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의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이 선언은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큰 범주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생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신 언약의 표준 안에서 살기로 약속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어떠한 언급도 나와 있지 않다. 만약 이스라엘이 언약의 범주와 그 언약의 자비로운 규정들을 순종하며 살았다면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 기초하여 살았음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941.6)
 레위기 18:5에는 구원을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다는 어떠한 임시도 없다. 구원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그들이 구원 받은상태를유지할수 있는 지에 관해 말씀하셨다. 만약 그들이 반역의 행위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면 구원은 계속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은혜로 살 수 있을 것이다. (94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야 하였다(30절; 19:3, 4, 10, 25, 31; 23:22; 24:22; 25:17; 26:1). 구원 받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으며 생명과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율법은 지켜져야 하지만, 현재와 다가올 미래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법은 구원 받은신 자들이 삶의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942.1)
 더욱이 레위기 18:5(제임스왕역)의 “만약”은 본질적으로 조건적인 상태를 나타내는데, 그 조건이란 현재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서”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조건은 언약의 수혜자로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속량 받은 새로운 삶을 온전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안에 새로운 삶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믿음의 삶이 은혜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충만히 경험될 것이라는 것이었다(신 5:33).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언약의 축복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만약 신자들이 생명의 길을 떠나서 반역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은 언약의 풍성한 축복을 주시지 않을 것이었다. (942.2)
 레위기 18장의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계명은 성화된 자들의 삶과 관련된 것이지 칭의의 과정에 관한 것이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언약 관계 속에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 나라들의 악한 풍습들과 우상숭배로부터 멀리 떠나야 하였다(3, 30절). 이 명령은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행위로 표현되는 구원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구원받은 자의 모습은 세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해 내어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신 거룩한 하나님과 조화되는 삶과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화된 삶의 모습이고 구원 받은 결과인 것이다. (942.3)
 결국 “이를 행하면 그가 살리라”는 구절의 더 적절한 번역은 “그가 율법을 통하여 살리라”가 되어야 한다(레 18:5). 로마서 10:5갈라디아서 3:12에서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은 대개 “그들에 의해서”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의 의미를 수단의 전치사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그 구절은 “그것들을 수단으로 하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헬라어 전치사는 여기서 처소격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이런 경우에 그 전치사는 “그것들의 영역에 있어서”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 문맥의 의미는 율법의 준수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은 신자들의 삶의 전체 영역과 범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요악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위에 의한 심판 사이의 긴장감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텔로스]은 영생이라”(롬 6:22). 그러므로 출발 단계는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경험하는 것이고, 이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성화의 삶이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마침내 온전히 경험하게 될 “영생”의 결과(헬라어 텔로스)로 마쳐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로부터 칭의의 결과 곧 “선한 행위”로 드러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통하여, 결국은 미래에 있을 절정(온전한 영생의 경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영생에 관하여는 구원론 III. B. 3을 보라). (942.4)
 E. 보응적인 심판과 인간 행위의 자연적인 결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보응(징벌)하시는 심판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전체 모습에서 한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맞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다른 부분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구시대적이고 미개한 방식의 이해로 고대 시대와 그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심판과 처벌이 하나님의 기준과 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판과 처벌은 “어떤 행위에 의해 자연히 이르러 오는 결과”라고 그들은 이해한다. 즉 심판과 처벌은 죄와 죄악 그 자체로부터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처벌은 자연적인 결과이지 하나님이 개입하거나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판과 처벌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결과 혹은 “어떤 행위의 당연한 결과”(Koch 68)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과 원칙에 따라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개입하시는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정해진다. (942.5)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과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한다. 죄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벌이 분명히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은 언제나 죄와 악에 대한 합당한 보응으로 행해진다. 처벌은 하나님의 심판의 합당한 결과이다. (943.1)
 보응이란 개인과 공동체와 국가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내려지는 정당하고 공의로운 상이나 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처벌은 사람이 행한 행위에 대한 타당한 대가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선한 행위 또는 악한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보상 또는 처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심판 구절들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모습이다. (943.2)
 역사의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신론의 주장처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버려지거나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다. 부재하는 신(데우스 압스콘디투스)의 신학 이론은 성경 진리와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하신다. 그분은 전 세계적인 홍수를 일으켰고(창 6-9), 평지의 도시들을 멸망시켰다(창 19:24, 25). 인간은 그들 스스로 최후 멸망을 초래하는 일에 자연을 조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직접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신다. 그리고 때로 정당한 처벌을 내리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도 하신다. 동시에 그분은 자신에게 충성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일에도 적극적이시다. 충성된 남은 자는 자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중재로 인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경험한다. 지구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아남은 자들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첫째 부활에 일으킴을 받은 자들을 데리고 가실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943.3)
 역사 속에서 심판에 관한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도록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내버려두신다는 비(非)보응 신학과 상반된다. 성경의 가르침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의해 저절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거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 없이 자연적으로 처벌이 초래된다는 주장과도 맞지 않다. 이러한 성경의 일관적인 관점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성경의 진술들을 살펴보면 더 뚜렷해진다. 이 문제를 아래에서 다루고자 한다. (9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