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서 언급된 주간의 첫째 날 중에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요한계시록의 첫 장에 나오는 “주의 날”이다.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계 1:9, 10). (125.3)
 이 구절은 “주의 날”로 번역된 정확한 희랍어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유일의 경우이다. 불행하게도 이 문맥에서는 어느 날을 두고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요한 이후의 1세기 동안에 기록된 믿을만한 문서들 속에서도 “주의 날”이란 용어를 사용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성경 주석들이 하나같이 이 날을 일요일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125.4)
 물론 이 때로부터 좀더 세월이 지나간 다음에 일요일이 주일로 호칭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후기 희랍어 기록에서 쿠리아케(Kuriake:주님의)란 용어 자체가 사실상 일요일의 명칭이 되었으며 현대 희랍어에서도 그렇게 남아 있다. 주일이란 뜻의 라틴어는 도미니카 디에스(Dominica dies)인데 이 단어가 라틴어 불가타(Vulgate)역의 요한계시록 1:10절에 나오며 이 단어가 라틴어 교회에서 일요일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도미니카(Dominica)라는 단어는 라틴 계열의 언어에서 일요일을 대신하는 말속에 들어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일요일이 도메니카(Domenica)이며 스페인에서는 도밍고(Domingo)이며 프랑스에서는 디망쉬(Demanche)이다. (125.5)
 그러나 문제는 기원 1세기 후반에 일요일이 “주의 날”로 알려졌느냐 하는 것이다. 요한이 계시록 1:10에서 “주의 날”이라고 기록했을 때 일요일을 뜻했느냐 하는 것이다.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다.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 보다도 기록 연대가 더 늦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요한복음은 일요일을 단순히 “주간의 첫째 날”로 언급했을 뿐이다. 만약 그 당시에 일요일이 “주의 날”로 알려져 있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125.6)
 소수의 주석가들은 요한계시록 1:10“주의 날”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주의 날” 즉 종말적인 심판의 날과 같은 날로 해석한다. 비록 구약 성경의 “욤 야훼”(야훼의 날)는 70인역에서 “쿠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로 번역되지 않고 “주(主)”의 형용사 형태 대신에 “주”의 속격 형태를 사용해서 “헤 헤미라 투 쿠리우”(he hemera tou kriou)라 번역됐지만 두 번역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 할 수도 있다. 70인역은 히브리어 문법을 모방하여 속격을 사용했었을 수도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형용사들이 많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속격으로 형용사를 대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25.7)
 요한계시록 1:10“주의 날”(Lord’s day)을 미래의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로 번역한 사람들은 요한이 계시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그 “여호와의 날”로 미리 이동되어 미래의 심판의 사건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요한계시록 1:10“내가 묵시 중에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내가 서있음을 보았다”는 뜻이 된다. 계시록이 주간의 날들 보다도 무한대로 광대한 무엇과 함께 위로 들려 올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요한이 일요일인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읽는 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이 예언적인 중요성을 띤 여호와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읽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0에 있는 “주의 날”이란 어구의 문맥이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해석을 허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바라 본 묵시는 종말적인 “여호와의 날”에 속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126.1)
 그것은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께서 현 시대의 교회들을 보살피는 분으로서 일곱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계시였다. 요한계시록 1:9, 10에서 예언자는 계시 속에서 그가 마지막 심판의 날로 이동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계시를 받은 공간과 시간을 밝히고 있다. 즉 “나 요한은∙∙∙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이다. (126.2)
 제3의 해석은 아직 대부분의 신약 학자들로부터 적절하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주의 날”은 주님의 부활을 일년에 한 번씩 기념하는 기독교 유월절 즉 나중에 “부활절”로 불려지게 되는 날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 이후의 저술가들에게 최초의 “주의 날”은 일주일마다 지키는 어떤 날을 지칭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일년에 한번 씩 기념하는 부활의 기념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가능성이 높은 주장이다. 이 연례적인 주의 날은 침례후보자들이 침례를 받거나 성만찬을 기념하기에 적합한 날이었다.6 (126.3)
 이같은 연례적 기념을 위한 기초는 바울의 고린도전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바울이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자”(고전 5:7, 8)고 했을 때 연례적인 부활절을 제안하였던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과일의 첫 열매를 예물로 드리는 날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는 후기 진술의 배경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126.4)
 마지막으로 만약 “주의 날”을 성경의 유비에 따라 해석한다면 “주의 날”은 제칠일 안식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식일은 창조 때에 거룩한 용도로 구별되었다(창 2:2, 3). 신약성경의 여러 성경절(요 1:1-3; 골 1:15-17; 히 1:1, 2)에 의하면 그 창조의 매개적 존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제칠일을 “주 너의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제칠일을 “나의 성일”, 또는 “여호와의 성일” 이라고 부르고 있다(사 58:13). 공관복음인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께서 “인자는 안식일도 주인이라”하신 말씀을 인용하였다(막 2:28; 마 12:8; 눅 6:5). (126.5)
 이러한 관점은 외경인「요한의 행전」(Acts of John)의 “그리고 제칠일 곧 주의 날에∙∙∙”라는 표현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제칠일이 주간의 제칠일인지 여행의 일곱 번째 날인지가 확실치 않지만 주간의 제칠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요한이 요한계시록 1:10에서 안식일의 의미로 “주의 날”이라고 기록했다면 왜 그가 제칠일이나 안식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의 날이란 표현을 사용했을까? 요한계시록은 “주 가이사”“주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를 주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와 순교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가 없었다(고전 8:5, 6). 그 당시 로마에는 로마 황제들에게 구별된 특별한 날들이 있었다.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땅의 임금들의 머리”(계 1:5)로 높이고 안식일을 진정한 “주의 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한 행위가 아닐까? (127.1)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요한계시록에는 1:10안에 있는 “주의 날”이란 구절이 정확한 해석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치 않다. 주의 날을 일요일과 동일시하려는 대중적인 기도는 성서적인 증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가 상당히 지나간 시대에 일요일이 주의 날로 호칭되었기 때문에 생기고 있는 것이다. 주의 날을 종말론적인 심판의 날로 해석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접근이다. 더 큰 관심이 모여져야 할 주장은 주의 날을 연례적인 부활의 기념일로 보려는 관점이다. 그리고 주의 날은 실제로 제칠일 안식일을 두고하는 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