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점에서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기뻐하라는 초청으로 바뀐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재림시에 있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의 연합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표현되었다. 어린양과 그의 신부간의 이 연합은 앞 장들에서 묘사되었던 음녀 바벨론과 그녀의 연인들 간의 불법적 관계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18)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로 표현된 이 초청은 신약에서 이 곳 외에 단 한 곳에서만 나온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압제받고 핍박받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음의 약속을 하셨다.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2)
19)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상급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과 그의 신부가 그들의 오랫동안 기다렸던 연합을 축하하는 큰 혼인 잔치’로 묘사되었다.
20) 어린양의 신부는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초청에 유의하고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바벨론의 음란과 부정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켰으며, 그러한 연유로 고통을 당하였다. 이제 그들은 어린양의 만찬에 참여한다.
그분의 십자가 피로 사신 백성과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핵심이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은 절정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혼인 잔치가 열리는 것은 이 시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혼인 잔치의 시간이 이르렀다고 선언할 뿐이다. 이것은 다른 잔치 곧
요한계시록 19장 17-19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큰 잔치와 평행을 이룬다.
21)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 간의 연합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래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한이 혼인 잔치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단지 그 때가 이르렀음을 선포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적인 사건은 어느 곳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혼인 잔치는 최후의 구속적 사실을 암시하는 은유적 표현 방식으로,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계 21:3).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라는 동일한 은유를 사람들 중에 거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계 21:2) 적용할 수 있다. 또한 혼인 잔치는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칭하는 이유다(
계 21:9).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기 위하여 사용되듯이(
마 23:37), 새 땅에 대한 계시에서도, 하나님의 백성과 그 수도, 즉 교회와 새 예루살렘은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신부라는 동일한 상징이 교회와 새 예루살렘 양편에 사용되었다.
22)
어린양의 신부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자신을 단장하였다.본문은 교회가 자기를 단장함에 있어서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곳에서 우리는 고대의 결혼 관습에 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혼인하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땅으로 내려오셨다. 갈바리에서 그분은 당신의 신부를 위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셨다. 그 후에 그분은 신부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려고 당신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다(
요 14:1-3 참조), 그 동안 그분의 신부는 이 곳 땅에 머물러 있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신부는 고대의 히브리 신부가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면서 결혼을 위하여 자신을 단장한 것같이 자신을 준비한다. 장소와 신부가 준비되면, 결혼, 즉 재림이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 그분이 오실 때,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
엡 5:27).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술한다(
요일 3:3). 이 곳
요한계시록 19장 7-8절에서 사도는 교회가 이제는 자신을 단장하였고,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마침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신부인 교회와 연합하기 위하여 아버지 집을 떠나 땅으로 내려와 신부를 위하여 예비하신 장소로 신부를 데려가실 순간이 이르렀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자신을 단장하며 준비한다(
계 7:14 참조). 다니엘은 마지 막 때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
단 12:10)이라고 예언하였다.
‘빛난’은 영광을 의미하는 밝은 광채를 가리키며(
마 13:43 참조),
‘깨끗한’은 교회의 순결과 충성과 신실함을 가리킨다.
23) 세마포는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의로운 행실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계발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삶에 의해 생산되는
‘의로운 품성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열매(result)다.’ (
갈 2:20; 약 2:17-20 참조)
24) 신부의 세마포 옷은 큰 음녀 바벨론의 붉은 자주빛 옷, 사치스러운 치장 등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
계 17:4), 교회와 바벨론은
“그들의 행실과 특성으로 옷 입고 있다.”25) 교회의 옷은 의로운 행실과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상징하고 있는 반면, 바벨론의 옷은 불의한 행실과 사단과 같은 특성을 상징한다(
계 18:5 참조), 비즐리-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두 도시의 이야기, 부제로는 음녀와 신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6) 교회가 준비함에 있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라도, 본문은 교회가 자신의 행위의 옷으로 단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어린양의 신부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자신을 단 장하였다고 말한다. 어린양의 신부가 입도록 세마포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 옷이 자신의 공로나 자기 의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27) 흰 옷은 자기가 만들거나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여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의로운 행위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이 개념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도 강조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고 자신들을 덮기 위하여
“심혈을 바쳐” 그에게서 흰 옷을
“사라”고 초청하셨다(
계 3:18).
28)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제단 아래의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의 표로서 흰 옷을 받았다.
요한계시록 7장 9-14절은, 구속받은 자들이 입고 있는 희고 깨끗한 두루마기는 어린양의 피에 씻긴 결과로서 그렇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보좌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계 7:10),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요청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속은 그들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상은 이사야의 예언에서 확인된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0)
요한계시록 19장 8절은 이사야의 이 구절을 반영한다. 그것은 구원의 옷과 의로운 행위가 구속받은 자들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이지 그들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29)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에서 오는 소산물이다(
엡 5:24-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