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부 서언(緖言) (1:1-18) 제 1 장 서언: 예수께서 지상에 내려오심 (1:1-18)
 서언의 세부 사항
 요한복음 1:1-3창세기 1장의 창조 사화를 상기시키며 이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태초에”라는 구절은 헬라어로 된 구약의 첫 단어(창 1:1)를 반복하고 있다. 3절의 “지은 바 되었으니”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창조를 위한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1:14)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 아무도 그의 논점의 전체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요한은 창조된 어떤 존재나 사물도 말씀의 행위 없이 지은 바 될 수 없었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3절). 말씀은 창조된 모든 것의 근원이다. (54.1)
 요한복음 1:1은 아마도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장 분명한 주장일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개의 간략하지만 심오한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는 그 중의 하나가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다루어질 때 발생하게 될 오해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Jameison, Fausset, and Brown, 1026). (54.2)
 태초에, 즉 창조가 일어났을 때(1:1; 창 1:1), 말씀은 이미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씀의 영원성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아버지께서 영원하시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러 예수를 낳으셨다는 의미에서). 둘째 구절(“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은 그가 영원부터 아버지와 구별되어 있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과 밀접한 동행자였다(1:1, 2, 18). 셋째 진술(“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은 이것이 열등한 한 분에 대한 우월한 한 분의 친교가 아닌, 동등한 친교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을 충만히 공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러한 것처럼 말씀도 그러했다(1절).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들”(“Gods”)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Godhead)의 인격체들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있는 동시에 신성 안에는 충만하고 완전한 연합이 있다. (54.3)
 창조시 우주에 빛과 생명을 가져왔던 바로 그 말씀이, 비록 어두움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생명과 빛으로 그것을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4, 5절). 예수 없이는 비도 햇빛도 공기도 생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영원한 분, 거룩한 분, 만물의 창조자, 우주의 유지자가 그분을 기다렸다는 “자기 백성들”조차 몰라보고 무시하고 거절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9-11절). 서언의 10절과 11절은 이 복음서의 본론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예수께서 거절당하실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5:16-18; 7:32, 45-52; 8:48-59; 9:13-34; 10:30-39; 11:45-57; 12:10, 11 등). (54.4)
 그러나 이 장면이 전적으로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서언의 교차대구 구조의 중심에는 그를 “영접하고”(헬라어 부정과거—과거의 한 시점) 그의 이름을 “믿는”(헬라어 현재형)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는 약속이 있다(12절). 이 절은 하나님과 바르게 되는 데는 두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접의 시발점이 있다. 둘째로, 사람이 계속해서 믿으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참고 6:35-59; 15:1-7). 여기에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once—saved—always—saved”)라는 의미는 전혀 없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55.1)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새로 남”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1:13)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부모로부터 자연적으로 물려받는 “혈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반적인 성 행위, 즉 “육정(肉情)”이나, 특히 남성이 주도권을 잡고 하는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원래의 창조의 행위(1-3절)만큼이나 이적(異蹟)이다. 원래의 창조의 행위가 말씀이신 분의 돌보시는 계속적인 이적에 의해 유지되어야 했던 것처럼(4, 5절),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와 맺는 관계는 영적인 생명의 지속적인 이적이 생기게 하는 지속적인 믿음(12절)을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55.2)
 서언은 14절로부터 18절에서 감동적인 결론으로 옮아간다. 여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성한 말씀의 지상에서의 신분이 묘사되어 있다(1-5, 9-13절을 보라). 비록 말씀은 언제나 “계셨지만”(1절), 14절에서 [육신이] “되셨다”(“became”)고 했는데, 이 말은 3절창세기 1:1에서 원래의 창조를 묘사할 때 사용된 것과 똑같은 용어이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상태로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상태로 오셨다(1, 2, 14절). 비록 그가 “하나님”이셨지만, 그는 “육신이 되셨다”(1, 14절). 이와 같이 단순한 언어로 요한은 말씀의 신성한/인간적 본질, 즉 신학자들이 “기독론”(“Christology”)이라고 부르는 것의 전 영역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56.1)
 말씀의 본질
요한복음 1:1, 2 요한복음 1:14
영원함 현세적임
“계시니라”(“was”) “되어”(“became”)
“하나님과 함께”(“with God”) “우리 가운데”(“among us”)
“하나님이시니라”(“was God”) “육신이 되어”(“became flesh”)
(56.2)
 또한 요한복음 1:14-18은 유식한 독자들에게 구약의 성소를 회상시켜 주는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그를 따랐던 요한과 다른 제자들]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14절)고 했다. 여기서 “거하시니”는 헬라어로 “장막을 치니”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광야에 있던 성막(tabernacle)을 상기시키는 말이다(출 25:8, 9). 사실 이 말은 “성막을 치니”(“tabernacled”)로 번역될 수도 있다. 제자들이 본 예수의 영광은 그 성막 안의 셰키나(Shekinah)의 영광을 상기시켜 준다(출 40:34, 35).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히브리어로 거하다(shakan)라는 단어는 성소에 있던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일컫는 셰키나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사고에서 “영광”“장막”은 하나이다! (56.3)
 구약 성소에 대한 이와 같은 암시는 16절“은혜 위에 은혜러라”(charin anti charitos-“한 가지 축복 다음에 또 다른 축복”[“one blessing after another,” 「새국제역」])을 설명해 준다. 구약의 성소는 은혜와 축복의 놀라운 원천이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구약의 성소는 축복의 더 큰 원천에 의해 가려져 버리게 되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육신 속에 거하시고, “우리가” 전에 휘장 뒤에 숨겨졌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이 그러했던 것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57.1)
 그와 같은 기별은 17절에서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예수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자였던 모세가 제공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나은 계시를 제공한다. “율법”은 모세에 의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지은 바 되었다”[“were created”]—3, 14절). 모세는 그의 백성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들을 언약의 땅으로 인도한 것은 여호수아였다. 그처럼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었으나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예수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이다(12, 13절). (57.2)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품속에”(“at the . . . side,” “... 곁에”)라는 구절은 이 복음서에 두 번—1:18 (헬라어: 에이스 톤 콜폰[eis ton kolpon])과 13:23 (헬라어: 엔 토 콜포[en tōi kolpōi], “옆에 기대는”)—나타난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곁에 계셨던 것처럼 이 책을 기록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곁에 기대어 있었다. 이 헬라어 구절들 사이의 연관성은 명확하면서도 신중히 고려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교묘한 방식으로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최대의 계시임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사랑받는 제자인 자신도 예수에 대한 최대의 계시를 제공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애정 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제자였다(화잇, 사도 행적, 539-545).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온 유일한 제자였으므로, 예수를 대신하여 그의 모친 마리아를 돌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19:25-27). 그래서 그의 복음서는 예수의 계시로서 독특하며 뛰어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57.3)
 서언의 주요 주제 요약
 예수는 누구인가?
 서언에서 예수의 지상 생애는, 이 복음서의 본론에서 묘사된 것처럼 영원과 연관하여 설정되어 있다. 이 땅 위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자라나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봉사하다가 결국 압제의 권력에 의해 처형당했던 바로 그 예수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드러났다. 더욱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그가 영원한 과거 내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요 그분의 동반자였다는 사실이다. (58.1)
 서언은 지체 없이 이 복음서의 일차적 목적이 독자들에게 외관상으로는 평범한 한 인간이 그의 육신 속에 하나님 자신의 신성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려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서언이 없었다면, 그래서 먼저 이 책과 만남으로 이미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이 복음서의 주요 본문 속에 나타난 예수의 진술들의 다수가 우스꽝스럽고 자기 과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주장들 중에 감탄스러운 것 몇 개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14:9),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 서언은 독자들이 예수께서 이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20:31). (58.2)
 우월한 계시
 만약 예수가 요한복음의 서언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라면, 그는 이 세상이 보아 온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여야 한다(히 1:1, 2). 그는 천연계나 세상의 큰 종교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침례자 요한, 모세, 그리고 구약의 성소에 의해 제공된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요한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그리스도에 관한 기별에 대해 몇 가지 선택의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요한복음의 입장은, 침례자 요한, 모세, 그리고 구약의 성소는 모두 그 자체의 위치에는 좋은 것이었지만, 예수와 비교할 때, 그것들은 단지 “쇠하기에”(“decrease,” 3:30, 「제임스왕역」) 안성맞춤이다. (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