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시 근처 지하 채석장이었던 카타코움에서 회집했다. 그들은 사별한 사람들을 벽에 묻고 재림의 날을 고대하였다.
(213.5)
 생령을 구성한 두 개의 요소를 주목하라.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1) 땅의 흙을 빚으시고(2) 거기에 “생기”를 추가하셨다. (214.1)
 “생기”란 단어 속의 “기”는 호흡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히브리 어 단어는 “루아흐” 이다. “루아흐”란 단어에는 “바람”이란 뜻도 들어 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호흡(또는 “기”(氣))과 “혼”(spirit)으로 번역되었다. 혼이란 뜻의 영어 단어 스피리트(spirit)는 라틴 어 스피리투스(Spiritus)에서 기원했는데 이 또한 호흡과 바람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호흡이란 뜻의 또 다른 영어 단어 레스퍼레이션(respiration)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214.2)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음을 받았다(창 1:27). 이 같은 은총으로 말 미암아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크게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창조의 기사에는 다른 동물들도 모두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살아 있는) 네페시” 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를 한글 성경과 영어 성경이 모두 “생물”(生物, living creature)로 번역하였다(창 2:19). “생령”“생물” 이 히브리 어 사본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동물도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요소로 형성되었으니 첫째가 흙이요 둘째가 “생기” 였다(창 1:24, 30). 여러분이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와 고양이, 그리고 기니 산(産) 돼지가 모두 “생령”이다. 말(馬)도 생령이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생령이다. (214.3)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가? 성경을 보면, 사람이 죽을 때 두 개의 기본 요소가 당분간 서로 분해된다고 했다. 당분간(1) 흙과(2) 호흡이라는 두 요소가 그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14.4)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神)(루아흐 · 호흡)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
(214.5)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은 전도서 12장 7절을 다소 어색하게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흙(티끌)은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호흡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 아간다.” 영어 현대어역(Today's English Version)에서는 “우리의 육신은 땅의 티끌로 돌아가고 생명의 호흡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214.6)
 사람이 죽을 때 영(네페시)은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들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주할 때 어린 자녀들의 그네 틀은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이 그 그네 틀을 처음으로 조립했을 때는 두 개 기본 재료, 즉(1) 파이프와 막대와 밧줄들과(2) 플라스틱으로 된 고정 나사와 빗장 못들이 필요했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 할 경우에는 그네를 분해해야 하는 것이다.(1) 파이프, 막대, 밧줄과(2) 못과 나사들을 따로따로 해체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네는 어디로 갔는가? 여러분이 새로 이주한 집의 앞뜰에 다시 그네를 조립하여 세우기까지는 그 그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14.7)
 그러나 “마분지 상자 속에 있는 그네”라는 식으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14.8)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에 대해 아직도 미진한 느낌이 있다. 요한계시록 6장 10절에 보면 이 영혼들이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한다. (214.9)
 이 영혼들은 “제단 아래 있다”고 하였다. 희생 동물들처럼 이들도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나타낸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215.1)
 문제는 성경 구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성경 구절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 영혼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피”는 신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영혼을 불멸의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을 불멸의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불멸의 존재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딤전 6:16; 1:17). (215.2)
 하나님께서 최초로 남녀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간절한 소망은 사람들이 영원히 생존하는 것이었다. 그 분은 사람을 죽을 수밖에 없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며 우리를 살도록 지으셨다. 끝이 없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 나무의 과일을 마련해 주셨다(창 2:9, 16, 17). 그러나 그들은 죄를 범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과일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하여 인생의 연한을 단축시키셨다(창 3:24). (215.3)
 만약 생명 나무의 열매를 계속 먹을 수만 있었다면 인간이 영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 과일이 없이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영혼은 현재의 우리이며,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영혼도 죽는다. 영혼이 죽을 때 우리의 생각과 계획과 소망은 당분간 끊어지는 것이다. (215.4)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며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사 38:18, 19)
(215.5)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 146:3, 4)
(215.6)
 만약 위의 성경 구절처럼 제단 아래의 영혼들이 지각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라면 어떻게 그들이 소리쳐 기도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아벨이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아벨의 피가 신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이 부르짖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하셨다. (215.7)
 이것은 퍽 단순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대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중한 죄는 중한 벌을 요청한다” 라고 말한다. (216.1)
 순교자들 자신이 복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 그 혹독한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과 스데반처럼 박해자들을 용서하며 죽었을 것이다(눅 23:34; 행 7:60). 처벌을 요구하는 것, 하나님께 복수를 요구하는 것은 살인자의 가공할 비인간성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이 영혼들을 “제단 아래에 있도록” 강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복수를 요청하는 것이다. (2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