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요한복음 7:21절에서 “내가 한가지 일을 행하매”라고 하신 그 “한가지 일”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반신불수의 남자를 고쳐주신 일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어도 죄가 안 되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지적하였다(요 7:22). 모세법은 생후 8일에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한다(레 12:3). 할례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안식일에 할 수 있었다(Shabbath. 18:3; 19:2). 할례는 사람의 완전함을 마무리하는 예식으로 간주되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까지는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예수님은 주장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늘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요 7:23). (100.2)
 유대인들은 사람의 예식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람의 신체적 치료를 위해서도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안식일 논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이 바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억압적인 율법을 자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다. 또 그는 안식일의 제도 전체를 거부하는 반(反) 안식일의 태도를 유지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안식일 본래의 목적을 성취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이 만약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기 위하여 모세 율법에 여러 규정들을 마련한 취지를 제대로 이해했던들 예수님께서 행하신 자비의 행동들이 단지 허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마땅히 이행되어야 할 의무 사항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100.3)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있는 또 하나의 안식일 치료 이야기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치료한 사건이었다(요 9장). 이 때 예수님께서 눈을 치료하신 일은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을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다.’(요 9:6-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랍비들의 안식일 준수 규칙을 고의적으로 범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선택하신 것 같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 자체가 환자의 상태가 치명적인 것이 아닐 경우에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김으로써 안식일에 금지된 39개항의 금지된 종목의 하나를 범했다. 즉 예수님이 ‘반죽하기’‘섞는 일’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사람의 눈에 기름을 바를 때는 주간의 평일에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만을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있었다. (101.1)
 일부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요 9:16). 사람들은 오직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칙을 지킬 때만 안식일의 준수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이 규칙들을 어긴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 눈 먼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력을 되찾은 일로 크게 감명 받았다. 그리하여 물었다.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는냐’(요 9:16).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의 시력을 되찾아 주신 것은 그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의 역할을 보여주신 것이었다(요 9:5; 8:12). 그와 직면하게 되면 누가 볼 수 있는 자인지의 판결이 이루어진다(요 9:39-41). 이처럼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치료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있었다. 교회와 회당의 분리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해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의해 이루어진다. (101.2)
 마태복음 24:20절의 의미.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열 두 제자들에게 종말론적인 강론을 하셨을때(마 24:4-36; 막 13:5-37; 눅 21:8-36) 매우 명백하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눅 21:20, 21) (101.3)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유대로부터로 도망하여 생명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 13:18)라고 기록되었다. 왜 겨울에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춥고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는 도망하고 피난처를 찾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101.4)
 “또는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추가된 말은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보인다. 많은 주석자들은 “안식일에 도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안식일에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여행하지 못하게 한 금지규정을 언급하고 있다.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는 1마일의 5분지 3의 거리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출애굽 때에 안식일에는 긴 여행이 금지되었다.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 나오지 말지니라”(출 16:29)하였다. 이 명령은 한 주간의 6일 동안에 이스라엘의 진영 주변의 광야 지면에 내린 만나를 모으기 위하여 안식일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한 규정이었다(출 16:13, 14, 26, 27). 그러나 “자기의 처소”란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다.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이스라엘 민족의 머물고 있는 진영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70인역의 번역자들은 각 개인의 집을 뜻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안식일을 “성회”로 정의한 것(레 23:2-4)과 조화되지 않는다. (102.1)
 “안식일의 여행거리” 이상으로 여행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규정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제정된 랍비들의 규칙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든 안식일의 여러 다른 규칙들을 무시했으면서도 여행거리에 관한 장로들의 유전만을 존중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단순히 안식일에 도망하기를 꺼려하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고려했다고 주장했다. 안식일의 여행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충분히 안전한 거리로 도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랍비들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도망하는 일을 정당하게 생각했다.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마태복음 24:20절을 마태복음의 대상이 되었던 신앙공동체가 안식일을 계속해 지키고 있었다는 증거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입장이 옳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A.D 7년에 이르기까지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으로 기대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재난의 시기를 맞아 안식일에 도망해야 할 필요성에 봉착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권고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에 급히 도망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와 혼잡과 혼란은 거룩한 안식일의 특징이 되어야 할 예배와 평화와 기쁨에 전혀 맞지 않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02.2)
 수난 주간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안식일. 네 복음서 모두에서 주님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을 “파라스케웨”(paraskeue. “예비”)의 날로 표현하였다. 마가는 “파라스케웨”를 프로-삽바톤(pro-sabbaton), “안식일의 앞” 즉 안식일의 앞의 날이라고 설명했다(막 15:42). 누가복음 23:54절은 “이날은 예비일”이라고 기술하기보다는 “이 날은 안식일의 앞의 날”이라고 해야 옳았다. “예비”라 함은 “안식일을 위한 예비”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모을 때에도 안식일을 위해 주간의 여섯째 날에 예비하도록 권고받았다(출 16:5, 23). 신약시대에는 “파라스케웨”가 금요일을 대신하는 특수한 용어로 인식되었다.15 (102.3)
 요한복음 19:31절에서는 “예비일”이 안식일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신명기 율법은 나무에 매달린 죄수의 시체가 그 자리에서 밤을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신 21:22, 23). 그래서 어느 날에나 저녁이 되기 전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시체로 십자가에서 내리는 관습을 좇았다. 그러나 안식일이 시작하려는 시각에는 더더욱 이러한 전통을 존중하였다. 안식일이 유월절 기간에 포함될 때는 안식일이 “큰 날”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날에는 보통의 안식일보다 더욱 더 신성모독에 대해 조심했다. (103.1)
 요한복음 19:42절에는 “유대인의 예비일”을 안식일에 관련시키고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비일의 시간이 이미 기울고 있었고 가까이에 위치한 동산 안에 요셉의 무덤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서둘러 예수를 거기에 매장하였다. 안식일이 가까웠으므로 그들이 서둘렀던 것이다. (103.2)
 그러나 요한복음 19:14절에는 예수님이 죽으신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었다고 말한다.이러한 명칭은 요한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세 공관복음에서는 “파라스케웨”를 유월절에 연결시키지 않았다. 주석자들은 “유월절의 예비일”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양분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유월절의 속격 “투 파스카”(tou pascha:“유월절의”)를 목적의 속격으로 이해하여 “유월절을 위한 예비일”로 이해한다. 그러나 유월절의 앞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로 호칭된 증거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유월절의 속격을 소유의 속격으로 이해하여 유월절 절기에 속한 예비일이나 유월절 주간의 금요일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할 것이다. (103.3)
 유월절(passover)은 본래 유월절의 어린양이나 유월절의 희생을 뜻하는 단어인데 점차니산(nisan)월 14일부터 21일까지의 전체의 축제기간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같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파라스케웨 투 파스카’(유월절의 예비일)는 유월절 주간에 속한 예비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은 예비일로서의 금요일 개념을 유월절의 시간과 결합시킨 것 같다. 즉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육시라’한 말은 ‘그 날은 유월절 절기의 금요일이었으며 시간은 제 6시 경이었다’는 것이었다. (103.4)
 공간 복음서들은 예비일에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던 일단의 갈릴리 여인들에 대하여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마 27:55, 56; 막 15:40, 41; 눅 23:49, 56). 이 여인들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주님을 수행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주님과 동행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주님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데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이들은 예수의 숨은 제자 아리마데 요셉이 십자가에서 그의 스승의 시신을 내려 세마포로 싸서 자기의 무덤에 눕히는 것을 주목하여 보고 있다. 누가에 의하면 이 시각은 예비일 오후의 늦은 시간이었고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눅 8:1-3). 희랍어로 ‘에페포스켄’(epephosken)은 문자 그대로 ‘날이 새는, 날이 시작하는, 점점 분명해지는’의 뜻이다. 어떻게 해지는 저녁 때에 ‘날이 밝아지기 시작’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을 안식일이 시작할 때 첫번째 별의 비춤을 두고 하는 말이다.16 (103.5)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안식 후 첫째날의 이른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다’(눅 23:55-24:1). 이 여자들과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야 사명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면 이 단순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여인들은 열 두 제자들 다음으로 예수님의 가까운 측근들이며 대단히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면서까지 예수님을 좇아 그의 십자가에 까지 나아갔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헌신은 그들이 주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서둘러 향품과 향유를 샀던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104.1)
 그들은 그들의 죽은 주님의 시체에 바르게 위하여 향품을 샀지만 안식일을 범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둘러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샀다. 일몰 시간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예비일에 향품과 유황을 사용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그들이 어떤 계명을 좇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자명한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과 관련된 계명을 좇아 쉬었던 것이다. 그들은 계명을 순종하여 쉬었다. ‘토 삽바톤’(to sabbaton ‘안식일에’)이라고 대격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안식일 전체’를 쉬었다는 것을 뜻한다. 누가복음 23:56절의 끝에 나오는 ‘삽바톤’(sabbaton 안식일) 앞에 있는 접속부사 ‘맨’(men ‘그 다음에’)은 24:1절‘데’(de ‘그러나’)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23:56절24:1절의 한 문장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안식일 내내 안식한 다음 그 전날 예비일에 착수했다가 중단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무덤으로 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무덤이 텅빈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그때 한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 예수님도 그 안식일에 그의 구속의 큰 일로부터 쉬셨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원히 살아나셨다. (104.2)
 누가는 수난 기간의 이야기에서 특별한 세 날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예비일과 안식일과 첫째 날이다. 예비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고 주간의 첫째 날에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그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들도 안식일에 계명을 좇아쉬었다. (104.3)
 복음서의 본질. 안식일에 관한 복음서 기록의 중요성은 우리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깨달을 때 더 잘 이해되고 평가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인정하고 있는대로 복음서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서들은 아니다. 복음서들은 기독교 신앙을 촉진시키기 위해 기록된 교회의 책들이다(눅 1:1-4; 요 20:31). 복음서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내신 아름답고 기쁜 소식을 확산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록한 것이다. 복음서들은 일차적으로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편람이다. (104.4)
 복음서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들을 많이 기록했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위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셨으며 안식일에 어떤 행동을 보이셨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폐하신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치료의 기적을 행하셨으나 이 행위들은 모두 안식일의 정신과 일치하는 거룩한 행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의 구전적 전통이 안식일 위에 쌓아올린 해석적 규정들로부터 안식일을 해방시키려 애쓰셨다. 그는 안식일을 영적인 자유의 날이며 도움을 주는 봉사의 날로 만드셨다. (105.1)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들을 기록했을 때 이것은 동시에 초대 교회의 믿음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록들도 초대 교회의 신앙과 실천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차례로 사도행전에서 안식일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