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5 부 내 제사장이신 예수님과 함께 (죄와의 교제 관계로부터의 해방) 27. 열 두 지파 봉헌식 (나의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의 것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있는 동안 거둔 승리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서 대단한 권세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표현하여야함을 인지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기뻐하면서 응답하여야겠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4, 15).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요긴하다”(각 시대의 대쟁투, 48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늘 제사장으로서 행하시는 봉사는 중보의 사역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봉사에는 또 다른 면들이 있다. (348.3)
 바울은 독자들에게, 승리의 그리스도는 그분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해” 혹은 “속죄”를 행하신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 힐라스코마이<hilaskomai>는 덮어 가린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의 카파르<kaphar>에 해당되는 희랍어이다. 카파르는 영어 성경에서 20개의 다른 단어들로 번역되었다(영어 성경 단어 색인집을 찾아보라). 이 단어는 그 어근이 가지는 의미로부터 파생되어, 용서하다, 사면하다, 속죄하다, 보상하다, 순화하다, 완화시키다, 지워 없애다, 혹은 가라 앉히다 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시 25:11; 65:4; 79:9; 단 9:19; 눅 18:13를 참조하라). 이러한 신학적인 용어들에 담긴 개념은 속죄나, 달램, 혹은 용서를 통하여 화해를 한다는 뜻이다. 구주께서는 이 일을 자신의 속죄 희생을 통하여 성취한다(롬 3:25; 히 9:15, 26고전 5:7엡 5:2를 참조하라). (348.4)
 희랍어 동사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힐라스테리온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씩 대속죄일에 피를 뿌렸던(레 16:13~16) 속죄소나 법궤 뚜껑의 명칭이다(히 9:5; 참조, 칠십인역 출 25:17~22). (348.5)
 이 용어를 이렇게 두 가지로 사용하는 것은 제사장이, 죄인들을 매일 화해시키는 일과 “대속죄일”에 백성들과 성소를 연례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대제사장의 일에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349.1)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으로서 행하는 사역의 한 국면은 그분의 속죄하는 죽음을 지상에 있는 백성의 계속되는 필요에 적용시키는 데 있다. 제사장이 성전의 바깥 뜰에서 피를 취하여 성소에 뿌렸듯이 “그리스도도 갈바리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을 바치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가야만 하셨다”(T. C. Edwards, The Expositor‘s Bible, Hebrews, 134, 135쪽). 그러기에, 스웨트(H. B. Swete)가 “구약 성경의 대속죄일 유추나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도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이 그분의 죽음과 동시에 끝났다고 하는 교리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에는 타당성이 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넘기워졌다면, 더 나아가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면 ∙∙∙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성 바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십자가와 수난이 아니라 승천과 대제사장적 중보가 주님의 구원 사역의 절정이다”(The Ascended Christ, 49쪽). 희생 제물—제사장은 “영원한 생명의 권세”를 통하여서 지금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드리고 계신다. (349.2)
 바울은 교회, 곧 현대의 “하나님의 온 집”에서 그리스도가 행하는 봉사의 또 다른 국면을 고대의 “하나님의 온 집”인 이스라엘에서 모세와 아론의 행한 봉사에 비교하였다(히 3:1~6).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인도하였고, 대제사장이 일반 제사장들을 감독하였듯이, 구주께서는 지상에서 봉사하는, 자신의 “왕들과 제사장들”의 봉사를 감독하신다(벧전 2:5, 9).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일반 제사장이 입는 흰 옷을 차려입고 성소에 놓인 일곱 촛대 사이로 걷고 있는 구주의 어렴풋한 모습을 보았다. 그분은 거기서 인류 역사에서 자신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향유하는 빛이 밝게 빛을 발하도록 봉사하시고 계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못박힌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그들의 대표자 “천사들”이나 혹은 지상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문제들을 다루고 계셨다(계 1~3장).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에 하늘 성소의 제사장과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히 2:17, 18; 5:1). (349.3)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주장에 무게를 더하시기 위하여(막 12:35~37)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4)라고 하는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시었다. 스가랴는 다음과 같이 시편 기자의 입장에 동조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筍; Branch, 가지)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2, 13). 순이라고 번역된 트사마크(tsamach)라는 말(렘 23:5; 33:15에도 사용되었다)은 항구적으로 메시야를 가리킨다. 예수의 대제사장적 사역은 그분의 왕권과 불가분리적이다. (349.4)
 그분은 멜기세덱과 마찬가지로 왕이자 제사장이며 어느 날엔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시기 위하여 지상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계 17:14, 19:16). 그 때까지 그분께서는 백성의 영원한 안녕을 위하여 계속하여 봉사하신다. (350.1)
 이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혈을 흘리신 후에, 흠없은 자신의 의 가운데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가신다. [고백되어서 영원히 용서받지 않은 죄들은 지성소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심홍색 피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봉사를 하게 된다”(4T, 122). 우리의 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매일의 봉사를 통하여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듯이, 그분께서는 재림 직전에 막을 내릴 최종적인 대속죄일의 정결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킨다. (3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