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만찬 (19:1-21)
 요한계시록 19장은 뚜렷이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1-10절은 바벨론의 운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늘 존재들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묘사하며, 또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알리 고 있다. 11-21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한다. 하늘 군대에 호위되어 오시는 전사/왕께서는 악의 군대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재림하신다. 이어서 공중의 새들에게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큰 만찬에 참여하라는 초청이 발해진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 (19:1-10)
 요한계시록 18장 20절에서는 종말적 바벨론의 멸망을 기뻐하라고 청하였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 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9장 1-10절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기쁨과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을 기술한다. 본문은 바벨론의 심판 장면(계 17-18장)과 전사/왕으로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싸워 바벨론을 궁극적으로 멸망시키실 그리스도의 출현(계 19:11-21) 사이에서 막간 같은 역할을 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할렐루야.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네 번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신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할랄(halal 찬양하다)과 (Yah 야웨 Yahweh)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의미다(상응하는 헬라어로 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5절에 나온다). 이 단어는 시편에서 24회 나온다(예, 시 111:1; 112:1; 113:1; 146:1). 원래 히 브리어이지만, 이 곳에서는 헬라어로 음역(音譯)되었다. 이 단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채택되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적 어휘로서 매우 보편적인 표현 양식이 되었다.1)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더럽게 한.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음행.
 요한계시록 14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본문은 사법적 행위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 서는 바벨론의 손에서 당신의 종들의 피를 갚으심으로 바벨론을 심판하셨다(계 6:10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19: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그[녀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올라가는 연기는 완전한 소각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14장 1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이십사 장로.
 요한계시록 4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네 생물.
 요한계시록 4장 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전능하신.
 요한계시록 1장 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통치하시도다.
 헬라어에서 이 구절은 아마도 행동의 시작을 알리는 진입(ingressive)의 부정과거인 것 같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어린양의 혼인.
 혼인의 비유는 성경에 자주 나온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 이 혼인 주제를 사용하셨다(막 2:19), 혼인 잔치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와(마 22:1-14)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 등을 포함하여, 도래하는 왕국에 대한 그분의 여러 비유에 나오는 주제다.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순결한 처녀 같은 교회를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자라고 하였다(고후 11:2), 하나님의 백성과 그것을 상징하는 여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2장 11절과 14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종종 신부로 묘사된다(사 61:10; 62:5; 렘 2:32; 호 2:19-20 참조),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예비되었다라는 말은 고대 히브리의 결혼에 비추어 이해하여야 한다.2) 일반적으로 히브리 인의 결혼은 신부 아버지 집에서의 정혼으로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신랑은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로 간주되었다. 그런 다음 신랑은 그와 신부가 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그 기간 동안 신부는 자기 아버지 집에 머물면서 결혼을 위하여 자신을 준비하였다. 거처와 신부가 준비되면, 신랑은 결혼 잔치를 베풀 자기 아버지 집으로 신부를 데려가기 위하여 돌아온다(마 25:1-10 참조),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준비되었다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히브리 결혼의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옳은 행실.
 이 곳에 사용된 헬라어 디카이오마타(dikaiomata 복수 형태)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그것은 ‘규정, regulations’, ‘요구, requirements’, 또는 ‘규례, statutes’ 등을 지칭하는 것 같다(눅 1:6; 롬 1:32; 2:26; 8:4; 히 9:1, 10 참조).3) 로마서 5장 18절에서 이 단어는 파랍토마(paraptima 범죄 행위)와 대조되는데,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를 가리킨다.4) 복수 형태의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 15장 4절에도 나온다. 그것은 만국을 심판함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들’을 의미한다. 이 곳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올바른 번역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들과 조화를 이루는 ‘의로운 행위들’이다(계 12:17; 14:12 참조).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들[디카이오마타]”은 음녀 바벨론의 불의[아디케마타 adikémata]와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계 18:5).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의 증거.
 요한계시록 1장 2절과 12장 1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대언의 영[한글 구역, 예언의 신].
 이 표현은 신약 전체에서 오직 이 곳에만 나온다. 그러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문헌들은 ‘예언의 신’이라는 말은 요한이 만들어 낸 신조어가 아니고, 오히려 일세기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알려준다.5) 이 구절은 하나님이 계시하고 위탁하신 기별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다’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와 봉사를 통하여 전하신 증거로, 또는 그분이 옛날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증거하셨던 것처럼, 예언의 영을 가진 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증거로 이해되어야 한다(벧전 1:11-12 참조; 계 1:2; 12:17의 어구 해설 참조), 윌리엄 바 클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참 선지자란 사람들에게 전할 기별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람이라 고 정의할 수 있다. 동시에 그의 언행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행위라고 할 수 있다.”6)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7) 몇몇 학자들을 따라서 한스 라론델은, ‘예수의 증거’란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증거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대언의 영’이라는 용어가 선택된 신자들의 무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신실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다.8)

 그러나 문맥은 ‘대언의 영’이 일반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유가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지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만”의 소유가 될 것임을 나타낸다.9) 리처드 보컴에 의하면,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독교 공동체 내에 선포하는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의 특별한 소명과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반의 일반적 소명과 구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를 보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들에게, 그리고 교회들을 통하여 세상에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령과 관련된 세부적인 구절들을 조사한 결과, 그 구절들은 오로지 교회들에게 전달된 예언을 관장한 성령의 감동과 관련이 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선교적 역할에 관여한 성령의 활동을 보려면, 우리는 특정한 성령 관련 구절들을 살펴야 한다.”10) 데이비드 아우니와 그 외의 많은 학자들도 동일한 노선을 취한다. 그들은 이 구절이 “특정 개인들에게 묵시적 경험을 허락하는 능력, 그리고 그들에게 일반 사람들은 얻을 수 없는 계시적 통찰력을 주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1)

 더욱이 요한계시록의 문맥은 ‘예수의 증거’는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반드시 속히 될 일”(계 1:1)을 보여줄 목적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특별히 요한계시록 22장 6절에서 강조되었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12)
(주해)
요한계시록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요한계시록 19: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종말적 바벨론의 멸망으로 바벨론의 동맹체들은 비통하게 된 반면, 또한 하늘에 엄청난 환희를 가져온다. 요한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하늘에 허다 한 무리의 음성을 듣는다. 이 무리는 아마도 하늘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 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소리치는 ‘큰 무리’와 동일한 무리일 것이다(계 7:9-10). 그것은 또한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시온 산에서 부르는 새 노래”를 상기시킨다(계 14:1-3; 15:2-4).13) 하늘의 이 무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능히 설 수 있었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계 6:17).

 제 그들은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를 송축하며, 종말의 바벨론에게 그분의 참되고 의로운 심판을 행하시고 그의 권세를 취하시고 통치하기 시작하신 그분에게 찬양을 돌린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5장 3-4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유리바다 위에 서서 부른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상기시킨다.

 이들은 두 가지 이유로서 기뻐한다. 첫째, 바벨론이 그의 음행으로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큰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셨다. 바벨론의 이러한 활동은 요한계시록 17장 1-6절에 묘사되었다. 둘째, 땅을 망하게 하는 자 바벨론이 멸망하였다는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의 선언이 성취되었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환호는 보복이나 복수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환호다. 그러나 이 구원은 원수의 박해 세력이 제거되고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온 이후에만 가능하다.

 하늘의 합창단이 환호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벨론을 벌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의 피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법적 행위를 암시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의 피를 갚음으로 바벨론을 심판하셨다. 이 마지막 때 배도적인 종교 세력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압제하여 그들의 피를 흘린 죄가 있다(계 18:24), 요한계시록 6장 9-11절에 관한 인유가 여기에 강하게 나타난다.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고난받는 성도들은 제단 아래서 신원과 공의를 학수고대한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압제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환호하는 무리의 중심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다.14) 그들의 환호는 최후의 위기에서 큰 구원을 받은 이후의 안도감을 나타낸다.

 바벨론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고 있기에, 구원받은 무리들은 이제 두 번째의 할렐루야를 외친다. 일찍이 요한계시록 14장 11절에서 선포된 것이 여기에서 성취되었다.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은 옛 에돔이 그랬던 것처럼 바벨론이 결코 다시는 ‘폐허에서 일어나지’ 못 할 것임의 다른 표현이다(사 34:8-10 참조).15)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의 멸망은 확실 하며 돌이킬 수 없다.
요한계시록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환호하는 무리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합류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십사 장로 들은 아마도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일 것이다. 하늘에 있는 그들은 신·구약의 구속받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계 4:4 참조). 네 생물은 아마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에 천군을 이끄는 지위 높은 천사들일 것이다(계 4:6-8 참조). 하나님께 등을 돌린 땅 위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곳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의 대표자들이 함께 구원과 심판을 베푸신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에 대하여 그분에게 찬양을 드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아멘과 할렐루야로, 그들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함에 하늘 합창단과 하나가 된다.
요한계시록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 시점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종들에게 초청이 발해진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이 초청은 ‘무론 대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상급과 관련하여 일곱째 나팔에서 선언하였던 것의 성취이다(계 11:18). “무론대소하고 그[주]를 경외하는 너희들” 이라는 구절은 시편 115장 13절에서 빌려온 것으로, 모든 사회-경제 계층으로부터 온 충성스러운 신자들을 가리킨다.16)

 그들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 그분에게 찬양을 돌리는 구속받은 무리의 노래는 ‘할렐루야’라는 새로운 탄성을 발함으로 그 절정에 달한다. 이제 그들은 종말적 바벨론이 멸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서 통치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기뻐한다. 이 곳에서 일곱째 나팔에서 발해졌던 선언이 발전되어 간다.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 마지막 때 배도적 종교 세력의 몰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과 권세로써 땅을 통치하기 시작하셨음을 의미한다. 래드가 지적하듯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적으로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사단의 감금, 그리고 천년 기 후에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통치하기 시작하실 때를 기다린다.”17)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 시점에서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기뻐하라는 초청으로 바뀐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재림시에 있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의 연합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표현되었다. 어린양과 그의 신부간의 이 연합은 앞 장들에서 묘사되었던 음녀 바벨론과 그녀의 연인들 간의 불법적 관계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18)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로 표현된 이 초청은 신약에서 이 곳 외에 단 한 곳에서만 나온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압제받고 핍박받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음의 약속을 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2)19)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상급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과 그의 신부가 그들의 오랫동안 기다렸던 연합을 축하하는 큰 혼인 잔치’로 묘사되었다.20) 어린양의 신부는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초청에 유의하고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바벨론의 음란과 부정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켰으며, 그러한 연유로 고통을 당하였다. 이제 그들은 어린양의 만찬에 참여한다.

 그분의 십자가 피로 사신 백성과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핵심이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은 절정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혼인 잔치가 열리는 것은 이 시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혼인 잔치의 시간이 이르렀다고 선언할 뿐이다. 이것은 다른 잔치 곧 요한계시록 19장 17-19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큰 잔치와 평행을 이룬다.21)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 간의 연합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래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한이 혼인 잔치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단지 그 때가 이르렀음을 선포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적인 사건은 어느 곳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혼인 잔치는 최후의 구속적 사실을 암시하는 은유적 표현 방식으로,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계 21:3).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라는 동일한 은유를 사람들 중에 거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계 21:2) 적용할 수 있다. 또한 혼인 잔치는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칭하는 이유다(계 21:9).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기 위하여 사용되듯이(마 23:37), 새 땅에 대한 계시에서도, 하나님의 백성과 그 수도, 즉 교회와 새 예루살렘은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신부라는 동일한 상징이 교회와 새 예루살렘 양편에 사용되었다.22)
어린양의 신부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자신을 단장하였다.본문은 교회가 자기를 단장함에 있어서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곳에서 우리는 고대의 결혼 관습에 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혼인하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땅으로 내려오셨다. 갈바리에서 그분은 당신의 신부를 위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셨다. 그 후에 그분은 신부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려고 당신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다(요 14:1-3 참조), 그 동안 그분의 신부는 이 곳 땅에 머물러 있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신부는 고대의 히브리 신부가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면서 결혼을 위하여 자신을 단장한 것같이 자신을 준비한다. 장소와 신부가 준비되면, 결혼, 즉 재림이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 그분이 오실 때,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엡 5:27).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술한다(요일 3:3). 이 곳 요한계시록 19장 7-8절에서 사도는 교회가 이제는 자신을 단장하였고,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마침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신부인 교회와 연합하기 위하여 아버지 집을 떠나 땅으로 내려와 신부를 위하여 예비하신 장소로 신부를 데려가실 순간이 이르렀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자신을 단장하며 준비한다(계 7:14 참조). 다니엘은 마지 막 때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단 12:10)이라고 예언하였다. ‘빛난’은 영광을 의미하는 밝은 광채를 가리키며(마 13:43 참조), ‘깨끗한’은 교회의 순결과 충성과 신실함을 가리킨다.23) 세마포는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의로운 행실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계발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삶에 의해 생산되는 ‘의로운 품성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열매(result)다.’ (갈 2:20; 약 2:17-20 참조)24) 신부의 세마포 옷은 큰 음녀 바벨론의 붉은 자주빛 옷, 사치스러운 치장 등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계 17:4), 교회와 바벨론은 “그들의 행실과 특성으로 옷 입고 있다.”25) 교회의 옷은 의로운 행실과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상징하고 있는 반면, 바벨론의 옷은 불의한 행실과 사단과 같은 특성을 상징한다(계 18:5 참조), 비즐리-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두 도시의 이야기, 부제로는 음녀와 신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6)

 교회가 준비함에 있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라도, 본문은 교회가 자신의 행위의 옷으로 단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어린양의 신부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자신을 단 장하였다고 말한다. 어린양의 신부가 입도록 세마포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 옷이 자신의 공로나 자기 의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27) 흰 옷은 자기가 만들거나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여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의로운 행위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이 개념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도 강조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고 자신들을 덮기 위하여 “심혈을 바쳐” 그에게서 흰 옷을 “사라”고 초청하셨다(계 3:18).28)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제단 아래의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의 표로서 흰 옷을 받았다. 요한계시록 7장 9-14절은, 구속받은 자들이 입고 있는 희고 깨끗한 두루마기는 어린양의 피에 씻긴 결과로서 그렇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보좌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요청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속은 그들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상은 이사야의 예언에서 확인된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요한계시록 19장 8절은 이사야의 이 구절을 반영한다. 그것은 구원의 옷과 의로운 행위가 구속받은 자들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이지 그들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29)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에서 오는 소산물이다(엡 5:24-27 참조).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천사는 요한을 불러 다음의 말을 기록하라 한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칠복 중 네 번째 복이다(1:3; 14:13; 16:15; 19:9; 20:6; 22:7, 14). 분명 이것은 식탁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던 사람의 말을 환기시킨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눅 14:15) 예수께서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마 8:11). 이 즐거운 연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복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는 비록 그들이 고난과 고통을 당할지라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복받은 자들임을 일깨우게 하려 함이었다.

 요한과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이 축복의 확실함과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천사는 한 가지 더 첨가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되었다는 사실은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 곳에서 엄숙히 확약 받는다.30)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확실히 어린양의 신부가 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개념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통해서도 표현되었다(마 22:1-14; 25:1-13 참조). 비유적인 이 두 개의 표현, 즉 신부와 손님에 의하여, 요한은 재림시에 있을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을 두 개의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다. 혹세마의 언급에 의하면, 신부는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통하여 연합된 교회 전체를 나타내는 반면, 손님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축제의 초청에 개인적으로 응한 교회의 신자들이다.31)

 방금 자신이 들은 것 때문에 기쁨에 압도되어, 요한은 천사를 경배하려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천사는 즉각 그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요한에게 상기시킨다. 나는 너와 및 예수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명백히 하셨던 말씀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사람과 그 사람의 기별이 아무리 유력하다 할지라도 그는 경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인 하나님만이(계 14:7) 우리의 경배 대상이다.

 천사는 예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라고 부연하는데, 그것은, 리처드 보컴이 말한 대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32) 에베소 3장 2-6절에 의하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대리자들이다. 그들의 역할은 그분의 생애, 죽음, 부활, 하늘에서의 일 및 재림 등에 관 한 비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풀어놓는 것”이다.33) 보컴에 의하면, “예언의 성령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땅에 사는 그분의 백성에게 가져다주며, 땅에서 하늘의 계시의 말씀을 보증하며, 교회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주님께로 향하게 한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이 행하는 특별한 역할들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들을 교회 내의 특별한 그룹으로 구별한다(11:18; 16:6; 18:20, 24; 22:9).”34) 여기서 요한은, 자기가 그 선지자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묵시 가운데서 자신에게 전달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하여 증언한다(계 1:2). 요한은 자기 자신이 마지막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교회 내에서 선지자의 봉사가 일세기 이후에도 전 기독교 시대를 통하여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선지자의 봉사가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 가운데서 행해졌을지라도,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은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들로 부르신 사람들을 통하여 주신 예수의 증거를 특별히 소유하는 것이라고 매우 분명히 말한다. 결국, 교회는 요한의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 한 번 더 선지자를 갖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란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과 지도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그러나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을 불신실한 자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 중에 예언의 선물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예언의 기별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큰 만찬 (19:11-21)
 장면은 갑자기 결혼 잔치에서부터 사단적 삼위의 지휘를 받고 있는 땅의 군대와 땅의 임금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하늘 군대를 진두 지휘하는 용사요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바뀐다. 아마겟돈 마지막 전투의 절정이 여기에 소개된다. 종말적 바벨론은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다뤄졌다. 요한계시록 19장의 나머지 부분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성도들의 환희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선언으로 중단되었던 장면을 완성한다(계 19:1-10). 본문은, 마지막 때 배도한 종교 체제와 부적절하게 협력하였으며, 그 죄에 동참하였던 자들의 운명에 관한 질문에 답한다.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계 19:15)에 밟히고 공중의 청소부들에 의해 먹힐 것이라고 요한계시록 14장 17-20절에서 선언되었던 그 때가 이르렀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그 의 눈이 불꽃 같고.
 요한계시록 1장 1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헬라어 디아데마는 왕관을 말한다(계 2:10의 어구 해설 참조). 그리스도께서 많은 왕관을 쓰고 계시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윌리엄 바클리는 마카베오 상 11장 13절에서, 프톨레마이오스(Ptolemy)가 안디옥에 입성하였을 때 두 개의 왕관, 즉 디아데마를 썼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이 아시아의 군주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애굽의 군주임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요한 당시에 “한 군주가 한 개 이상의 왕관을 쓰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35)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이 비유적 표현에 대한 구약의 배경 본문은 이사야 63장 1-6절이다(계 14:19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
 최후의 전투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군대는 아마도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로 지칭된 성도들인 것 같다. 요한계시록 16장 12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요한계시록 1장 1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
 요한계시록 14장 19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요한계시록 14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전능하신 이.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는 사단적 삼위의 세 번째에 해 당하는 자로서, 요한계시록 13장 11-17절의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한 새로운 명칭이다. 요한계시록 16장 1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이 말은 고대 근동의 전후(戰後) 장면을 반영한다. 사람의 시체를 새나 동물들의 먹이로 처분하는 것은 완전한 패배 또는 수치스러운 굴욕을 의미한다(신 28:26; 삼상 17:44; 왕상 14:11; 16:4; 21:23-24; 겔 39:4, 17-21). 더욱이, “공중의 청소부들[새]에게 먹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 선언한 모세의 저주들 중의 하나였다.”36)
(주해)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요한계시록 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요한은, 요한계시록 4장 1절에서 목격하였던 것처럼 다시 한번 하늘이 열린 것을 목격한다. 이번에 열린 하늘의 문은 요한이 들어가도록 열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내려가시도록 열린 것이다. 여기에서 용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았을지라도, 백마를 타고 개가를 부르며 개선을 경축하는 로마 장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분은 충성과 진실로 칭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자신을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 3:14)으로 소개하셨다. 근동의 이름들은 품성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름들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으로 여기게 한다. 그분 은 예언의 말씀에 따라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중이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 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단 12:1) 과거에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관한 당신의 약속들을 신실히 지키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그분은 마지막 때 당신의 백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일어서실 것이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것은 그가 충성되고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전쟁이란 공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압제하며 피흘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싸우시려는 전쟁의 목적은 공의를 세우고 압제를 끝내기 위함이다. 그 전쟁은 백성을 위한 것으로서, 백성을 구원하여 그분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곳에 그들을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용사이신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 같았다. 이는 요한계시록 1장 14절에서 묘사된 그리스도를 상기시킨다. 이 비유적 표현은 그리스도의 심판 능력을 의미한다. 그분의 투시하는 통찰력 앞에 아무것도 숨겨질 수 없다. 그분은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 이 관들은 왕관으로서 왕권과 심판을 행사할 그분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분의 머리에 있는 많은 왕관들은 요한계시록 12장 3절의 용의 왕관들과 대조를 이룬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통치권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는 이 땅을 정복하고 있다는 사단의 반역적 주장 때문에 제한을 받으셨다(눅 4:6 참조),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당신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고전 15:25) “잠간”(계 12:12) 동안 그의 통치를 계속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제 종말적 바벨론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확고한 통치권의 문이 열린다. “모든 정사와 모든 권 세와 능력”(고전 15:24)을 멸하고 땅의 모든 왕국들의 왕과 주가 되시기 위하여, 그분은 “만 왕의 왕과 만주의 주” (계 19:16)로서 오신다. 그분의 다리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한 이름이 쓰여 있다. 무슨 이름이 쓰여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는 이름”을 그에게 주셔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 하게 하셨다고 하였다(빌 2:9-11).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두 번이나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계 17:14; 19:16)로 언급되었다. 이 특별한 이름은 그리스도를 우주에서 유일한 참된 우주적 왕이심을 시사한다.39)

 용사이신 그리스도의 옷에는 피가 뿌려졌다[dipped in blood, 적셔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 이사야의 말을 상기시킨다. 에돔을 벌하고 돌아오신 그분은 ‘화려한 옷을’ 입으셨다. 그분은 ‘그 의복을 입고 장엄하게 보이며 큰 능력으로 걷는’ 분이시다.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 63:1-3).
여기서 그리스도의 옷이 피로 얼룩졌다는 것은 다소 의외다. 왜냐하면 “전쟁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0) 이는 분명 박해를 당하나 충성하였던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피다 (계 17:6).41)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피를 신원하며 그들의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하여 오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5절의 인유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다.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땅의 거민들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은,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과 능력으로 오심을 암시할 것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보증을 전한 예언적 기별을 지칭한다. 그 이유는 요한 자신을 포함하여(계 1:9) 성도들이 고난과 격렬한 핍박을 당한 것은(계 6:9; 20:4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체현(體現)이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압제받고 핍박받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며, 또한 예언의 말씀이 최종적으로 확실히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오신다.
요한계시록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따른다. 이것은 분명 요한계시록 17장 14절을 가리킨다. 이 하늘 군대는 아마도 “동방에서 오는 왕들”, 즉 성도들일 것이다(계 16:12). 그들은 이 세상 역사의 최후 전투에서 그리스도의 지휘를 받는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계 17:14) 자들이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계 19:8)를 입은 어린양의 신부에 대한 은유로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해 준다. 실제로 성도들은 땅에서 승천을 기다리는 반면(살전 4:16-17 참조), 영적으로 그들은 이미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공유한다(엡 2:6 참조).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 요한계시록에서 일관되게 “땅에 거하는 자들”(계 6:10; 8:13; 11:10; 13:8, 14; 14:6 참조)로 언급되는 자들과 대조된다. 성도들은 이제 그들의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지휘하에 “백마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42) 비록 군대가 그리스도를 수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심판은 오직 그분의 몫이다.43)
요한계시록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요한계시록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백마 탄 자를 묘사하면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일찍이 사용하였던 이미지들에 의존한다. 그는 독자들이 백마를 타고 있는 용사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묘사되었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열국들을 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계 19:21 참조) 분명 요한계시록 1장 16절의 인유다. 구약에서 검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무기다(시 149:6). 그분은 철장으로써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다(시 2:9; 계 2:27; 12:5 참조). 요한은 분명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 인을 죽일”(사 11:4)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한싹 곧 메시야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 곳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 메시야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는다. 요한계시록 14장 17-20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 곳에 나온다. 악인들의 운명이 포도주 틀을 밟는 것에 의하여 은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다음의 사실을 지적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용사/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악한 군대들의 멸망이 확실하고 최종적임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칭호를 쓰셨다. 이 칭호는 반역한 인간에게 그분의 영원한 절대적 권세와 권위를 선포한다. 이 칭호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곳은 요한계시록 17장 14절이며, 그 곳에서 그분은 모든 것을 정복하시는 어린양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9장요한계시록 17장에서 소개된 장면을 완성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 19: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요한계시록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이제 최후의 싸움에서 종말적 동맹이 완전히 와해될 것이다. 요한은 큰 음성으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땅의 군대들의 고기를 먹으라고 외치는 한 천사를 목격한다. 이 비유적 표현은 에스겔의 묵시에서 가져온 것으로, 곡(Gog) 땅의 이방 나라들의 심판에 관한 묵시인데, 이들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가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을 위하여 마련된 희생 축제에 의해 묘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너희가 용사의 고기를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 내 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사를 배불리 먹일지니라 하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9:17-21) 하나님의 큰 잔치에 참여하라고 맹금(猛)들에게 발한 초청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라는 이전의 초청과(계 19:9)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 같은 장에서 두 종류의 식사가 언급된 것은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축복의 대상인 반면, 회개치 않은 자들은 공중의 새들의 먹이가 되는 무시무시한 잔치의 대상이 된다.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받아들이든지 그리스도의 대적들과 한 편이 되어 “청소부의 메뉴”가 되든지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는다.44)

 새들은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는 초청을 받는다. 즉,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의 고기를 먹으라는 것이다(계 13:16 참조). 말과 사람의 고기를 먹는 청소부에 관하여 묘사한 이 무시무시한 광경은 에스겔의 묵시를 더 한층 반영한다(겔 39:17-21), “열국으로 나의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 목록에 의하면, 최후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적인 인간은 모든 사회-경제의 계층이다.45) 이 그림은 여섯째 인(印) 장면의 인유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얼굴에서 자신들을 숨기고자 애쓰는 자들 은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다(계 6:15-17). 두 본문 간의 유사성은 재림과 관련하여 악인들이 멸망당할 것임을 나타낸다. 마지막 때 배도 한 종교 체제인 바벨론은 붕괴된다.

 그러나 최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요한은 이제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7 장 14절과 유사하다. 거기에는 땅의 임금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울 것이나 어린양이 저희를 이기실 것이라고 하였다. 여섯째 재앙을 쏟아 붓는 장면에서, 사단적 삼위는 밀사들을 온 세 상에 보내어 자신들과 자신들의 일을 위하여 일해 줄 나라와 세상의 지배 세력들을 모았다(계 16:13-14). 그들의 기만적인 영향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지배적인 종교-정치 권세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여 싸울 목적으로 사단적 삼위의 지도를 받아 세계적 동맹을 형성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추종자들을 패배시키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하여 특단의 결심을 하고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으로 모인다(계 16:16). 그러나 그들의 동맹은 매우 짧은 시간만 지속된다.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요한계시록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마지막 전쟁의 결과는 세계적인 동맹체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다. 용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계적인 동맹체를 완전히 붕괴시키기 위하여 친히 현장에 나타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 배도적 종교 체제를 “그 입의 기운으로 ...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살후 2:8)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을 기만하여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의 우상을 경배하게 한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다. 그러므로 본문은 요한계시록 13장 13-17절의 주제를 결론짓는다. 요한계시록 13장 4절에서, 짐승을 경배한 자들은 물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바로 어린양이시요 용사이신 그리스도시라고 요한계시록 19장은 대답한다. 그분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에게 궁극적 패배를 안기실 것이며, 이들은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0-15절에도 나오는 불못은 문자적으로 영원히 타는 지옥이 아니라, 완전한 멸망을 묘사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 곳은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반역이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멸절되는 장소다. 백성 중 나머지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으로 죽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재림시 그리스도의 권능의 영광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다(살후 1:8-10). 이 시점에 온 땅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시체로 가득 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멸망에 대한 기괴한 묘사는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었다는 말로 끝맺는다. 반역한 인간으로 구성된 전 세계적인 동맹체는 최후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모인다. 그러나 그들은 총체적이 고도 완전한 패배를 당할 것이다.

 우주적 쟁투가 이제 막 끝나려 하고 있다. 바벨론은 멸망되었고, 사단의 동맹체는 둘 다 불 못에 던져졌고, 그 지지자들은 죽임을 당하여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사단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 20장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19:1-21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19장17장에서 시작하여 20장에서 끝나는 큰 심판 장면의 한 부분이다.46) 악한 세력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된 것의 역순으로 멸망되었다. 심판은 요한계시록 12장의 용에서 시작하여, 13장의 두 짐승으로, 그리고 17장의 음녀 바벨론의 순으로 끝난다. 심판에 상응하는 궁극적 멸망은, 일곱째 재앙에서 선포된 대로(계 16:17- 21), 마지막 때 배도적 종교 체제인 바벨론으로 시작하여(계 17-18장),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형벌이 뒤따르며(계 19:20), 마지막으로 사단 자신이 불못에 던져진다(계 20장).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여러 상징적 방식에 의하여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묘사한다. 각 상징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성격을 각기 다른 측면에서 제시한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전 반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혼인 잔치에 빗대어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혼인은 19장에서 선포될 뿐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더욱 발전된다. 19장 후반부는 요한계시록 16장 12-16절에서 소개되었던 아마겟돈 전쟁을 끝낸 용사요 왕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한다. 엘렌 화잇도 그리스도께서 흰 말을 타시고 하늘의 용사로서 나타나시는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의 장면은 바로 아마겟돈 전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확증한다. “아마겟돈 전쟁은 곧 일어날 것이다. 그 옷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이름이 쓰인 분은 곧 하늘 군대를 이끌고 나가실 것이다.”47)

 요한계시록 19장은 성도들과 관련하여 시종여일한 변화를 보인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다. 혼인은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의 연합을 의미한다.

 둘째,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그들은 초청받은 손님들이다. 마지막으로 19장 11-21절에서, 성도 들은 흰 말을 탄 군대다. 분명히 그들은 여전히 혼인 예복을 입고 있다. 이러한 은유의 변화는 본 장에서 그리스도 및 성도들과 관련하여 다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48)

 용사이신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마지막 때 배도한 종교 체제는 종말을 맞는다. 이 종교 체제는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살후 2:4) 자신을 높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악의적으로 압제하고 핍박하였다. 그것은 또한 악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하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은 자들”(살후 1:8)의 종말을 초래하였다. 주의 면전에서 능히 설 수 없는 악인들은 스스로를 숨기려고 한다(계 6:15-17 참조), 그리스도의 찬란한 강림은 마침내 그들을 멸망케 한다(살후 2:8; 살후 1:8-10 참조),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는 바울의 설명은 논리적이다. 흑암의 군대들이 멸망함으로써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은 구원을 얻는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고초와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에게 우주적 드라마가 그 종국에 이르고 있음을 보증한다. 요한계시록 전체의 초점은 최후의 전쟁이 아니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다. 혼인식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준비해야 한다. 하늘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완전한 연합을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반면, 교회는 오랫동안 고대하였던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준비하고 있다. 혹세마(Hoeksema)는 이렇게 말한다. “신랑과 함께 있게 될 날을 고대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날에 순결하고 흰 성도들의 의의 세마포 옷을 입고 나타나기 위하여, 은혜로 바벨론의 부패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킨다. 그들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준비한다.”49) 그러므로 그러한 복스러운 소망을 마음에 품고 있는 우리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딛 2:12-13) 될 것이다. 그 복스러운 소망은 우리를 자극하여 임박한 혼인의 날을 간절히 고대하게 하며, 전 성경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의 중심이 되시는 분을 맞을 준비를 시킬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살후 1:10)실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다(요일 3:2). 이 시점에서 요한계시록 19장과 관련하여 행한 리샤르 레만(Richard Lehmann)의 호소는 매우 적절하다. “그 찬란한 승리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위엄 가운데서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을 보자마자, 극악무도 한 세력들의 종국이 선언되고 구속받은 자들의 승리가 선포되는 것을 듣자마자, 독자들은 요한과 하늘의 존재들과 하나되어 엎드려 경배한다. 자신들의 연약한 목소리를 강력한 천둥소리 같은 다른 존재들의 소리와 합하여 ‘할렐루야!’를 외침으로 하늘의 초청에 반향하는 것이다.”50)

주(註) ——————
1.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68-169.
2. Mounce, 340. 참조
3. Bauer. 198.
4. Ladd, 249.
5.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Committee on 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252-253 참조.
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77.
7. Erdman, 148: Harrington, 226: Mounce, 342: Morris, 222:Beasley-Murray, 276.
8. LaRondelle. How to Undei'stand the End-Time Prophecies, 287-290 참조(그는 Beasley- Murray. 182를 따르고 있다): 그의 견해를 더 많이 포괄적으로 다루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나는 그의 전반적인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가 주석적 그리고 문맥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요 철학적인 것 같기 때문이다.
9. Pfandl. 320.
10.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62; Beckwith, 729-730.
11. Aune, Revelation 17-22、1039: Caird, 238: Thomas, Revelation 8-22, 377.
12. 더 깊은 논의를 위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7:876-877: Committee on 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244-256을 보라. 또한 Pfandl, 315-322를 보라.
13. Fiorenza, Revelation, 102.
14. Krodel. 306: Beale. 916.
15.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70.
16. Mounce, 338,
17. Ladd, 246.                                                                                             
18. Johnson, 571.
19.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72에서 지적되었다.
20. Mounce. 340.
21. Richard Lehmann. “The Two Suppers.”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215, 221 참조.
22. Ladd. 248-249.
23. Johnson, 571.
24.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7:872.
25. Ladd, 249: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435.
26. Beasley-Murray. 315,
27. Hughes. 200: Hoeksema, 618 참조.
28.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122,
29. Morris, 221.
30. Ladd. 250.
31. Hoeksema. 618.
32.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60.
33. Paulien. The Bible Explorer, 2.1.
34.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60.
35.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79.
36. The Seventh -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75.
37.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2:178: Mounce, 345.
38.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rnentary 7:873.
39.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83.
40. Lehmann, 217.
41. Caird, 243.
42.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 132,
43. Lehmann. 217.
44. 상게서. 221.
45. Mounce, 338.
46. Lehmann, 217.
47. White, Testimonies for the Church, 6:406. 아마겟돈에 대한 화잇의 견해를 보려 면, LaRondelle, “Armageddon: History of Adventist Interpretations,”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7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444—449를 참조하라.
48. Beatrice Neall은 개인 서신을 통해 이런 형식에 내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49. Hoeksema, 623.
50. Lehmann.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