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어 (22:6-21)
 이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는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완결한다. 요한계시록 22장 6-21절로 요한은 그의 책을 종결짓는다. 서언(계 1:1-8)처럼, 결어는 책 전반에 대한 총체적 요약이다. 서언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반복된다. 서언에서 소개된 주제들이 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으며, 결어에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결어는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확 인하고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

결어 (22:6-2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속히 될 일.
 요한계시록 1장 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복이 있으리라.
 요한계시록의 복 중 여섯 번째 복이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속히 오리니.
 미래적 현재시제는 미래에 일어날 행동이 현재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래적 현재시제 용법은 어떤 사건의 확실성 뿐만 아니라 임박성을 강조 하는 것이다. 재림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계 1:7; 22:20 참조).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시작과 끝.
 요한계시록 21장 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복이 있으니.
 요한계시록의 복중 일곱 번째 복이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빨다”라는 동사는 현재분사로서 쉼 없이 계속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흠정역은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쓰여 있다. 본문상의 이런 차이는 아마 도 필사(筆寫)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 같다. 헬라어에서 두 표현은 서로 닮았고 소리도 비슷하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헬라어로 호이 플뤼논테스 타스 스톨라스(hoi plunontes tas stolas)이며,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호이 포이운테스 타스 엔톨라스(hoi poiountes tas éntolas)다. 헬라어 원전 신약 사본들에서, 이 단어들은 대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단어들 사이에 띄어쓰기도 없었다. 영어 대문자로 표기했을 때, 두 구절 간에는 분명히 유사성이 있다.


 HOIPLUNONTESTASSTOLAS

 HOIPOIOUNTESTASENTOLAS


 필사자가 그 구절을 읽고 있었거나 누군가가 그에게 읽어주고 있었든지 간에, 그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로 쉽사리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고(最古)의 그리고 최상(最上)의 사본들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로 읽는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은 오독(誤讀)이었거나 오청(誤聽)으로 인한 필사적 과오였을 것이다.

 내적 증거는 이런 결론을 지지한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독법은 매우 이례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어딘가에서 요한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계 12:17; 14:12 참조) 또는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것(1:3; 2:26; 3:8, 10; 22:7, 9 참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들 중 하나인 반면, 옷을 빠는 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근거를 제공한다(계 7:14; 5:9-10; 12:11 참조). 하나님의 백성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다. 이것이 계명들의 중요성을 허무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는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명들의 중요성은 하나의 본문에 기초되어 있지 않다. 이 경우에 계명들과 관련하여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개들.
 고대에 개는 부정적(否定的) 상징이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개는 남창(男始)(신 23:17-18) 및 악인들(삼하 16:9; 왕하 8:13; 시 22:16, 20; 59:6; 사 56:11)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개는 부정한 사람(마 7:6), 이방인(마 15:26-27), 그리고 악인들(빌 3:2; 벧후 2:22)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다윗의 뿌리.
 요한계시록 5장 5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속히 오리라.
 요한계시록 2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를 마치면서, 천사는 요한에게 이 말씀들, 즉 요한이 보고 듣고 기록한 모든 것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확증한다. 이미 이 확증은 일찍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묵시에서 주신바 되었다(계 21:5). 이제 결론이 내려진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하고 참되시”다(19:11; 참조 3:14).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고 그분은 약속하신다. 천사는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신뢰할 만한 분이신 것처럼,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책에서 예언된 모든 것은 확실히 일어날 것이다. 이는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 대한 직접적 인유로서, “선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님”을 의미한다.1) 이 말씀은 묵시 중 요한에게 보인 것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감동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증해준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둘 다 “동급의 진지함으로 취급되어야 한다.”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한 번 더 되풀이하여 말씀하신다(계 3:11; 22:12, 20 참조), 그분이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의 말씀은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각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을 지속적으로 고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미래에 대한 누군가의 호기심 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당면할 압제와 핍박 중에서도 그리스도께 일관된 그리고 흔들림 없는 충성을 다하도록 권고하기 위함이었다. 예언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특별한 축복이 약속되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섯 번째 축복으로, 요한계시록 1장 3절의 반복이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큰 기만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경고의 기별에 유의하는 자들은 그 기만으로부터 보전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요한계시록 22: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이 절들에도 반복적인 내용이 소개된다. 요한은 책의 허두에서 했던 것과 꼭 같이 (계 1:9 참조),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라고 다시 자신을 밝힌다. 그가 본 모든 것은 충실하게 기록되었다. 요한에게 허락된 가장 최근의 계시는 새 예루살렘의 탁월한 영광에 관한 것이었다. 듣고 본 모든 것의 휘황함에 감동된 요한은 이 모든 것들을 그에게 보여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다시 엎드린다(계 19:10 참조). 천사는 다시 그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경고한다.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의 이 두 번에 걸친 경험과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는 권고는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특별히 적절한 말씀이다. 마지막 위기의 때에 주 쟁점은 경배에 관한 것이다. 종말의 때, 곧 온 세계가 돌이켜 짐승과 사단적 삼위를 경배하려 할 때(계 13:12),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위한 당신의 복음, 즉 세 천사의 기별을 선포하신다. 이 기별은 땅의 거민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계 14:7).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종말의 때와 관련하여 다니엘에게 그가 받은 묵시를 인봉하라고 지시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단 8:26; 12:4), 천사는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도록 명령한다. 인봉하지 말라는 이유는 분명하다.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의 묵시들은 미래의 마지막 때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그 묵시들을 인봉하라고 지시하였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만이 열기에 합당한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를 보았다. 두루마리의 일부는 요한을 통하여 교회에게 계시되었고,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 12장 1절-22장 5절에 기록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지상 최후의 사건들에 적용할 때 그들에게 요긴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게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지시하신다.

 종말이 가깝다는 진술과 그리스도의 신속한 강림을 선언하는 것 사이에 엄숙한 선포가 끼어 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예언의 말씀이 개봉되어 예언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사람들과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 사이에 있을 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들었다. 예언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사람들은 당분간 복음을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판결이 선언될 것이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유예 기간이 끝난다는 말은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기회가 도무지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계 15:5-8 참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계 22:12).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이제 분명히 요한은 장면에서 사라진다.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3)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더 요한과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당신의 속히 오심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속히 오리니. 그분은 당신이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장 7-8절의 반복이다. 또한 이것은 마태 복음 16장 27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거의 반복하고 있다. 그분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때, “각 사람의 일한 대로”(KJV) 갚으실 것이다. 이 말은 종종 바울에 의해 반복된다(롬 2:6; 14:12; 고후 5:10), 이는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신약의 명백한 가르침에 동의한다 (계 7:10, 14 참조).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인 반면, 심판은 행위에 따른 것이다. 행위는 개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은 바른 삶을 살도록 자극할 것이다. 엘렌 화잇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인자가 곧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생애의 일상적인 일을 부주의하거나 등한시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히 오심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고 사업에 있어서 부지런할 것이다. 그들의 사업은 부주의하거나 부정직하게 행해지지 않을 것이며, 신뢰할 만하고, 신속 하고, 완전하게 행해질 것이다. 이생의 일에 대한 부주의한 무관심이 그들의 영성과, 세상과의 분리에 대한 증거라고 스스로 아첨하는 자들은 큰 기만에 빠져 있다. 그들의 성실성, 신실함과 고결함은 현세적인 사물에 의해 검증되며 입증된다. 만일 그들이 작 은 것에 신실하다면 그들은 큰 것에도 신실할 것이다.4)
다시 오셔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다(계 1:8; 21:6 참조). 그분은 인간 역사의 처음이요 끝이시다. 그분은 무엇이 미래를 이끌며 역사의 진로를 궁극적으로 통제하는지를 아신다. 성경적 관점에서 역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미 있게 시작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인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기록하였다(빌 1:6). 그분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미래에는 소망이 있다.
요한계시록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본문은 도성에 들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축복 중 일곱 번 째요 마지막 축복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두루마기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기 위한 조건이다. 이런 개념은 신약 전체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에 잘 들어맞는다. 빛나고 깨끗한 두루마기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말한다(계 19:8). 이사야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사 61:10)신다고 외쳤다. 두루마기를 빨아 그것을 희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계 7:14), 어린양의 피로 씻은 자들만이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으며,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고 그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의 결과이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행한 일의 결과가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열거하신다. 이미 두 개의 유사한 목록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찍이 언급되었다(계 21:8, 27). 배제된 것으로 파악된 자들은 개들[부정한 자들]과 복술자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좋아하고 행하는 자들이다. 복음과 반대되는 것들을 사랑하고 행하는 모든 자들은 하늘 도성에서 배제된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서언에서 확언하셨던 것을 한 번 더 확실히 하신다. 즉, 그분은 요한계시록의 묵시들의 출처시다(계 1:1).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요한이 묵시에서 본 것들을 그에게 설명해준 천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 사명을 위탁받았다. 요한계시록 22장 6-16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똑똑히 전한다. 종종 천사의 말과 그리스도의 말씀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요한계시록 1장 11절에서 강조되었듯이,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계시된 것들은 요한 당시의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증언이 될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의 신원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을 남기지 않으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 5장의 언어로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밝히신다. 메시 야이신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시다. 모든 권세와 주권이 그분에게 주신 바 되었다(마 28:18계 5장),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새벽별”(계 2:28), 즉 그리스도 자신이 약속되었다. 그분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새 시대, 곧 땅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왕국의 여명(黎明)이시다.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제 교회를 통한 성령의 증거에 주의가 집중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교회를 통한 성령의 부르심을 듣고 그것에 응하는 자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촉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요한계시록을 진지하게 다루며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는 강력한 호소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이것은 초막절 때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서,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복음의 기별은 구원에 관한 것으로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인간의 영적 갈증이 궁극적으로 해갈된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시점에서 요한은 독자들에게 보내신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를 담고 있는 후기(後記)를 첨가한다. 요한계시록은 ‘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계획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을 함부로 고치며 교훈을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요한계시록과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게 된 사람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 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말씀을 첨가한 자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분명히 그 죄에 그 형벌이다. 이 경고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권고하였던 신명기 4장 2절의 말씀을 반영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스도의 경고는, 축자영감의 개념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의 단어 자체를 고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목적에 맞추기 위하여 개인의 사상이나 견해를 억지로 본문에 집어넣어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을 곡해시키는 것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당신의 신속한 강림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요한계시록의 중심 기별이 갖는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들은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반응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신 그분의 마지막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은혜를 베푸신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바야흐로 세상에서 일어나려는 사건들에 대한 온갖 혼란과 두려움의 와중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음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며 책을 끝맺는다.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족하다. 요한계시록에 선포된 최후의 사건들은 무섭고 미래는 암울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그리스도의 보증을 가지고 있다(마 28:20).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교회에 주신 바 되었다. 이 은혜는 요한계시록의 기별을 진지하게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이 하늘 도성에 이를 때, 요한계시록의 약속들은 실현될 것이며, 그 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
22:6-21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은 이제 그 결론에 이르렀다. 결어는 이 책이 시작될 때 소개되었던 것과 동일한 주제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서언과 결어는 “피차에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요한계시록의 중심부를 위한 전반적인 구조를 제공한다.”5) 결어는 서언에서 천명되었던,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미래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님을 확인한다. 요한계시록은 전 역사를 통하여 역사의 가장 마지막까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보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유진 보링(M. Eugene Boring)은 이렇게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시작하는 단어부터 마지 막 단어까지 종말에 관한 책이지만, 추상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다. 그는[요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기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한 채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독자나 청중을 격려할 목적으로 기록한다. 요한의 계시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어 성경을 관통하나 영원토록 계속되지는 않을, 이야기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요한의 계시는 이미 대단원에 이르렀고, 마지막 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6) 그러나 데이비드 바(David L. Bar)가 지적하듯이, 궁극적 종말은 요한계시록에서 결코 이를 것 같지 않다.7) 이 문학적 전략은 책 전반에 걸쳐 추적할 수 있다. 종말은 계속적으로 언급되었고, 그것은 모든 주요 묵시들의 결론에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졌다가 새로운 묵시에서 다시 소개될 뿐이었다(예를 들면, 일곱 인의 개봉[계 6:17-8:1], 일곱 나팔[11:15-18], 또는 12-14장에 나타난 묵시[14:14-20]). 끝이 없다. 끝은 언제나 “우리를 시작으로 데려간다.”8)

 마지막 묵시의 “이루었도다”도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계 21:6). 이 묵시는 종말을 묘사한다. 전쟁은 끝났고, 악의 군대들은 패배하였으며, 죄는 도말되었다. 편지는 끝났다. 그러나 요한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종말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여전히 오고 계시며, 싸워야 할 진짜 전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전히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며 “책의 말씀들을 지켜야 할 기본 의무”가 있다.9)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앉아 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독자들을 가공의 묵시나 유토피아적 꿈속으로 떠밀어 넣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곧 오신다. 이것은 우리의 첫 현실일 뿐이다. 두 번째 현실은 여전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종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자들은 만물의 끝이 이를 때까지 그 책을 읽고 또 읽어 책의 기별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결론으로,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압제와 고난을 직면할 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신 분에게 그 눈을 고정시키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역사적 전개나 마지막 사건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과 마지막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 그분의 충성된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그리스도는 수수께끼 같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소망과 염원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분은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시다. 아니 그분은 우리의 미래시다.


 여러 해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노 선교사 부부가 은퇴하여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에게는 마땅한 집 한 채 없었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노 부부는, 대규모 원정 사냥 경기에서 돌아오는 테디 루스벨트(Teddy Roosevelt) 대통령과 한 배에 승선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아무도 선교사 부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부부는 대통령 일행에게 쏟아지는 팡파르와 기를 쓰고 이 위대한 사람을 보려는 승객들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배가 큰 바다를 가로질러 온 후에, 노 선교사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뭔가 잘못되었소. 우리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소. 왜 우리가 지난 여러 해를 아프리카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아야 했는지 모르겠소, 저 사람은 사냥 길에서 돌아올 뿐인데, 모든 사람이 저렇게 대대적인 환영을 하고 있소. 그러나 아무도 우리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구려.”

 “여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소. 뭔가 잘못된 것 같소.”

 배가 뉴욕에 입항하였을 때,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하여 밴드가 기다리며 시장을 비롯한 여러 고관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신문 기자들은 대통령의 도착 소식을 취재하기 위하여 저마다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이 선교사 부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튿날부터는 그 도시에서 생계를 꾸려나갈 만한 무슨 수가 있기를 바라면서, 노 선교사 부부는 맥없이 배에서 내려 이스트 사이드(East Side) 거리의 허름한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

 그날 밤 노 선교사는 마음이 상해 아내에게 투덜거렸다.

 “이런 대접을 받아들일 수 없소.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지 못하오.”

 그의 아내가 대답하였다. “방에 가서 하나님께 아뢰지 그래요.”

 얼마 후 침실에서 나온 그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물었다.

 “여보, 무슨 일이 생겼어요?”

 “주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소!”

 “대통령은 그토록 열렬히 환영받는데, 우리 고향에서는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어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는지를 주님께 토로하였소. 내가 그 말을 마치자 주께서 마치 자신의 손을 내 어깨에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소. 그러나 내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당도하지 않았단다.”10)


 분명 요한계시록은 이런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전 역사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세상은 그들의 집이 아님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충성하느라 압제와 무서운 반대를 겪으면서 삶의 고난을 경험할 때, 그들은 아직 본향에 당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본향에서 환영받을 그 날이 오고 있다. 온 하늘은 그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그 곳에 있을 것이다.

 아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註) ——————
1.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223-224.
2. 상게서, 224.
3. Marshall, 156.
4. White, Testimonies for the Church, 4:309. 
5. Fiorenza, Revelation, 46.
6. Eugene M. Boring, “Revelation 19–21: End Without Closure,” The Princeton Seminary Bulletin, suppl. 3(1994):60. 
7. David L. Barr, “Waiting for the End that Never Comes: John's Apocalypse as Story,”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 of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New Orleans, Louisiana, November, 1996; Boring은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참조 “Revelation 19-21: End Without Closure”, 65-66)
8. Barr, 14, 16-17.
9. 상게서, 13-14.
10. 작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