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이전에 이집트의 압제를 받고 살 때 안식일 준수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추측하건대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조들의 율법을 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이집트에 살고있던 디아스포라(해외 거류의)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 같다.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유대인 이름은 사바타이(Sabbatai)와 시몬과 요셉이다. 사바타이는 안식일에 태어난 유대인 아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비 유대인들도 그 이름을 사용했으며 사바타이의 이름이 와전된 형태의 이름인 삼바티온(Sambathio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방인들은 유대인으로 귀화하지는 않으면서도 안식일을 지켰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교적인 환경에서 유대인이 안식일 신앙에 철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57.3)
 유대인이 외국인 공사 감독자 밑에서 일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며 외국 군대에 복무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요셉푸스는 시리아의 지사 돌라벨라(Dolabella)의 편지를 언급하였다. 돌라벨라는 기원전 44년에 에페수스의 지역 책임자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에서 그는 “안식일에 무기를 휴대할 수 없고 행진할 수 없기 때문에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관하여 지침을 전달했다. 그는 그들에게 군 복무를 면제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민족적 관습을 따르도록 허용하게 하였다.16 파피루스 자료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에서는 군복무를 했으며 그 이전 시대인 페르시아 왕조의 치하에서도 엘리 판틴의 유대인 수비대가 좋은 본보기이듯이 유대인들이 군복무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은 관행은 로마에 의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기까지 계속되었다.17 그러나 안식일 문제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다. 아마 평화시의 군 복무이었기 때문에 적응과 조절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유대인들 쪽에서 안식일 문제를 묵인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57.4)
 유대인들이 권력의 강요를 받아 군대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동포들과 맞서서 안식일에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경우도 이 시대의 자료에 한 번 나타나고 있다. 니카노르(Nicanor)는 유다스(Judas)가 지휘하는 유대 군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며 “안식의 날에는 완전히 안전하게”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군대에 강제로 징집된 유대인들은 니까노르에게 간청하여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 날에게 존경을 보이도록” 그에게 간청하였다. 니카노르가 유대인 병사들을 향하여 누가 안식일을 명령했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하늘의 주재이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니카노르가 다시 대답하기를 “나도 땅에서 주재자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무기를 들고 왕의 사업을 완성하기를 명령한다”고 하였다(2 Macc 15:1-4). 그들은 명백히 강요를 받고 공격을 했으며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투에 종사해야 했을 때 안식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니까노르는 안식일에 유대 군대를 공격해서 성공할 수 없었으나 포틀레마이오스 소테르는 안식일에 저항을 받지 않고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와 “어려움 없이 이 도시의 주인이 되어 가혹하게 이 도시를 다스렸다.”18 (58.1)
 좀 더 늦은 시기인 기원전 168년에 안티오쿠스(Antiochus)가 아포로니우스(Appolonius)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였으며 아폴리니우스는 안식일 전날까지 평화스럽게 예루살렘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안식일에 그는 그의 부하들에게 무장하고 행진하도록 명령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게으르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군대를 보러 나오자 군인들은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그는 성벽도 파괴하였으며 그 자리에 요세화된 성채인 아크라를 세워 군인들이 그곳을 점유하였다(2 Macs 5:24-26:I Macc 1:30-33). (58.2)
 그 다음의 그러한 경우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nes) 치하에서 발생하였다. 그는 그의 정복지에 혤라화 정책을 철저하게 수행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의 탄압에 따라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IMacc 1:43). 그러나 일부 유대인은 이 강압을 거부하고 광야로 도망했다. 군대가 그들을 추적하고 안식일에도 맹렬히 그들을 공격하였다. 도망자들의 수령인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그의 부하들은 “순결하게 죽자”고 말하면서 저항을 포기 하였다. 그 결과는 대 재난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반란자들은 안식일에도 전투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앉아서 살육을 당하느냐의 딜레마에 고민하다가 결국 안식일에도 불가피하면 전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결심했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하여 오는 누구에게든지 맞서 싸우자; 자신들의 도피처에서 죽어간 우리의 형제들처럼 그렇게 죽지는 말자”(I Macc 2:32-41). (58.3)
 요셉푸스는 여기에 추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면 전투를 계속했다.” 19 이 사건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기록된「희년서」는 안식일의 전투를 금했다. 차라리 살육을 당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을 엄격히 지키기로 작정했던 신앙공동체의 정신을 대표하였던 것 같다. 하여간 전시 체제 하에서의 안식일 준수가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58.4)
 마카비우스 치하에서는 안식일에 공격을 받게되는 경우에만 저항하고 안식일에 공격적인 전투는 하지 않는다는 관행이 계속 유지되었던 것 같다. 마타디아스를 대신하여 반란군을 지휘하게 된 유다스(Judas)는 니카노르가 안식일에 그를 공격해오자 맞아 싸웠다(2 Macc 15:1-4). 그리고 그의 후계자 요나단(Jonathan)도 바키데스가 유대인들의 성일에 공격해오자 반격하였다. (59.1)
 요셉푸스 자신도 유대 전쟁 때에 타리케아이(Tarichaeae) 지역의 반란군을 지휘하면서 이같은 관행을 따랐다.20 당시 적군의 장군들은 안식일에도 자신들을 보호하기로 한 유대인 반란군들의 결의를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상황이 유리할 때도 안식일에는 적군들을 공격하거나 추격하지 않았다. 유다스와 그의 군대는 니카노르의 군대를 패배시켜 그들을 위급한 상황으로까지 추격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하였다. 그 날이 안식일의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그 다음 날에 그들의 전리품들을 나누어가졌다(2 Macc. 8:25,26). 그 후에도 유다스의 군대가 고르기아스의 군대를 패퇴시켜 추적하게 되었었는데 안식일이 다가오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적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었다(2 Macc. 12:38). (59.2)
 그들은 비록 불가피하게 안식일에 방위를 위해 전투를 했으나 안식일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로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적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리아의 데메트리우스가 유대의 요나단과 동맹을 맺고자 했을 때 요나단은 여러 제안들의 하나로 “안식일과 여러 절기들과 절기의 앞에 있는 3일 동안에 유대인들을 노역에서 면제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21 그리고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안티오쿠스 7세 시데테스(Antiochus W Sidetes) 군대와 동맹하여 카르티아 족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에도 왕에게 요청하여 안식일과 유월절을 위해 행군을 멈추어 한 장소에 머물도록 하였다. 유대인은 안식일과 유월절에 행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22 (59.3)
 적군들은 안식일을 존중하는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공격할 때 안식일을 이용한 여러 가지 작전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적군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방어만 할 뿐 공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게하여 긴장을 풀게했다가 유대인들을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라티루스(Ptolemy Lathyrus. c. 100 BC)가 바로 이러한 작전들을 사용했다. 그는 갈릴리의 도시인 아소키스(Asochis)를 안식일에 갑자기 기습하여 약 일만명의 주민을 사로잡고 많은 물품들을 약탈하였다.23 (59.4)
 적군이 사용한 또 하나의 다른 작전은 안식일을 다음 차례의 공격을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사용한 작전도 이것이었다. 이 일에 대하여 요셉푸스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59.5)
 “그러나 만약 안식일에 쉬는 것이 우리들의 민족적인 관습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흙으로 만든 토루들을 완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 일을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법은 우리들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것만을 안식일에 허용하고 적군이 무엇을 하든지 그날에 선재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 군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날들에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화살을 쏘지도 않았고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전투를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들은 성 앞에 토루를 쌓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 공격할 때 사용하기 위해 성을 공격하는기계들을 배치하였다.”24 (60.1)
 로마의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비교적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안식일도 지킬 수 있었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돌라벨라(Dolabella)가 에페수스의 공직자에게 서한을 보내어 만약 유대인들이 군대에 복무하게 된다면 안식일 준수와 음식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게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군 복무에서 면제시키라고 지시한 사실을 언급했다. 요셉푸스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준수의 자유를 허락하는 여러 칙령들과 서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5 당시 유대인들의 갈등은 안식일보다는 우상 숭배 문제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6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과 관련된 문제들도 발생했다. 필로도 그러한 경우의 하나에 대해 언급하였다. “지배층의 한 사람이” 안식일을 없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고관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일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만약 그가 안식일에 관한 고대의 규칙을 파괴시킬 수 있다면 다른 법률도 어기게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을 전체적으로 배교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같은 명령을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인간의 이성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상상해 보라. 만약 적군이 갑자기 침공해 오든가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강 뚝이 무너지던가, 대 화재나 지진이나 기근이나 큰 전염병이 발생하든지, 그 밖의 인재나 천재가 발생하면 너희는 집에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겠는가? 안식일에 무의식적으로라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평상적인 차림으로 오른손은 몸 안으로 움츠려 들이고 왼 손은 외투 아래 있는 옆구리에 가까이 댄 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 어슬렁거리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집회 장소에 모여 앉아서 너희의 정규적인 집회를 개최하여 안전하게 너희들의 경전을 낭독하고 안락을 누리며 한가하게 경전의 불명료한 사항들을 설명하고 조상의 철학을 장황하게 토론하겠는가? 아니다. 너희는 이같은 일들을 집어치우고 자신들과 너희의 부모와 자녀들과 그 밖에 너희에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허리띠를 졸라매라. 그리고 그들을 파멸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재산들을 사용하라.”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희 앞에 서 있는 나는 이름 그대로의 나이다. 나는 회오리바람이며, 전쟁이며 대 홍수이며, 벼락이며 가뭄과 질병의 대 재난이며 튼튼하고 안전했던 것을 뒤흔드는 지진이다. 나는 너희들의 눈에 보이도록 너희의 옆에 서있는 강압적인 운명이다.”26 (60.3)
 필로는 이 통치자의 설득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강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설득은 실패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지의 좋은 실례를 소개한 것이다. (60.4)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에 도착한 이후의 시기인 유대 반란의 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최고 관리로 재직하고 있던 안티오쿠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다른 유대인들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식일에 쉬는”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그들에게 안식일에도 “다른 날과 똑같이 일하도록 강요하였다. 너무나 엄격히 복종을 강압했기 때문에 안디옥에서만 주간의 안식일이 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게 까지 이러한 조치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27 (61.1)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절망적인 전쟁에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관습을 더 이상 전략에 이용할 수가 없었다. 과거에는 유대인들의 원수들이 유대인들의 처지와 행위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기습하여 놀라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 전쟁에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놀라게 되었다. 그러한 사례의 하나가 안식일에 로마인의 수비대가 몰살당한 일이었다. 관습적으로 안식일에는 종교적인 망설임에 얽매어 왔던 유대인들로서는 가장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요셉푸스는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안식일의 대량 학살 사건을 전하면서도 자기는 이 행위에 찬성할 수 없음을 나타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마치 섭리의 손이 작용하기라고 한듯이 가이사리아 주민들이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28고 전했다. 유사한 사건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요한(John)이 티투스(Tutus)를 속여 지칼라(Gichala) 사람들의 항복을 안식일부터 다음날까지 연기시키지 않을 수 없게하여 그 밤 사이로 그가 도망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29 (61.2)
 그리고 전쟁이 절정에 도달하여 예루살렘에까지 전쟁의 불길이 미치게 되었을 때 요셉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대인들은 전쟁이 이제 수도인 예루살렘에까지 미친 것을 보고 그들의 축제를 단념하고 서둘러 무장하였다. 그들의 많은 숫자를 크게 의지하고 무질서하게 날뛰었다. 그날은 그들이 특별히 경건하게 여기는 안식일이었지만 제칠일 안식일에 대해 전혀 배려를 하지 않고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다.”30 이 안식일은 초막절 안식일이었다. (61.3)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죽느냐 아니면 안식일에도 싸워서 살아남느냐 하는 유대인들의 딜레마는 유대인들의 반란 직전에 행해진 아그립바 2세의 연설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만약 너희들이 안식일의 관습을 지켜 그 날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의심할 나위없이 너희들의 조상들이 폼페이우스에 의해 당했듯이 쉽게 패배할 것이다. 그때도 폼페이우스는 포위된 성안에서 사람들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날들을 골라 가장 맹렬하게 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로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너희가 너희의 조상들의 율법을 범한다면 너희가 이처럼 싸워야 할 무슨 종교적 목적이 더 남아있게 될지 나는 모르겠다. 너희들의 목적의 하나는 너희 조상들의 모든 제도와 관습들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봉사를 고의적으로 바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 할 수 있겠느냐?”31 (61.4)
 이 질문에 대한 한 대답은 아시나이우스(Asinaeus)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다. 아시나이우스는 그의 형제 아닐라이우스(Anilaeus)와 함께 가이우스(Gaius)가 죽고 그곳의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살육되었던 기원 41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 독립적인 전략지를 구축하였다. 아시나이우스는 바빌로니아의 태수가 안식일에 자기를 공격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척후병들을 보내어 자세한 정보를 탐지해오게 하였다. 척후병들은 돌아와서 소문이 사실임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조상들의 율법의 명령 때문에 손발이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탄식하였다. 당시의 그들은 안식일에 자신들을 방어하는 전투행위 조차도 부당한 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 아시나이누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율법을 더 잘 지키는 길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있는 채로 죽임을 당함으로서 원수를 기쁘게 하는 대신에 용기로 주먹을 쥐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곤경으로 하여금 율법의 범법을 용서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피하다면 복수를 강행하면서 죽는 것이다.”32 그의 이 같은 결의로 그의 군대는 크게 힘을 얻게 되었고 안식일에 적군을 패주 시켰다. (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