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구절은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과 내재성(immanence)을 섞어서 짜놓았다. 하나님은 가깝고도 먼 분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육신과 친밀함에다 그분의 주권, 공의와 위엄을 짝지어 놓았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멀리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까이 계신 하나님)라고 기도하신 것의 의미이다(마 6:9). (238.3)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 또한 현재 있기도 하고 미래의 것이기도 하며, 실존적인 동시에 우주적이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중에” 있다고(눅 17:21) 하신 직후에 예수는 덧붙여서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춰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4)고 말씀하셨다. (238.4)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는 말은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계시는 요한이 아직 엎드려 경배하는 동안에 그에게 임하였다(계 19:11). 그 순간에 그 계시는 하나님이 오시는 절정의 장면에 도달한 것이다. (238.5)
 아마겟돈-제2부
 전형적인 히브리 방식으로 선지자는 승리의 이상으로부터 거기까지 이르러온 사건들로 되돌 아간다.11 그 기사의 옷에 묻은 선혈(鮮血)은(계 19:13) 그가 그 칼을 사용했음을 보여 주며 우리를 둘째 인의 장면으로 데려간다. 압제자들의 피는 순교자들의 피에 대한 보상으로 뿌려진다(계 6:3, 4). 백마의 기사는 성도에게 싸움을 걸었던 사람들과 싸운다. 칼은 칼로 통한다. (239.1)
 “땅의 임금들”이 그 거룩한 전사를 대항하여 모이는 것은(계 19:19) 이와 비슷하게 온 천하 임금들이 도적같이 오시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므깃돈의 산에 모였던 것을 가리킨다(계 16:14~16). 본 구절은 여섯째 잔의 장면과 다수의 공통되는 주제들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일한 아마겟돈의 전투이다. (239.2)
 계시록은 그 전투의 상세한 부분은 설명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결말을 알려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이 그의 원수들에게 완전히 승리하신 것이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이제 다른 모든 세력들과 결탁한다. 17장18장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불완전한 기사(記事) 였다. 우리는 바벨의 패배와 그에 이어지는 땅의 임금들의 파멸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 왕들의 최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239.3)
 이제 천사는 그 이야기의 결말을 짓는다. 그는 바벨과 그것의 동맹, 거짓 선지자의 패배를 상기시킨다(계 19:20; 참조 17:16; 단 7:11). 그 앞에 서술된 이야기(계 17~18장)에서는 거짓 선지자는 언 급하지도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양(兩) 세력의 몰락을 목격한다.

  (239.4)
 다른 사람들, 즉 정치권력들을 말하는 “땅의 임금들”“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는다(계 19:21). 그들이 받는 형벌은 짐승들이 당하는 것과 다르다. 검이 “땅의 임금들”을 공격한다. 하나님은 각 세력을 그들이 속한 영역에 맞추어 처리한다. 하나님—심판자의 우주적인 권능은 종교적인 세력들을 소멸시키고, 만군의 하나님의 군사적인 세력은 정치적인 세력들을 정복한다. (239.5)
 그 치명적인 무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창 1:3: 요 1:1~3), 이제는 그것으로 세상을 멸망시키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기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한다.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고] ∙∙∙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었다]”(벧후 3:5~7). (240.1)
 히브리어에서 “말씀”은 단순히 소리들을 조합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다바르(davar, 말씀) 에는 “역사”,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말씀은 영혼, 또는 인격의 표현이다. 히브리서에 의하 면 “하나님이 ∙∙∙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1, 2). (240.2)
 파루시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거리낌 없이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사 33:20; 참조 딤전 6:16). 그들은 변하든지, 아니면 죽는다. 하나님의 오심은 변화(고전 15:51, 52) 또는 죽음을 수반한다. (240.3)
 사람을 잡아먹는 잔치
 “땅의 임금들”에게 파루시아는 난폭한 죽음을 초래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나님은 형벌의 직접적인 동인(動因)이 된다. 사실상 그 장면에는 하나님만 홀로 남는다. 이때까지 심판은 상호성의 원칙을 따라 일어났고, 인간의 조건에 내재되어 있는 요인들에 따라서 작동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이 직접 행사한다.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는다(계 19:21). 그리고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운다(21절). (240.4)
 바벨론도 동일한 방법으로 최후를 맞았다. 열 뿔과 짐승은 그 살을 먹었다(계 17:16). 이제는 그들의 차례가 왔다. 이 사건은 에스겔의 이상과 유사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히브리 선지자는 새들과 들의 모든 짐승들을 모았었는데, 요한의 이상은 새들만을 언급한다. 에스겔에서는 왕들, 용사들, 말들과 군사들로 그 학살이 한정된다(겔 39:17~20). 하지만 계시록의 이상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그 희생자의 목록에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계 19:18)가 더해진다. 그것은 총체적인 멸망이다. (240.5)
 공교롭게도 땅의 임금들을 먹어치우는 이 “사람들을 먹는” 잔치는 셋째 인에 나오는 영적인 기근을 반향(反響)한다(계 6:5, 6). 동시에, 그 사건을 묘사하는 데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데이 프논[deipnon], 식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계 19:17: 참조 19:9). 두 잔치 사이에 나타나는 대칭은 구원의 두 가지 성격을 지적한다. 그것은 구원하기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한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 하객들을 기쁨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준다. 아마겟돈의 잔치는 모질고 절대적인 애곡의 분위기에서 그 손님들을 삼켜버린다. 그들의 뼈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성대 하게 장사를 치르는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되지도 못한다. 독수리들이 그들을 완전히 다 먹어치운다. “땅의 임금들”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240.6)
 마귀와 공허(空虛)
 이렇게 죽음으로 황폐하게 되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최후의 원수를 사로잡는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처럼 20장 2절에서도 그를 “용, 옛 뱀, 마귀요 사탄” 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세 원수(계 16:13) 중에 오로지 용만 살아 남았다. 다른 둘, 바다 짐승과 땅 짐승(거짓 선지자)은 모두 멸망을 당하였고, 그들과 함께 땅의 마지막 임금들도 그렇게 되었다.

  (242.1)
 떨어진 별, 곧 땅의 임금에게 잃었던 “무저갱의 열쇠”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돌려 주어진다(계 20:1). 이 구절은 창조 이전 땅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계시록에 사용된 그리스어 낱말은 창세기 1장 2절의 히브리어 낱말 트홈(무저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귀는 그곳에 던져진다. (242.2)
 땅은 공허하고 혼돈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하나님도 없고 생명도 없다. 하늘은 마귀를 황폐하고 공허한 데로 내쫓았으며, 그것은 뱀을 흙을 먹는 처지에 떨어뜨린 것과 마찬가지이다(창 3:14). 그에게는 미혹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창세기의 상황과는 달리 거기는 미혹할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악은 무력화된다. (2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