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하신 성령님 제 8장 재림교회의 성령 이해 III. 성령 교리의 역사에서 얻는 교훈
 20세기는 삼위일체 교리의 르네상스라고 불리어진다. 오늘날 삼위일체 신학은 하나님 안의 신비한 관계에 대한 탐구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진술로써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된 구체적인 교리로 이해하고자 하는 추세이다.99) 다시 말해, 삼위일체 신학의 실제적인 의미를 고찰하면서 그 윤리적 영역에서의 적절성을 부여하고자 시도하고 있다.100) 그 교리는 “현대의 개인주의에 도전이 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호 의존과 참여라는 복합적인 그물망으로서의 사회를 보도록 가르치고 있다.”101) (223.2)
 보프는 “사회적 불공평이 존재하는 한, 삼위일체 신앙은 모든 불의에 대한 비판과 근본적 변화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될 것”102)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주제를 삼위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사고가 교회와 세상에서의 교회 선교에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103) 그래서 그렌즈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적이라는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기독교적 윤리를 위한 토대가 된다”104)고 하였다. 그러면 삼위일체 담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윤리적 의미는 무엇인가? (224.1)
 1)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권고함 (224.2)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과 사귐 안에서 위격 중심의 공동체이다. 위격 중심의 공동체라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진술은 영원토록 하나님은 사랑의 공동체임을 가리킨다.105) (224.3)
 리차드(Richard of St. Victor)는 하나님의 통일성(unity)은 상호간의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 안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그 상호성은 사랑하는 존재들 간의 동등성을 요구하는데, 여기에는, 본성(신성), 존재(영원한), 그리고 본질의 동등성이 포함된다.106) 리차드는 말하기를, 자아 사랑은 자비로운 것이 아니고, 두 위격 간의 사랑은 배타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삼위이어야만 한다고 하였다.107) (225.1)
 몰트만도 하나님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은 삼위이어야만 하는데, 이는 “사랑은 어떤 고독한 주체에 의해서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108)이라고 하였다. 에릭슨(Millard J. Erickson) “사랑이 사랑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고 언급한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단지 자아도취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수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109) (225.2)
 하나님이 본질상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공동체라면, 하나님은 인간 사회 역시 사랑에 기초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과 기계문명 속에서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에 빠져 인간 소외와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치유하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226.1)
 몰트만도 “삼위일체론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110)고 하였다.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은 최고의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귐 가운데 있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to be)은 곧 사랑한다는 것(to love)이다.111)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한다.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226.2)
 이처럼 삼위 하나님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일체를 이루신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다. 하지만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통해 하나가 되신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에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를 가르친다. (226.3)
 인간의 많은 비극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한데서 시작된다. 백인들이 흑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흑인을 차별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비극이 발생했다. 이 외에도 유대인 학살, 인종청소, 각종 테러와 전쟁 등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227.1)
 유대인 철학자 에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철학’을 전개했는데, 인간이 타자를 자신과 획일화하려는 데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자기와 구별되는 절대적 존재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2)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에 나타난 깊은 의미에 공감한 포튜(Stavros S. Fotiou)는 삼위 하나님의 위격 중심의 존재론이 현대 사회의 궁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13) 그러므로 타인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적인 사랑을 구현할 때 현대 사회의 수많은 비극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227.2)
 2) 관계적 삶을 추구해야 함 (227.3)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적인 사랑 안에서 사귐과 교제를 나누는 관계적인 존재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정체성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227.4)
 오늘날 삼위일체 담론의 중심주제는 관계성(relationality)이며, 삼위일체 해설에 적합한 개념은 관계 안에 있는 위격이다(person-in-relationship).114) 그래서 그렌즈(Stanley J. Grenz)는 “삼위일체 신학에서, 관계성은 20세기 말에 두드러진 주제가 되었다”115)고 하였다.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도 말하기를, “실로 삼위일체 신학은 탁월한 관계성의 신학이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본질’이 관계적이며, 타자를 향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하나님께서 자유, 사랑, 인식의 연합 안에 연합된 다양한 위격들로 존재한다”116)고 주장한다. (228.1)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가 헬라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인데, 이 말은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 “상호 순환(mutual circulation),” “상호 침투(mutual penetration)”를 뜻한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이 상호 초대와 내주 행위를 통해서 다른 위격 안에 관계하고 계심을 가리킨다(요 10:30; 14:9, 11, 20; 17:21).117) (228.2)
 삼위 하나님과 같이 인간 사회도 역동적인 상호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228.3)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삼위일체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신성의 위격들 상호 간의 관계를 인간 상호 간의 관계의 모델로 본받도록 요청한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자기경험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그물 속에 얽혀 있으며 이 그물에 의존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뢰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며, 반대로 자기 신뢰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118) (229.1)
 몰트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있다”(Ich bin, weil Du bist; Du bist, weil ich bin). 그 이유는 우리는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의존하며,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있는 존재(Sein-in-Beziehung)이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은 오직 상호주체성(Intersubjektivitat) 안에서만 가능하다.”119) 이와 같이 인간은 타인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고,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내가 진정한 ‘나’가 되는 길은 오직 타인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이다.120) (229.2)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있는 상호 내주의 관계성을 실현해야 한다. 그 삶의 방식은 타인의 존재와 삶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한채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다. (229.3)
 왜냐하면 개인주의는 결국에 사회와 인류를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삶은 개인의 차이와 다양성을 무시한 채 집단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집단주의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전체가 개체를 지배하는 전체주의는 언제나 억압과 지배로 인해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 삶은 현대 사회의 존재론적 양극성의 삶의 폐해를 해결하는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2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