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새 땅을 그 수도와 함께 묘사하면서 우주의 대 드라마의 전모를 결론 짓는다. 악은 영원히 사라졌고 평화와 기쁨과 안전이 태초와 같이 땅에서 회복되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의 거처로서 한 동산을 주신 것같이, 그분께서는 구속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거처로서 새 땅에서 한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을 주신다. 새 예루살렘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려왔던 도성이다. 아브라함 자신도 그 도성을 고대하였다(
히 11:16),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은 이 세상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가졌던 모든 꿈과 소망의 성취로 묘사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런 질문이 제기된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에서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문자적인 도성인가, 아니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고상한 실체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실제 사람이 사는 실제 장소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가 상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은 특기할 만하다.
“그림으로 된 예언에서 그림과 실체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해석하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49) 비록 미래의 실체일지라도,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었던 고대의 도시들에 빗대어 묘사되었다. 바데나스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킨다.
“요한 당시에 도시는 문명으로 인간적, 사회적 통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도시에 속하였다. 고대인들은 백성과 그들의 수도를 동일시하였다. 왕들의 영광은 그들이 세웠거나 정복한 도시들이었다.... 하나님의 도성은 아마도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을 대표하는 최상의 상징일 것이다.”50) 그러나 새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문자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어디에 정확한 구분선을 그어야 할 지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 도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그림 같은 언어는 여러 출처에서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 배경을 조금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를 이해함은 불가능하다.
먼저, 새 예루살렘은 실낙원이 된 에덴동산을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
창 2-3장 참조), 에덴 동산 바로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고, 그 곳에 강이 있었던 것같이(
창 2:9-10 참조), 새 예루살렘에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있고, 그 도성의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다(
계 22:1).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한 것같이(
창 1:27), 새 예루살렘에서도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한다(
계 22:4). 창세기에 최초의 저주가 나타나는데, 저주의 가장 고통스런 장면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생명나무 접근 금지였다(
창 3:22-24), 새 예루살렘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다(
계 22:3). 구속받은 자들은 회복된 낙원으로 되돌아왔으며 방해를 받지 않고 생명나무에 접근한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새 땅에 관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질문에 답한다. 새 예루살렘은 잃어버린 낙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한다.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것이다.
51) 하나님의 백성,
“그토록 오랜 세월 순례자들이었고 방랑자들이었던 그들”이 거할 곳은 생명수 강가와 생명나무 아래다.
52)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 가운데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
계 2-3장)의 모든 궁극적인 성취를 그 동산-도시(garden-city)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 묘사는 에덴동산 주제와 선지자 에스겔이 묵시(겔 40-48장)에서 자세히 묘사한 회복된 지상 성소를 결합시킴으로 계속된다. 에스겔과 요한은 높은 산으로 데려감을 받아 그 곳에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았다(
겔 40:2; 계 21:9-10), 에스겔의 묵시에서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던 것같이,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에 가득하다. 두 묵시들에서, 그 도성은 열두 문을 가진 높은 성곽으로 되어 있었다. 그 도성의 각 편에는 세 개의 문들이 있었고, 그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겔 48:31-35; 계 21:12-13). 에스겔과 요한은 그 도성과 문들, 그리고 성곽을 측량하기 위하여 갈대를 가진 하늘의 존재를 보았다(
겔 40:3-42:20), 두 사람은 그 도성이 정방형으로 위치해 있는 것을 보았다(
겔 48:20; 계 21:16), 두 묵시에서, 그 도성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중에 거하신다(
겔 43:7; 계 21:3, 5; 22:1), 마지막으로, 두 본문은 장차 그 도성의 거주민이 될 사람들의 자격에 대하여 서술한다(
겔 44:6-14; 계 21:8, 27), 바데나스의 언급처럼, 이 묘사들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예루살렘의 회복이 하늘 도성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53)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이상적인 도시에 대한 선지자들의 꿈과 소망, 즉 구약의 예루살렘으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었던 꿈의 성취로 제시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여러 구절에서
요한계시록 17-18장의 바벨론에 대한 묘사와 평행을 이룬다. 두 묘사 사이의 평행구와 대조들이
‘개관: 요한계시록 12:1-22:5’에 나와 있다.
54) 두 묵시는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동일한 천사에 의해 소개되었다(
17:1; 21:9), 두 경우에, 요한이 그 광경을 목격하도록 성령께서 그를 데려가셨다(
17:3; 21:10), 바벨론은 큰 음녀로(
17:1),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로 언급되었다 (
21:9), 두 도시는 보석으로 단장하였다(
17:4; 21:11), 음녀 바벨론은 가증한 잔을 주고(
17:4; 18:3), 새 예루살렘은 생명수를 제공한다(
22:1). 바벨론은 마귀들의 처소며(
18:2),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처다(
21:3). 바벨론은 부정한 것들과 가증한 것, 그리고 죄로 가득 찬 곳인 반면(
18:2, 4-5), 새 예루살렘에서는 부정한 것이나 가증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21:27). 나라들과 바벨론의 왕들은(
17:15) 그들의 권세와 권위를 짐승에게 준다(
17:12-13). 마찬가지로 나라들과 왕들은 그들의 영광을 새 예루살렘으로 가져온다(
21:24), 새 예루살렘에는 그 중앙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이 있는 반면(
22:1), 바벨론은
‘많은 물’, 즉 유프라테스 강(
17:1) 위에 앉아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바벨론의 특징인 반면, 그분에 대한 충성은 새 예루살렘의 특징이다.
그러나 두 도시의 거주민들은 예리하게 대조된다. 새 예루살렘에서 제외된 자들은 바벨론의 거주민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말로써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벨론의 시민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반면(
17:8), 새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21:27), 살인자, 음행자, 복술자들은 하늘 도성에서 배제된 반면 (
21:8), 바벨론은 살인자(
17:6; 18:24), 음행자(
17:2; 18:3, 9), 복술자(
18:23)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반면, 바벨론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원수들을 상징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벨론은 세상의 거짓 소망과 꿈을 대표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바벨론은 죄인들이 바라는 번영, 돈, 권력, 성공, 감각적인 만족 등을 제공한다.
요한계시록 18장의 일련의 애곡이 말하듯이,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간의 모든 기만, 희망, 그리고 꿈이 파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한 편으로, 새 예루살렘은 분쇄된 꿈과 헛된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꿈꾸고 고대하는 최고의 것을 제공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늘 도성이다. 그 도성은 전 역사에 걸쳐 살았던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이 모이는 곳이다. 그 문들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어 모든 인종적, 종족적, 또는 언어적 집단을 받아들인다. 온갖 장벽들은 제거된다. 그 도성에 기꺼이 들어가기 원하여 조건들을 이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환영받는다.
무엇보다도, 새 예루살렘은 충성된 자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성전으로서의 그 기능을 한다. 그 도성은, 구약 성소의 지성소처럼(
왕상 6:20), 완전한 입방체의 모양으로 제시되었다. 그 곳은 오랜 세월 고대하였던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간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 성전 봉사에서 오직 제사장들만이 하나님의 면전에 가까이할 수 있었고, 일반 백성은 중보자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필요치 않으니, 이는 그 도성이 성전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곳에 거하실 것이며, 사람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그분의 면전으로 나갈 것이다. 이전의 지상 성소에서 대제사장에게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는 특권이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허락되었다(
계 22:3-4 참조), 여기에 더하여, 고대 성전에서 속된 것이나 가증한 것은 자리가 없었던 것같이,
“부정한 자는”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외에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계 21:27).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새 예루살렘을 실제적인 장소로 제시한다. 그 곳은 구속받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도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러한 묘사는 다른 자료들에서 끌어왔다. 새 땅의 수도에 대한
요한계시록 21장 1절-22장 5절의 묘사는 암시적이다. 도성 그 자체와 그 곳의 생활은 인간의 어떤 상상도 초월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고전 2:9) 하늘의 실체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모든 상상적 언어는 부적절하며 충분하지 않다.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금과 보석으로 묘사할 때, 실제로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금이 아니다. 금과 보석은 구속받은 자들이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 화려함에 대한
“희미한 예시일 뿐이다.” 곧
“이 세상의 부는 장차올 부와 비교할 수 없다.”55)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 도성-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들과 꿈이 스며 있는 도성에 대한 모든 인간의 오랜 염원과 꿈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선지자들이 예언하 였고 고대하였던 것이 마침내 실현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인 도성이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불확실성을 추방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에 서의 삶은 번영에 대한 인간의 헛된 소망들과 유토피아적 꿈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답변이다. 그들의 번영은 자신들의 전략과 노력에 기초해 있다. 새 예루살렘은 영원한 생명과 무제 한의 행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되라고 초청하신다(
계 2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