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19장 제사는 영생을 예표한다
 정결하게 하는 과정은 부정함의 근원들이 사라질 때까지 시작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문둥병을 앓고 있었다면 질병의 증상이 사라질 때까지 제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을 시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레 14). (139.5)
 단 하루 동안 지속되는 가벼운 부정을 가진 사람은 옷을 빨고 몸을 씻으며 정결케 되는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레 15:5~8). 이렇게 물에 몸을 온전히 담그는 정결의식은 기독교의 침례의 전신이었다. (139.6)
 새신자인 그리스도인이 물로 내려가는 것은(행 8:38) 그의 죄된 예전 삶을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악한 생명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 6:1~14). (140.1)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결해지기 위해서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을까? 그 부정함이 그 날의 끝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바로 예수께서 “저녁”(혹은 늦은 오후)제사 시간에 돌아가신 것이다(마 27:46-51, 참고 민 28:4).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하루의 끝에 정결함이 제공되었다. (140.2)
 심각한 부정은 부정함이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지만 더한 것은 속죄제가 요구되었다(레 12:6~8; 15:14-45). 성소의 다른 모든 제사들과 같이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타냈지만 용서가 포함되지 않은 제의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속죄만을 제공했다. 이것은 중요하지만 무시된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로부터 용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요일 1:9), 죽을 운명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요 3:16)는 것이다. 시편 103편은 우리의 회복의 대하여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2~3) (140.3)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시대까지 존재했던 죄들과 죽음의 운명만을 처리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세대들에게까지 용서와 생명이 미치게 하셨다. 이러한 개념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속죄제에 반영되어 있다. 붉은 암송아지을 진 밖에서 태워 재를 만들었고 재는 보관되었다. 후에 어떤 사람이 시체와의 접촉으로 오염되었을 때 재의 일부를 물과 섞어서 그를 정결케 하기 위해 뿌려졌다(민 19). (140.4)
 그 재는 사람으로부터 부정을 제거하는 제의적 스펀지 역할을 하였다. 암송아지를 태우는 것이 재가 부정한 사람에게 사용되어지기 이전에 일어났지만 암송아지를 태우고 재의 보관에 참여한 사람들도 부정하게 되었다(민 19:7~8,10). 왜 그랬을까? 그 불에 태우는 희생에 미래의 부정이 떠맡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시체로 인한 부정이 암송아지의 재를 통하여 그 희생 사건 때로 시간과 공간을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재도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은 미래의 것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죄들과 죽음의 운명을 짊어지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미래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정결함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141.1)
 그리스도께서 정결함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 로마병사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곧 피와 물이 나오니라”(요 19:34)는 사실로 더욱 강조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제사제도에서 정결케 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요소인 피와 물이었다. (141.2)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지상 공생애 사역 중에도 정결의 근원이셨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하여 그들을 만지셨는데(마 8:3) 어떻게 그분 자신은 부정하게 되지 않았는지 의아하지 않은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눅 8:43-48). 레위기 15장에는 그런 여인은 부정하고 그녀를 만지는 자도 모든 사람이 부정하게 되었다(25~27절, 참고 19절). 그 여인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도, 특별예식에 사용된 음식을 먹지도,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남편과 동침할 수도 없었다(참고 레 18:19; 20:18). (141.3)
 그녀의 삶은 그녀의 육체적 고통 이외의 것으로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끊어졌다. 그녀가 절망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42.1)
 그녀는 왜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건드렸을까? 그분을 부정하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셨다. 근동의 모든 군중들이 밀고 당기는 속에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 만일 우리가 그 군중들 틈에 끼어 있었다면 그 질문이 예수님 주변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들렸을 때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께서 하신 말의 뜻을 알았고 그분을 부정하게 만든 자신의 행위를 꾸짖으시려는 줄알고 떨고 있었다. (142.2)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를 꾸짖는 대신 그녀를 죽복하셨다. 그녀는 조금도 예수님을 부정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예수님께서 정결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능력이 그분에게서 그 여인에게로 나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만짐을 주목하셨다(눅 8:46). (142.3)
 예수는 레위기 11:36에 언급된 샘과 웅덩이의 물 같은 분이시다. 부정한 동물의 주검은 다른 것들을 더럽힐 수 있었지만 샘물과 웅덩이의 물은 정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더럽힐 수 없었다. (142.4)
 기별은 이렇다. 예수께 와서 그분이 너를 만지게 하라. 그분의 옷자락을 잡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은 모든 정결하게 함과 치유함이 필요한 더러운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는 것 없이 당신을 도우실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을 꾸짖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오직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다. (142.5)
 그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함의 근원으로 만드실 수 있으며 세상을 치유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가 온갖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찬 곳으로 나아갈 때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소개함으로 정결함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한, 그분의 일에 그분의 인도를 받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두려워하지 말라. (143.1)
 이제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하늘 성소를 향해 우리의 예배가 집중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의 특정한 위치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상 성소에 계신 하나님 사이의 교통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적 정결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의적으로 부정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교회의 문 밖에 사람들을 배치할 필요는 없다. (143.2)
 그러나 정결법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성경의 정결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정결법은 우리에게 죄된 상태가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지 가르쳐주며 하나님께서 깨어짐과 더러움과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완전함과 순결함과 생명을 주셨는지 보여준다. (143.3)
 우리의 삶은 전쟁터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엉망인 것을 치워주시고 우리에게 궁극적인 평화를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보증한다(계 21:4).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