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19장 제사는 영생을 예표한다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용서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에게는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는 여전히 다시 범죄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세상에 살며 죄를 향한 본성적 욕망을 가진 죄인들이다.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45). (135.1)
 죄를 극복해내려고 애쓰는 것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카누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시도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욕망과 우리에 대한 사탄의 영악한 유혹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주는 강력한 힘이 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135.2)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3~4).
(135.3)
 우리에게 죄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영적인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136.1)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화롭고 순결하며 새로운 육체를 받을 때까지(고전 15:51~54) 우리는 죄를 향해 구부러진 마음을 가진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갈 2:20)를 인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 신성은 죄된 본성을 극복하고 제어하게 한다. (136.2)
 그리스도의 희생은 죄를 범하는 것 넘어서 용서와 승리를 준다. 타락하지 않는 기질과 영원히 사는 것이 완전히 해결된 새로운 몸을 약속하시는 것도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된 행실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 (136.3)
 그리스도인에게 침례 예식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롬 6:1~11; 참고 벧전 3:21~22). 그리스도께서 용서뿐만 아니라 생명도 주신다는 이 사상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에도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 제사를 통해 죄된 행실과 함께 제의적 부정까지 속죄 받았던 것을 기억하라. 제의적 부정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제거되어지는 죽음의 운명을 대표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36.4)
 제의적 부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임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거룩한 것들과 교통하는 자격을 잃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화목제의 거룩한 고기를 먹는 것이 제의적로 부정한 사람에게는 금지되었다(레 7:20). 부정함은 거룩함과 접촉할 수 없었다. (137.1)
 성경의 부정을 규정하는 율법의 목적은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들로 인한 오염으로부터 거룩한 것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부정함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셨기 때문에(레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정함의 경계를 지키는 데 매우 주의해야 했다. (137.2)
 제의적 부정함은 보통의 신체적 더러움이 아니다. 우리는 욕조에서 자신을 북북 문질러 몸을 씻을 수는 있지만 여전히 제의적으로는 부정하다. 제의적 부정은 주로 인간의 신체적인 상태가 원인이었다. 또 제의적 부정은 죄를 제거하기 위한 제사의식에 사용된 짐승과의 접촉이 원인일 수도 있었다(레 16: 21, 26). (137.3)
 예를 들어 동물의 주검이나 시체와의 접촉(레 11:24~28; 민 19), 문둥병(레 13-14), 생식기의 유출(레 12; 15; 민 23:10~11)이 우리를 오염시켰다면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문둥병이나 유출이 치료되었더라도 적절한 제사의식을 통해 정결케 될 때까지 제의적으로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137.4)
 제의적 부정이 보통의 신체적인 더러움이 아니라는 것은 씻는 것만으로 제의적 부정을 정결케 못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즉 물리적으로 깨끗케 한 시체조차도 제물로는 부정했으며 남녀의 동침같은 사소한 제의적 부정에서 정결케 되려면 저녁까지 기다리기만하면 되었다(레 15:18)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녁까지 기다리는 것만으로 신체가 저절로 청결하게 되지는 않는다. (137.5)
 최근에 제의적 부정함이 무엇과 유사한가에 관한 나의 최고의 실례는 내 어린 시절에서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자 아이들은 “세균들”라고 부르는 전염성이 있는 것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여자 아이들과 떨어져 있기를 원했다. “세균들”는 문자적으로 “이”를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가 있다는 것이 문자적으로 신체적인 더러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 반의 여자아이들 가운데 이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였고, 남자 아이들은 스스로 여자 아이들과 거리를 둠으로 자신의 남성 이미지를 보호하기를 원했었다. (138.1)
 제의적 부정처럼 ‘세균들’는 본성에 있어 개념적인 것이다. 개념은 사람이나 사물의 물리적 본성들이나 상태들를 바탕으로 분류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세균들’는 어리석음의 표출이었고 사춘기가 되면서 없어졌다. 그러나 제의적 부정은 성숙한 사람들에게 심오한 원칙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것이었다. (138.2)
 성경에서 제의적 부정함에 대한 경우를 다루는 구절들을 서로 비교하므로(레 11~15; 민 19) 다양한 부정들에서 하나의 공통분모를 얻는다. 부정함들 모두가 주위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은 특별히 죽은 시체와의 접촉이나, 피부병의 부패나, 생식기로부터 피나 생명의 씨앗(정자 또는 난자)의 유출를 통해 그들의 죽음의 운명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138.3)
 이스라엘의 정결제도는 성소와 성소에 관련된 거룩함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애굽인들이 행했던 것처럼 죽은 자를 숭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138.4)
 애굽에서 죽은 사람이 거의 거룩한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무덤은 사원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죽은 사람은 부정한 것에 불과했고(레 21:14; 11; 민 6:6~17; 19:1~22) 부정함은 거룩한 것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39.1)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와 죄가 제의적 부정의 원인이었을지라도 제의적 부정 자체가 죄는 아니었다(롬 6:23). 또한 몇몇 경우에 월경(레 15:19)이나 몽정(신 23:10~11) 같은 제의적 부정들의 원인은 일상적이고 자기도 모르는 몸의 기능들 때문이었다. 이런 것들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139.2)
 시체와의 접촉 같은 몇몇의 제의적 부정은 항상 피할 수 있었다(민 6:9에는 예외가 있다). 그러나 부정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그들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제사장들은 그들이 특별히 거룩했기 때문에 제한되어졌다(레 21:14, 10~11). 그런 제한을 어기는 것은 제의적 부정함이 죄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므로 죄가 되었다. (139.3)
 제의적 부정함은 죽음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생명을 가리켰다. 이 의식들은 몸을 씻는 의식과 속죄제를 포함했다. (1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