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한 사례로서 제사장들의 본보기를 제시하기 위해 율법 자체를 인용하기도 하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5) 하셨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안식일에는 “여호와 앞의 떡”의 오래 된 것을 물려내고 “더운 떡”을 새롭게 떡상에 올려놓는다. 그 날에는 또 “향기로운 화제”를 드렸는데 매일 드리는 번제가 안식일에는 갑절로 드려진다(민 28:9, 10). 때문에 안식일에는 죽임을 당해야 할 동물들이 있어야 하며 불 땔 나무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마이모니데스(Maimoni-des)가 수세기 후에 논평했듯이 “성전 안에는 안식일 안식이 없었다.”9 제사장들은 주간의 평일 보다 안식일에 더 힘들게 일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제적 봉사는 거룩한 일이고 세속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당한 일이었다. (94.3)
 이 본보기에 기초된 논지는 칼 와호메르(Qal Wahomer)의 원칙 즉 “가볍고 무거움”이라고 이름하는 유명한 해석학적 원칙을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에 적용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12:6절에 나타나 있는 기독론적인 진술은 진실로 의미 심장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우리 주님께서 유대교의 예배 규칙들보다 더 크시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성전과 성전의 예식들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성전예배가 적시하려고 하는 것은 제사장과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일이다. 그는 세상의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제자들은 인류를 대속하는 그의 큰 일에 합류한 사람들이다. 그 일은 거룩한 일이며 세속적인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그들의 거룩한 봉사를 수행할 힘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신체적인 배고픔을 해결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 (95.1)
 안식일의 진정한 본성은 자주 중대하게 곡해되었다. 단지 노동을 중지하는 것만이 안식일의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쓸모 없는 날로 만들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내버리고 예배와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바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사건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잘 알려진 말을 인용하셨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세우려고 오셨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눈에는 율법에 대한 계율적인 순종보다 몇배 더 중요한 것이 자비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경우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철저하게 드리면서도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와 인과 신) 같은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은 소홀히 한다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했던 것이다(마 23:23). (95.2)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안식일의 목적이라는 주제를 제기하셨다(막 2:27). 안식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도록 계획된 것이다. 사람의 신체적 휴식의 날이면서 영적 활동을 위해 바쳐진 날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는 날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기라도 한 듯 그날을 취급하였다. A.D. 80년경에 랍비 시몬 벤 메나사(R. Shim on ben Menasha)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 적이 있었다. “안식일이 네게 주어진 것이지 네가 안식일에게 양도된 것이 아니다.”10 “그러나 이 랍비는 이러한 말로 안식일 계명을 공격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예외적인 사항들에서 안식일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어겨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11 그러나 마가복음 2:27절은 사람과 사람의 필요가 안식일 계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5.3)
 세 공관복음은 모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결론적 주장을 기록하였다(막 2:28; 마 12:8; 눅 6:5). 그리스도의 주권이 안식일을 주관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안식일이 제정될 때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요 1:1-3). 그러므로 그 분이야말로 안식일에 합법적인 일이 무엇이고 합법적이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범한 것은 안식일의 계명 그 자체가 아니라 안식일의 준수를 위하여 사람이 제정한 바리새 규칙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한 번 이상으로 바리새인들이 끔찍히도 중요시 하는 이 구전적인 규칙들을 철저하게 무시하셨다. (96.1)
 안식일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치료행위. 마가와 누가는 가버나움의 회당 예배 중에 예배를 소란케한 어떤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신 사건을 기술하였다(막 1:21-28; 눅 4:31-37). 예수님은 그때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리고 뭇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 그런데 그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눅 4:33) 예배중에 크게 소리지르자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령하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다(눅 4:35). 그러자 그 귀신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나왔다. 그러자 이 광경을 목도한 무리들은 서로 “놀라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 하였다(막 1:27). 안식일에 이루어진 이 치료 행위는 이 경우에 논쟁의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문제삼지 않았다. 분명히 이 사건이 일어났던 같은 안식일의 좀더 늦은 시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을 앓고 있던 모세의 장모를 치료해 주셨다(마 8:14, 15; 막 1:29-31; 눅 4:38, 39). 그런데 이 치료 사건도 논쟁을 유발했다는 기록이 복음서에 없다. (96.2)
 그러나 공관 복음은 논쟁으로까지 비화된 또 하나의 안식일의 치료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한 일이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11). 아마 이 때 쯤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께서 안식일 때문에 자신의 치료 봉사를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제 이 문제로 예수님과 본격적으로 부딪쳐 보아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96.3)
 얼마 후에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의 회당으로 들어가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오른손이 마른 남자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눅 6:6). 이 남자는 일종의 중풍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미쉬나(Mishnah)에 의하면 병자나 부상당한 사람이 실지로 생명의 위험에 빠져 있을 경우에는 안식일에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생명이 위험스러운지 아닌지 의심이 생길 경우에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Mishnah Yoma 8:6). 오른손 마른 남자의 경우에는 분명히 이러한 예외적인 조치에 해당되지 않았다. 오른쪽 손이 마른 것 때문에 당장에 생명이 위협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걸고 넘어질 구실을 찾기 위하여 과연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어떻게 하실 지를 유심히 주목하고 있었다. 마태에 따르면(마 12:10) 그들은 실지로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하였다. (96.4)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일어서게 하는 일이었다. 마태는 말하기를 예수께서는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바리새인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셨다고 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마 12:11).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보다도 동물을 더 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2). (97.1)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맞섰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그들은 물론 악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필요에 처한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한 손 마른 사람을 그같은 어려운 처지에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생각할 때 그를 멸망시키는 일이다.∙∙∙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그 사람을 파멸시키는 악행이다.12 (97.2)
 그래서 예수님은 “저의 마음이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셨다”(막 3:5). 그리고 한 쪽 손 마른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밀자 즉각 그 손이 치료되었다. 이 광경을 목도한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 수 있을지” 음모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그들은 불구의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안식일에 치료되는 것을 보지 않으려 했으면서도 그들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안기려는 자신들의 음모에 대해서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원칙을 세우셨다(마 12:12). (97.3)
 브루스(F.F. Bruce)는 예수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예수님은 힐렐(Hillel) 학파나 삼마이(Shammai) 학파 같은 랍비학파 학자들에 의해 해설된 안식일의 규칙들을 따르는 대신에 안식일은 인간의 구제와 안녕을 위해 인간에게 마련된 것이므로 그러한 목적을 진척시키는 어떠한 행동도 안식일에 적절하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랍비들도 사람의 목숨이 위급해진 상황에서는 안식일에도 의료적 치료을 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했지만 환자가 다음 날까지 생명에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고 기다릴 수 있을 때는 치료행위를 다음 날로 미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야말로 상황의 위급 여부에 상관없이 자비를 베푸는 일을 행하기에 더 없이 적합한 날이라고 주장하셨다. 자비를 베푸는 일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그 반대로 안식일의 율법을 통하여 사람에게 부담을 주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안식일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3 (97.4)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는 안식일 치료사건. 누가복음은 논쟁을 유발시킨 다른 두 개의 안식일 치료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 하나는 누가복음 13:1-17절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18년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선언하시고 그녀에게 자신의 손을 얹으심으로써 그녀를 치료하셨다. 직전의 안식일 논쟁에서는 논쟁이 먼저 이루어지고 치료가 그 후에 이루어졌는데 여기서는 치료가 먼저 이루어지고 논쟁이 뒤따랐다. (98.1)
 이번의 논쟁은 회당장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에게 항의하는 대신에 오히려 무리들을 꾸짖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것이니라”(눅 13:14). 예수님은 이 회당장과 그의 설명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이 안식일에 가축들의 안녕에 대해 관심을 많이 나타내면서 정작 사람의 안녕에 대해서는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동물들이 사람보다 더 귀중한가? 안식일 같은 제도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보다 더 높이 존중되어야 하는가? 예수님의 취지는 이런 것이었다. 즉 “너희는 마구간에 묶여있는 동물들을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할 때도 그 일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브라함의 딸인 한 인간을 악한 영들의 본거지인 사탄의 18년에 걸친 멍에로부터 풀어주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고 있다.”14 이 여자의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탄에게 잡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를 그 날에 자유롭게 해주셔야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 논쟁에서 원수들을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다”(눅 13:17). (98.2)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또 하나의 안식일 치료 이야기는 예수님이 고창병을 앓고 있는 한 남자를 치료해주신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기적은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이 그 집의 식사에 초청을 받았던 것이다. 거기서 주님이 고창병 환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사건이 발단하였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안식일에 병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고 그 자리에 참석해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라고 대답 할 수도 없고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예” 라고 대답하면 율법에 대해서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받을 것이며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고통당하는 자에게 가혹하고 무정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했고”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 보내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은 또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구약 성경은 형제에게나 심지어 원수에게 속한 짐승이라도 어려움에 빠져있으면 도와주어야 할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라”(출 23:5. cf 신 22:4)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에 그러한 도움을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고가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랍비들의 의견들은 서로 달랐다. 분명히 예수님은 위험에 빠진 동물들을 사람들이 도와야 한다는 원칙에 있어서는 그의 신학적인 원수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동물도 안식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왜 인간이 도움을 받지 말아야 하는가? 손님도 주인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98.3)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킨 두 차례의 안식일 치료 사건이 요한 복음에만 기록되었다. 그 하나는 베세다 연못에서 38년된 반신불수의 사람을 치료한 사건이다(요 5:1-9).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계셨는데 마침 연못 둘레의 행각에서 연못물이 요동하기를 기다리며 누워있는 38년된 만성적인 병자를 보게 되었다. 이 연못의 물은 간헐적으로 분출하였던 것 같다. 대중들은 이 현상을 천사들의 작용으로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가련한 남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하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하시었다. 이 남자는 믿음을 가지고 의지를 세워 그 명령을 순종하였다. 그러자 그는 치유되었고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는 자기가 깔고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감으로써 치료의 진실성과 온전성을 많은 사람들 앞에 증명했다. (99.1)
 요한은 이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기록했다(요 5:9). 예수님의 이 치료 행위는 랍비들의 안식일 규칙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치료를 받은 병자는 그 당시 생명을 잃을 위험에 직면해 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치료받기 위해 안식일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안식일에 치료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자기의 침상을 들고 갔으므로 랍비들의 법에 금지된 39개의 종목의 하나를 범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즉각 지적하였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 5:10). 그러나 그 남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함에 있어서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생명과 건강의 원천이 되셨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이 그에게 정당한 법적 권위의 원천은 될 수 없겠는가. 그들은 그들이 의심했던 그대로 그 남자를 치료한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확인하고는 “예수님을 핍박하였다”(요 5:16). 예수님이 습관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 때문에 유대인들이 더욱 분노하였던 것이다. (99.2)
 예수님은 두 가지의 전제 위에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였다. 하나는 그와 하나님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도 계속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는 것이다. (99.3)
 사려 깊은 유대인 주석가들은 창세기 2:2절에 기술돼 있는 하나님의 안식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하여 고심하였다. 이것은 많은 토론의 주제였다. 우주의 도덕적인 통치를 위해 하나님은 잠시도 쉴 수 없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심지어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심판하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운행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신다. 우주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일은 순간도 중지될 수 없으며 안식일도 하나님의 이러한 일을 중지시킬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 아버지의 일과 똑같이 거룩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99.4)
 요한복음 5:18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어떤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주장을 부당히 여기고 배척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주장을 신성 모독에 다름이 없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별도로 자기의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한대로 행하셨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일과 동일한 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계셨다.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동일한 일을 하셨다. 그가 말씀하실 때마다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말씀의 궁극적 권위를 피력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이 논쟁은 요한복음 7:19-24절에서 재연되었다. 예수님께서 연못가의 반신불수 환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신 이후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파괴하기로 작심하였다(요 5:18; 7:1).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적개심과 살의를 품고 살면서도 모세의 법을 지킨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할례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