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부 서언(緖言) (1:1-18) 제 1 장 서언: 예수께서 지상에 내려오심 (1:1-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말씀이 ... 계셨으니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말씀은... 이시니라 하나님
태초에 그는... 계셨다 하나님과 함께
(48.2)
 서언의 찬미와 같은 특성은 4절5절“계단형 대구법”(“stair- step parallelism”)에서 더욱 확실히 나타난다: (48.3)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빛어둠 속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48.4)
 한편 6-8절은 산문 형태로 되돌아가서 침례자 요한과 예수를 대조시키고 있다. 서언에 흐르는 찬미의 정확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1-5, 9-11, 14, 그리고 16-18절은 명백한 운문체인 반면에, 다른 구절들은 찬미를 이 복음서의 주요 주제들인 침례자 요한의 역할(1:6-8, 15; 또한 1:19-36; 3:22-30; 5:33-35도 보라)과 그리스도인 경험에서 믿는 일의 중요성(1:12, 13; 또한 2:11; 3:16; 4:48, 53도 보라)과 묶어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신약에 나타나는 유일한 찬미는 아니다. 아마도 적어도 다른 세 곳, 즉 빌립보서 2:6-11, 골로새서 1:15-20, 그리고 디모데전서 3:16이 여기 사용된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48.5)
 이와 같은 신약 찬미의 발견은 매우 실재적인 적용을 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성경 시대와 자신이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서, 그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와는 다르고, 하나님이 오늘날 역사하시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찬미를 부르고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다. 그들도 또한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고뇌했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신이 익숙한 찬미 가사를 사용하면 그들이 자신의 기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49.1)
 매우 조심스럽게 구성된 통일성
 요한이 사용한 언어의 출처에 상관없이 현재 있는 그대로 1-18절은 문학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완성된 서언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어떻게 만나시는지에 대한 두 번째 예증을 제공해 주고 있다. 히브리적 사고의 공통된 문학 형태는 교차대구법(chiasm [카이애즘], 헬라어 문자 X [chi, ]에서 유래됨)이다. 사람들이 어떤 논리를 전개할 때,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역순(逆順)으로 표현하여 처음 시작한 논점으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방법이 교차대구법이다. 첫 논점과 마지막 논점이 대구(對句) 또는 평행(平行)을 이루는 것이다. 두 번째 논점은 끝에서 두 번째 논점과 대구를 이루고, 다음도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49.2)
 서언은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말씀으로 시작하며 마치고 있다(1, 18절). 그 다음은 물질 창조에 있어 말씀의 역할(3절)과 은혜와 진리로 이르러온 재창조에 있어 그분의 역할(17절)을 비교∙대조시키고 있다. 침례자 요한의 역할은 꼭 같은 대응 위치에 두 번 언급되어 있다(6-8, 15절). 그러므로 전체 서언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교대 교차대구적인 구조가 나타난다: (49.3)
 A.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 (1, 2절)

   B. 창조에서의 그분의 역할 (3절)

      C. 생명과 빛의 선물 (4, 5절)

         D. 침례자 요한의 증거 (6-8절)

            E. 말씀이 세상에 들어옴 (9-11절)

               F.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됨 (12, 13절)

            E. 말씀이 육신이 됨 (14절)

         D. 침례자 요한의 증거 (15절)

      C. 은혜의 선물 (16절)

   B. 재창조에서의 그분의 역할 (17절)

 A.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말씀 (18절)

 (50.1)
 위에 나타난 A-F-A의 화살 형태는 X 형태의 교차대구법을 보여준다. 사상의 진전이 서두로부터 중심에 있는 절정을 향해 나아가다가 그 다음에는 역순으로 다시 서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자신과 자기 독자들에게 익숙한 히브리적 논리 형태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50.2)
 교차대구법의 핵심점이 대개 중심에 오므로, 서언의 중심 주제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 12절13절에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말씀이 세상에 오심의 초점은 새 창조, 즉 하나님의 자녀의 창조인 것이다. 이 주제는 복음서의 목적 진술에서 다른 용어로 표현되었는데, 이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20:30, 31). (50.3)
 “말씀”의 배경
 이 복음서를 여는 예수의 칭호는, 하나님이 요한의 청중이 있던 곳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하여 요한의 경험과 배경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세 번째 예증이다. 요한이 헬라어를 말하는 독자에게 “메시야 예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접근했다면 “예수? 그게 뭐야?”라고 말하며, 그 정보에 대해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요한이 인자(人子, Son of Man) 예수에 대해 이야기했더라면, 그는 대체로 유대인들의 흥미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요한은 헬라인 지성에게, 그리고 헬라 철학의 이념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힘있게 전달되는 예수의 칭호를 선택했다. 요한은 예수를 “그 말씀”(“the Word”)이라고 불렀다. (51.1)
 헬라어로 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logos])이 창조는 하지만 인격체는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시 33:6, 9).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담화의 권능과 창조력의 표현으로 봐야지 창조에 조력한 인격체로 봐서는 안 된다. (51.2)
 반면에 잠언 8:22-31에 보면, 태초부터 하나님 옆에 서서 창조에 능동적인 행위자(active agent)였던 인격체가 있었는데, 그 인격체는 “말씀”(“Word”)이 아니라 “지혜”(“Wisdom,” 헬라어 소피아[sophia]—여성적 표현)라고 불리고 있다. 그래서 구약에는 요한이 사용한 “말씀”(“the Word”)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개념들은 있지만, 그것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요한이 사용한 예수의 칭호와 좀더 정확히 평행을 이루는 것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51.3)
 요한이 사용한 “말씀”은 바로 헬라 철학의 영역에서 그 해석을 찾을 수가 있다. 위대한 헬라 철학자 플라톤(Plato, 400 B.C.)은 하나님[神]에 대한 매우 고상한 관념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실체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관념을 가졌다. (플라톤의 생각대로) 위대한 신이 순수한 정신(pure mind)이고, 물질(matter)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면, 어떻게 그 위대한 신이 물질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그의 손을 더럽힐” 수 있었겠는가? 플라톤은 “말씀”이라고 부르는 인격체로 그 해답을 구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대화를 할 만큼 위대하기도 하지만 물질적인 것들의 혼란 속에 함께할 만큼 겸손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는 위대한 신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있는 중간 신(an intermediate God)으로 활동했다. 후대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스토아 학파(Stoics)와 같은 헬라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생각을 확대하여 말씀을 영원한 존재로, 우주의 창조자요 유지자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이성과 지성의 근원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이 흡사 예수에 대한 신약의 개념처럼 들린다면, 우리는 엘렌 G. 화잇이 이와 같은 위대한 이방 사상가들에게 “영감의 영”이 부여되었다고 선언한 것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화잇, 시대의 소망, 33). (51.4)
 예수께서 지상 생애를 사시던 무렵의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은 헬라 철학을 유대인의 구미에 맞게 하고, 구약을 헬라인들의 구미에 맞게 만드는 일을 추구하여, 결국 유대교와 헬라 철학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대의 지혜 개념과 헬라의 말씀 개념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사람은 필론이었다. 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유대인의 말씀-인격체(Word-personality) 개념인데,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씀(Word)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주요 배경을 제공하였다. (52.1)
 필론에게 있어서 말씀은 “제2의 하나님”(“second God”),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하나님과 함께하는 중재자, 율법의 시여자(施與者), 창조의 중개자, 계시의 중개자, 우주의 유지자,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필론은 그분을 하나님의 처음 난 자, 그의 장자,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둘째 아담이라 불렀다. 신약에 대해 뭔가를 아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필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류가 예수와 같은 인격체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를 “말씀”이라 불렀을 때,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그 용어를 그들이 예수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52.2)
 본 저자는 필론이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의 이야기를 플라톤의 표현으로 다시 쓰도록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요한이 아레오바고(Mars Hill)에서 바울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전술(戰術)을 사용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7:22-31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고 위하는 신”(23절)에 대한 설교를 통해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접근하였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섬기는 이 말씀이 바로 내 책의 주제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분을 더 잘 이해하고 섬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헬라 독자들은 요한복음의 예수를 숙고하도록 이끌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신다. 그 결과, 영감된 저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표현을 자신의 청중의 필요에 기꺼이 맞추어 왔다. 영감을 받은 것은 기별의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화잇, 가려뽑은 기별, 1:21, 22). (53.1)
 예수를 묘사하기 위해 요한이 “말씀”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먼저 사람들과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사람들이 우리가 전한 복음을 잘 이해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세속의 사람들은 보통 복음을 거절한 적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도처에 교회들과 텔레비젼 전도자들, 자동차 범퍼에 붙은 “예수를 사랑하면 경적을 울리세요”라는 스티커들에 묻혀 살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질문이 무엇인지 모를 때, “예수가 유일한 해답이다”라는 주장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요한의 “말씀 전략”(“Word strategy”)은, 우리가 이 시대에 세속의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나누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오 리를 가자고 할 때, 십 리를 갈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때에만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다(고전 9:19, 22; Paulien, Present Truth in the Real World, 17-42). (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