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개신교도들을 배척함으로서 하나님의 “두 증인” 이자 “등대”인 성경의 빛까지 크게 배척한 결과가 되었다. 1700년 대의 많은 프랑스 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빛에 등을 돌리고 대신에 “계몽주의” 라고 하는 당시의 철학 사조를 받아들였다. (282.5)
 계몽주의(Enlightenment)
 1700년 대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28 권의 백과 전서(여기에 7 권의 부록이 추가되어 있다)로 망라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우주가 자연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같은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중요성이 갈수록 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신론(自然神論)이 이 시대를 풍미했다. 자연신론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하나의 커다란 시계와 같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신 다음에는 스스로 돌아가도록 내맡겨 버린 그런 분이었다. (282.6)
 인간 이성(理性)이 갈수록 존중되었다. 이것은 인간 이성이 우주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녀 탄생의 기적과 부활과 개별적인 기도의 응답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멸시되었다. (283.1)
 유럽과 북미 일대에는 계몽주의가 엷게 퍼져 나갔으나 프랑스의 파리에는 이 사상이 크게 만연했다. 모든 계층의 남녀들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인 채로 클럽이나 살롱에 모여 소위 철학자들이라는 당대 지식인들의 최근 발표작을 토론하는 것을 멋으로 알았다. (283.2)
 계몽주의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와 프랑스와 볼테르(Francois Voltaire)가 가장 뛰어났다. 두 사람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루소는 몇 가지 상호 모순적인 것들을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와야 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있는 소수가 다수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의 의지를 강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그 일례이다.31 (283.3)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볼테르는 1755년 11월 1일의 리스본 대지진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니 우리 자신이 우리를 보살피는 쪽이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 주장은 프랑스 혁명의 길을 닦은 논거의 하나였다. 볼테르는 자연신론자였다. 그의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한 신이기는 하지만 누구를 사랑할 수 없으며, 우리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도 없는 신이었다. 볼테르는 거듭하여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하였고 인간의 이성이 그리스도교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별히 구약 성경을 배척했다. 구약 성경이 인간을 짐승의 차원으로 깍아 내렸다는 것이다.32 (283.4)
 프랑스 혁명 기간에 한 미국 시민이 프랑스의 국민 의회의 회원으로 선출된 것은 뜻있는 일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었다. 그는 다소 기인(奇人)형의 미국 애국자로서 여러 면에서 볼테르와 입장을 같이했다. 페인은 파리에 체재하는 동안에 저술한 「이성(理性)의 시대」(The Age of Reason)에서 자기는 “구약 성경을 혐오한다”고 노호하였다.33 (283.5)
 비그리스도교화 운동이 수행됨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에는 프랑스의 거의 모든 주교들이 귀족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은 귀족 세력과 국왕에게 밀착되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주교들은 국왕과 귀족들의 압정과 사치 생활을 제대로 비판치 못했다.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낡은 왕정과 귀족 제도, 그리고 가혹한 조세 제도와 종교를 뒤엎어 버렸다고 해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니었다. (283.6)
 프랑스의 혁명 세력은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의 종교였던 가톨릭 종교 제도를 혐오한 첫 조치로서 완전히 새로운 역법(曆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기원을 삼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연대를 기원으로 삼은 새로운 역법이었다. (283.7)
 낡은 역법에 의하면 1년 365일 중에 거의 200일에 가까운 날이 각종 성일(聖日)로 지정되어 있어서 근로 계층의 생계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 날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력(新曆)에서는 이러한 성일들이 모두 철폐되었다. 심지어는 일요일을 성일로 삼는 일까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와 함께 성경의 안식일을 생각할 수 있는 일말의 기억도 사라졌다. 그런데, 개신교 종교 개혁을 통하여 백성들이 성경을 자유롭게 읽게 되었던 영국의 사정은 크게 달랐다. 영국에서는 과거 교회가 제정한 모든 성일들이 철폐되었지만, 일요일은 안식일로 주장되면서 성경의 안식일과 거의 똑같은 성격의 날 즉 거룩하게 안식할 날로 존중되었다. (283.8)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반(反) 그리스도교적인 신 역법(新曆法)이 제정되어 한 주일이 열흘로 늘어났고 제10일은 공화국(共和國)과 그 혁명 종교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일로 선포되었다. (283.9)
 

박해당하는 위그노 교도 지도자들은 프랑스 황야 지대에 본부를 설치했다. 부엌 다락을 빠져 나와 산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한 통로가 아직도 남아 있다.
(284.1)
 그리고, 매달의 명칭은 각기 그 시절을 쫓아 불어(佛語)로 눈의 달, 비의 달, 바람의 달, 안개의 달, 수확의 달, 폭염의 달 등으로 붙여졌다. (284.2)
 혁명 종교의 첫 기념식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짝을 이루었다. 1793년 8월 10일, 자연의 여신(女神)을 상징하는 거대한 조각이 특별한 장소에 세워졌다. 파리의 시민들이 그 조각 앞에 떼를 지어 몰려 섰는데 그 여신상(女神像)의 젖가슴에서 물이 쏟아져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연못 위로 흘러내렸다. 이때 장엄하게 꾸민 한 배우가 나와 “그대 민족들의 주권자여, 그 문명됨과 야만됨을 시비하지 않노라. 오! 자연이여, 이 위대한 국민은 그대에게 합당한 국민이로다” 라는 불경한 기도를 올렸다.34 (284.3)
 엄격한 의미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그리스도교를 철폐하지 않았다. 사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모든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혁명 정부는 당시의 가톨릭교를 특징지우는 열렬한 거리 행진을 금지시켰으며 파리의 주교와 그 보좌 신부들에게 그들의 천직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이 소식을 듣고 파리 시의 48개 구(區)가 기뻐 날뛰었다. (284.4)
 파리의 한 구민(區民)들은 화톳불을 피우고 기도서들과 각종 교회 예식서들을 불태우며 이를 기념했다. 다른 구민(區民)들은 공공연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포기를 결심하였다. 가톨릭 교회당에는 낯익은 여러 성인들의 조상(彫像)들 대신에 자유와 평등을 위해 “순교한” 혁명 열사들의 흉상들이 안치되었다. 고색 찬연한 고딕 양식의 교회당에서는 혁명 종교의 “할렐루야”가 울려 퍼졌다.35 그리하여 혁명 정부가 모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내의 모든 교회들이 즉각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사람들은 찬양대원들의 가운을 뜯어 만든 샤쓰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교회와 묘지에서 사람들이 나체 춤을 추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84.5)
 중고품 상점에서는 신부들의 가운과 제의(祭衣)들이 판탈롱 바지, 세면대 시트와 나란히 진열된 채 판매되었다.36 (285.1)
 비그리스도교화의 이 거친 물결은 파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 운동은 다른 도시들에게 먼저 시작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가 폭도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지방 당국이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상징물들을 철거시키고 파이프 오르간을 뜯어 내팽개쳤다. 십자가 고상, 성인들의 조상(彫像), 값 비싼 성찬 기구들이 모두 팽개쳐졌다. 또한 귀족들의 지하 묘지에서 호사스런 갑옷을 꺼내어 팽개쳤다. 상당량의 금과 은이 교회로부터 시(市)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 금과 은의 대부분은 새로운 국민 군대를 위해 사용되었다. 프랑스의 한 유명한 역사가는 말하기를, 종교적인 보물들이 선적되어 수도에 도착하자 “저속한 익살 극에 심취해 있는 하층 사회의 어중이떠중이들이 가장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종교 의식을 풍자했으며 전에는 종교적인 의식을 경축하면서 기쁨을 누렸던 그들이 이제는 그것들을 모독함으로서 기쁨을 삼았다”고 했다.38 (2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