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기의 시작을 알리는(참조 천년기 I. C)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임함은 그분의 대의가 이루어진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완성된 것을 나타낸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기도 한데, 실제로는 두분 모두의 나라이다(마 13:41; 16:28; 눅 22:30; 요 18:36; 골 1:13; 벧후 1:11; 엡 5:5). 예수께서는 역설적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 중에 임할 그 나라가 실제로 자기의 존재와 사명 가운데서 역사 속에 이미 임해 있다고 선언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참조 마 12:28). (230.3)
 사탄의 멸망이 천년기의 끝에 있을 것이지만(계 20:10),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7:21). 승리의 함성이 울릴 때까지의 시간적 간격은 그 기간이 불분명할뿐더러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기간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사건은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분의 재림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절정에 이른 사건이다. 마지막 때는 그분의 초림 시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이미 시작되었다(히 1:2; 요일 2:18; 벧전 1:20). 그리스도교 신자는 현재 “이미 지나간 시간”“장차 이르러 올”시간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강림하여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살전 2:8).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임재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봉사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9:16)로서의 그분의 다시 오심을 경험하고 있다. (230.4)
 그리스도께서는 이 죄된 세대 속으로 들어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심으로 이 땅 위에 현시대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영적 왕국을 세우셨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영생까지도 포함되어 있는(요 3:16)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들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골 1:13). (231.1)
 그리스도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요 3:36). 우리의 이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알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다. 물론 완전한 영생은 장차 그것이 완성될 때에 경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이 영생을 즐길 수가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촉진하라고 권고한다(눅 12:35-37; 고전 1:7, 8; 살전 1:9, 10; 벧후 3:11, 12). 그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파루시아를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다시 오실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사역을 통해서 자기들을 위해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그 일을 생각하면서(롬 8:34; 히 4:15, 16), 이 사건이 자기들의 “복스러운 소망”(딛 2:13)이라는 확신과 행복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다. (231.2)
 E. 하나님의 초청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성경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심을 확인하였다. 그분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심을 드러내고 선포하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이 죄가 없으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존재임을 보여 주셨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세워진 계획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값없이 죄인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은 죄책과 그에 따른 형벌로부터 건져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못박힘의 증거를 간직한 상태로 살과 뼈를 가진 몸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승천하셔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영광과 권능 중에 곧 다시 오셔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를 종식시키실 것이다. (231.3)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기를 강권하는 분명한 초청의 말씀들도 기록되어 있다. 죄인과 성도 모두에게 그분을 바라보거나 그분을 찬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함을 받을 때까지 그분을 닮기 위해 그분을 따라 행하라는 권고가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초청은 우리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초청에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행하는 일, 곧 그분의 “안에 거하”는(요 15:4, 7) 일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참조 5절)는 말씀을 통해서 “거함”의 개념을 이중적인 형태로 표현하셨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이 언제나 믿는 자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매우 생생한 표현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자가 그리스도처럼 행하고(요일 2:6),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며(요일 3:24), 지고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요일 4:12). 요한은 자기의 첫 번째 편지에서 “거함”의 개념을 매우 자주 다루고 있는데(요일 2:6; 24, 27, 28; 3:6, 24; 4:12, 13, 15, 16; 참조 2:10, 14; 3:9, 14, 17), 이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능력의 근원을 강조하고자 하는 그분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231.4)
 바울도 이처럼 강하고 명료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구원의 계획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은 그분의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은 곧 삶의 새로운 원칙들, 새로운 관심들, 새로운 도덕적 가치들, 새로운 사고방식들을 의미한다. 둘이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롬 6:3).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사람의 모든 삶의 방식이 그분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참조 고전 4:17). (232.1)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사상이 너무나도 무한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그의 개념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라는 개념을 더 하고 있다. 이는 바울 자신의 경험임이 분명하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사도는 회심한 에베소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라고 말하였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가 자신이 경험한 그 복을 에베소의 신자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라는 문구가 당시의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하나의 규범이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 개념은 헤아리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이것이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골 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진리에 관해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이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가 궁금해할 정도였다(고후 13:5). (232.2)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복음을 참되게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한 회심과 침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또한 지금은 부활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선포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고백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때가 찰 때까지 곧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매일의 삶을 통해서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