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결혼식이 완전한 의미에서 종결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큰 잔치 곧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결혼 예식에 곧바로 이어질 것이다. 주인은 그의 하인들을 초청하여 “상에 앉게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 밖의 구원받은 모든 이방인들과 함께 그의 하인들을 하늘, 곧 신랑의 집, 혼인 서약이 행해진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403.9)
 또 한 가지, 우리는 신부와 혼인식 손님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부는 교회 전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교인 개개인은 혼인식 손님이다. 신부는 그리스도의 전체 인간 왕국의 상징인 새예루살렘이다(계 21:9, 10). 교인 개개인은 새예루살렘 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곳에 가정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인 것이다(요 14:1~3). (403.10)
 8. 요한계시록 14장 11절“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고 한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요한계시록 14장 10, 11절에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것이며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403.11)
 “연기”“세세토록” 올라가는 광경은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구약 성경에서 (403.12)
 

사해지역. 소돔과 고모라에서 지금은 연기가 오르고 있지 않다.
(404.1)
 빌어 온 표현이다. 이것은 이사야 34장 8~10절에서 빌어 온 것이다. 거기서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보수하는 날에 에돔 땅은 불붙는 역청과 유황으로 변할 것이며 그 불은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라” 하였다. (404.2)
 그런데 11~17절로 이어지는 이 성경절에, 에돔 땅에 기식할 새들과 짐승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주목하라. 어떻게 새와 짐승들이 역청과 유황의 불더미에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이사야 34장35장은 아무런 단절 없이 곧바로 이어지고 있는데 35장은 완전한 원상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404.3)
 이와같이 요한계시록에 차용된 이사야서의 구절들, 즉 역청과 유황과 밤낮 타는 불과 세세토록 올라가는 연기에 관한 이 극적인 표현들은 일시적 현상에 관한 묘사인 것이다! (404.4)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세세토록”이란 영원히란 뜻이 아닌가? (404.5)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과장된 표현의 관용어구들과 은유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희랍어나 히브리어로 “right on the money”(정확한), “the cutting edge”(분기점), “ieft of center”(정확치 않음), “the rat race”(정신 없이 바쁜)따위의 영어 관용구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404.6)
 출애굽기 2장 16절은 말하기를 어떤 경우에 노예는 “그 상전을 영영히 섬겨야” 하리라 하였다. 이것은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분명히 불가능한 말이다. 개역 표준 역이나 그 밖의 현대 번역 성경들은 이를 다르게 번역하여 그 종은 주인을 “평생토록”섬겨야 한다고 했는데 매우 적절한 번역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세세토록” 또는 “영원히”라는 말은 “그 사람이 살아 있는 한”이란 뜻의 히브리어 관용 어구인 것이다. (404.7)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한 분이시라는 뜻이다(딤전 1:17). 그러나 악한 자들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고 한 것은 단지 죄인들이 살아 있는 한 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404.8)
 성경에는 가끔 “영원한 불”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베드로후서 2장 6절유다서 7절에 보면, 기원전 약 2,000년 전 아브라함의 시대에 불타서 “재”로 화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영원히 타는 불”“본보기”로 제시되어 있다. (404.9)
 

일요일 예배가 미국에서 강요될 수 있을까? 오늘날 수많은 미국 사람들은 공립 학교에서의 기도와 낙태 규제를 입법화하는 헌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405.1)
 필자 자신이 사해(死海)를 가 보았지만 아무 곳에서도 연기가 오르고 있지 않았다. “영원한 불”은 그 효력에 있어서 영원하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영원히 멸망되었다. (406.1)
 마태복음 3장 12절에 나오는 “꺼지지 않는 불”이란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이란 단지 다 탈 때까지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우리는 소방 대원들이 끌 수 없는 초비상의 화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불들은 “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불은 다 타고 만다. 원자 폭탄이 꺼지지 않는 불을 나타내고 있다. (406.2)
 말라기 4장 1~3절에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와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였다. (406.3)
 선지자들은 자국어의 이 같은 관용 어구와 은유들을 익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세세토록”이란 단어를 이해하듯이 죄인들이 “수백만 년 동안” 불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이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지 않으셨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그의 위대한 설화(눅 16:19~31)는 당시 민중들의 미신적인 관념을 풍자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옥의 뜨거운 불에 고통당하는 사람이 손가락 끝의 물 한방울 혀 끝으로 받아 마셨다 해서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406.4)
 하나님은 우리를 염려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시나 그것은 그분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이기심의 반대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은 완강한 이기심을 없애기 위하여 끝내 완고한 죄인들을 제거하실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계실 것이다. 우리가 “세세토록” 불이 탄다는 용어를 가지고 추측한 바대로 그는 피조물들이 영원히 불더미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이 표현이 단지 하나의 관용어구일 뿐 실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4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