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이제 그 결론에 이르렀다. 결어는 이 책이 시작될 때 소개되었던 것과 동일한 주제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서언과 결어는
“피차에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요한계시록의 중심부를 위한 전반적인 구조를 제공한다.”5) 결어는 서언에서 천명되었던,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미래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님을 확인한다. 요한계시록은 전 역사를 통하여 역사의 가장 마지막까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보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유진 보링(M. Eugene Boring)은 이렇게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시작하는 단어부터 마지 막 단어까지 종말에 관한 책이지만, 추상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다. 그는[요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기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한 채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독자나 청중을 격려할 목적으로 기록한다. 요한의 계시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어 성경을 관통하나 영원토록 계속되지는 않을, 이야기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요한의 계시는 이미 대단원에 이르렀고, 마지막 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6) 그러나 데이비드 바(David L. Bar)가 지적하듯이, 궁극적 종말은 요한계시록에서 결코 이를 것 같지 않다.
7) 이 문학적 전략은 책 전반에 걸쳐 추적할 수 있다. 종말은 계속적으로 언급되었고, 그것은 모든 주요 묵시들의 결론에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졌다가 새로운 묵시에서 다시 소개될 뿐이었다(예를 들면, 일곱 인의 개봉[
계 6:17-8:1], 일곱 나팔[
11:15-18], 또는
12-14장에 나타난 묵시[
14:14-20]). 끝이 없다. 끝은 언제나
“우리를 시작으로 데려간다.”8) 마지막 묵시의
“이루었도다”도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계 21:6). 이 묵시는 종말을 묘사한다. 전쟁은 끝났고, 악의 군대들은 패배하였으며, 죄는 도말되었다. 편지는 끝났다. 그러나 요한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종말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여전히 오고 계시며, 싸워야 할 진짜 전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전히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며
“책의 말씀들을 지켜야 할 기본 의무”가 있다.
9)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앉아 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독자들을 가공의 묵시나 유토피아적 꿈속으로 떠밀어 넣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곧 오신다. 이것은 우리의 첫 현실일 뿐이다. 두 번째 현실은 여전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종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자들은 만물의 끝이 이를 때까지 그 책을 읽고 또 읽어 책의 기별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결론으로,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압제와 고난을 직면할 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신 분에게 그 눈을 고정시키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역사적 전개나 마지막 사건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과 마지막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 그분의 충성된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그리스도는 수수께끼 같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소망과 염원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분은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시다. 아니 그분은 우리의 미래시다.
여러 해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노 선교사 부부가 은퇴하여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에게는 마땅한 집 한 채 없었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노 부부는, 대규모 원정 사냥 경기에서 돌아오는 테디 루스벨트(Teddy Roosevelt) 대통령과 한 배에 승선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아무도 선교사 부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부부는 대통령 일행에게 쏟아지는 팡파르와 기를 쓰고 이 위대한 사람을 보려는 승객들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배가 큰 바다를 가로질러 온 후에, 노 선교사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뭔가 잘못되었소. 우리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소. 왜 우리가 지난 여러 해를 아프리카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아야 했는지 모르겠소, 저 사람은 사냥 길에서 돌아올 뿐인데, 모든 사람이 저렇게 대대적인 환영을 하고 있소. 그러나 아무도 우리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구려.” “여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소. 뭔가 잘못된 것 같소.” 배가 뉴욕에 입항하였을 때,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하여 밴드가 기다리며 시장을 비롯한 여러 고관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신문 기자들은 대통령의 도착 소식을 취재하기 위하여 저마다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이 선교사 부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튿날부터는 그 도시에서 생계를 꾸려나갈 만한 무슨 수가 있기를 바라면서, 노 선교사 부부는 맥없이 배에서 내려 이스트 사이드(East Side) 거리의 허름한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
그날 밤 노 선교사는 마음이 상해 아내에게 투덜거렸다.
“이런 대접을 받아들일 수 없소.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지 못하오.” 그의 아내가 대답하였다.
“방에 가서 하나님께 아뢰지 그래요.” 얼마 후 침실에서 나온 그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물었다.
“여보, 무슨 일이 생겼어요?” “주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소!” “대통령은 그토록 열렬히 환영받는데, 우리 고향에서는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어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는지를 주님께 토로하였소. 내가 그 말을 마치자 주께서 마치 자신의 손을 내 어깨에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소. 그러나 내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당도하지 않았단다.”10) 분명 요한계시록은 이런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전 역사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세상은 그들의 집이 아님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충성하느라 압제와 무서운 반대를 겪으면서 삶의 고난을 경험할 때, 그들은 아직 본향에 당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본향에서 환영받을 그 날이 오고 있다. 온 하늘은 그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그 곳에 있을 것이다.
아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