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의는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추구하는 삶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일치와 연합을 모색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세 위격이라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다양성은 결코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분열이나 대립을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 위격의 다양성 가운데 온전히 하나 됨을 유지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조화를 이루는 비결은 삼위 하나님이 상호 무아적인 사랑 가운데서 자신보다 다른 존재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230.2)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빌 2:5~8)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복종하신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아버지를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요 17). 이러한 성자의 모습 역시 무아의 사랑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부 역시 성자와 성령을 의지하고 높인다(요 14:26; 15:26; 5:22, 27).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무아적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0.3)
이렇게 삼위 하나님은 세 위격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안에는 완전한 통일성의 조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31.1)
현대 사회의 수많은 비극은 다양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한 마음이 되지 않고 서로간에 다양성만 주장하면서 반목하고 대립할 때 그 공동체는 망하게 된다. 삼위일체 신앙은 우리에게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통일성과 연합을 깨뜨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더욱 견고한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231.2)
이 점에서 삼위일체 교의는 우리에게 다양성 안에서 연합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서로를 섬기고 희생하는 삼위 하나님의 무아의 사랑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창 2:24; 엡 5:22~33). (231.3)
또한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렷이니”(고전 12:12~14). (231.4)
이와 같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성 안에서 연합을 추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은 우리의 사회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 (232.1)
4) 선교적 공동체인 교회 사명을 감당해야 함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서로를 증거하고(mutual witness)있다. 성부는 성자를 증거하시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을 증거하시고, 성령은 성자를 증거하신다(요 5:36, 37; 마 11:27; 요 14:26; 15:26). 이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증거하시는 교통과 사귐을 나누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간에는 ‘보내시고 보냄을 받는 친교’가 있다. (232.2)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세상에 보내신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을 따라 교회를 세상에 보내신다. 이러한 삼위 간의 교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선교적’(missional)인 특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특성(ontological feature) 임을 알 수 있다.121)(232.3)
삼위일체 교의를 통해 볼 때,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어진 선교적 공동체이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과 이유가 바로 선교이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에 주신 주님의 지상 명령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마 28:18~20; 막 16:15, 16). (232.4)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적 공동체의 삶을 본받아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사회, 나아가 국가와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233.1)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와 세상의 구성원들을 사랑으로 인정하고, 아끼고, 존중하며 섬겨야 한다. 그리함으로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며(마 5:13-16),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학은 우리에게 선교적 공동체의 사명을 가르쳐준다. 그 신학은 개인 영혼 구원과 사회봉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을 제시해 준다. (233.2)
포스트모던니즘과 종교 다원주의가 확산되는 21세기 시대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성패는 기독교 복음의 적절성과 역동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속 계시의 핵심”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기독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233.3)
지난 천 수백 년 동안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인의 구원과 삶과는 무관한 비실제적인 교리로 신학적인 논의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삼위일체 교리는 다시 신학의 중심으로 부상하였으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공동체라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부각되었다. (233.4)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적인 존재 방식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윤리적인 의미를 제공한다. 삼위 하나님의 상호 존중과 수용의 삶은 우리에게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가르침으로써, 현대 사회의 수많은 비극을 해결하는 사회적 비전을 제공한다. 또한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의 존재 방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중요성과 의존성을 깨우쳐 줌으로써 “상호주체성” 안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하게 해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내주 관계적 삶은 우리에게 개인주의의 위험과 전체주의의 폐해를 막는 방안을 제공한다. (234.1)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무아적 사랑의 삶은 우리에게 다양성 안에서의 조화와 연합을 이루는 비결을 제시한다. 이것은 다양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가정과 교회, 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증거의 삶과 ‘보내고 보냄을 받는 친교’의 삶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선교적 사명을 일깨워준다. (234.2)
삼위 하나님의 세 위격이 서로를 증거하고, 보내고 보냄을 받듯이, 우리는 가정과 직장,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해야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학은 단순한 사변적, 이론적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죄악과 불의를 개혁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창조적 변혁의 능력이 되어야 한다. (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