구와 대조들이 ‘개관: 요한계시록 12:1-22:5에 나와 있다.54) 두 묵시는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동일한 천사에 의해 소개되었다(17:1; 21:9), 두 경우에, 요한이 그 광경을 목격하도록 성령께서 그를 데려가셨다(17:3; 21:10), 바벨론은 큰 음녀로(17:1),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로 언급되었다 (21:9), 두 도시는 보석으로 단장하였다(17:4; 21:11), 음녀 바벨론은 가증한 잔을 주고(17:4; 18:3), 새 예루살렘은 생명수를 제공한다(22:1). 바벨론은 마귀들의 처소며(18:2),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처다(21:3). 바벨론은 부정한 것들과 가증한 것, 그리고 죄로 가득 찬 곳인 반면(18:2, 4-5), 새 예루살렘에서는 부정한 것이나 가증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21:27). 나라들과 바벨론의 왕들은(17:15) 그들의 권세와 권위를 짐승에게 준다(17:12-13). 마찬가지로 나라들과 왕들은 그들의 영광을 새 예루살렘으로 가져온다(21:24), 새 예루살렘에는 그 중앙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이 있는 반면(22:1), 바벨론은 ‘많은 물’, 즉 유프라테스 강(17:1) 위에 앉아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바벨론의 특징인 반면, 그분에 대한 충성은 새 예루살렘의 특징이다.

 그러나 두 도시의 거주민들은 예리하게 대조된다. 새 예루살렘에서 제외된 자들은 바벨론의 거주민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말로써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벨론의 시민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반면(17:8), 새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21:27), 살인자, 음행자, 복술자들은 하늘 도성에서 배제된 반면 (21:8), 바벨론은 살인자(17:6; 18:24), 음행자(17:2; 18:3, 9), 복술자(18:23)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반면, 바벨론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원수들을 상징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벨론은 세상의 거짓 소망과 꿈을 대표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바벨론은 죄인들이 바라는 번영, 돈, 권력, 성공, 감각적인 만족 등을 제공한다. 요한계시록 18장의 일련의 애곡이 말하듯이,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간의 모든 기만, 희망, 그리고 꿈이 파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한 편으로, 새 예루살렘은 분쇄된 꿈과 헛된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꿈꾸고 고대하는 최고의 것을 제공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늘 도성이다. 그 도성은 전 역사에 걸쳐 살았던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이 모이는 곳이다. 그 문들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어 모든 인종적, 종족적, 또는 언어적 집단을 받아들인다. 온갖 장벽들은 제거된다. 그 도성에 기꺼이 들어가기 원하여 조건들을 이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환영받는다.

 무엇보다도, 새 예루살렘은 충성된 자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성전으로서의 그 기능을 한다. 그 도성은, 구약 성소의 지성소처럼(왕상 6:20), 완전한 입방체의 모양으로 제시되었다. 그 곳은 오랜 세월 고대하였던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간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 성전 봉사에서 오직 제사장들만이 하나님의 면전에 가까이할 수 있었고, 일반 백성은 중보자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필요치 않으니, 이는 그 도성이 성전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곳에 거하실 것이며, 사람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그분의 면전으로 나갈 것이다. 이전의 지상 성소에서 대제사장에게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는 특권이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허락되었다(계 22:3-4 참조), 여기에 더하여, 고대 성전에서 속된 것이나 가증한 것은 자리가 없었던 것같이, “부정한 자는”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외에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계 21:27).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새 예루살렘을 실제적인 장소로 제시한다. 그 곳은 구속받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도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러한 묘사는 다른 자료들에서 끌어왔다. 새 땅의 수도에 대한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의 묘사는 암시적이다. 도성 그 자체와 그 곳의 생활은 인간의 어떤 상상도 초월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하늘의 실체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모든 상상적 언어는 부적절하며 충분하지 않다.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금과 보석으로 묘사할 때, 실제로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금이 아니다. 금과 보석은 구속받은 자들이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 화려함에 대한 “희미한 예시일 뿐이다.”“이 세상의 부는 장차올 부와 비교할 수 없다.”55)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 도성-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들과 꿈이 스며 있는 도성에 대한 모든 인간의 오랜 염원과 꿈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선지자들이 예언하 였고 고대하였던 것이 마침내 실현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인 도성이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불확실성을 추방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에 서의 삶은 번영에 대한 인간의 헛된 소망들과 유토피아적 꿈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답변이다. 그들의 번영은 자신들의 전략과 노력에 기초해 있다. 새 예루살렘은 영원한 생명과 무제 한의 행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되라고 초청하신다(계 22:17).

주(註) ——————
1. Bauer, 496-497. 
2. Badenas, 250. 
3.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89. 
4. Johnson, 593. 
5. Testament of Dan 5:12 (Charlesworth, 1:810); 1 Enoch 90:28–29 (Charlesworth, 1:71); 4 Ezra 7:26; 10:25-55 (Charlesworth, 1:537, 547-548); The Silbprilline Oracles 5:420-427 (Charlesworth, 1:403) 참조. 
6. Tobit 13:16-18(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74). 
7. 2 Baruch 32:2-4(Charlesworth, 1:631). 
8. Fiorenza, Revelation 113; 이상적인 도시에 대한 고대 그레코로만의 꿈에 대하여는 Aune, Revelation 17-22, 1191-1194를 참조하라. 
9. Bauer, 137-138. 
10. 상동, 998-999. 
11.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205. 
12. Johnson, 592. 
13.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99. 
14.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89. 
15. Eerdman, 105; 155도 참조. 
16. Badenas, 252. 
17.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 138. 
18. Badenas, 260-261. 19. Maxwell, 534. 
20. Fiorenza, The Apocalypse, 57. 
21. Ladd, 278. 
22. Mounce, 374. 
23. 상게서, 375. 
24. Bauer, 724-725. 
25. 상게서, 1073. 
26. Swete, 284. 
27. Herodotus History 1.178 (Rawlinson, 40). 
28. Fiorenza, Revelation, 111. 
29. Caird, 274-275; Sweet, 306 참조. 
30. Swete, 298; Beale, 1104-1105 참조.
31. Aune, Revelation 17-22, 1139. 
32. Morris, 241, 
33. Badenas, 255. 
34. Beale, 1079. 
35.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92. 
36. Herodotus History 1.178-179 (Rawlinson, 40) 참조. 
37. Swete, 305; Beale, 1076. 38. Fiorenza, Revelation, 112. 
39. Beale, 1081; Mounce, 383. 
40. Josephus The Wars of the Jews, 5,5.6(Whiston, 707–708). 
41. Robert W. Wall, Revelation, New International Bible Commentary (Peabody, MA: Hendrickson, 1991), 254-255, 
42. Tobit 13:16-18(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74). 
43. Beale, 1097-1098 참조. 
44. Tobit 13:11(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74). 
45, Ladd, 285. 
46. Morris, 248. 
47, Maxwell, 534; Mounce, 387; Beale, 1107-1108, Ladd(p. 288)는 이런 해석과 씨름한다. 이 말의 상징적 이해에 대하여는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222와 Johnson, 599를 참조하라. 
48. Fiorenza, Revelation, 113. 
49.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92. 
50, Badenas, 251, 51Hughes, 231. 
52. White, The Great Controversy, 675. 
53. Badenas, 252. 
54. Aune, Revelation 17-22, 1144-1145에 나오는 평행 목록도 참조하라. 
55. Ezell, 1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