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안식일과 그리스도의 구원 봉사의 관계가 두 개의 안식일 기적에서 암시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38년된 중풍병자의 치료(요 5:1-18)이며, 다른 하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치료이다(요 9:1-41). 이 두 에피소드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검토해도 무방하다. 이 두 사람은 다같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경우에 똑같이 그리스도는 해당 환자에게 행동하도록 말씀으로 촉구하고 계시다. 38년된 중풍병자에게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하셨고,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하셨다. 예수님의 이 두 행위는 모두 랍비들의 안식일 규칙들을 어기는 행위였으며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들로부터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규탄을 받았다(요 9:16; 5:10,16). 그러나 안식일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을 향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그들의 부당한 비난을 반박하셨다. 자신의 구속 봉사는 안식일 계명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셨다(요 5:17; 7:23; 9:4). 그리스도의 자기 변명은 그 어떤 주장에서보다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요 5:17; cf. 9:4) 하신 유명한 주장을 통해 더욱 잘 나타나 있다. (211.2)
 안식일의 명료화인가 아니면 안식일에 대한 거부인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는 비난을 반박하기 위하여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라고 주장하신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안식일 준수의 의무를 해제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안식일의 진정한 본질과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가? 간단히 말해서 안식일 계명을 부정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안식일 계명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인가? (212.1)
 “내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아직까지 세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1)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

 (2) 하나님의 계속적인 관리,

 (3) 하나님의 구속적인 활동이 그것이다.

 이 세 관점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안식일 계명의 폐지를 뜻하고 있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212.2)
 과연 예수님이 주장하신 뜻이 그러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문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아직까지”라는 의미의 부사 “헤오스 아르티”“일하고 있다”는 의미의 동사 “에르가제타이”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며 이 구절의 신학적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212.3)
 “아직까지”라는 부사
 전통적으로 “아직까지”라는 부사구는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과 구속의 어느 것을 위해서든지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무릎쓰고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활동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희랍어에서 동사 앞에 쓰이는 부사 “아직까지”는 동사의 항구성을 강조하려는 것이기보다는 동사의 행동성의 극치성이나 최고치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언제나”라는 뜻보다는 “이만큼”이나 “이렇게까지”의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자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 성경 번역자들은 “지금에 이르도록”(even until now)이라는 강조 어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부사어구는 시작(terminus a quo)과 끝(terminus ad quem)을 늘 전제로 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일하신다”라는 예수님의 주장에서 시작 또는 출발은 두말할 나위 없이 창조의 첫 안식일(창 2:2, 3)을 뜻할 것이며 끝은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요 9:4) 같은 최종적인 안식일 안식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침과 함께 제칠일 안식일에 안식하셨지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약속된 안식일 안식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아직까지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213.1)
 “일하고 있다”는 동사
 내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일하고 있다”는 말의 뜻은 요한이 반복해서 그리고 명확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하나님의 계속된 창조나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관리나 보전으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일치시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13.2)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요 6:29). 그리고 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 38; cf. 4:34; 14:11; 15:24) 하셨다. (214.1)
 하나님의 일의 구속적인 본질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치료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 치료행위가 분명하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 9:3)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안식일에 그의 창조의 일을 마친 것이었지만 “그의 하시는 일”을 전체적으로 마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구속의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창조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안식이 최종적이었지만 그 안식은 동시에 인간이 누려야 할 안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단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 안식이 교란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일의 기본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아직까지” 일하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214.2)
 “내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일하신다”는 주장의 신학적인 의미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기능을 무효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명료화하기 위하여 “내 아버지의 아직까지 일하심”에 호소하셨다. 그리스도의 변증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이 창조(창 2:2, 3; 출 20:11) 사건에 뿐만 아니라 구속(신 5:15) 사건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14.3)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모든 세속 활동들을 중단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였으며 동료와 이웃들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풂으로써 구속주 하나님을 모방하였다. 이것은 안식일에 불우한 이웃들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하는 일반 신자들의 삶에서만 진실이 아니라 제사장들은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을 그 일들의 구속적인 기능 때문에 안식일에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진실한 것이다. (215.1)
 유대인들도 안식일의 이같은 신학을 이미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과 그의 아버지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의 합법성을 옹호할 수가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중풍병자의 치료 때문에 생긴 다툼을 종식시키고자 하여 안식일에 할례 주는 관례를 이용하였다(요 7:22-24). 제사장들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언약의 구원을 끼치기 위하여 안식일에 사람의 신체의 작은 한 부분(랍비들의 계산에 따르면 할례를 치르는 인간의 신체 부위는 인간 248지체의 하나라 한다)을 돌보는 할례를 안식일에 베풀어도 합법적인 일이 되는데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회복시키는 일을 가지고 “나를 노여워할” 까닭이 없다고 주장하신 것이다(요 7:23). (215.2)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그가 전체적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날이다. 사람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하는 날이다. 두 차례의 안식일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두 번 다 자기가 치료해 준 사람을 그 안식일에 다시 찾아 나서 찾아내었고 그 다음에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시면서 그의 영적 필요를 위해 봉사하셨다(요 5:14; 9:35-38). (215.3)
 예수님의 원수들은 예수님의 안식일 봉사 안에 감추어진 구속적인 내용을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공의로 판단치 않고 외모로 판단하는”(요 7:24)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재결합이나 시력의 회복(요 9:14)보다는 돗자리나 진흙 같은 것을 더 문제삼았다(5:1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그 본래적인 자리와 기능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오해를 통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5.4)
 안식일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치료하셨을 때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고 말씀하셨다. 구속적 봉사의 연결 사슬에 그의 추종자들도 하나의 고리로 참여하라는 초청이었다. 여기서 “밤”은 분명히 구속 역사의 종결을 뜻한다. “아직까지”라는 부사에서 암시된 그 종결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구속 활동의 그같은 종결은 원형으로서의 창조 안식일과 대칭을 이루는 마지막 안식일을 이끌어낼 것이다. (216.1)
 마지막 안식일을 유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요 5:17). 그러나 우리도 그 구원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확대시키기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요 9:4). 요한이 소개하고 있는 두 개의 안식일 치료 사건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를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216.2)
 4. 히브리서에서 예수님과 안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