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최후의 기별 (14:1-20)
 요한계시록 13장은 지상 역사 최후의 위기를 대비한 대대적인 준비에 관하여 묘사한다. 종말이 가까워옴에 따라 하늘과 흑암의 군대는 각자의 입지를 강화한다. 사단의 삼위는 땅에 있는 백성을 기만하여 그들로 바다 짐승과 사단을 경배하게 하려고 애쓴다. 요한계시록 14장은 신실한 남은 백성을 통하여 하실 하나님의 활동들을 가리키며,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경고한다. 본장의 서두는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백성의 신원을 밝히고 그들에 대하여 묘사한다(계 14:1-5). 요한계시록 14장 6-13절은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 기별을 선포한다. 14장의 마지 막 부분은 최후의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다음에 있을 세상의 대 추수를 상징적 언어로 기술한다(계 14:14-20).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 (14:1-5)
 요한계시록 14장의 서두는 13장과 대조된다. 종말 시기에 살고 있는 백성의 대부분이 세계 적 기만에 굴복하여 사단의 삼위에 충성을 하고 있는 반면, 하나님께는 최후의 싸움에 맞서 죽 기까지 당신에게 충성하는 참된 남은 백성이 있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시온 산.
 구약에서 시온 산은 메시야 왕국의 하나님의 통치 중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기자에게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하셨으며(시 2:6; 48:1-2; 사 24:23 참조), 미가는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그들을 치리하”리라고 예언하였다(미 4:7). 이사야, 요엘, 그리고 오바댜는 시온 산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의 장소요 또한 최후의 승리의 장소라고 하였다(사 59:20; 욜 2:32; 옵 1:17). 이 사상은 신약에 다시 등장한다. 시온 산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곧 하늘의 예루살렘”이다(히 12:22), 요한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대조적인 위치에 서 있다(요한계시록 12:1-22:5에 대한 개관을 참조하라).
144,000인.
 요한계시록 7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새 노래를 부르니.
 어떤 주석가들은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과 거문고 타는 자들은 14,000인이 아니라 144,000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별을 가진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요한계시록 15장 2-3절에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자들은 144,000인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후에(계 19:1, 6) 요한이 하늘에서 노래하는 구속받은 자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 같았다.
구속받은 자들.
 헬라어 아고라조(agorazo)‘사다’, ‘구매하다’라는 의미다(계 3:18; 18:11; 고전 6:20 참조), 또는 ‘구속하다’는 뜻도 있다(계 5:9; 롬 3:24 참조).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더럽히지.
 헬라어 몰뤼노(molunō)‘더럽히다’ (양심, 고전 8:7) 또는 ‘얼룩을 묻히다’(옷, 계 3:4)를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부정(不定)과거는 시간상 특정한 시점에서 행해진 행동을 시사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이 설명하는 대로, 이 경우는 ‘여자 들’로 상징된 종교적 요소들이 연합하여 ... 성도들에게 갖은 압력을 가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포기하고 짐승을 경배하라고 할 때를 가리킨다. “어떤 형태의 굴복도 더럽히는 행위가 될 것이다.”1)
여자들.
 요한계시록에서 신실한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사용되었다(계 12:1; 19:7-8; 22:17). 반면, 음녀는 배도하고 불신실한 자들을 상징한다(계 17-18 장; 계 12:1의 어구 해설 참조).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도는 종종 음행으로 묘사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왕들과 땅의 모든 나라들은 큰 음녀 바벨론과 음행하였다(계 14:817:2, 4; 18:3, 9; 19:2), 대조적으로 144,000인은 짐승을 경배하여 “자신들을 더럽히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정절을 지켰다.2) 복수 형태의 ‘여자들’은 아마도 큰 음녀 바벨론과 그녀의 딸 들을 가리킬 것이다(계 17:5).
정절이 있는 자[들].
 헬라어 파르쎄노스(parthenos)는 일반적으로 ‘처녀’를 의미하지만, 전에 결혼한 사람이나 과부와 관련하여 사용될 수 있으며 또한 남자와 여자에게 공히 적용할 수도 있다. 이 용어는 종종 성경에서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뜻하였다. 그러나 ‘처녀’라는 단어는 결코 불성실했던 적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때때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음란하고 불성실하게 묘사되었을지라도, 종종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처녀로 불렸다(왕하 19:21; 사 37:22; 렘 14:17; 18:13; 31:4; 애 2:13; 암 5:2). 신약에서 이 단어는 교회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께 ‘정결한 처녀’로 드리기 위하여 애썼다(고후 11:2-3). 마태복음 25장 1-3절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은 열 처녀로 묘사되었다. 144,000인은 음행, 곧 짐승과 큰 음녀 바벨론과 그녀의 딸들을 경배함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지켜 그리스도께 충성하였다는 의미에서 처녀들이다.4)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로.
 70인역에서 헬라어 아파르케(aparche)는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수확의 첫 열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특별한 헌물로 그분에게 성별된 구속받은 성도들과 관련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5) 예를 들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굽에서 구속받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렘 2:3) 이 곳에서 예레미야는 구속받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드린 수확의 첫 열매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은 그를 압제하였고, 이제 곧 심판을 받게 될 적대적인 나라들과 구분되었다.6)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구속받은 그리스도인 들을 ‘그 조물 중에 첫 열매’라 하였다(약 1:18),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서, 144,000인이 ‘하나님께 드려진 첫 열매’로 언급된 것은 예레미야 2장 3절의 사상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이 144,000인은 ‘바야흐로 심판을 받을 믿지 않는 나라들’과는 대조적으로(포도 수확, 계 14:17-20) 종말 때에 추수될 수확의 첫 열매들로서 구속(敬順)받거나 수매된다(알곡 수확, 계 14:14-16).7)
요한계시록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거짓말.
 이 곳의 “거짓말”(프슈도스 pseudos)은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내뱉는 거짓말”(요일 1:5-10; 2:21-22)8)로, 통상적인 거짓말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종류의 거짓말은 마지막 때 사단적 삼위의 활동을 특징 짓는데(계 13:14; 16:13-14; 19:20), 144,000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다(계 21:27; 22:15 참조).
흠이 없는.
 헬라어 구약 성경에서 아모모스(amómos)는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에 대한 전문 용어로, 흠이 없고 ‘희생 제물로서 완전하다’는 의미다.9) 신약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며(히 9:14; 벧전 1:19), 또한 하나님 앞에서 흠도 없고 거룩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엡 1:4; 5:27; 빌 2:15; 골 1:22; 유 24). 144,000인 은 하나님께 드리는 흠없는 첫 열매들로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죄 없는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정절을 말하며,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포기하고 큰 음녀 바벨론과 그 딸들과 음행할 때, 자신들을 더럽히기를 거절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계 14:8; 17:2, 4; 18:3, 9; 19:2). B. S. 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모모스가 되는 것, 즉 마지막 때 대 환난을 통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완전한 상태는 144,000인에 게만 있는 독특한 자질이 아니다. 홈이 없다는 것은 144,000인들처럼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계 7:14) 구약이나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다. 바로 이 씻음과 어린양과의 동행을 통하여 그들은 흠 없게 되었다.”10)
(주해)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묵시의 다음 무대에서, 요한은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양과 그들의 이마에 그분 의 이름과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 쳐진 144,000인에게 주의를 돌린다. 이것은 수 세기 전 요엘의 예언을 반향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요엘의 예언 성취로서, 요한은 이 곳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시온 산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 14장은 일찍이 요한계시록 7장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한 그룹을 묘사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진노의 큰 날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인침을 받는 반면(7:9), 요한계시록 14장에서 그들은 시온 산에 서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시온 산은 ‘하나님의 종말적 승리’11) 즉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위한 구원의 장소이다. 144,000인은 분명히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이다(계 12:17).

 마지막 때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백성으로서 그들은 최후의 위기를 통과하였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영원한 안전을 누리며 흑암의 군대를 이기고 큰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144,000인은 그들의 이마에 쓰인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이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이름과 함께 상징적 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꼭 같이, 144,000인은 그들의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마에 이름을 받는 것은 ‘사단이나 하나님의 특성에 일치함’을 의미한다.12)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실한 자들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계 3:12)이 기록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하나님의 성’은 시온 산으로, 요한은 그 곳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시민권’을 의미한다. 이들은 그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들(계 13:16-17 참조), 곧 ‘땅에 거하는 자들’로 밝혀진 사람들의(계 13:14) 운명과는 전혀 다르다.13) 그러므로 144,000인의 이마에 있는 이름은,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단과 그의 동맹자들에게 전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치기로 마음을 정할 때,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전적인 헌신과 하늘에 그들의 시민권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은 구속받은 144,000인이 하늘에서 부르는 합창소리를 듣는다. 음악소리는 많은 물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 같고 거문고 타는 자들이 거문고를 타는 것 같았다. 후에 다시 요한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부르는 합창을 많은 물소리와 큰 천둥소리에 비유한다(계 19:1, 6), 구속받은 성도들은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다.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인 외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에서, 이 새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 과한 기적적인 구원을(출 15장) 축하하면서 부른 특별 찬양으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144,000인은 큰 환난에서 나왔기에 이 새 노래는 해방과 구원의 노래다(계 7:14). 이제 이들은 옛 이스라엘로 묘사된다. 홍해를 건넌 그들은 저 편에 서 있다. 최후의 위기에서 그들은 역사상 어떤 사람들도 경험하지 못한 구원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왜 다른 사람들은 이 새 노래를 배울 수 없는지의 이유다. 그것은 구속의 노래다(계 7:14-15 참조), 144,000인 은 하나님께 속하며, 그들은 그분의 보좌 앞에서 그들이 받은 구속을 찬양한다.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요한계시록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제 요한은 구속받은 144,000인의 신원을 파헤친다. 그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은 처녀들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큰 음녀 바 벨론과의 모든 더러운 관계를 거절하였다는 점에서 처녀들이다. 땅 위의 만국은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을 하였다(계 14:8; 17:2; 18:3),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충성한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땅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첫째 자리에 두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를지라도 그분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의 충성은 엄청난 시험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은 마지막 때의 기만에 맞서 승리하였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 아무도, 아무것도 그들을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다.

 그들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려진 첫 열매들로서 구속을 받았다. ‘그들이 구속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14) 그들 이 사람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들은 갈바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속함을 받았다(계 5:9). 마지막 때의 추수에 대한 묘사에서, 144,000인은 밀의 추수로 기술되어 있다(계 14:14-16).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수확의 첫 열매들로서 구속되었다(약 1:18 참조).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예물로서 그들은 시온 산에 있는 그분의 성소로 나오는 반면, 포도 수확으로 비유된 악인들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할 것이다(계 14:17-20).

 144,000인의 마지막 특성으로는 그들의 입에 거짓말이 없다. 여러 세기 전에 스바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훌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습 3:13) 거짓말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특성 중 하나다(계 21:27; 22:15).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하였다(롬 1:25). 144,000인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거짓이 없다는 것은 종말의 때 거짓말이 사단의 활동들의 특징이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특별히 중요하다(살후 2:9-11; 계 13:14; 19:20),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한(살후 2:10) 온 세상이 기만을 당하여 거짓을 믿게 되는 반면,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 성은 진리를 신실하고 굳게 붙든다.

 마지막으로, 144,000인은 수확의 첫 열매로서 흠 없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흠이 없으셨던 것과 꼭 같이(히 9:14; 벧전 1:19), 종말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흠이 없는 자로 발견되어야 한다(엡 1:4; 5:27; 빌 2:15; 골 1:22; 유 24).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도덕적 완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일컫는 말이다.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노아와(창 6:9) 아브라함이(창 17:1)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44,000인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계 14:4). 이 세상 역사 끝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버리고 사단적 삼위의 편에 설 때, 144,000인은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그리스도의 참 성품을 반사한다. 베드로는 이렇 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평강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 5:1 참조). 144,000인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충성하면서 그분과의 계속적이고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다.
첫째 천사의 기별 (14:6-7)
 종말에 관한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 중 하나는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4), 그 복음의 성취가 요한계시록 14장에 묘사되어 있다.16) 요한계시 14장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땅의 거민들에게 당신의 경고의 기별을 보내실 것을 예시하는데, 세 천사가 공중을 날아가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을 선포한다고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땅에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 10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헬, 포베오마이 phobeomai, ‘두려워하다’, ‘존경하다’)은 구약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삶속에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모신다는 사상을 전달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삼상 12:14, 24; 대하 6:31; 느 7:2; 욥 1:9; 시 40:3; 렘 32:39; 44:10; 학 1:12 참조).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애굽인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보았을 때, 백성은 그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분을 믿었다(출 14:31), 하나님의 종들은 종종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로 언급된다(창 22:12; 왕상 18:3, 12; 왕하 4:1; 시 111:10; 잠 1:7; 9:10).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나 바른 행동을 낳고(출 18:21; 레 19:14, 32; 25:17, 36, 43 참조) 악을 피하게 한다 (욥 1:1, 8; 잠 3:7; 16:6).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오는 후속 결과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은 이것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가 그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수행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다(요 17:4).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처럼 자신들을 가치 있게 여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고전 6:19-20), 그리스도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전 10:31).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권고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그들에게 행한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를 순종하며,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는 호소를 반영하는 것이다(신 6:13, 17; 10:12-13; 13:4). 구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 이 둘은 항상 나란히 간다(신 5:29; 6:2; 8:6; 17:19; 31:12; 시 111:10; 112:1; 119:63; 128:1; 렘 44:10), 솔로몬에 의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과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은 인간의 첫째 의무다(전 12:13), 요한계시록 14장 7절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계 11:18; 15:4; 19:5)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로 언급되어 있다(계 12:17; 14:12 참조).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심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리시스(krisis)로서 기본적으로 심판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계 16:7; 18:10; 19:2).17) 이와는 대조적으로, 크리마 (krima)는 일차적으로 심판 행위의 결과, 즉 ‘평결’, ‘심판의 선고’를 의미한다(계 17:1; 20:4 참조).18) 영어 성경에서 ‘이르렀다’ (has come)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상으로는 진입(進入)의 부정과거(ingressive aorist)로 과거의 시점에서 발생한 어떤 행동이 시작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르렀다’를 소위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 미래의 사건을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과거시제)로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4장 8절과 같은 것이다.19) 그러나 그레고리 K. 빌이 말한 것처럼, 접속사 왜냐하면 (호티 hoti)은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이 발한 이유임을 나타낸다. “기별을 들은 자들이 받은 경고는 형벌의 시간이 이르기 전에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에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20) 첫째 천사가 지적한 ‘그의 심판의 시간’은 심판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것의 첫 번째 국면은 재림 전에 일어나고 두 번째 국면은(최후의 심판) 천년기 후에 일어난다(계 20장),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은 각 사람의 운명은 재림과 최후의 심판 전에 결정될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급을 가져가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며,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계 22:12), 천년기 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은 집행 심판으로(계 20:11-15), 재림 전에 확정된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다. 왕국에 포함될 사람들과 제외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결정은 재림 전 심판에서 다루어지는 것으로서 보좌 앞에서 이루어진다. 신실한 자들은 최후의 심판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요5:24).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
 이 절은 “주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을 반향한다(출 20:11), 독자는 70인역의 단어와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20:11 “그분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다.” (70인역)
요한계시록 14:7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
연합성서공회 헬라어 신약 성경의 4판 편집자들은 요한계시록 14장 7절 하단이 출애굽 기 20장 11절을 반영한다고 여백에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첫째 천사의 호소는 십계명의 넷째 계명이라는 문맥에서 주어진 것이다.
(주해)
 구속받은 무리들이 승리하여 시온 산에 서 있는 것을 본 후에,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 곧 자비를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때가 이르기 전에 모든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 는 천사에게 그의 눈을 돌린다.
요한계시록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첫째 천사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전할 경고의 기별을 가지고 공중을 날아간다.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이다(계 13:8). 이것은 최후의 기별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기별은 영원한 복음이라고 일컫는다.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마지막 때에 전하는 복음은, 특별히 지상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 적합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복음은 오순절에 선포되었던 것과 동일한 불변의 복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봉사와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하늘로의 승천, 그리고 그 다음 사건으로서 하늘 보좌에 등극하신 일 등에 대한 복음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보좌에 서 우주의 구주(Lord)로서 통치하신다. 그 복음은 그분의 중보, 심판, 그리고 이 땅에 오실 그 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복음이기도 하다. 이 영원한 복음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전파되고 들려질 것이다(마 24:14 참조).

 이 영원한 복음은 그 규모에서 세계적이다. 그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선포된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라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10장 11절과 연관된다. 그 곳에서 요한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본래 요한 이 받은 사명은 교회와 더욱 관련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 세계적 경고는 바다 짐승이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때, 또한 모든 사람이 사단에게 그들의 충성을 바치고 그를 경배할 때(계 13:7-8) 발해진다. 마지막 때 사단의 활동이 그 규모에서 세계적인 것같이, 종말의 때 복음의 기별도 세계적이다. 그 기별의 목적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하여 그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이 곳에서 실제로 보는 것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의 성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 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세 천사는 세상에 최후의 복음 기별을 선포하면서 모든 백성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촉구한다. 아직 너무 늦지 않았다. 죄인들에게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얻을 시간이 여전히 주어졌다.21)
요한계시록 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이제 요한은 첫째 천사가 선포하는 마지막 때의 복음을 요약한다. 이 복음은 큰 음 성으로 선포된다. 그것은 땅의 거민들에게 발해진, 잠에서 깨어나라는 두 개의 권고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11:13; 14:7; 15:4 참조), 전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칭하는 반면, 후자는 그분의 계명들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사람이 주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역사를 깨달은 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계 11:13; 15:4).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회개에 이르게 된다(16:9; 11:1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진지하게 대하고, 삶에 있어 결정적 전환을 하고, 그분과의 관계에 들어가고, 그리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 특징인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이 바로 첫째 천사의 호소가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권고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급된 심판은 심판의 첫째 국면으로서(재림 전 심판) 재림 전에 하늘에서 이루어진다. 심판의 이 첫째 국면은 천년기(계 20:11-15) 이후에 일어날 집행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심판은 최후의 복음 선포가 온 땅에 진행될 때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바, 심판과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들과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구분하는 분명한 선이 그어진다.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혹은 안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첫째 천사의 기별은 매우 분명히 한다. 전도서의 경고는 이렇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바울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가 행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고후 5:10),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은 마지막 때의 복음 선포와 재림 전 심판이 하나님을 택한 자들과 잃어버린바 된 자들 사이를 크게 분리시킬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으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계 22:12).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이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한 편으로는 상을 주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신다.

 첫째 천사의 기별에서, 마지막 때의 심판이 영원한 복음의 일부분임이 드러났다.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심판이라는 말은 복음이다. 그들에게, 심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압제적인 박해의 세력들을 처리하실 시간이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충성된 백성을 옹호하실 것이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압제받은 백성이 전 역사를 통하여 염원하였고 기도하였던 바로 그 심판이다. 이 기다림은 순교당한 성도들이 제단 밑에서 “오, 주여 언제까지?”(계 6:10)라고 끊임없이 탄원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심판의 때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에게 “그들의 영원한 본향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신호다.”22) 그러나 불충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 두려운 사건이다.”23) 하나님께서는 그 들을 감동시켜 회개케 하시려고 그들에게 최후의 복음을 보내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벧후 3:9).

 첫째 천사는 땅의 거민에게 두 번째 권고를 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들은 그분을 경배하는 자 들이다(계 15:4 참조). 최후의 위기에서 쟁점의 중심은 경배일 것이다. 마지막 때에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 즉 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사람들과(11:1, 18; 14:7) 진리를 증오하고 용과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13:4-8; 14:9-11)이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 반면,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은 “그 이름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다(13:8). 최후의 투쟁은 두 무리 사이를 구분하는 분명한 선을 그을 것이다. 온 세상이 짐승과 사단적 삼위를 경배하기 위하여 돌아설 때(계 13:12), 하나님의 종말적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그분의 계명들을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특징 지워진다. 순종하는 계명들 중에는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간의 표로서 하나님의 참 예배일을 가리키는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출 31:13-17; 겔 20:12, 20 참조).

 만일 경배가 마지막 쟁투의 주요 쟁점이라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위한 자신의 복음을 땅의 거민들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며 하나님을 창조주, 곧 경배를 받기에 합 당한 유일한 분으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계 14:7; 19:10; 22:8-9 참조). 참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권고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마지막 세대에게 특히 중요하다.

 첫째, 이 권고는 창조에 대한 성경 기사의 타당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약화시키는 진화론이 등장하여 인기를 얻는 시류에 비추어 특히 적절하였다.

 둘째, 하나님, 곧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권고는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을 지칭함이 분명하다. 넷째 계명은 백성에게 안식일 준수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엿새 동안에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안식하시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출 20:11). 첫째 천사의 기별에 사용된 언어와 넷째 계명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초청이 넷째 계명과 관련하여 주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마지막 때의 복음 선포에 있어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호소가 안식일 계명의 맥락에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한다. 폴린이 지적하듯이, 비록 “쟁점이 안식일에 ...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후의 위기 가운데서 안식일이 “쟁점의 필수 부분”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24)

 결론적으로, 첫째 천사의 권고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행한 호소” 즉,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오직 그만 경배하라는(신 6:13, 17; 10:12-13; 13:4) 호소를 분명히 반향 한다.25) 그 같은 호소로 전도서가 마쳐 진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 세상 역사가 끝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땅의 거민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신다. 아직 너무 늦지 않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의 은혜로 용서받을 기회가 여전히 있다. 144,000인의 노래가 가리키듯이, 많은 사람들이 첫째 천사가 전하는 기별의 호소에 응할 것이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4)
둘째 천사의 기별 (14:8)
 둘째 천사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마지막 때에 있을 바벨론의 무너짐을 간략히 선포한다. 그의 선포는 첫째 천사가 선포했던 적극적인 초청, 곧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초청으로부터 기별을 거절하고 불신한 결과에 대한 묘사로 바뀐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헬라어에서 반복된 동사 ‘무너졌도다’는 미래의 사건을 선언하는 부정과거다. 히브리 예언에서 부정과거의 미래적 용법은 예언적 완료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미래의 사건이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과거시제로 표현하는 용법이다(사 21:9; 렘 51:8; 계 10:7 참조). 이 곳 본문에서, 장차 있을 종말적 바벨론의 붕괴가 마치 이미 일어난 것으로 선언되었는데, 이것은 장차 있을 바벨론의 붕괴에 관한 예언의 확실함을 강조하는 것이다.26)
큰 성 바벨론.
 요한계시록의 이 성경 절에서 바벨론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종말의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신약의 신학적 개념은 구약의 고대 바벨론(신의 문)의 역할에 뿌리가 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종교적-정치적 세력이다. 그 시작부터 바벨론은 참 하나님을 적대하는 무신론적 세력의 화신으로 서 있다(창 11:1-9 참조), 구약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은 참 하나님을 믿는 종교를 적대하고 세상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종교체제를 대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큰 원수로 묘사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바벨론 왕을 루스벨과 동일시한다(사 14:12-14),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향하여 나타낸 바벨론의 행위와 태도는 루스벨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이라는 표현은 느부갓네살의 자만을 상기시켜 주는 말로 쓰였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이 자만으로 인하여 그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게 되었다(단 4:31-32). 바벨론은 바야흐로 그 종국을 맞으려 하고 있었다. 서기 일세기 말경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바벨론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은 로마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벧전 5:13 참조).27)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종말적 바벨론의 신학적 의미는 구약에 등장하는 고대 바벨론의 신학적 뜻에 기초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7장 1-13절은 바벨론을 ‘많은 물들’과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음녀로 묘사한다. 물과 짐승은 세상의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바벨론이 세상의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과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마지막 때 사단적 삼위로 구성된 전 세계적 종교동맹체를 대표한다(계 16:19). 이 동맹체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포진하고 있는 세력이다. 구약의 바벨론처럼, 종말적 바벨론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며 하나님을 대신하려 한다(살후 2:3-4 참조). 요한계시록 13장은 이 종교 체제가 삼위 하나님을 위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배도한 종교 조직을 연합시켜 그들로 사단적 삼위를 섬기게 하고, 종말 때에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백성을 대적하게 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이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백성에게 돌렸던 그 증오심은 마지막 때 이 세계적 동맹체의 특징이 될 것이다(계 13:6 참조), 요한계시록 17장 2-4절은 바벨론이 만국을 그의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의 활동들은 이 세상의 세속적, 정치적 지배 세력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승인을 받을 것이다(계 13:12-17).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바벨 론이 영원히 그 최후의 종말을 맞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옹호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 요한은 이 종말적 체제가 세 부분으로 깨어지는 것을 보았다(계 16:19), 다시 말하면, 사단적 연립(聯立)이 피할 수 없이 붕괴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종말적 바벨론 붕괴에 관한 묘사는 고대 바벨론의 몰락에 근거한다. 요한계시에서 마지막 때의 큰 성 바벨론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런식으로 보아야 한다.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
 이 말은 구약의 두 개념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28) 첫째,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대 바벨론을 술에 취하게 함으로써 남자를 유혹하여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게 한 음녀로 묘사하였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노의 포도주 잔’이며, 만국에게 그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렘 25:15; 51:7), 한편, 욥은 악인에 관하여,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라 고 하였다(욥 21:20), 요한계시록 14장 8절에 의하면, 세상은 바벨론의 매혹적인 음행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며(17:2; 18:3 참조), 그 결과로 일련의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계 14:9-10 참조).
음행.
 ‘부도덕’은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의 상징으로, 이에 대한 비유적 표현은 구약에서 끌어왔으며(사 57:3-12; 겔 16:15, 26-29 참조), 신약에서 계속된다(약 4:4; 계 17:1-5 참조). 요한계시록 14장 4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백성에게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초청을 발하는 첫째 천사에 뒤이어 둘째 천사가 무대에 등장한다. 이 천사가 ‘둘째’로 언급되고 그가 첫째 천사를 ‘뒤 따른다’는 사실은 두 기별 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14장의 둘째 천사의 기별은 첫째 천사의 기별을 보완한다. 만국의 남녀들은, 그들이 돌이켜 창조주를 경배하게 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역행하는 모든 제도들과 음모들을, 그것이 설령 종교적인 것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배격해야 한다.”29)

 둘째 천사는 종말적 바벨론의 붕괴를 이렇게 선언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바벨론은 사단적 삼위, 곧 용, 바다 짐승, 그리고 땅 짐승으로 구성된 마지막 때의 세계적 종교동맹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백성을 대적하려고 도열해 있다. 윌리엄 G. 존슨이 제안하듯이, 바벨론은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려는 모든 인간적인 시도,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모든 계획과 프로그램 등을 대표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것 들이 오로지 인간의 이성과 책략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30) 다시 말하면, 복음에 맞서는 것은 종교 제도다. 복음이 영원한 것에 비하여 바벨론은 오래 가지 못한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과거시제로 ‘무너졌다’는 말을 반복한 것은 종말적 바벨론 몰락의 임박성과 확실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고대 바벨론의 몰락을 예언하며 사용하였던 바로 그 말들의 반향이다. 이사야는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숴져 땅에 떨어졌도다”라고 외쳤다(사 21:9).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렘 51:8) 이와 동일하게, 둘째 천사는 종말적 바벨론의 붕괴를 선언한다. 이 바벨론은 배도한 세계적인 종교 체제와 세상의 정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종교 조직들로 이루어진 동맹체다(계 13:12-17),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 당사자인 배도한 이 종말적 종교 체제는 그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둘째 천사가 이 곳에서 선언한 그 붕괴는 후에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묘사된다.

 종말적 바벨론은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만국을 취하게 하였다. 이 말은 고대 바벨론을 쳐서 말한 예레미야의 외침을 반향한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렘 51:7; 25:15 참조), 마찬가지로, 요한은 종말적 바벨론을 만국을 유혹하여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하여 부도덕한 일에 빠지게 하는 음녀로 묘사하였다(계 17:1-2; 18:3 참조).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우리는, 바벨론이 기만으로 만국을 미혹하여 어떻게 그들로 사단적 삼위 편에 서게 하는지를 보았다. 바벨론의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땅의 거민들을 미혹하여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게 하고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계 14:9; 13:11-17; 17:1-6; 18:2-3 참 조), 미혹을 받은 만국은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위하여 바벨론과 연합한다(계 18:3, 9-19).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둘째 천사의 기별이 악인들을 경고하는 경보인 반면, 그것은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강력한 보증이다. 배도한 세계적 종교 체제인 종말적 바벨론은 일시적 존재에 불 과하다. 그것은 곧 그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바벨론의 붕괴는 결정되었고 선언되었다. 아무 도 속임을 받지 않아야 한다. 바벨론에서 나와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계 18:1-4).
셋째 천사의 기별 (14:9-11)
 경고의 기별을 가진 셋째 천사는 첫 두 천사들을 뒤따라 경고한다. 그의 경고는 둘째 천사의 선포에 기초되어 있다. 특히, 셋째 천사의 기별은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첫째 천사의 기별을 거절하고, 대신 짐승을 경배하며 그들의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기로 한 자들에 관한 내용이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표.
 요한계시록 13장 16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구약에서 하나님이 집행 하시는 진노는 종종 그분의 잔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으로 상징된다(욥 21:20; 시 60:3; 75:8; 사 51:17-23; 렘 25:15-29; 49:12; 겔 23:32-34; 옵 16 참조). 욥기에서는 악인들이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욥 21:20),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예루살렘은 멸망당한 사마리아와 똑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비소와 조롱을 당하리라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겔 23:32-34).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라 하였다(사 51:7, 22절 참조). 이 비유적 표현은 구약의 다른 곳에도 나온다(시 60:3; 렘 25:15-29; 49:12-13; 옵 15-16).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당할 자신의 고통을 언급하면서 똑같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셨다(마 20:22; 26:39; 요 18:11).

 요한계시록 14장 10절에서, 진노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헬라어 쒸모스(thumos ‘분노’, ‘격노’)와 오르게(orge ‘진노’)가 사용되었다. 쒸모스는 강력한 또는 격렬한 분개 또는 분노인 반면, 오르게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사용되는 통상적 단어다(특히 바울이 사용한 언어에서 그렇다. 롬 1:18; 3:5; 12:19; 골 3:6 참조).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쒸모스오르게는 함께 하나님의 종말적 진노에 사용된다(계 14:10, 19; 15:1, 7; 16:1, 19; 19:15). 두 단어는 종종 요한계시록에서 뿐만 아니라 70인역에서 함께 사용되는데, 이는 심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실제적 진노를 배가시킬 목적 때문이다(계 14:10; 16:19; 19:15; 롬 2:8 참조).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와 관련하여 사용된 헬라어 케란뉘미(kerannumi 섞다)는 그 취기(辭氣)를 가중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향신료와 약초를 술과 섞거나, 그 효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물을 섞는 고대의 관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진노의 포도주”라는 표현은 물로 희석된 것이 없는 독한 포도주를 의미한다.3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쏟으실 최후의 진노는 자비가 섞이지 않은 큰 진노다. 시편 75편 8절은 특히 이 곳에서 의미가 깊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께 서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불과 유황과 연기가 ‘세세토록’ 하늘로 올라간다는 사상은 구약에서 끌어왔다.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하늘에서 내리”신 후에(창 19:24), 아브라함은 연기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19:28).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묘사하였다(유 7),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에돔을 불과 유황으로 벌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께 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사 34:8-10)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고, 세세에 황무할 것이며, 그 폐허에서 결코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어떤 예언을 주목하라. 요한계시록 14장 11절(19:3; 20:10 참조)에서의 세세토록 올라가는 연기는 특히 에돔에 관한 이사야의 이 예언을 반영한다. ‘세세토록’이라는 말은 끝없이 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불이 그들의 운명이었을지라도, 오늘날 현대 요르단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에돔이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데스몬드 포드가 강조하듯이, “불의 목적은 소멸시키는 것이지 결코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32) ‘세세토록’이라는 말은 더 타야 할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진(德)함을 의미한다.
(주해)
요한계시록 14: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요한계시록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셋째 천사는 첫째 천사의 기별의 주제를 계속 이어간다.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그 이마에나 오른손에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을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으라는 요구는 요한계시록 14장 7절“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명령의 상대물이다. 최후의 위기 때 오른손이나 이마에 있는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인의 상대물로서 사단적 삼위를 경배하는 자들의 신원 파악에 사용된다. 짐승을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과 정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사단적 삼위에 대한 순종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13장 11-17절은, 땅의 거민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으라고 요구함으로 바벨론 은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하였으며(계 14:8), 그들을 유혹하여 사악한 삼위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바벨론의 매혹적인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기를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진노의 잔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욥 21:20; 시 75:8; 사 51:21-23 참조). 심판의 집행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아 붓는 것으로 상징되어 있다(계 15-16장),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아 부음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 마”친다(계 15:1).

 하나님의 진노의 이 잔은 섞인 것이 없는 그의 진노의 잔이다. 이것은 최후의 진노는 자비와 은혜가 섞인 것이 없는 완전한 진노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33)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 적인 감정”으로가 아니라 죄와 반역에 필연적인 “거룩하신 하나님의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34)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악의적으로 압제하였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불순종하였으며, 복음을 반역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반응이다. 래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노로 모든 악과 반역의 세계를 최종적으로 정결케 하지 않는 한, 그분의 왕국은 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큰 의미에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본다면, 그분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더불어 불가피한 상관 관계에 놓인다”고 하였다.35)

 셋째 천사는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위에 일곱 재앙이 쏟아질 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 외에, 불과 유황으로도 고난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이 하늘의 여호와로부터” 비처럼 쏟아져 내린 장면을 연상시킨다(창 19:24).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원수 에돔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도 상기시킨다(사 34:8-10).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된 에돔은 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단적 삼위와 한편이 된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와 에돔같이 최후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마지막 때에”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이고 완전”할 것이다.36)

 불신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멸망할 것이다.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묘사된 천년기 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 사데 교회의 승리자들이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인정받으리라는 약속이 있지만(계 3:5),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천사들 앞 타는 불못에서 그들의 종국을 맞이할 것이다. 유황으로 타는 불못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형벌하는 상징적 장소다(계 19:20). 이와 같이, 복음의 초청을 거절하고 사단적 삼위 편에 선 사람들은 “불과 유황의 못”에서 사악한 삼위의 궁극적 운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 곳에서 그들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계 20:10).
요한계시록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유황으로 불타는 멸망의 불은 복음을 거절하고 짐승을 경배하며, 그의 표를 받은 사람들을 멸망시킨다. 그 멸망은 최종적이요 돌이킬 수 없이 완벽한 멸망이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 올라가는 연기는 완전한 소각을 의미한다. 이는 두 도시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서 아브라함이 보았던 소돔과 고모라의 올라가는 연기와 매우 흡사하다(창 19:28). 구약의 선지자들은 골짜기에서 소멸된 도시들을 고대 바벨론의 운명에 대한 모델로 사용하였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사 13:19; 렘 50:40 참조) 종말적 바벨론의 멸망을 기술하며,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고대 바벨론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사용했던 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임박한 심판에 관한 묘사는 “누구도 기술할 수 없는 두렵고도 최종적인 상황”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37) 타고 있는 유황불 연기에 관한 비유적 표현은 영원히 불타고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종적 심판의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는 불은 그 목적을 완전히 이루어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까지 계속된다.

 더욱이 천사는, 짐승을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들은 밤낮으로 심을 얻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의 진술과 대조되는데,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수고에서 쉬리라는 약속을 받는다(6:11 참조), 그러나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은 결코 그 심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반역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쉼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반향한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 95:11) 약속된 안식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얻는 안식으로서 신약에서 계속된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9-11)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는 안식은 영원하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을 위한 임박한 심판의 쉼 없음도 끝이 없다. 필립 E. 휴즈가 말했듯이, “이 마지막 심판에는 집행 유예가 없다. 사망의 선고는 취소할 수 없다. 결코 회복이 없는 멸망이다.”38)

 셋째 천사의 경고에서 사용된 괴이한 언어는 백성을 움직여 참 하나님께 충성하게 하고 확고히 서게 하려 함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은 백성으로 하여금 경배하라는 그의 요구에 응하게 하려고 두려움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제 셋째 천사의 기별에 의한 “더 큰 두려움이 짐승에 의한 두려움을 내쫓았다.”39)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경고함에 있어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복음의 최후 초청에 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순종하여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직면할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충성된 남은 자손 (14:12-13)
 최후의 위기 때 사단적 삼위에 가담했던 자들이 당면할 필연적 결과에 관한 경고의 기별을 결론 지으면서, 요한은 마지막 때 있을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과 그들의 영광스러운 장래를 제시한다. 요한계시록 14장 12-13절은 마치 세 천사가 선포한 기별들의 부록으로 첨부된 요한의 해설처럼 들린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예수 믿음.
 여기서 예수 믿음은 필시 목적어적 소유격으로서 요한계시록 2장 13절과 같은 의미, 즉, 예수에 대한 믿음을 뜻하는 것 같다(막 11:22; 약 2:1 참조, NEB, 예수님께 대한 지속적인 충성).40) 이 곳에서 ‘지키다’(헬, 테레오 téreo)라는 말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와 같이 ‘유지하다’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을 지키다’ 또는 ‘충성하다’라는 말은 요한 당대의 통상적인 헬라어 표현이었다.41) 본문에서 이 구절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산 믿음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그 새롭게 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 초래한 “혹독한 박해의 압제 하에서도”42) 그들로 순종할 수 있게 해주고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칠복 중 두 번째 복이다(1:3; 14:13; 16:15; 19:9; 20:6; 22:7, 14). 요한계시록 1장 3절 어구 해설을 참 조하라.
그들의 수고.
 헬라어 코포스(kopos)‘힘든 일’ 또는 ‘피곤하여 지칠 때까지 하는 수고’ 를 의미한다(롬 16:12; 고전 15:10; 갈 4:11; 살전 2:9 참조). 요한계시록 2장 2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셋째 천사의 기별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경고인 반면, 성도들에게는 충성되고 확고부동하라고 촉구하는 강력한 자극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구절의 상단은 요한계시록 13장 10절에도 나온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의 성도들은 틀림없이 사단적 삼위가 대적하는 요한계시록 13장 7절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믿음을 가진”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의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이다. 그들은 저항하거나 항거하지 말고 인내하며 견디라고 부름받았다. “여기 있나니”라는 말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사악한 삼위의 편에 서서 사단에게 충성과 복종을 하는 최후의 위기 때, 곧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거짓 사상들에 의해 농락되고, 종교 동맹에 의해 공격받으며, 국가 권력들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43)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에 확고 불변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그분에게 순종하며(계 12:17 참조),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께 충성함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한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그들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존슨의 이야기처럼, 그들은 “거짓 종교 체제와 연관된 기적적인 현상들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는다. 설득이나 강압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념에 확고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손실과 육체적 고초와 심지어 죽음까지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44)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의 칠복 중 두 번째 복은 참고 그리스도께 끝까지 충성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보증을 한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자신들의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 때문에 죽임당할 때, 그것은 종종 비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그들의 죽음은 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이 쉼은 사단적 삼위를 따르는 자들의 슬픈 현실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계 14:11)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그들의 수고로부터 쉬라는 약속을 받는다. 헬라어의 의미는, 힘들지만 좋은 일로부터 쉬라는 것이 아니라, 지쳐 쓰러질 지점에까지 이른 수고로부터 쉬라는 뜻이다.45) 지칠 대로 지치고 힘든 수고로부터의 쉼은 특히 감미롭다.46) 이 쉼은 다섯째 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은 제단 밑의 순교자들에게 약속된 것과 동일한 쉼이다(계 6:9).

 이것은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의 수고가 마지막 때에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헌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고난과 박해를 받았다(계 12:11 참조), 그들은 자신들의 수고로부터 쉬게 되나 저들이 행한 일은 저들을 따른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분명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킴으로 보여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가리킨다(계 14:12). 그들의 인내는 과거지사가 되고, 그들은 부활과 다가오는 영광의 날까지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 쉼을 얻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당부를 받는다. 왜냐하면 저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이다(고전 15:58).
땅의 두 가지 추수 (14:14-20)
 마지막 때 선포되는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악인들 사이를 크게 분리한 다음 끝을 맺는다. 본 단락은 재림 전에 있을 큰 분리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요한은 그것을 이중 추수 곧, 알곡의 추수와(14:14-16) 포도주 틀에서 밟힐 포도의 수확(14:17-20)으로 묘사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이 표현은 다니엘 7장 13절에서 끌어왔다. 복음서에서 ‘인자’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애칭이었다. ‘인자 같은 이’라는 동일한 표현이 요한계시록 1장 13절 에서 사용되었다. 어떤 주석가들이 추정하듯이, 이 곳에서 표현된 ‘인자 같은 이는 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임을 암시한다(계 1:13의 어구 해설 참조).
금 면류관.
 면류관에 사용된 헬라어는 스테파노스로서 왕관이 아니다. 그것은 승리의 면류관, 즉 화관이다(계 2:10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1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성전.
 여기 사용된 헬라어 나오스는 성소를 지칭하거나 내부 성전, 즉 지성소를 가리킨다. 나오스의 의미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11장 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네 낫을 휘둘러.
 15절과 18절의 낫을 휘두르라는 명령은 요엘 3장 13절에 대한 직접적인 인유다. 그리스도께 내려진 추수 명령에는 펨포(pempō 보내다)라는 헬라어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종말적 추수와 관련하여 사용하신 것이며, 그 추수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추수하시기 위하여 낫을 대실 것이다(막 4:29). 그러나 마태복음 13장 39-43절에 의하면, 인자가 땅의 추수를 위하여 보내실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물의 비유에서, 천사들은 마지막 정점에 악인들과 의인들을 분리시킨다. 예수께서 보내신 추수꾼들로서 천사들의 역 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의인들을 모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일은 감람산 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종말적 담화에서 다시 확인된다(막 13:27; 마 24:3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장 15절과 18절에서 낫을 휘두른다는 것은 천사들을 보내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며, 보냄을 받은 그들의 역할은 곡식과 포도의 추수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신실한 자들을 모으며, 하나님의 최후의 진노가 쏟아질 때를 위하여 악인들을 모으는 것을 뜻한다(추가적 논의는 다음 단원을 참조하라).
땅의 추수.
 (타작 마당과 더불어) 추수는 잘 알려진 성경적 은유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원수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 사용되었다(렘 51:33; 욜 3:13 참조), 그것은 또한 긍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호 6:11; 욜 3:1-2 참조)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추수는 백성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모으는 것이다(마 9:37-38; 눅 10:2; 요 4:35-38).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9)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 수님은 추수의 사상을 재림 전에 있을 대 추수와 그 이후에 있을 악인들의 심판과 연결시키셨 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값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 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9-43) 침례 요한에 의하면, 추수 때에 그리스도께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 3:12).47)
요한계시록 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제단.
 이 곳에 언급된 제단은 아마도 보좌 앞에 있는 향단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8 장 3-5절에서 언급된 번제단일 것이다(계 8:3의 어구 해설 참조).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이 제단 아래였다(6:10). 이제 순교당한 성도들에게 말씀한 약속이 성취될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 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악의적으로 압제하고 핍박했던 자들을 이제 막 심판하려 하신다.
네 이한 낫을 휘둘러.
 요한계시록 14장 15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
 윌리엄 바클리가 설명하는 대로, 포도주 틀은 “도관(導管)으로 연결된 상부 홈통과 하부 홈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홈통들은 바위를 파내어 만들었거나 벽돌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포도는 약간 높은 곳에 있던 상부 홈통에 넣어졌다. 발로 밟으면 연결된 도관을 따라 하부 홈통으로 즙이 흘러내렸다.”48) 포도를 밟는다는 이 비유적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내려질 때 사용되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자기의 진노를 에돔에 쏟고 돌아오는 용사로 묘사한다.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사 63:1-6).
예레미야도 유사한 방법으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다.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애 1:15) 요한은 이 세상 역사의 끝 날에 있을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려고 술틀에서 포도를 밟는 널리 알려진 이 비유를 사용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피 뿌린 옷을 입”“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용사로 기술한다(계 19:13-15).
요한계시록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성 밖에서 밟히니.
 ‘성 밖’이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여호사밧 골짜기에 (아마 예루살렘과 감람산을 가르는 기드론 골짜기일 것이다.) 만국이 모여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요엘의 예언에 대한 인유다. 요엘의 예언에서 만국에 대한 심판은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욜 3:10; 슥 14:2-4 참조) 이러한 의미와 이러한 구약적 배경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성 밖에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신다고 표현한 것 같다. 요한은 원래 민족적, 지역적 의미를 지녔던 요엘의 예언을 재해석한다. 그는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압제한 자들에게 쏟아 부을 그분의 진노와 관련하여 그 예언의 세계적 성취와 의미를 부여한다.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여기서 요한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전쟁에서 빌려온 과장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유대인의 위경인 에녹1서에 나오는 한 흥미로운 진술은 이 과장법적 표현이 일세기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술하기 위하여 널리 사용되었던 것임을 확증한다. “말이 죄인들의 피를 통과하여 지날 것이며, 그 피가 가슴까지 찰 것이다. 병거가 그 꼭대기까지 빠질 것이다. 그 때에 천사들은 은밀한 장소로 내려올 것이다. 그들은 범 죄하는데 일조한 모든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심판의 그 날에 일어나 그 모든 죄인들에게 큰 심판을 하실 것이다.”49)
일천육백 스다디온.
 한 스다디온은 약 600피트의 거리였다. 이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석은 아직 없다. 학자들의 가장 보편적인 견해에 의하면, 일천육백 스다디온 (약 300km)은 대충 팔레스타인의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길이에 해당된다.50)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은 피로 완전히 뒤덮인 전쟁터가 된 땅 전체를 대표할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4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4는 땅의 숫자다(땅의 네 모퉁이[계 7:1; 20:8], 땅의 네 바람 [마 24:31], 땅의 네 부분[사 11:12]), 일천육백의 상징적 의미는 그러므로 4X400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일천육백 스다디온은 하나님의 진노의 집행이 세계적 규모와 중요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아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의 설명이 최선의 해석일 것이다. “중심 사상은, 하나님 교회의 원수들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모든 원수들로부터 확실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고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기쁨에 넘치는 승리를 바랄 수 있다.”51)
(주해)
 마지막 때에 영원한 복음이 선포됨으로 온 세계의 사람들은 두 진영 곧, 복음의 초청에 응 하여 반대와 압박의 와중에서 참 하나님을 경배한 사람들과, 복음을 거절하고 사단적 삼위의 편에 서서 짐승과 사단을 경배한 자들로 나뉘었다. 이 세상 역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사 람들이 “그의 행한 대로”(계 22:12) 받게 될 최후의 심판으로 종결짓는다. 이 심판 전에 큰 추수가 있어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왕국으로 인도되고,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던 두 번의 추수로 그 상황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1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요한계시록 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이제 요한은 흰 구름과 구름 위에 인자 같은 이가 앉아 계신 것을 본다. 이것은 다니엘이 보았던 묵시를 상기시킨다.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부터 나라와 우주적이고 영원한 통치권을 이양(移讓) 받는 장면을 보았다(단 7:13-14). 그러나 요한은 이 곳에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 자”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마 2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 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요한은 그의 책 서두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다고 선언하였다(계 1:7). 이 구절들은 ‘흰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 같은 이는 땅을 심판하실 목적으로 속히 오실 그리스도이심을 시사한다. 그분은 그의 머리 위에 금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고 묘사되었다. 이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인 화관이다. 그분은 손에 추수 도구인 예리한 낫을 가졌으며, 땅의 추수를 준비하고 계신다.

 복음 선포는 끝나 땅의 곡식을 거둘 때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막 4:29).

 이제 요한은 성전에서 나오는 천사를 본다(계 11:19 참조). 이 성전은 하늘 성전의 지성소를 지칭한다. 이는 그 천사가 하나님 자신의 기별을 가지고 하나님 바로 면전에서 나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천사는 추수 때가 이르렀다고 선언한다. 그는 그리스도께 요청한다.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고 땅의 추수가 익었음이라. 비슷한 명령이 열국에 대한 요엘의 심판 예언에서 발견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천사의 요청에 응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낫을 휘둘러 수확하신다.

 예수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마 13:39), 곧 재림 전에 추수하실 것을 분명히 하셨다. 추수는 복음 선포의 종결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는 그 분량이 찼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편이 되었거나 사단적 삼위의 편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는 작업은 끝났다. 복음 기별을 줄기 차게 거절하고 반대하였던 사람들을 위한 유예의 기간도 끝났다. 각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렘 8:20) 이 제는 하나님의 진노가 악인들에게 집행되기 전에 구속받은 자들을 왕국으로 모아들일 때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아 붓는 것으로 상징되었다(마 24:30-31). 의인을 거둬들이는 일은 예수께서 큰 능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기 전에 일어난다. 그 분은 당신의 추수꾼인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다(막 13:26-27; 마 24:30-31), 이것은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서 언급된 “첫 열매들”을 의미한다. 구속받은 자들은 알곡 추수의 첫 열매들이다(렘 2:3 참조), 그들은 인침을 받은 자들이다(계 7:3-8 참조), 포도 추수에서 바야흐로 심판을 받게 될 믿지 않는 열국과는 이런식으로 구분된다(계 14:17-20), 인침을 입은 구속받은 자들은 악인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계 7:3; 15:1-6 참조). 이제 그들의 죽을 몸은 변화를 입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전 15:50-54). 이어서 그들은 공중으로 끌어올려 영광 중에 오시는 그리스 도를 만날 것이다(살전 4:17).
요한계시록 1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요한계시록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알곡으로 추수된 후, 이어서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는 것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진노가 악인들에게 쏟아진다. 요한은 요엘의 예언에서 두 종류의 추수 4기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끌어온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골 3:13) 이 곳 요한계시록에는 알곡 추수에 이어 포도주 틀에 포도를 밟는 일이 뒤따라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왕국으로 모은 후 하나님의 진노가 사단적 삼위에 가담한 자들 위에 쏟아질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늘의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도 예리한 낫을 가지고 있다. 이 천사도 이전의 천사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나온다. 이일 후 요한은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이 천사의 신원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먼저, 제단에서 나오는 이 천사는 요한계시록 8장 3-5절에서 언급된 천사와 연결된다. 요한계시록 8장 3-5절의 천사는 제단에 서서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바친다. 이 기도들은 전 역사에 걸쳐 압박받았던 하나님의 백성의 연중 끊이지 않는 탄원이었다(계 6:9-11). 그들은 저들의 압제자들과 복음의 원수들에게 심판을 내리고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탄원하였다. 또 이 천사는 ‘불을 다스리는’ 자로 소개된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8장 5절의 장면을 가리킨다. 거기서 그 천사는 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향로에 담아 땅에 쏟았고, 이어서 ‘천둥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뒤따랐다. 이것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4장 18절에서 천사가 나온 제단은 다섯째 인의 개봉 장면에서 언급된 제단과 동일하다고 암시한다. 그 제단 밑에서, 심판과 구원을 위한 여러 해 동안 끊이지 않는 성도들의 탄원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요한계시록 14장은 복음이 선포되었고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 기별이 땅의 거민들에게 발해졌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 자들의 죄는 그 분량이 찼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침을 받았고 완전케 되었다. 의인들의 추수와 함께 악인들을 위한 유예 기간은 끝난다. 하나님께서 제단 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며(계 6:11), 복음의 반대자들과 신실한 백성을 압제한 자들을 처리하실 때가 이르렀다.

 제단에서 나온 천사는 낫으로 악인들을 추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매우 긴급하게 전달한다.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이는 그 포도가 익었음이라. 지체 없이 그 천사는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그것을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진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포도를 던지는 것과 그 발아래 밟는 것은 이사야 63장 1-6절에서 끌어온 것이다. 요한은 악인들에게 집행될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유대인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개념을 사용한다. 이 심판은, 마지막 일곱 재앙들이 쏟아질 것이며, 이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마”쳐진다(계 15:1)는 상징적 묘사로 기술되어 있다.

 포도로 가득 찬 포도주 틀은 이제 성 밖에서 밟힌다. 이 성은 새 예루살렘, 곧 거룩한 성을 지칭한다. 깨끗지 못한 자는 누구도 이 성에 들어갈 수 없다(계 21:27),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들이 여호사밧 골짜기로 모일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골 3:2-3, 13)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예루살렘 밖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은 거룩한 성 밖에서 하나님의 쏟아지는 진노를 경험 할 것이다.

 포도를 밟은 결과, 포도주 틀에서 피가 나오고 있다. 피가 말굴레까지 차서 일천육백 스다디온까지 이른다. 이 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엄중하게 집행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장되게 표현되었다.52) 이 심판은 규모에서 세계적이요 땅의 모든 백성에게 미친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의 우산 밖에 있는 자들이다. 마지막 일곱 재앙이 악인들 위에 쏟아질 때, 온 땅은 마치 전쟁터와 같다(계 19:17-19 참조), 마지막 일곱 재앙 때 쏟아질 하나님의 최후의 진노를 묘사하면서 사용된 기괴한 언어는, 요한계시록 14장의 다른 장면들과 함께, 세 천사가 선포한 경고에 대하여 그들이 내리는 결정의 심각성을 독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사단적 삼위와 그 경배자들을 위하여 유보된 운명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참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경배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인상 깊은 그림의 목적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위협으로 인한 두려움을 “더 강한 두려움”으로 물리치기 위함이다.53) 더 이상 자비를 구할 수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피 뿌린 옷을 입고”(계 9:13) 하늘 군대와 함께 오실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다(계 19:15-16; 사 63:1-6 참조).
14:1-20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14장은 종말이 오기 전,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기 전에, 땅의 거민들이 그 규모에서 세계적이요 영광스러울 영원한 복음이 최종적으로 선포되는 장면을 목격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 효력은 갈멜산 위에서 엘리야가 선포한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 때 배도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참 하나님을 선택하여 그분을 순종하고 경배하게 되었다. 선지자 말라 기는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4:5). 세상을 경고하는 최후의 복음 선포는 그 특징이 엘리야의 설교에 나타났던 것과 같을 것이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강력히 선포되는 복음의 경고는 “세계적으로 영글게 하여” 온 땅으로 추수를 대비할 수 있게 할 것이다.54) 추수에서 알곡으로 대표된 자들은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으나, 포도로 대표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할 것이다(계 11:18 참조).

 요한계시록 14장은 지상 역사의 끝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종말이 오기 전, 그리고 유예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한 복음을 선포 하라는 사명을 위탁받았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곧, 돌아가사 부활하여 아버지 우편에 있는 하늘 보좌에 좌정해 계시며, 이 세상 역사를 종결 지을 그분에 관하여 바울과 초기 교회가 전하였던 복음과 동일한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곧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곧 오신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바는 세상에 최후의 경고 기별을 선포할 때, 그리스도를 처음이요 나중으로 높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6-12절은 마지막 때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 기별은 교회의 프로그램, 기별, 운명 등을 제시한다. 그 기별이 교회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도록 촉구하는 한편(마 28:19-20 참조), 결국 복음의 선포를 완성시키실 분은 진실로 하나님이 심을 분명히 보여준다.55) 땅의 거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로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영원한 복음을 최종적으로 선포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의하여 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마 24:14), 예수께서는 능동태가 아니라(너희가 전파하리라) 수동태를(전파되리라) 사용하여 표현하셨다. 여기서 수동태는 히브리어의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활동을 시사하는 것이다. 영원한 복음의 최종적인 선포는 인간의 지혜나 노력이나 기술 또는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활동들을 통하여 마쳐질 것이다. 우리의 주 임무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은혜와 용서의 복음으로서 높이는”것이다. 그때 우리는 영원한 복음의 전파가 완성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 “우리는 죄와 사망을 끝내기 위하여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 것이다.”56)

주(註) ——————
1.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26. 
2. Ladd, 191. 
3. Swete, 179 참조. 고대의 독신주의에 대하여는 Aune, Revelation 6-16, 818-822 참조. 아우니는 요한 계시록 14장 4절에서 이 용어를 문자적으로나 혹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논의하지 않는다. 
4. Ladd, 191.
5. 아우니는 성경과 그레코로만 문학에서 ‘첫 열매’는 하나님/신들에게 바쳐진 희생 제물을 가리킨다고 하였다(Revelation 6-16, 814-818 참조). 
6. Beale, 743. 
7. 상게서, 743-744. 
8.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 163. 
9. Swete, 181. 
10. Neall, The Concept of Character in the Apocalypse, 166. 
11. Ladd, 189. 
12. Neall, “Sealed Saints and the Tribulation,” 255. 
13. Hughes, 158. 
14. Aune, Revelation 6-16, 818. 
15. Morris, 172. 
1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09. 
17. Mathias Rissi, “Krino, krisis,” in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Horst Balz and Gerhard Schneider (Grand Rapids, MI: Eerdmans, 1990-1993), 2:318, 320. 
18. Herntrich Buchsel, "Krino, et al.,”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3:941-942; Rissi, “Krima,” in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2:317. 
19. Robertson, 6:411;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39. 참조. 아우니는 본문 속의 부정과거의 의미를 알려고 애쓰는 것이 분명하다(Revelation 6-16, 827-828 참조). 
20. Beale, 753. 
21. Ladd, 193. 
22. Johnsson, 38 
23. 상동. 
24.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26. 
25.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34. 
26 Aune, Revelation 6-16, 829 참조. 
27. Sibilline Oracles 5. 137-162(Charlesworth, 1:396-397) 참조; 2 Baruch 11:1; 67:7 (Charlesworth,1:625, 644); Tertulian Against Marcion 3.13(The Ante-Nicene Fathers, 3:332). 
28,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11 참조. 
29. Johnsson, 35. 
30. 상동, 
31. Beasley-Murray, 226, 
32. Desmond Ford, 603. 
33. Mounce, 275. 
34. Ladd, 195. 
35. 상동, 
36. Beale, 761. 
37. Ladd, 196. 
38. Hughes, 164. 
39. Desmond Ford, 602-603. 
40, Robertson, 6:413;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33. 빌(Beale)은 이 곳의 개념을 알고자 애쓰고 있다(참조 The Book of Revelation, 766-767).
41. Aune, Revelation 6-16, 837-838. 
42. Thomas, Revelation 8-22, 213. 
43. Johnsson, 39. 
44. 상게서, 38. 
45. Rienecker, 815. 
4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14. 
47. 추수 개념에 대해 더 알고자 하면, Aune, Revelation 6-16, 801-803 참조. 
48.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15. 
49. 1 Enoch 100:3(Charlesworth, 1:81). 
50. Ladd, 202 참조.
51.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35.
52. Beale, 781, 476 
53. Desmond Ford, 602-603.
54.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63. 
55. Desmond Ford, 593. 56. 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