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짐승 (13:1-18)
 한계시록 12장은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과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는 용의 결심으로 끝을 맺는다(12:17), 본 단원은 마지막 때에 용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최후 시도에서 용의 동향을 기술한다. 가능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용은 두 동맹자, 곧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13:1-10)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13:11-18).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13:1-10)
 다음 부분을 건전하게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점은 구조적 틀을 이해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 1-4절다니엘 7장의 묵시에 기초한 짐승의 일반적인 묘사를 근거로, 최후의 위기에서 등장할 사단의 동맹자 중 첫째 짐승을 소개한다. 요한계시록 13장 5-7절은 마흔두 달 동안의 그의 활동을 묘사하며 바다 짐승의 신원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 두 성경절은 사상 면에서 유사하다.1) 요한계시록 13장 8절은, 지상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최후의 쟁투에 관한 일종의 서론적 역할을 한다. 여기에 대한 부가적 설명은 13장 11-18절에 나타나 있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그가 섰다.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은 흠정역의 ‘내가 섰다’(헬, 에스타쎈 estathsèn) 보다는 ‘그가 섰다’(헬 에스타쎄 estathse)로 읽는다. 흠정역에 의하면, 요한은 바다 모래 위에 서서 물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고 있다. ‘그가 섰다’라는 독법이 아마도 가장 바른 번역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독법은 후기의 헬라어 사본에 기초한 흠정역과는 반대로 주로 초기의 헬라어 사본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바다 모래 위에 섰다’라는 구절은 그의 최초의 동맹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기다리며 서 있는 용을 가리킨다.
한 짐승.
 헬라어 쎄리온(thérion)은 야생 동물, 야수, 괴물 등을 포함한 잔인한 성격의 존재를 의미한다.2) 요한계시록 13장 1-2절의 짐승에 관한 묘사는 바다 괴물의 모습을 암시한다. (계 12:3 어구 해설 참조).3) 머리가 여럿인 괴물은 시편에 언급되어 있다(74:13-14). 세계 제국을 대표하는 짐승에 관한 상징은 다니엘서로 거슬러 올라간다(단 7:17, 23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은 정치 세력에 대한 상징이다. 사단은 이 세력을 통하여 일반적으로는 전 역사에 걸쳐, 특별히 마지막 때에 활동적으로 일한다(계 11:7; 13:1-18; 14:9-11; 15:2; 16:2, 10, 13; 17:3-17; 19:19-20; 20:4, 10).
바다.
 요한계시록 13장 1절의 괴물 같은 짐승이 나오는 곳으로 바다를 언급한 것은 분명히 다니엘 7장 2-3절에서 온 것이다. 이는 이 복합 짐승이 다니엘의 묵시에(단 7:3-7) 나오는 네 짐승의 모든 특성들을 통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구약에서 바다는 종종 바다 괴물들의 거처를 상징한다(욥 26:12-13; 시 74:13-14; 사 27:1; 51:9-10; 겔 32:2). 이 바다로부터 악한 원수의 세력들이 나와 이스라엘을 압제하였다(계 12:3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무저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계 11:7; 17:8).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요한은 동일한 짐승을 언급한다(그 짐승은 머리 일곱과 열 뿔이 있으며, 참람한 이름들로 가득 차 있다; 17:3, 7, 12). 이번에 그 짐승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것으로 되어 있다(17:8)이것은 바다와 무저갱 또는 밑이 없는 못은 요한계시록 13장 1절의 짐승이 나오는 곳과 동일한 상징적 장소를 암시하는 것 같다(무저갱이 사단과 귀신들의 처소라는 개념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9:1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서, 음녀 바벨론이 앉아 있는 ‘많은 물’“참람된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짐승과 평행을 이루는데, 이 짐승 위에 여자가 앉아 있다 (17:3).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로 알려졌는데, 그것들은 분명히 짐승의 열 뿔과 동일한 것이다(17:12-18). 유게니오 코르시니(Eugenio Corsini)는 이 곳의 바다는 “밑이 없는 심연이라는 우주적이며 역사적인 실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4) 요한계시록 13장 1절의 짐승이 나온 바다가 ‘통상적으로 폭군들이 등장하는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다는 결론은 합리적이다5)(계 17:15 참조).
열 면류관.
 짐승의 뿔 위에 있는 면류관은 왕관이다. 면류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죽게 된.
 이 곳의 ‘죽게 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파조(sphazó 살해하다, 도살하다, 죽이다)다. 동일한 헬라어가 어린양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계 5:6, 9, 12; 13:8). 이것은 짐승의 머리의 죽게 된 상처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상처와 흡사하였음을 암시한다. 또한 동일한 단어가 하나님과 복음에 충성한 결과로 죽게 된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계 6:9; 18:24), 신약의 다른 곳, 즉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이 단어는 그의 형제 아벨을 ‘죽인’ 가인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요한계시록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참람.
 신약에서 참람은 하나님과의 동등을 주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요 10:33; 마 26:63-65 참조). 바다 짐승의 참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13장 6절에서 분명하다. 그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하였다. 조지 래드가 말하였듯이, 짐승이 자행한 참람함이란 “짐승 자신이 자기의 신격화를 주장함으로 신성을 훼손시킨 것”을 의미한다.6)
마흔두 달.
 요한계시록에서의 마흔두 달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하여 일정하게 사용된 1260일과는(11:3; 12:6 참조)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압제 세력에 배당되었다(11:2; 13:5 참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538년을 교회가 교권을 확립한 해이며, 1260년 기간의 기산점으로 본다. 그리하여 1798년이 이 예언 기간의 끝이 된다. 이 예언적 기간의 상징과 역사적 적용을 위하여 11장 2절12장 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땅에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어린양의 생명책.
 요한계시록 3장 5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속담 같은 이 독법은(흠정역, 개 정표준역 [RSV] 및 새 미국표준성경[NASBI) 4세기의 시내 사본을 포함한 몇 헬라어 사본에 기초되어 있다. 이 같은 독법은 핍박자인 짐승의 운명을 강조한다. 다양한 독법이 새 국제역과 (NIV) 새 영어성경에서(NEB) 발견된다. “칼을 맞아 죽을 사람은 칼을 맞아 죽을 것이다.” 이 같은 독법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포함한 다른 사본들에 기초되어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의 운명을 강조한다. 비록 만족할 만한 해결책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흠정역, RSV, NASB 등의 독법이 아마도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도한 백성과(렘 15:2) 애굽에 대한 심판과 관련하여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언한 것을 반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렘 43:11). 이것은 마태복음 26장 52절에서 하신 예수님의 속담적인 말씀과 상응한다.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주해)
 교회를 멸하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좌절되자, 사단은 이제 그의 분노를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에게로 향한다.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이제 용은 그의 첫 동맹자를 불러내어 그에게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 이어서 요한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을 본다. 짐승이 나온 근원인 바다는 다니엘 7장의 묵시를 생각나게 한다. 그 곳에서 선지자는 네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7:3),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후에 요한계시록 17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17장은 이 바다 괴물의 신원에 대하여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요한의 묵시에서, 물에서 나오는 짐승의 실제적인 모습이 그 몸의 다양한 부위와 함께 소개된다. 그 짐승은 열 뿔과 일곱 머리가 있다. 뿔은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계 17:12), 바다 짐승의 열 뿔은 다니엘의 묵시에 나오는 넷째 짐승의 열 뿔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로마제국의 붕괴 후에 일어난 왕국들을 상징한다(단 7:7, 23-24; 계 17:12 참조). 그러나 윌리엄 G. 존슨이 말하듯이, 용의 일곱 머리는 “사단이 각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왕국들”을 대표한다.7) 짐승은 역사에서 차례차례로 등장하는 그의 머리들을 통하여 활동하였다. 그 머리들 중 하나가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짐승은 활동을 멈추었다. 미래에 그 머리가 낫게 될 때, 그 짐승은 그의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다니엘 7장의 짐승들이 총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8) 바다 짐승은 요한계시록 12장 3절의 용과 똑같은 수의 머리와 뿔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 됨을 모방하여 용과 바다 짐승의 하나 됨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 이듯이, 용과 바다 짐승도 하나다.”9)

 짐승은 그 열 뿔 위에 열 면류관을 가졌는데, 그것들은 정치적 권위의 왕관이다. 그러나 용의 머리 위에는 일곱 면류관이 있는 반면, 짐승의 열 뿔 위에는 열 면류관이 있다. 우리는 일찍이 용의 머리에 있는 일곱 면류관은 세상에 대한 완전한 권위와 권세를 가졌노라는 사단의 거짓 주장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바다 짐승의 열 뿔 위에 있는 열 면류관은 용이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을 통하여(계 17:12-13, 17 참조) 바다 짐승에게 준 권세와 보좌와 큰 권위를 상징한다 (계 13:2). 이것은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19:12)을 쓰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이신(계 17:14) 그리스도에게 대립하여 서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짐승들의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묘사된 짐승도 참람 된 이름들로 가득 차 있다(17:3). 요한계시록 13장 6절에서,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였다. 래드가 설명하였듯이, 짐승의 이러한 신성 모독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16:9)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내뱉는 저주가 아니다. 그것은 짐승 자신이 자기의 신격화를 주장함으로 신성을 훼손하는 것이다.”10) 이 세력은 하나님의 대권, 또한 그분과의 동등함을 주장한다. 이것은 이 사단적 동맹자가 정치 세력인 반면, 동시에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적대하는 종교적 세력임을 강력히 암시한다(살후 2:3-4 참조), 짐승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경배와 땅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한다(계 13:3-4, 12).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은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모습과 특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세계를 다스릴 제국들의 승계를 대표한다. 짐승의 몸은 표범의 몸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다. 이 곳에 여러 가지가 등장한다. 우선, 바다에서 올라온 합성적 짐승의 이미지는 다니엘의 묵시에 기초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 7장은 바다 짐승과 그의 활동을 밝히는 열쇠를 제공한다. 다니엘서에서 짐승은 통치권을 대표하기 때문에, 바다 짐승에 관한 묘사는 사단의 이 동맹자가 일련의 통치 권력, 즉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권력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는 그 앞에 있었던 모든 권세들의 정통 후계자다. 이 바다 짐승의 활동들은 다니엘의 넷째 제국인 로마제국의 붕괴 얼마 후에 명백히 드러난다.

 바다 짐승은 자신을 호출한 용으로부터 권세와 그의 보좌와 큰 권력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권세를 받으신 것처럼(계 2:27), 바다 짐승은 용의 권세를 받았다. 사단은 이미 이 세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 칭하였다(요 12:31; 14:30; 16:11).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그는 이 세상의 통치권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 는 자에게 그 통치권을 주노라”고 하였다(눅 4:6), 그가 전 역사를 통하여 땅 위에 행사해온 능력과 권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이제 로마제국을 경유하여 바다 짐승에게 넘겨졌다. 악한 삼 두정치(三頭政治)의 첫번째 주자인 이 짐승의 활동들을 통하여 사단은 지상 역사의 마지막 때 세상에 대한 완전한 능력과 권세를 행사한다.
요한계시록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요한계시록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다니엘의 묵시에 등장하는 상징적 작은 뿔에 의해 바다 짐승의 모습을 묘사한 후, 요한은 이제 이 바다 괴물의 신원에 대하여 추가적 설명을 한다. 그의 머리 중 하나가 죽게 되었다. 짐승이 ‘죽게 되었던’ 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5장 6절의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는 표현과 같다(각각의 죽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는 동일하다).11) 그러므로 짐승의 머리의 죽게 된 상처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상처와 흡사하다.

 짐승의 존재와 그의 활동들은 그의 머리들이라고 밝혀졌다. 짐승은 존재하였었고, 전 역사를 통하여 그의 머리들이 차례차례로 활동하였다. 머리들 중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을 때, 그 짐승의 통치와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 곳에서 죽게 된 상처가 짐승의 머리들 중 하나인 반면, 요한계시록 13장 12, 14절에서 짐승 자신은 죽게 된 상처를 받았다가 낫는다. 장차 이 머리가 치유되며 짐승은 자신의 이전 역할과 활동들을 재개한다. 일곱 머리 중 어느 것이 상처를 받아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아마도 일곱째 머리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7장 9-10절에 따르면, 일곱째 머리는 요한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고, 요한 당대의 로마제국 이후에 등장할 것이었다. 요한계시록 13장 14절에 의하면, 죽게 된 상처는 ‘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짐승은 그의 죽게 된 상처가 나았기 때문에 부활을 경험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위작(僞作)이다. 죽게 된 상처가 나음으로 세계적 추앙과 경외심을 끌어낸다. 왜냐하면 온 땅이 이상이 여겨 짐승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추앙으로 짐승과 용(짐승에게 권세를 부여했던)이 경배를 받는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누가 짐승과 같으뇨?’라는 수사학적 질문은 구약의 ‘누가 하나님과 같으뇨?’에 대한 모방이다(출 15:11; 시 35:10; 미 7:18). 하늘에서 용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미가엘로 언급된 것은 특별히 의미심장한데(계 12:7), 미가엘은 히브리어로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라는 의미다. 최후의 전쟁을 준비함에 있어 용이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또 다른 암시가 여기에 있다. ‘누가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는 질문은 ‘아무도 없다’는 답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요한계시록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요한계시록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다니엘의 묵시에 의해 바다 짐승을 일반적으로 서술한 다음, 요한은 이제 짐승의 활동과 특징들을 밝힌다. 짐승은 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하는 입을 받았다. 이것은 다니엘 7 장 8, 25절에 나오는 넷째 짐승, 즉 로마제국 이후에 일어나는 작은 뿔의 활동들의 인유다. 짐승이 그의 권세를 행사하도록 할당된 시간은 마흔두 달이다. 이것은 상징적 작은 뿔을 묘사한 다니엘 7장 25절의 또 다른 인유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이 기간은 삼 년 반에 해당한다.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서 마흔두 달은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짓 밟도록 할당된 기간이다(계 11:2의 주해 참조). 이 기간은 용이 광야에 있는 여자를 쫓는 ‘1260 일’과 같다(계 12:6, 13-16). 이 모든 것은 최후의 쟁투에서 중심 역할을 할 정치 종교 세력이 약 1200년간 이상의 중세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해할 것을 의미한다. 역사주의적 해석자들은 교회가 교권을 확립하여 그 예언적 기간을 시작한 해를 538년으로 잡는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의 사건들과 교황의 포로로 교회의 종교 정치적 억압 세력이 흔들리게 된 1798년이 마흔두 달 기간의 끝을 장식한다.

 마흔두 달 동안에 행할 그들의 활동들은 그리스도의 삼 년 반의 지상 봉사와 평행을 이룬다. 총 마흔두 달의 특징은 거절과 핍박이었다. 중세 기간 동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베 옷을 입고 1260일 간”을 예언하였다(계 11:3).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께서 삼 년 반 충실히 증거하셨던 것을 경험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요 15:20)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요한은 바다 짐승의 신성 모독적 성격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본 장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로(계 13:8, 12, 14) 언급된 악인들 과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한다. 비유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계 11:6; 5:9-10 참조), 이 곳에서 하나님의 거처 혹은 장막이 ‘하늘에 거하는 자들’과 동등시 됨은 특히 흥미롭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은(엡 2:6)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하나님의 장막임을 의미한다.12) 이 원수의 세력이 쏟아 붓는 신성 모독은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하고 충성된 성도들을 겨냥한 것이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허락을 받는다. 마흔두 달이라는 이 상징적 기간 동안, 비록 악인들보다 수가 적고, 압제당하고, 핍박받을 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계 12:17 참조).

 짐승은 또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는다. 짐승에게 이렇게 권세를 주는 것은 요한계시록 13장 2절의 반복으로,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짐승에게 위임하였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14장 6절의 종말적 복음이 전파되는 곳과 같은 지역이다. 이와 같이 바다 짐승은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들이 전하는 복음과 경쟁되는 복음을 제공한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다니엘의 묵시에 의해 마흔두 달 동안 행동할 사단의 동맹자 중 첫째의 신원과 활동들을 밝힌 요한은 독자들의 주의를 종말의 때로 돌린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그를 경배할 것이다. 여기에서 짐승의 활동과 지상 역사의 마지막 때 그가 받을 도움이 소개된다.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함에 큰 권세와 능력을 행사했던 그 동일한 세력이 다시 세상을 정복하고 종말 때에 온 세계의 충성을 이끌려고 노력할 것이다. 최후의 싸움은 하나님의 참 경배자들, 곧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과 짐승을 경배하고 그 이름들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자들 사이에 확실한 경계선을 그을 것이다(17:8 참조), 이것은 공중을 날아가면서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는 천사의 대 경고를 생각나게 한다. 즉, 첫째 천사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경배를 돌리라고 촉구하면서 짐승에게는 경배하지도 충성하지도 말라고 경고하였다(계 14:6-12). 여기에 언급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최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 상의 죽음을 통해 그분이 얻으신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부분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라는 호소로 끝을 맺는다. 이 호소는 그리스도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주신 각 기별의 결론적 권고를 반향한다.

 각 사람은 사단의 동맹자들 중 첫째와 관련하여 이 곳에서 말씀된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 호소에 이어 두 개의 잘 어울리는 경구로 표현된 세계적 경고가 뒤 따른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첫 경구는 하나님 백성의 운명에 관하여 강조한다. 그들의 충성되고 신실한 삶은 종종 투옥과 죽음이 수반될 것이라고 진술한다(계 12:11 참조), 그러나 핍박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 둘 째 경구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의 운명에 관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저항이 아니라 인내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최종적인 판결은 하나님께 있다.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그들이 당할 심판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한 위해(危害)와 압제에 비례할 것이다(계 18:6-8 참조). 그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은 인내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 있나니라는 말은, 최후의 위기 때 사단적 삼위가 땅에 거하는 [모든]자들의 충성을 자기 편으로 이끌려고 애쓸 때, 하나님의 백성은 인내와 참음으로써 하나님께 흔들림 없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그 특징이 됨을 보여준다(계 14:12 참조).

 사단의 동맹자들 중 첫째는 누구를 혹은 무엇을 대표하는가? 바다 짐승과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나타난 유사성은 이 원수의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활동에 정반대되는 세력임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물에서 나오심으로 자신의 봉사를 시작하신 것과 꼭 같이(눅 3:21-23 참조), 바다 짐승도 바다에서 나옴으로 행동을 개시한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신 것같이 (요 14:9), 짐승은 용과 하나 되었다고 묘사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권세를 받으신 것 같이(계 2:27), 바다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는다. 그리스도와 짐승은 그들의 이마에 왕관을 쓰고(계 19:12), 둘 다 검을 사용하며(계 1:16 참조), 둘 다 뿔이 있다(계 5:6). 짐승의 마흔두 달의 활동은 예수님의 삼 년 반의 봉사와 같다. 그리스도와 바다 짐승은 둘 다 죽게 된 상처를 받는다(계 5:6). 그 후에 다시 살아 더 큰 권세로 부상(浮上)한다. 둘 다 죽게 된 상처가 나은 후 경배를 받는다(마 28:17 참조). 둘 다 추종자들이 있으며, 그들의 이마에 쓴 것이 있다(계 13:16; 14:1), ‘누가 짐승과 같으뇨?’라는 외침은 요한계시록 12장 7절의 미가엘(누가 하나님과 같으뇨?)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바다 짐승은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에 대한 전 세계적 권세를 발휘한다(계 13:7 참조).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사단의 동맹자들 중 첫째의 신원은 그리스도의 지상봉사를 모방하는 배도적 종교 체제임을 밝힌다. 이 종교 체제가 한 짐승의 상징속에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정치적 권세와 세력이 종교라는 가면 아래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이 세력이 자행할 활동들은 다니엘 7장의 네 번째 짐승 이후에 일어나는 작은 뿔의 활동들을 상기시킨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다니엘 7장요한계시록 13장은 로마제국이 붕괴된 후에 일어나 그것을 계승할 한 세력을 가리킨다. 작은 뿔과(단 7:25) 바다 짐승의 활동 기간은(계 13:5) ‘마흔두 달’ 혹은 ‘1260일’이라는 예언적 기간으로 제한되었다. 다시 말하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마지막 활동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 1200년 이상의 활동에 뒤이어 나온다는 것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 짐승을 요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하였던 제국 로마를 상징한다고 여긴다. 짐승의 죽게 된 상처가 네로 레비비두스(Nero revividus, 부활한 네로) 신화에 적용된다. 그들은 짐승의 ‘죽게 된 상처’ 혹은 ‘시방 없어진’ 짐승의 존속 기간을(계 17:1 참조) 네로의 자살과 그 상처의 회복으로부터 1세기 말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개된 핍박까지로 보곤 한다.13) 최초의 독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의미심장했다고 본 주석의 ‘서론’에서 밝힌 바 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 회중들에게 보내진 서신으로 그들의 직접적인 역사적 환경과 상황을 다루고 있었다.

 “1세기 말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상징들에서 당대를 위한 의미를 발견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존슨의 말에 확실히 동의할 수 있다.14)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슨 은 이렇게 말한다.

인정받지 못하는 소 종파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대적하여 일어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그리고 그 후 200년 간 그들을 무겁게 짓누른 제국 로마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들과 그 음모들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3장에서 요한계시록 13장에 이르는 강력한 운동을 주시한다. 전자에서 국가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그러나 후자에서 국가는 사단의 대리자가 되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묘사된 종교와 국가의 통합은 그 들의 현재 경험들을 반향하였을 것이다.15)
1세기나 그 후의 그리스도인들이 13장의 사건을 어떤 식으로 적용했던지 간에, 요한계시록 자체는 바다 짐승과 관련된 예언의 성취가 요한 당대를 넘는다고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바다 짐승이 오로지 종말 때의 종교적-정치적 체제임을 밝히는 열쇠를 제공한다. 다니엘 7장에 기초한 복합 짐승과 그것의 일곱 머리를(계 17:9-11 참조) 이 체제로 묘사한 것은 바다 짐승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했던 세상의 국가적, 종교적 모든 권세들을 대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출애굽 시에 세워진 광야 교회로부터 재림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였다.16)

 짐승은 역사의 다른 기간에 머리들 중의 하나로서 존재하였다. 각 머리는 “소정의 기간을 다스리는 사단적 세력의 부분적 성육신이다.”17) 특히 요한계시록 17장은 바다 짐승의 신원에 더 많은 빛을 제공한다. 천사는 요한에게 짐승의 일곱 머리는(계 13:1 참조)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였고, 세상을 정복했던 일곱의 연속적인 무신론적 세속 세력들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계 17:9-11). 더욱이 천사는 그 제국들 중의 다섯(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은 요한 이전의 때를 통치하였고, 여섯째인 로마는 요한 당대의 세계적 권력이었으며, 일곱째는 요한의 관점에서 미래에 등장할 세력으로 설명한다. 이 후에 “시방은 없으나”라는 구절이 뒤따르는데(계 17:11), 이것은 죽게 된 상처의 시기가 될 것이다(계 13:3).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7장 11절에서, 천사는 요한에게 마지막 때 종말적 바벨론을 섬기는 세계적 정치 권세는 여덟 번째 머리가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덟 번째 머리는 실제로 죽게 된 상처가 나은 후 마지막 때에 재등장하는 일곱 번째 머리다. 요한은 여섯 번째 혹은 로마 머리 시대에 살았다. 일곱 번째는 막 무대에 등장하려는데, 요한계시록 13장에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일곱 번째 머리 혹은 ‘시방은 없으나’라는 국면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덟 번째 머리, 곧 다시 살아난 후의 일곱 번째 머리는 그 연합된 열 왕국과 함께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계 17:12-13 참조). 그것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 세계 무대에 등장할 것이다.

 본문은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 짐승이 이교 로마제국(여섯 번째 머리; 계 17:10 참조)의 후계자로서 일곱 번째 머리 국면에 와 있다고 말한다. 로마제국의 분열 이후 일곱 번째의 머리 국면에 잘 들어맞는 유일한 역사적 기간은 중세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종교-정치적으로 압제한 기간이다. 중세 시대에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 짐승과 그의 활동들의 묘사에 걸맞는 유일한 종교-정치적 세력은 교황의 교권(敎權)적 독재주의로 6세기에 교권을 확립 하여 1200년 이상 하늘의 이름으로 서방 세계를 지배하였다. 역사적 기록들은 “성도들과 싸워 420 이기”“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하였던 바다 짐승의 일차적인 활동 무대를(일곱째 머리의 국면) 교황권에 의하여 계획되어 중세 시대의 종교적 압제 기간 동안에 자행되었던 교황권의 비극적인 성취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확증한다. 오늘날처럼 교회 연합과 종교 관용으로 특징지어진 현대에 그러한 해석은 가혹하고 불공정하게 보일지라도, 현재가 역사적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 짐승의 일곱째 머리를 중세의 교권 세력에만 적용하는 것의 부적절함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는, 동방 정교의 수뇌부에 의하여 이루어진 활동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슬프게도, 종교적 편협이 그 특징을 이루었던 17, 18세기 서방 세계에 새로이 자리를 잡은 개신교 정통파에 의하여 자행된 동일한 종교-정치적 압제가 나타났다.18) 이런 관점을 지지 하는 근거가 많지만, 그것은 이 주석의 범위를 벗어난다.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이후 로마제국의 단계적 붕괴는 점차적으로 강압적인 교권을 예고하였다. 그 교권은 근대(近代)를 시작으로 하여 그 종언을 고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회의주의(懷疑主義)와 신학적, 정치적 전선(戰線)에 대한 개신교의 도전을 시작으로, 교회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도시 계층의 등장으로 귀족 계층과 교권적 상부 구조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뒤이어 일어난 계몽주의 시대는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통치 배후에 있던 전반적인 원리를 공격하였다. 르네상스 정신의 전통이 계속되면서, 새로운 사상가들은 사회를 본격적으로 세속화하기 시작하였다. 철학자들이 이론으로만 옹호했던 것을 미국과 프랑스 혁명들은 점차적으로 실행에 옮기곤 하였다. 자유주의 철 학자들은 교회와 군주들이 나눠주기를 원치 않았던 상당한 자유를 요구하였다. 북미와 유럽에서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세우는 일과 교육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점차적인 세속화는 점진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억압과 중세와 중세 이후 시대의 억압과 편협을 종식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대중의 해방은 종교적 미신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민족주의는 대 중들의 수준을 통치권의 엘리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군주 제도를 무너뜨리며, 그 자체의 필요를 위하여 교회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중이었다. 정치적, 종교적 자유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던 프랑스 혁명 사건들은 (1798년 나폴레옹 휘하에서 교황권이 몰락한 것을 포함한) 아마도 ‘죽게 된 상처’에 대한 가장 명백한 시위(示威)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목적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게 된 상처’의 원인이 되며, 바다 짐승을 ‘시방은 없으나’의 시기로(계 17:11 참조) 몰아간 것은 바로 이 긴 과정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변화였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종교-정치적 통치와 수세기 동안 서방 세계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끝이 났고, 그 후로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인간 중심의 물질주의적(무신론적) 철학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죽게 된 상처가 결국 나음을 입고, 바다 짐승이 다시 한 번 부활하여 여덟 번째 머리의 국면에서 권세와 능력을 행사할 것이며(계 17:11), 그 짐승의 활동 반경은 종말 적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과 동일하다고 말한다(계 13:7; 14:6 참조), 요한계시록 13장 8절은 전 세계적인 세속적, 정치적 권세들과 세력들의 지원을 받는 이 종교 정치적 체제가 그의 활동들 을 강화시키되, 특히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그렇게 할 것임을 천명한다. 그 결과로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이 짐승을 경배할’ 것이며, 사단적 삼위에게 그들의 충성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살아난 배도적인 종교-정치적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려는 그 목적을 수행하기 전에 궁극적으로 멸망될 것이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 (13:11-18)
 요한계시록 13장 8절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온 세상의 충성과 경배를 손아귀에 넣을 종말의 때를 가리킨다. 요한은 이제 그의 시선을 사단의 동맹자들 중 두 번째, 곧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로 돌린다. 첫째 짐승에 대한 묘사에서와 같이, 요한은 땅의 짐승에 대한 일반적 특성을 논한 다음(13:11), 그 짐승의 종말적 활동으로 옮겨간다(13:12-18).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땅.
 이 곳의 땅(헬. 게 ge)은 요한계시록 12장 15-16절의 땅과 관련이 있다. 용이 여자를 쫓아 광야로 갔을 때, 땅은 그 입을 열어 용의 입에서 나오는 홍수 같은 물을 마심으로 여자를 도왔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땅’은 우선 긍정적인 상징으로 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땅’은 종말의 때에 종말적 바벨론의 가증한 것들의 처소가 된다(계 17:5). 요한계시록 19장 2절에 의하면, 바벨론은 그 음행으로 땅을 부패케 하였거나 파괴시켰다. “144,000인은 ‘땅’에서부터 구속을 받았다(계 14:3).”19)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땅과 바다가 연계된 것으로 볼 때(계 10 장에서처럼), 요한계시록 13장 11절의 땅은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서 언급된 ‘바다’의 보완물이 됨을 암시하는 것 같다. 바다와 땅은 모두 요한계시록 12장 12절의 성취로서 마지막 때 사단의 활동 범위가 우주적이며 세계적임을 나타낸다.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 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20) 라론델은 개인적으로 출판한 책에서, ‘땅’을 거주 지역과는 대조적으로(계 13:1‘바다’가 의미하는 것처럼) 제한된 지리적 장소로(이를테면, 팔레스타인이나 소아시아) 본다거나 또는 사람이 거의 정착해 있지 않은 지역으로(미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보는 것은 ‘추측일 뿐’이라고 하였다.21) 재림교의 전통적인 해석과 일치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은 그렇게 보는 것은 합리적 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22)
그러나.
 헬라어 카이(kai)는 이 곳에서 반어적인 ‘그러나’의 역할을 한다.
요한계시록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땅에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헬라어 카라그마(charagma)는 날인(徐印)된 표 또는 새겨진 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새겨진 우상도 뜻한다(행 17:29 참조). 카라그마는 상용 문서들에서 사용된 로마제국의 도장과 로마 동전에 사용된 제왕의 압인(押印)을 일컫는 전문 용어였다. 이 단어는 동물을 낙인(格印)하는데도 사용되었다.23) 그러나 어떤 고대의 관습에도 사람에게 카라그마를 낙인했다는 증거는 없다(예를 들면, 노예에게 표를 하기 위하여 사용된 단어는 스티그마타(stigmata)였다. 갈 6:17 참조), 이것은 사단적 삼위에 속하는 신분의 표로서 이마에 짐승의 표를 찍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 쳐진 하나님의 인과(계 7:1-4) 사단적 삼위의 경배자들에게 쳐진 표는 종말 때에 있을 두 무리를 구분 짓는다.

 짐승의 표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로마제국에서 격렬한 핍박을 받고 있던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했던 사람들에게 발급된 증명서에서 ‘짐승의 표’가 적용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전 역사를 통하여 짐승의 표는 시대마다 다른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3장은 짐승의 표가 궁극적으로 적용될 시기는 재림 직전의 종말 때임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에게 순종하고 경배하는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짐승의 표가 사단적 삼위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충성의 표가 되는 것은 최후 위기의 때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인과 예리하게 대조된다. 인과 표의 근본적 기능은 소유권과, 정체성 및 보호 등에 있다. 그러므로 둘은 각각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이거나 짐승에 대한 충성의 표다. 요한계시록 12-14장‘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계명은 충성과 순종의 표준’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강조한다.24) 마지막 때 하나님의 인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서 그 특징을 이룬다(계 12:17; 14:12).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짐승에 대한 순종으로 대체하는 것이 된다.

 특히, 십계명의 첫 네 계명(“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 “너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에 혹은 땅 아래의 물에 있는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은 최후의 위기의 때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시금석이 될 것 같다. 이 네 계명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및 예배와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 12-14장에 따르면, 최후의 위기의 때 하나님과의 관계 및 합당한 예배가 쟁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 때의 두 무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과 용과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이다(계 14:7, 9; 13:8, 12-15 참조). 이는 종말의 때에 바다 짐승이 네 계명에 대하여 왜 그처럼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배를 짐승이 요구하는 것은(계 13:4, 8)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첫 계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우상을 세워 경배를 하게 하는 것은(13:14-15) 둘째 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은 셋째 계명을 공격하는 것이다(13:5-6).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요구는 넷째, 즉 안식일 계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의미한다.

 이 시점에서, 요한계시록 7장에서 언급된 이마에 친 하나님의 인을 안식일 준수에만 국한 하려는 여하한의 시도와 관련하여 주의가 요망된다. 어느 곳에서도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인이 된다고 분명히 진술되어 있지 않다. 신약에서 인침은 분명히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임재를 의미한다(고후 1:21-22; 엡 1:13-14; 4:30; 이것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계 7:3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께 속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된다(딤후 2:19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인(印)으로서의 안식일의 유효성을 결코 망가뜨리지 않는다. 메러디쓰 클라인(Meredith Kline)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고대 언약 문서의 체제를 따르고 있는데, 그 문서의 중앙에는 소유권과 권위의 표로 인이 쳐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넷째 계명은 십계명의 중앙에 찍힌 인의 기능을 한다.25)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체결된 시내 산 언약을 비준한 인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 히브리 성경은 제칠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다른 백성과 구분하는 뚜렷한 표라고 분명히 정의한다. 안식일은 참 하나님께 소속됨과 하나님과 당신의 언약의 백성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외적 표였다(출 31:12-17; 겔 20:12, 20).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주어진 십계명에 관한 두 번의 설명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창조주시요(출 20:11) 구세주 이심을(신 5:15)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임을 나타낸다. 안식일의 이러한 측면이 요한계시록 12-14장에서 강조된 것 같다. 비록 최후의 위기에서 쟁점이 안식일에만 국한되지 않을지라도, 안식일은 분명히 최후의 위기의 때 충성과 순종의 ‘리트머스 시험’이 될 것이다.26) 요한이 요한계시록 14장 6-12절에서 땅의 거민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최후의 호소를 묘사할 때, 그는 넷째 계명으로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촉구한다(계 14:7; 출 20:11 참조; 연합성서공회의 헬라어 신약 성경 4판의 편집자들은 요한계시록 14장 7절의 진술이 출애굽기 20장 11절의 인유(引)라는 것을 난외주에서 인정한다).27)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이 호소에 뒤이어, 바벨론의 무너짐을 선포하며 짐승을 경배하고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 것 등을 경고하는 다른 두 천사의 선포가 뒤따른다(계 14:6-11), 안식일 계명과 관련 하여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백성에게 촉구하며, 짐승을 경배하지 말고 그의 표를 받지 말라 고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짐승의 표가 안식일 계명에 대한 모조품 역할을 하는 것임을 강력 히 시사한다. 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결론적 본문이 더욱 뚜렷 이 보여 준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14:12) 자들 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본문은 최후의 위기에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에 안식일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현저한 표가 되는 것처럼, (제칠일 안식일과 대조적으로) 거짓 안식일인 짐승의 표가 짐승에 대한 순종의 표가 될 것임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현재는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것, 혹은 일요일 준 수가 그 자체로서 ‘표’가 아닐 수 있으나, 이 두 가지는 마지막 때의 강제 시행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고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되었던 안식일 준수(출 31:13; 겔 20:20)는 다시 하나 님을 첫째로 삼는 사람들을 세계 앞에 드러내기 위하여 전방에 설 것”이라는 존슨(William G. Johnsson)의 말에 확실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28)
요한계시록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표, 즉 짐승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의 수.
 이러한 독법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초기의 다른 주요 사본들은 본문에 ‘또는(or)’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가장 초기의 헬라어 사본 P47‘표 또는 짐승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의 수’로 읽는다. 그리고 시내 사본은 ‘짐승의 표 또는 그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의 수’로 읽는다. ‘또는’을 포함시키는 사본상의 강력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사본 증거라고 주장되는) 알렉 산드리아 사본의 독법이 더욱 정확한 것 같다. 그것에서는 ‘짐승의 이름’‘표’와 동격으로 놓는다. 다시 말하면, 표는 짐승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이마에 찍히는 하나님의 인과 대조되도록 짐승의 표를 놓는다(계 14:1).
요한계시록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지혜와 총명마음.
 이 두 단어는 음녀가 올라 앉아 있는 짐승의 정체와 관련하여 17장 9절에 또 함께 나온다. 지혜가 요구된다는 것은 다니엘 12장 10절의 인유처럼 보인다. 그 곳에서 이상 가운데 다니엘에게 보인 마지막 때에 관하여 ‘지혜로운 자는 이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니엘 12장 10절요한계시록 17장 9절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서 ‘지혜’‘총명’을 요구한 것은 게마트리아(gematria 437쪽 참조)를 포함한 수학적 계산 방법으로 짐승의 숫자를 알아내는 머리가 뛰어난 지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특성이다(5:12; 7:12),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지혜를 통하여서만 신실한 자들은 사단의 수인 666과 짐승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세어 보라.
 헬라어 프세피조(psephizo 세다, 계산하다, 알아내다)는 문자적으로 ‘자갈을 센다’는 뜻으로 이 단어는 이 곳과 누가복음 14장 28절에만 나온다. 로기조마이(logizomai 셈 하다, 계산하다, 심사 숙고하다)라는 동의어가 있다. 누가복음 14장 28절에 프세피조는 경비를 ‘계산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따르려면 제자도의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서, 그 단어는 ‘알아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독자는 666이라는 비밀스런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알아내도록 요구를 받는다.29) 이것은 사람의 수다. 헬라어 아리쓰모스 가르 안쓰로푸 에스턴(arithmos gar anthröpou estin)이라는 문장은 ‘이는 그것이 한 사람의 수다.’ 혹은 ‘이는 그것이 인간적 수다.’(혹은 ‘인류의 수’)라고 번역될 수 있다. 13장의 짐승은 한 개인이나(과거나 현재나 간에) 역사의 어떤 구체적 인물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대하는 어떤 인간적 제도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아리쓰모스 안쓰로푸는 여기서 ‘인간적 수’를 뜻한다. 요한은 안쓰로포스21장 17절에서도 총칭적으로 사 용하였기에 메트론 안쓰로푸‘사람의 척량’이란 뜻이 되었다. 본문은 짐승의 수가 사람과 다소 연관이 있다고 암시한다. 그러므로 666은 신의 수인 777과 대조적으로 사람의 수인 것이다.
그의 이름의 수는 666(haxakosioi hexèkonta hex).
 문맥은 원 독자들이, 후에 잃어버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는, 이 암호를 푸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2세기 이후로, 비밀 숫자 666을 판독하기 위한 시도로 사용된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게마트리아라고 알려진 기법이었다(헬, 게오메트리아에서 온 이 단어는 ‘숫자를 조작한다’는 의미다).30) 이 게마트리아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또는 라틴어의 알파벳 각 글자는 그 자체의 수치(數値)를 가진다(예를 들어, ‘A’는 1을 대표하며, ‘B’는 2를, ‘C’는 3을 등).31) 그 결과로 숫자 666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나왔다. 네로와 칼리굴라 등의 로마 황제들,32) 또는 모하멧이나 나폴레옹, 아니면 히틀러 같은 사람들도 이 수치에 해당한다. 그것은 또한 로마 교황의 삼중관(三重冠)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되는 비카리우스 필리이 데이(vicarious filii dei)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 제안들 중 어느 것도 최소한 다섯 가지 이유 때문에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첫째, 숫자 666에 대한 게마트리아의 기교적 가능성들은 무제한적이다.

 둘째, 요한은 요한계시록 어느 곳에서도 신원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 게마트리아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이 ‘수’라는 말을 이 책에서 사용할 때(5:11; 7:4; 9:16; 20:8), 결코 계산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숫자들은 “상징적 의미가 있었고, 어떤 영적 실재를 상징하며, 문자적 게마트리아 계산을 포함하지 않는다.”33) 뒤이어 나오는 구절에서, 요한이 그 이마에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된 144,000인을 언급할 때(계 14:3), 그가 의도한 것은 그 숫자에 관한 어떤 종류의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그것이 의도하는 상징적 혹은 영적 이해였다.

 셋째, 요한은 그의 책에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막론하고 어떤 구체적인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정치적 체계를 거론한다. 13장의 짐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만일 666이라는 숫자가 독자들에게 ‘문자적 계산을 통하여’ 어떤 역사적 인물을 파악하기로 의도되었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숫자가 사용된 다른 예들과는 전혀 다른 예외가 될 것이다.”34)

 넷째, 글자의 숫자적 가치를 계산하여 666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였더라면, 그 이름이 나타나는 언어를 지적하였을 것이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 요한이 어떤 이름의 구체적 의미를 지적하고자 했을 때에 요한은 독자가 언어를 자의적으로 선택하도록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떤 이름이 “히브리어로는”(9:11; 16:16) 혹은 “헬라어로는”(9:11)이라고 정해 주었다. 다섯째, 문맥은 짐승의 이름은 종말적 의미와 뜻이 있다고 암시한다. 세상을 부추겨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우상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13:17)를 받도록 할 땅 짐승의 마지막 활동 속에서 독자들은 666의 뜻을 알아 보도록 요청을 받는다. 다른 말로 666이라는 수는 그의 죽게 된 상처가 낫기 전이 아니라, 나은 후의 짐승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666을 어떤 역사적 인물(네로나 마호메트를 포함하여)이나 과거 언제 교황의 삼층 면류관에 새겨져 있었다고 주장되는 중세적 직함인 비카리우스 필 리데이에 적용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짐승의 특성을 이해하고 마지막 속임수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라고 하신 종말적 상황과 맞지 않는다.

 666으로 표현된 짐승의 숫자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숫자라기보다 ‘사람의 숫자’인데, 헬라어로 세 개의 6이 한 벌로 구성되어 있다. haxakosioi hexèkonta hex. 60진법에 기초된 바벨론 수학의 기초적 계산 단위는 6과 60이었다(오늘날 60진법은 호[孤]나 각[角]의 측정, 또는 시간을 나누는 일에 사용된다).35) 더욱이 숫자 6은 바벨론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36) 60은 다른 시기의 만신전(萬神殿)에 있던 바벨론 최고의 신(예를 들면, 아누[Anu] 마르둑[Marduck])들의 숫자였다(이것은 왜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이 높이 60규빗에 넓이가 6규빗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단 3:1). 바벨론의 사제들이 입었던 통상적인 부적에는 아래와 같이 신비로운 숫자가 사각 안에 배열되어 있었다.

1 32 34 3 35 6
30 8 27 28 11 7
20 24 15 16 13 23
19 17 21 22 18 14
10 26 12 9 29 25
31 4 2 33 5 36

 이런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 부적의 수를 각각 가로로, 세로로 합하면 총 666이 된다. 그러므로 6은 바벨론의 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수 7과는 대조적이다(계 5:1의 어구 해설 참조), 7에서 하나가 모자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과 완성을 나타내는 일곱과 대조적으로 하나님 없는 인간의 불완전을 나타낸다.

 열왕기상 10장 14절에서, 금 666달란트가 솔로몬의 일년 수입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이집트 공주와 결혼한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할 즈음에 이러한 내용이 주어졌다. 그런 식으로 짐승의 수로서 666은 한 때는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나, 결국 하나님을 떠나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되는 기독교라는 시스템을 지칭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사람의 수’ 6이 갖는 의미의 부가적 중요성은 인간이 창조의 제6일에 영광의 극치로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37) 그러나 완전한 주일은 (full week) 6이라는 숫자에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7이라는 숫자에서 나타난다.38) 제칠일은 창조주일 중 절정의 날이다. 그날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충만함을 나타낸다. 여섯은 그것의 참 의미를 인간 스스로가 세속적 영역에서 벗어나 그들을 존재케 하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자신들을 바치는 때인 일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애트리스 S. 닐(Beatris S. Neall)은 이렇게 제시한다. 숫자 666은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일곱으로 향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이 만든 것들에서 영광을 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채로 창조의 충만함과 모든 창조력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거듭 나지 않는 인간은 고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은 하나님을 떠나 그의 주권을 행사하는 인간을 대표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기보다는 짐승의 우상을 따르는 인간을 말한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은 짐승 같고 마귀같이 된다.”39)

 이런 맥락에서, 숫자 666은 최고의 불완전에 대한 상징이다.40) 짐승의 수에 대한 참 의미는 이런 뜻에서 찾아야 한다. 즉, 신적 분별력을 통하여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짐승의 수가 666이라는 말에 뒤이어 이마에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인을 받은 성도들에 관한 묵시가 나온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14:1), 이것은 본문 속에서 “짐승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을 대조할 의도가 있다”고 암시한다. “만일 후자가 순수한 영적 실체를 상징한다면, 사실이 그러할진대, 전자도 그러하다. 이것은 짐승의 수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수는 그의 이름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41) 그러나 짐승은 그가 모방하고 있는 신적 특성에 이르지 못한다.42) 이 적그리스도 세력의 신원 파악에는 지적 영리함과 인간적 계산 이상의 “신적 분별력이 있는 지혜가 요구된다.”43) 이런 노선들에 따른 해석은 요한계시록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주해)
 용, 곧 사단 자신은 여전히 바닷가에 서 있다. 그가 이번에는 그의 두 번째 동맹자를 무대로 불러낸다. 이 짐승은 지상 역사의 최후의 결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용과 바다 짐승에게 가담한다.
요한계시록 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이제 요한은 드라마의 둘째 배우, 즉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모습을 기술한다. 둘째 짐승이 올라오는 땅은 용의 입에서 나온 홍수 같은 강물을 들이마심으로 여자를 도왔던 바로 그 땅이다(계 12:15-16). 이것은 둘째 짐승의 우호적인 모습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 모습은 온 세상으로 바다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그의 기만적인 활동들과 부합된다. 덧붙여 사단의 두 동맹자가 각각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은 세계적 규모에 이르는 사단의 종말적 활동들을 의미한다(계 12:12 참조).

 땅의 짐승과 바다 짐승의 ‘짐승’에 사용된 헬라어는 동일한 단어로, 잔인한 짐승임을 암시한다. 바다 짐승이 괴물 같은 열 개의 뿔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 반면, 땅의 짐승은 어린양 같은 두 개의 뿔을 가지고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 곳의 구절은 아무 어린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양을 지칭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땅의 짐승의 모습은 그리스도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이 세력의 매우 긍정적인 역사를 시사한다. 그러나 땅의 짐승의 성격은 그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과는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가 용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쉬슬러 피오렌자가 주석하는 대로, “뿔들에 관한 구절과 괴물에 관한 어투는 본문이 아무 양이나 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양과 그 용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는 주장을 더 확고히 해준다.”44) 첫째 짐승처럼, 둘째 짐승은 기만에 의해 교회를 속이려는 사단의 노력 속에서 그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땅의 짐 승이 용처럼(혹은 뱀, 12:9) 말한다는 것은 ‘에덴동산의 뱀의 유혹적이고 기만적인 성격’을 가리킬 수 있다.45)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대변자들이었듯이, 이 종말적 세력도 사단의 대변인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에서 땅 짐승이 ‘거짓 선지자’로 칭해지는 이유다. (16:13; 19:20; 20:10).
요한계시록 13: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개괄적인 말로써 땅의 짐승의 신원을 밝힌 후, 요한은 이제 최후의 위기에서 그 짐승이 행할 활동들로 나아간다(11절의 과거시제가 12절에서는 현재시제로 바뀐 것을 주목하라).

 지금부터 우리는 용과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 사이에 있을 전쟁을 목격하게 된다. 13장의 나머지 부분이 ‘용의 남은 자들에 맞선 전쟁’을 묘사하는 반면, 14장‘용의 공격에 대한 남은 자들의 반응’을 기술한다.46)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그 앞에서 첫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사한다. 이 사단적 동맹자는 분명히 성령을 모방(parody)하고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권세를 행사하듯(요 15:26; 16:13,14 참조), 그는 바다 짐승의 권세를 행사한다. 바다 짐승은 그가 일찍이 마흔두 달(계 13:5-8) 이라는 상징적 기간 동안 행사했던 큰 능력과 권세를 땅의 짐승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행사한다. 땅의 짐승이 행사하는 능력과 권세는 전 역사를 통하여 바다 짐승이 행사하였던 기만과 강제의 두 전략으로 시작된다. 바다 짐승을 섬기는 땅의 짐승은 종교 정치 세력을 대표하며, 후에 ‘거짓 선지자’(16:13; 19:20; 20:10)로 지칭되는 것이 분명하다.47)

 더 나아가 땅의 짐승은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그의 죽게 된 상처가 낫게 된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한다. 우리는 이 곳에서 성령의 역할을 모방하는 모조품을 다시 보게 된다. 바다 짐승을 높이고 백성으로 그를 경배하게 함에, 땅의 짐승은 성령을 모방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크게 드러내는 일이다(요 15:26; 16:12- 15). 본문에서 이 곳의 시제들이 바뀌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에서 “저가 ... 하니”라는 구절은 현재시제인 반면, ‘경배하게 하니’는 미래시제다. ‘저가 ... 하니’‘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기 위한 준비의 개념을 전달한다.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making)’ 이 일에는 지상 역사의 마지막에 땅의 짐승 편에서 행할 어떤 활동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시작 단계에서, 이러한 활동에는 분명 기만과 설득이 들어있으며(계 13:13-14 참조), 최종 조치로서 강제가 포함된다(13:15-17). 초기에 여자를 도왔던 그 친절한 땅이 이제는 첫째 짐승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에서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의 반대편에 선다.

 바다 짐승의 죽게 된 상처에 관한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 같다(14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땅으로 바다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것은 죽게 된 상처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요한계시록 13장 3-4절에서, 죽게 된 상처가 나음으로 온 세계가 바다 짐승을 추앙하고 경배하게 되는 것을 주목하였다. 죽게 된 상처의 치유는 ‘땅’과 그 거민들로 바다 짐승의 압제적 권세에게 세계적인 충성과 경배를 하는 최후의 위기를 위하여 준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요한계시록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요한계시록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3: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요한은 이제 땅의 짐승이 ‘땅’으로 바다 짐승을 경배하게 하기 위하여 그가 사용하는 전략들 중 첫째 것을 설명한다. 첫째, 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한다. 이 큰 이적들의 목적은 온 세상으로 바다 짐승을 경배케 하려 함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적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의 지상 봉사의 특징이었다(행 2:22). 짐승이 행하는 이 기적적 표적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사도들을 통해 이루었던 표적과 기사를 생각나게 한다(2:43; 4:30; 5:12-16 참조). 성령께서 기적적 표적을 통하여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경배하도록 확신시키신 것과 꼭 같이, 이 모조품 그리스도도 “표적에 의하여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미혹한다.”(계 13:14)

 하늘로부터 땅에 불을 내려오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불의 혀가 제자들 위에 내렸던 오순절을 모방하는 것일 수 있다(행 2:3). 그러나 이 불은 선지자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러 내렸던 불에 대한 더 강력한 인유다(왕상 18:38).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시며 그 분만이 경배 받으실 분이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경우 땅의 짐승은 모조품 엘리야의 역할을 한다. 그 짐승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함으로 백성을 오도하여 거짓 신을 경배하게 한다. 이 불이 무엇을 대표하든지 간에, 그것은 진리와 복음을 모방하는 일에 효과적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의도된 목적은 이 큰 표적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백성을 속이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이 종말적 이적을 행하는 자의 전략은 효력이 있는 것 같다. 땅의 짐승은 표적에 의하여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한다. 이 기만은 사단적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이 표적들을 행할 권세를 짐승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법한 자에 대한 바울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그 때에 불법 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살후 2:8-10)

 이 큰 기적적 표적들의 기만을 통하여, 땅의 짐승은 땅의 기만당한 백성을 이끌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한다. 여기서 요한은 마지막 때의 드라마의 새로운 등장 인물을 소개한다. ‘짐승의 우상’이라는 표현은 새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다 짐승과 같을 것이나 땅 짐승과는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땅 짐승이 기만을 수단으로 설득 작전을 사용하는 반면, 짐승의 우상은 설득의 수단으로서 힘을 사용한다. 이 새로 등장하는 인물은 종교 세력이기보다 오히려 정치세력인 것 같다.

 구약에서 조상(彫像, images)과 우상(idols)은 말도 못하며 움직이지도 못하는데(예, 시 115:4-5; 135:15; 사 46:7; 렘 10:5; 합 2:18-19), 이는 그들 속에 생기가 없기 때문이다(시 135:17; 렘 10:14; 합 2:19), 그러므로 땅의 짐승은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장면을 상기시킨다(창 2:7). 짐승의 우상은 바다 짐승의 요구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 그리하여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한다. 모든 시나리오는 다니엘 3장에 기초되어 있다. 그 곳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백성에게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자신이 세운 금 신상에 경배하라고 명령하였다. 다니엘 시대에 금 신상의 경배가 법령에 의해 강제된 것과 꼭같이, 마지막 때에 국가 권력의 지원으로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와 같이 짐승의 우상과 거짓 선지자는 첫째 짐승을 섬길 것이며, 그들은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 최후의 위기 때에 경배가 쟁점이 될 것이다.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계 14:7; 19:10; 22:8-9). 그분 외에 다른 어느 대상을 경배하는 것은 그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에 등장할 두 무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과 용과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이다. 최종적 시험은 경배를 거부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경배를 받을 대상이 누구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둘째, 짐승의 죽게 된 상처가 낫는 것과 관련하여(계 13:14) 짐승의 우상이 상징하는 바는 사단이 각 시대를 통하여 사용했던 그의 이중 전략(기만과 강제)이 종말 때에 부활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짐승의 우상이 상징하는 바는 ‘다른 시대에 등장할 제도와 과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들은 그 형태와 행위에서 짐승의 권세를 꼭 빼닮을 것이다. 배도의 특징이며 언제나 핍박에 앞서 생기는 국가와 교회의 연합이 다시 형성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후의 쟁투는 “이름뿐인 기독교와 국가 권력이 궁극적으로 연합하여, 모든 사람들로 그 명령을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 그 특징이 될 것이다.48)

 누가 혹은 무엇이 사단의 둘째 동맹자인 땅의 짐승을 대표할 것인가? 그것의 정체는 매우 모호한 것 같다. 바다 짐승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말한 것은 땅의 짐승에게도 적용이 된다. 존슨이 지적하듯이, “의심의 여지없이, 일 세기 말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 13 장의 상징들에서 당대의 의미를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필시 “바다 짐승을 높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 땅의 짐승 배후에 제국의 종교적 요소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의해 묘사된 종교와 국가의 연합은 그들의 현재적 경험의 반향이었을 것이다.”49) 그러나 바다 짐승이 그랬듯이, 땅의 짐승의 활동들에 관한 예언은 요한 당대를 넘어서서 종말까지 이르러 성취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러 가지 것들은 땅의 짐승이 종말 때의 종교-정치적 제도임을 밝혀줄 실마리를 제공한다.

 먼저, 우리는 바다 짐승이 일곱 번째 머리 단계에서 하는 활동은 중세의 종교적 압제 기간 동안 정치적 독재 권력으로서 세계를 지배하였던 교권적(ecclesiastical) 종교-정치 세력을 대표한다는 것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땅의 짐승은 바다 짐승같이 옛 조상이 없다. 그 짐승은 바다 짐승이 죽게 된 상처를 받았던 기간 후에 권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즉, 땅의 짐승은 요한계시록 17장 11절에서 언급된 바다 짐승의 ‘시방은 없으나’의 기간 후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분명히 땅의 짐승은 오로지 종말 때의 세력으로서 그 역할을 한다.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이 세력의 시작은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그 짐승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교회와 관련하여 긍정적으로 상징된 땅에서 올라온다. 더욱이 그 짐승은 양같이 두 뿔을 가졌다고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그 짐승의 긍정적 특성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그 짐승의 외양은 그리스도와 닮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짐승은 백성에 대하여 관용적이다. 그러나 바다 짐승의 죽게 된 상처가 나을 때쯤에, 이 양 같은 세력은 더욱 용처럼 말하기 시작하며 용의 동맹자가 된다. 그 활동의 후반부에서, 이 마지막 때의 종교-정치세력은 바다 짐승을 높이며, 백성으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게 한다. 이것은 그분을 높이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요 15:26; 16:12-15).

 마지막으로, 이 종말적 세력은 최후의 위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후반은 첫째 짐승이 중세 동안 행사했던 권세가 다시 한번 땅의 짐승을 통하여 행사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땅의 짐승이 세계적 능력과 권세로 첫째 짐승을 대신할 것이며, 마지막 때에 세계적 압제 세력으로 행동할 것 같다.

 현대사에서 미국만큼 땅 짐승에 대한 묘사에 부합되는 그 어떠한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실체는 없는 것 같다. 미국은 중세의 교권 제도가 그 ‘죽게 된 상처’를 입은 이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미국은 세계에서 괄목할 만한 주요 세력이 되었다. 민주 세계의 권력을 주도하는 나라로서, 미국은 정치적, 종교적 관용과 자유 때문에 찬사를 받아왔고, 군사적, 경제적 강국으로 그 나라는 매우 존경을 받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를 두려워한다. 오늘날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이 세력은 분명히 두 뿔 가진 짐승을 닮아가고 있다. 역사적 용어로 말한다면, 아직은 이 두 뿔 가진 양에게서 용처럼 말하는 무엇을 보지 못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3장은 최후의 위기 때에 종교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미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13장 12-14절은 최후의 날에 땅 짐승이 바다 짐승을 높이기 위하여 처음부터 설득의 수단으로서 크고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는 것이 그 특징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 후반부에서, 종말 때에 등장할 이 종교-정치 세력은 거짓 선지자로 지칭되어 있다(계 16:13; 19:10; 20:10), 요한계시록 16장 13-14절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는 기만적인 이적과 기적을 통하여 백성을 속여 아마겟돈 전쟁으로 모이게 한다. 그 시작 단계에서, 그는 바다 짐승의 바로 면전에서 추종자들에게 거짓 복음을 주입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그 거짓 복음은 마음과 행동의 종교, 그리고 성령의 변화시키는 감화력을 대신할 이적과 감성에 바탕을 둔 선정 주의가 특징을 이룰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마지막 때 땅의 짐승이 보여줄 특이한 활동들 때문에, 윌리엄 존슨의 관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땅의 짐승에 관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여전히 미래의 일임을 솔직히 시인하자.... 그러나 둘째 짐승을 묘사한 것들 중 중요한 부분이 아직은 선명치 않다. 특히 많은 사람들로 배도하게 하는 이적들과 바다 짐승의 ‘우상’이 그렇다. 더욱이 그 묵시는 그 활동 무대가 전 세계가 될 것임을 가리킨다.... 모든 인간이 어떻게 기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게 될 것인지 현재로서는 분명치 않다.50)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13-18장의 모든 사건이 세계적인 규모로 성취될 것이며, 어떤 단독 지역이나 나라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51)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땅 짐승을 미국에 적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슨이 첨언(添言)한 것처럼, “땅 짐승의 의미에 대한 완전한 공개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큰 논쟁의 최후의 기만적 활동들은, 미국이 많이 연루되어 있는 반면, 세계적일 것이다.”52)
요한계시록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러나 그의 최후의 활동 무대에서, 땅의 짐승은 중세에 바다 짐승을 특징지었던 것과 같은 무자비함과 힘을 행사한다. 짐승의 우상은 온 땅의 거주자들에게 그들의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도록 강요한다. “그 명령은 모든 계층의 모든 사람”(작은 자나 큰 자), 모든 경제 계층(부자나 빈궁한 자), 그리고 모든 사회 계층(자유한 자나 종들)에 영향을 미친다.53) 아무도 예외가 없다. 요한계시록 7장 3절에서, 큰 환난의 어귀에 서 있는 성도들은 그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분하며, 그들을 원수의 패배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한다.54)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한 백성의 이마에 인으로 표하시듯이, 사단도 짐승을 추종하고 경배하는 자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이름으로 표를 한다.

 분명히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인을 모조하는 역할을 한다(계 7:3; 14:1). 인침은 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다. 인침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그분에게 속한다(딤후 2:19).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됨과 그분에 대한 충성의 표로서 상징적인을 가지는 것과 꼭 같이,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은 사단의 소유됨과 그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서 표를 지닌다(계 13:16-17; 14:9; 16:2; 19:20; 20:4), 하나님의 인은 아버지와 어린양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그 이마에 기록되는 반면(14:1), 짐승의 표는 “짐승의 이름 또는 그 이름의 수”로 구성되어 이마에나 손에 기록된다(13:17), 이마는 마음을 대표하고, 오른손은 행위나 활동을 대표한다. 비애트리스 닐은 “짐승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짐승의 표나 하나님의 인을 받는 다는 것은 사단이나 하나님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진술한다.55) 인침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므로(고후 1:21-22; 엡 1:13-14; 4:30),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성령의 일을 위조하는 것이다. 짐승의 표를 가진 백성은 이 종교 체제에서 양육되어 왔으며, 언제나 그들은 그들의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짐승을 섬긴다. 어떤 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섬기나, 다른 이들은 마지못해 섬긴다.

 닐이 바르게 지적하듯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요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표로서 그분의 계명들을 그들의 손과 미간에 매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환기시킨다 (신 6:8). “유대인들은 성구함을 지참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손에나 이마에 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분의 백성의 마음과 행동에 써넣는 것을 의미한다.”56) 이 관습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히브리 성경의 중심절이라고 생각한 구절을 마음에 새기고자 함이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예수님에게 이 말씀들은 십계명의 첫 네 계명에 대한 핵심적 요약이었다(마 22:27-40), 이것은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으라는 짐승의 요구는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하여 정반대의 입장에서라는 것,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짐승에 대한 순종으로 대체하라는 의미다.

 존 폴린이 말하였듯이, 요한계시록 12-14장은 최후의 위기 때 ‘세상을 시험하는 진리는 합당한 예배에 그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57) 마지막 때에 사는 사람들은, 그 이마에 인을 가지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거나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가지고 사단적 삼위를 경배하는 자들의 두 그룹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위기에서 두 그룹의 경배자들이 구분되는 것은 그들이 받은 인이나 표에 의해서다.

 요한계시록 12-14장에 의하면, 참 하나님의 인을 받은 경배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서 그 특징을 더한다(계 14:12; 12:17 참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은 짐승의 표를 가지고 있는 자들과 대조된다(14:9-12),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과’ 관련이 있는 반면,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58) 이것은 분명 “최후의 위기 때 하나님의 계명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기준으로 부상할 것임”을 시사한다.59) 그러나 문맥은 단지 하나님의 계명들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십계명의 첫 네 계명, 곧 하나님과의 관계 및 경배와 관련이 있는 계명들이 최후의 위기에서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을 가리킨다. 바다 짐승의 활동들은 이 네 계명을 대적하기 위하여 잘 계획된 전략의 일부로 묘사된다(계 13:16의 어구 해설 참조).

 존슨이 지적하듯이, 요한계시록 14장 6-12절은 안식일이 “특별한 리트머스 시험이 될 것이며, 개인과 안식일의 관계는 그와 하나님, 또한 그와 그분의 율법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드러낼 것”60)임을 분명히 제시한다. 사단적 삼위를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짐승의 요구에 순종하기보다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최후의 호소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발해질 때(14:7), 그것은 분명히 ‘넷째 계명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61)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안식일이 최후의 위기에서 합당한 경배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이해하였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 의하여 뚜렷한 순종의 표가 되듯이(출 31:12-17; 겔 20:12, 20 참조), 거짓 안식일인 짐승의 표도 짐승에 대한 순종의 표가 된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인간의 계명들(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그분의 소유됨의 현저한 표인 제칠일 안식일 대신 인간이 세운 거짓 안식일을 포함하여)로 대체시키는 역할을 한다.
요한계시록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오른손이나 그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요구에 응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진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여기서 “매매하지 못 한다”는 구절은 문자적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통제 권력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제적 제재 조치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바로 무역 조합의 활동에 가담하기를 거절했던 두아디라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와 같다(계 2:19-22). 다른 한 편으로, 요한계시록 13장의 심히 상징적인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매매의 상징적 의미를 암시한다. 요한계시록 18장은 큰 음녀 바벨론과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땅의 상고들’을 묘사한다(18:3, 15). 음녀를 심판할 때, 그 상고들은 애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벨론과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18:11-19). 더욱이 본문에서 ‘상고들’은 바벨론의 복술로 말미암아 미혹된 ‘땅의 왕족들’로 묘사되어 있다(18:23). 우리는 이미 요한계시록 13장17-18장과의 관계를 지적하였다. 요한계시록 18장의 상고들은 바벨론의 타락한 교리들과 정책들이라는 영적 상품을 팔고 배분하는 비유적인 판매원들이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비추어, 요한계시록 13장의 매매는 그리스도의 인침을 받은 신실한 추종자들이 온 세계가 바벨론의 타락한 교리들과 정책들을 받아들일(살) 때 견디어야 할 사회적 고립과 고난의 상징적인 표현일 것이다.”62)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은 바벨론의 상품을 살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들을 멸하려는 바벨론의 목적들을 돕는다.
요한계시록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본 단원의 결론에서 독자들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의 신원을 파악하라는 초청을 받는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요한은 이 곳에서 독자들에게 탁월한 지적 능력을 행사하거나 수학적 기술을 사용하지 말고, 대신 짐승의 기만적 성격을 파악하여 자신들을 그 기만에서 보호받기 위한 신적 지혜와 분별력을 구하라고 촉구한다(계 17:9 참조).63) 짐승의 수에 대한 요한의 언급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참 성격과 신원’을 인지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64)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지혜를 통하여서만 그들은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긴 자로 설 수 있을 것이다(15:2).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수 666은 ‘사람의 수'(인간의 수)다. 그러므로 그 수는 신적 특성이나 자질과 관련이 있기보다 어떤 모양이든 사람과 관계가 있다. 그 숫자는 바벨론의 전형적인 수다. 육(6)은 칠(7)로 상징된 하나님의 이상에 이르지 못함을 상징한다. 세 개의 육(666)은 요한계시록 1장 4-6절의 신성의 삼중 일곱과 대조되는(계 1:4-6의 주해 참조) 사단적 삼두정치를 대표하는 것 같다. 이것은 666이라는 수가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을 모방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필립 휴즈(Philip E. Hugh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수인 일곱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것에 근거하여 삼중(三重) 6은 인간적 혹은 인간적 삼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이것은 거룩한 삼위 하나님의 모조품으로서 그런 위조품이 암시하는바 최고의 능력과 권세를 모조리 가진 체한다. 아마도 이 모조품 삼위는 사단(용)과 적그리스도(첫째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둘째 짐승)로 구성되는 삼위임을 문맥으로부터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의 마귀적 목적, 즉 창조주를 하야시키고 피조물을 등극시켜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 대신 짐승의 형상으로 대체하는 일에서 연합한다.65)
숫자 666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위하여 세상의 충성과 경배를 요구하는 세력인 바다 짐승의 참 성격을 밝힌다. 이 짐승은 ‘참람된 이름들’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13:1; 17:3 참조),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나 그리스도께 속하는 ‘이름들이나 경칭(敬稱)의 칭호들’을 주장한다는 의미다.66) 그는 ‘땅에 거하는 자들’을 기만하는 일에 성공한다. 기만을 당한 그의 추종자들은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인 짐승의 표를 강제로 받는다. 상징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받는 것을 포함한다(계 13:16-17). G. K. 빌이 강조하듯이, 누군가의 이름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 사람의 특성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67)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계 14:1; 2:17 참조)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을 가짐으로 종말 때의 기만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하는 표로서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고후 1:21-22; 엡 1:13-14; 4:30). 성령만이 마지막 때에 사단이 행하는 활동들의 기만적 성격을 인지하는 영적 식별력과 그것들에 맞서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여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지혜’‘명철’을 촉구한 것은 탁월한 수학적 재능보다는 성령으로 일깨워진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다.
13:1-18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13장은 상징적 언어로 그리스도의 군대와 사단의 군대 사이에 있을 종말적, 전 세계적 위기-아마겟돈 전쟁-를 대비한 대대적인 준비를 묘사한다(계 16장 12-16절17-18 장에 걸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매우 확실한 것 같다. 이 세상의 세력들 배후에 서 있는 권세는 사단 자신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성도들과 전쟁을 벌이는 악한 지성이다.”68) 사단은 두려운 모습으로(12:3), 그의 두 동맹자들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최후의 전쟁에 돌입하고 있다. 스트랜드가 말하듯이, 진짜(real)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충성하거나 하나님의 반대 세력에 충성하든지를 선택하므로 꽤 깊이 진짜 싸움에 들어간다.”69)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을 시작으로, 계시자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최후의 전쟁을 승리하려는 사단의 확고한 결심을 경고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본문을 세밀히 분석하면, 백성의 마음을 쟁취하고자 하는 전쟁이 최후의 위기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비애트리스 S. 닐은 “두 경쟁 세력은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고자 한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반면, 짐승의 추종자들은 이마에(신조, 충성을 가리키는) 또는 손에만(정신적 동의 없이 강제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표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70) 세상의 충성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사단은 새로운 기만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상징적으로 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으로 묘사된 두 동맹자들과 연합한 후, 사단은 ‘참 하나님에 대한 대량의 기만’을 행하고 인간을 위한 그의 기만적 구원 활동을 펼칠 것이다.71) 이 가짜 구원의 목적은 세상을 속이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존 폴린은 이렇게 강조한다. “마지막 때의 기만은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 조차도 기만의 가혹한 영향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72) 최후의 위기에서의 전쟁은 분명히 정치적 사건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으로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백성의 편에 서든지 아니면 사단과 그의 동맹자들을 따르든지 해야 할 것이다.73)

 요한계시록 13장다니엘 3장 사이에, ‘우상’, 우상 숭배(단 3:5), 우상에게 절하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사형 위협(단 3:6), 세계성(단 3:2) 및 우상과 관련된 6이라는 숫자(단 3:1) 등의 평행구를 포함하는 언어적, 개념적 유사성이 있음을 관찰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이것은 요한이 요한계시록 13장을 기록하면서 다니엘 3장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는 다니엘 3장의 이야기가 마지막 때에는 전 세계적 규모로 반복될 것임을 우리에게 말한다. 매우 분명한 것은, 최후의 위기에서 진정한 시험은 예배가 될 것이다. 다니엘 3장의 세 청년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구원하고 악의 군대를 패퇴시키는 일에 개입하여 승리하실 것이다.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다 짐승은 종교-정치 세력으로서, 그가 종말 때에 행할 활동들은 여전히 미래에 성취될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한스 K. 라 론델은 우리의 주의를 촉구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 11-17절이 장차 있을 세계 최후의 기만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짐승의 ‘우상’을 세우는 일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짐승의 표도 아직까지 사람에게 강요되지 않았다. 이것을 깨달으면 해석자가 요한계시록 13장 11-17절의 미래 성취에 관하여 단정적인 해석을 내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74)
이 시점에서 요한계시록 13장의 두 짐승의 신원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성급한 판단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이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고 사단과 그의 동맹자인 두 짐승의 기만적 성격을 세상에 경고할 때, 그리스도인의 사랑뿐만 아니라 신령한 분별력을 나타내야 한다. 백성 중 어느 그룹이, 그리고 어느 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종종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백성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식별의 원칙을 정치적, 종교적 제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사단과 그의 동맹자들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시는 죄의 골짜기이고, 이 세상은 정치적, 종교적 계층을 포함한 각 계층에서 몸부림치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악한 제도는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모든 기관에서 당신을 위하여 일하는 대리자들을 가지고 계신다. 사단이 사람들을 속이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교활함과 기획을 필요로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성령께서 사단의 모조품을 반격하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여, 인간이 아무렇게나 판단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종종 복음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행동이나 잘못된 정책들을 밝혀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위치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갈바리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인간의 유일한 소망과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며, 그분에게 순종하여 자신들의 생애를 바칠 수 있게 할 것이다.

 오늘날 세 가지 유형- 곧 복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 복음과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복음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에 대하여 무지한 대부분의 사람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마지막 그룹은 꼭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꼭 사단의 편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3장은, 종말이 가까워옴에 따라 양극화가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편에 서거나 사단의 편에 설 것임을 단언한다. 한 편의 무리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할 것이며(계 11:1, 18; 14:7; 19:10), 다른 한 편은 복음을 거절하고 용과 짐승을 경배할 것이다(계 13:4-15; 14:9-11; 16:2; 19:20), 합당한 경배는 최후의 위기의 때에 주요 쟁점의 중심이 될 것이다.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기꺼이 순종함이 그 특징이 될 것이다. 순종해야 할 계명 가운데는 창조주시요 구속주이신(계 14:7, 14) 하나님께 참으로 경배드리는 날을 가리키는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자들, 곧 복음에 대하여 아낌없는 사랑을 하지 않는 자들은 아마도 종말 때의 기만에 완전히 노출되어 기만을 당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최후의 위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살후 2:10), 기만당한 세계는 마음과 행동을 수반하는 복음적 종교 대신에 관능주의와 감성적 표현들에 기초한 종교 제도를 따라갈 것이다. 최후의 위기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한 원칙을 종말의 때에 살지 않았거나 살지 않을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는 삶의 문제들에 직면하며, 이편 아니면 저편에 서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역사가 마지막으로 다가감에 따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경을 가지고 심령을 살피는 정신으로 자신들을 위하여 예언들을 연구하라고 호소한다. 이것은 바로 베드로가 그의 글을 쓸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사는 하나님의 종말적 백성에게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복음에 대한 사랑이다.

주(註) ——————
1. Johnsson, 24
2, Bauer, 455-456. 
3. Johnsson, 23. 
4. Corsini, 227. 
5. Charles R. Eerdman, The Revelation of John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36), 112. 
6. Ladd, 223. 
7. Johnsson, 17. 
8. 상게서, 23. 
9. Ezell, 77.
10. Ladd, 223.
11. Fiorenza, Revelation, 83. 
12. Beatrice S.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 with Implications for Character Education (Washington, DC: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3), 137. 
13. 네로 레비비두스에 대하여는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407-423, 441-452; Aune, Revelation 6-16, 737-740을 참조하라. 그 견해에 대한 평가와 비평에 대하여는 Strand, “The Seven Heads,”191–200: Paul S, MInear, "The Wounded Beast,”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72(1953):93-1019 참조하라. 
14. Johnsson, 22: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423-452. 
15. Johnsson, 22. 
16. Roy C. Naden, The Lamb among the Beasts(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96), 196. Naden은 이것을 제대로 간파하였다. 
17. Thomas, Revelation 8-22, 292. 
18. 이 해석은 처음으로 존 N. 앤드루즈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는 종말적 바벨론은 교황권, 그리스정교, 개신교를 비롯하여 모든 타락한 기독교가 다 포함된다고 보았다. (Alberto R. Timm, The Sanctuary and the Three Angels’ Messages: Integrating Factors in the Development of Seventh-day Adventist Doctrines,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Dissertation Series, vol. 5 (Berrien Springs, MI: And ventist Theological Society Publications, 1995, 307-308을 보라). 
19.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02–303. 
20. Johnsson, 28. 
21.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02-303. 참조 
22.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20. 
23. Ulrich Wilckens, "Charagma,”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9:416-417; Ladd, 185.
24. Johnsson, 30.
25. Meredith G. Kline, The Structure of Biblical Authority, 2d 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75), 120.
26. Johnsson, 30.
27.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25-126에서 바르게 관찰하였다.
28. Johnsson, 30.
29. Bauer, 1098.
30. Aune, Revelation 6-16, 771.
31. 게마트리아의 과정을 통해 “짐승의 수를 산출한 최초의 사람은 이레내우스였다(Against Heresies 5:29-30 참조); The Ante-Nicene Fathers, 1:558-560.
32. 짐승의 수를 네로에게 적용한 것을 보려면,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385-407; Aune,
Revelation 6-16, 770–771; Barclay, "Great Themes of the New Testament: V. Revelation xiii,"
Expository Times 70(1958-1959): 260-264, 292-296을 보라.
33. Beale, 721,
34. 상동,
35. Joan Oates, Babylon, 2d ed. (London: Thames and Hudson, 1986), 185–186.
36. 다음의 개념들은 Thiele의 Outline Studies in Revelation, 216-217에서 빌려왔다.
37.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 153. 38. Hoeksema, 475.
39.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Apocalypse, 154.
40. Metzger, Breaking the Code, 76.
41. Beale, 721.
42. 상게서, 722.
43.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11.
44. Fiorenza, Revelation, 84.
45. Charles, 1:358.
46.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09.
47. Ladd, 183.
48. Desmond Ford, 575.
49. Johnsson, 22;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434, 446-448 참조.
50. Johnsson, 29.
51. Desmond Ford, 575.
52. Johnsson, 29.
53. Thomas, Revelation 8-22, 179-180.
54. Ladd, 185.
55. Neall, "Sealed Saints and the Tribulation,”255.
56. 상게서, 257.
57.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22.
58. Neall, "Sealed Saints and the Tribulation,”257.
59. Johnsson, 30. 443
60. 상동,
61.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26.
62.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64.
63. Johnson, 534; Beale, 723.
64. Johnson, 534.
65. Hughes, 154-155.
66. H. Bietenhard, "Name,”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ed. Colin
Brown (Grand Rapids, MI: Zondervan, 1986), 2:653.
67. Beale, 723.
68. Tenney, 175.
69. Strand, "An Overlooked Old Testament Background to Revelation 11:1,"318.
70. Neall, “Sealed Saints and the Tribulation,” 256.
71.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11.
72. 상게서, 113.
73. 상게서, 136.
74.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1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