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 부 왕의 인격체 (1:1-4:16) 1. 약속된 왕 예수 (1:1-2:23)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는 헤롯의 갈망의 또 다른 예는 그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개축한 일이었다. 그는 그 공사를 BC 20년에 시작했는데, BC 4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그 성전의 재건은 그 후에도 60년 가량 계속되어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완공되었다. (56.2)
 헤롯 대왕이 전적으로 나쁜 왕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BC 25년 그가 자신이 소유한 금을 현금으로 바꾸어 기아로 죽어 가는 유대인들을 위해 양식을 구입했다는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도시들과 공공 건물들을 지은 위대한 건축가였다. 이런 공사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헤롯은 그의 태생에 대한 유대인의 적개심을 극복할 수 없었다. (56.3)
 그러므로 그는 불안정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와 같은 불안정이 권력을 향한 과도한 욕심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신이상에 가까운 의심과 결합될 때는, 그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을 감지할 경우, 그를 막무가내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56.4)
 헤롯을 위협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즉시로 제거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마리암네와의 결혼을 통하여 그의 처남이 된 사람)를 대제사장으로 만들고 나서 얼마 후에, 하스몬 가문의 마지막 남자로서 그 청년이 누리고 있던 인기를 알게 된 헤롯은 그를 “사고로” 왕궁의 연못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헤롯은 나중에 아리스토불루스의 장례식을 장엄하게 치러주었고, 그 장례식 때 그 왕은 우는 체하였다. (56.5)
 헤롯의 총애를 받던 아내인 마리암네도, 헤롯이 그녀가 자기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때, 곧 그의 남동생과 같은 운명을 당하였다. 그 동일한 두려움은 그녀의 할아버지와 헤롯의 두 아들들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는 죽기 5일 전(예수의 탄생 직후)에 그의 셋째 아들, 그의 맏아들 즉 그의 세자(世子)를 처형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 헤롯은 왕족 하스몬 가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숙청해버렸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그 집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신랄하게 비꼬았다. (56.6)
 헤롯은 그의 권위에 대한 어떤 도전이나 위협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왕이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헤롯의 영토 내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던 것이다! 헤롯이 박사들의 질문을 받고 “소동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는 잠재적인 라이벌을 제거하려는 시도로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는 그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 (57.1)
 헤롯의 막무가내한 성격에 대한 가장 큰 증거들 중 하나는 임종하기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의 가장 뛰어난 시민들을 투옥시킨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도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죽는 순간 죄수들을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헤롯은 그가 죽을 때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고 우는 일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베들레헴에 탄생하였을 때, 유대의 통치자의 성격이 이러하였다. 베들레헴에서 20-30명의 아이들을 죽인 것은 우리가 헤롯 대왕에 관하여 알고 있는 모든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57.2)
 예수에 대한 헤롯의 반응은 배척과 살인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것이 그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아니었다. (57.3)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그의 탄생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1절)의 반응이었다. 마태복음 2장의 박사들은 아마도 그들이 사제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페르시아에서 왔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에 박식한 사람들이었고, 철학, 의학, 그리고 자연 과학과 같은 분야들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57.4)
 하지만 그들의 주요 관심사들 중의 하나는 점성술이었다. 구약은 점성술에 대하여 반대의 뜻을 나타내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신들의 의도를 간파해 내는 한 방편으로서 고대 세계를 통틀어 성행했었다. 그러므로 박사들은 초자연적인 “별”(2절)을 보았을 때, 그 의미를 찾아 나섰다. (57.5)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그 특별한 별을 “유대인의 왕”의 출생과 연결시키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암시들이 있다. 우선 한 예를 든다면, BC 6세기에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근동 지방과 지중해 세계 전역에 걸친 공동체 내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BC 2세기 이래로 이들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어(당시의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학식있는 사람들-특히 사제 계층들-은 「70인역」(헬라어) 구약을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58.1)
 점성술에 관한 박사들의 관심에 관하여 특별히 의미심장한 것은 민수기 24:17에 있는 또 다른 한 이방인 박사(Magi)가 한 말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발람은 이렇게 선언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쯤 되어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바로 이 구절을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58.2)
 그 특정한 기대와 오시는 메시야—왕에 대한 한층 더 일반적인 유대인의 기대는 분명히, 한 세계 통치자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신념을 로마 제국 내에 널리 퍼뜨렸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c. AD 100)는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다: “유대로부터 오는 사람들이 세계를 통치하기로 운명지어져 있었다는, 오래되어 확립된 한 신앙이 동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Life of Vespasian, 4:5). 또 다른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 c. AD 55-120)는 “바로 이때에 동방은 더욱 강력해지고, 유대에서 오는 통치자들이 우주적인 제국을 획득할 것 ... 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Histories, 5:13)고 기록했다. (58.3)
 이런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2절)를 찾아서 그 별을 따라간 것은 너무 유별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앞서 제시한 정보 외에도, 우리는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12절)고 박사들에게 “경고”하였던 하나님께서 또한 그들에게 “별”과, 그들이 찾아 나서기 전에 그 의미에 관하여 그들에게 꿈들을 주셨을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8.4)
 이 이야기의 요점은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별을 따라가서 “유대인의 왕”을 발견했다. 그들은 예수를 발견한 후에 그들은 “엎드려 경배”했다(11절). 이 사실은 마태의 묘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십계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절하거나” “경배”하지 말도록 명령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출 20:3-5).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책에서 박사들의 엎드려 절함과 경배함을 강조함으로써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그가 1장에서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의 복음서 전체에 걸쳐 부각시키기를 계속할 주제—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59.1)
 박사들이 예수와 만난 것은 그들이 숭경(崇敬)의 태도로 엎드려 절함으로 끝나지 않고 그에게 그들의 값진 선물들을 실질적으로 드리는 일로 확대되었다(11절). 경배는 결코 그저 마음 속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박사들의 본을 좇아서 남녀들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 3:16) 분께 대한 반응으로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재산을 드릴 때 일상 생활의 세계 속으로 넘쳐서 들어간다. (59.2)
 박사들의 선물 헌정은 그들의 엎드려 경배하는 것만큼이나 경배의 행위였다. 그 외에도 그들의 헌정은 어린 왕이 헤롯 대왕의 사악한 간계를 피하여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데 많이 필요한 자금을 요셉에게 마련해 주었다. (59.3)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에 대한 세 번째 반응은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이다. 마태는 “모든 예루살렘”이 박사들의 도착과 그들의 진술, 그리고 “유대인의 왕”의 출생에 관한 질문들로 인해 “소동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2, 3절). 유대의 지도자들은 박사들이 온 목적과 취지가 무엇인지 이해했으며, 미가 5:2에 의하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었다(4-6절). (59.4)
 그러나 마태복음 2장의 큰 비극은 유대의 지도자들이 메시야가 나타났을 가능성에 관하여 흥분하기보다는 헤롯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소동”했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점이다. 마태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전적인 무관심의 반응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가보지 않았다. 그들은 헤롯의 공포와 증오심에 대하여 어떤 감정도 나타내지도 않았고, 경배하는 박사들에 대한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59.5)
 이와 같이 마태는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1:16)에 대한 세 가지 가능한 반응들—격렬한 배척, 경배, 그리고 무관심—을 능숙하게 제시한다. 그렇게 묘사한 후에 마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시하면서 더욱 완전하게 전개시킬 여러 주제들을 내놓는다. (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