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서우리만큼 엄숙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 당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초대 교인들을 박해한 유대 제사장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비난을 부인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일곱 나팔을 연구할 때 주목했듯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모슬렘들이 저지른 행위들을 볼 때, 세월이 흘렀다 해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의 행위는 크게 개선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87.3)
프랑스의 그리스도교 사제들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고문하고 추방하고 갤리선의 노예로 팔았다. 프랑스의 혁명 지도자들은 지존자(또는 理性의 女神)의 이름으로 그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내고 총살하고 추방하고 갤리선의 노예로 팔았다. (287.4)
이 둘 사이에 진정한 차이가 있는가? 참으로 가련한 프랑스가 아닐 수 없다. 1800년 대 미국의 교회 사학자(史學者)들을 대표했던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1세기 전 미국 교회사 학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에서 행한 강연을 통해서, “프랑스는 종교 개혁을 배척하여 혁명이라는 결과를 거두었다”고 주장하였다.46(287.5)
만일 샤프 교수가 “종교 개혁” 이란 말을 교리의 새로운 체계와 새로운 생활 방식의 의미로 사용했다면 우리는 사프 교수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만큼 중요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요 14:15)라” 하셨고 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다. (288.1)
만일 이같은 형태의 성서적 그리스도교로 개혁이 이루어졌던들 사전에 프랑스 혁명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288.2)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정 생활에서 맞는 허다한 난관들 역시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2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