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침략자들을 몰아내는 데에 그들의 시민군을 이용한 후에는 유럽의 모든 국가에게 그들의 혁명을 퍼뜨리기 위하여 시민군을 이용했다. 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인 자크-피에르 브리소(Jacques - Pierre Brissot)는 “온 유럽이 타오르지 않는 한 우리는 편히 쉴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곧 이어 프랑스는 거의 유럽의 모든 나라와 더불어 전쟁을 해야 했다. 프랑스는 23 년간 전쟁을 치렀다. 그동안 얼마나 숱한 폭력이 저질러졌겠으며 얼마나 숱한 인명이 살상되었을 것인가? (279.5)
 나폴레옹은 23년간에 걸친 전쟁의 대부분에서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점령한 나라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 후에는 그의 맹방이었던 러시아를 향하여 칼을 빼들었다. 그는 1812년에 51만의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향했다. 이 군대는 유럽 역사상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대군이었다. 그러나, 질병과 패배로 병사들의 수효는 점차 줄어들었고, 목적지에 당도한 병사들의 수효는 출발 당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겨우 텅빈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그 삼림의 도시는 곧 불에 타 버렸다. 겨울이 닥쳐오자 이 군대는 황량한 사막을 지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굶주리고 헐벗은 데다 코삭크 군대들의 추격에 쫓긴 이 군대는, 포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교량 하나를 건너는데도 25,000명의 병사들을 잃어야 했다. 그 거대했던 군대는 이제 완전히 궤멸되어 남은 병사가 거의 없었다. 그때 그는 재빨리 썰매를 집어 타고 급거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그는 다시 새로운 병력을 끌어 모았으나 그 병력도 잇따른 다른 전투들을 통해서 하루 5천, 1만 또는 2만 명씩 궤멸되었다.21 (279.6)
 

단두대에 의한 죽음. 프랑스는 종교 개혁을 거부함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80.1)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며 살상인가. (280.2)
 이에 반하여 이보다 앞서 치러진 미국 독립전쟁은 역시 전쟁이었던 만큼 비극적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동원된 병력은 믿기 어려울 만큼 소규모였다. 조지 워싱턴이, 승패를 결정짓는 요크타운(Yorktown)전투에서 콘왈리스(Conwallis)경의 영국군을 무찔렀을 때 워싱턴 휘하의 병력은 1만 7천 명이 채 못되었고 콘왈리스 경의 영국군은 8천 명에 불과했다.22 (280.3)
 한 역사가가 상기시키고 있듯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모든 전쟁이 용병과 직업 군인들에 의해 치러지고 있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통치하는 임금이 누가 되든지 별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국왕의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서는 백성들이 정부와 자신들을 동일시했다. 레베앙 마세(levee en masse)즉 국민 총동원령은 “근대 유럽의 역사 가운데서 유럽국의 인력을 대거 동원한 최초의 본보기였다. ∙∙∙여기서 국전(國戰)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국민 총동원은 국민 전쟁을 치르는 수단이 되었다. ∙∙∙이로써 유럽은 이제 예전의 유럽이 아니었다.”23 (280.4)
 그렇다. 유럽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은 다른 지역의 국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은 1천 6백만 명의 남녀들이 군복무에 종사했다. 또 소련은 2천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280.5)
 확실히 프랑스 혁명은 우리에게 뚜렷한 영향을 남겼다. 성경 예언이 이 사건을 취급한 것은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280.6)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은 징병 제도, 거대한 국군들, 엄청난 수자에 이르는 살상자들 뿐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또 하나의 현존하는 유산을 남겼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공산주의를 규명하기 위하여, 레닌(Lenin)과 트로츠키(Trotsky)는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전 과정을 세밀히 분석했다.24 그들은 그 같은 과정을 통하여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가르침을 숙지하게 되었다. 그는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도적 소수가 다수 대중을 위해 그 방책을 대중에게 강요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날 소련에는 전체 국민의 5% 만이 집권당인 공산당의 당원이다. 팔머 교수는, “만약 프랑스 혁명이 앞서 발생하지 않았던들 공산주의 운동이 현재와 같은 양상을 결코 띠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25 (281.1)
 존경받는 영국의 역사가인 V. H. H. 그린(Green)은 말하기를 “우리는 아직 프랑스 혁명이 세계 역사의 진행에 끼친 모든 영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수문(水門)을 열어 놓은 결정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우리는 아직도 이 수문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에서 헤엄치고 있으며 이 물결 위로 머리를 쳐들기조차 어려울 때가 적지 않다”고 했다.26 (281.2)
 혁명과 비그리스도교화 운동
 그린 교수의 말은 너무나 적절한 지적이다. 진실로 우리는 프랑스 혁명 이후 또 하나의 후속 추세인 비그리스도교적 무신론의 물결과 더불어 살고 있다. 오늘날은 전체 인류의 4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부의 통치 아래 살고 있다. (281.3)
 이제 우리는 이와 더불어 “두 증인”과 또 이들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살해되는 사건을 취급하게 됐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의 반(反)그리스도교적 태도는 대단히 강렬하였고 이로 인해 진실로 하나의 반그리스도교적 전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81.4)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성 십분의 일”을 프랑스로, 그리고 두 증인을 신·구약 성경으로 해석하고 있다(더 자세한 것은 “관련 문제와 해답”을 참고 하라). (281.5)
 프랑스 혁명의 반(反)그리스도교적인 태도는 긴 세월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1200년 대에 프랑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지휘하에 진보적이었지만 “이단”으로 규정된 알비조 파(派) 신도들(Albigenses)을 공격하여 계획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1500년 대의 개신교 종교 개혁 기간에는 4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 가톨릭 교도들이 프랑스 출신의 제네바 종교 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의 성서 중심적 교리를 신속히 책택했다. 만일 프랑스가 위그노(Huguenots)로 알려진 프랑스 개신교도들에게 충분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던들 프랑스의 역사는 얼마나 크게 달라졌을 것인가! 당분간 “두 증인”은 프랑스에서 기쁘게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간은 길지 못했다. 가톨릭 주교들과 귀족들의 충동을 받은 프랑스의 국왕들은 전후 8차에 걸쳐 위그노 교도들과 내전(內戰)을 치루었다. (281.6)
 두 차례의 위그노 전쟁 중간에 깃든 평화의 기간이었던 1572년 8월 18일에는 프랑스 국왕의 누이와 위그노교도의 한 지도자가 결혼식을 올렸으며, 국왕은 위그노 교도들의 신앙 자유를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톨릭교도이면서 신부의 어머니이기도 한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모후(母后)는 이러한 사태에 격분한 나머지 후에 “바돌로매 성일(聖日)의 대학살”로 알려진 사건을 획책하였다. 결혼식이 거행된지 1 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성 바돌로매 축일의 전날, 종소리를 신호삼아 새벽 2시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대략적인 추산을 따른다 해도 짧은 시간 안에 “파리에서는 1만 8천 명이, 프랑스 전역에서는 그 몇 십 배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학살되었다.27 (281.7)
 이 소식을 가지고 황급히 로마로 달려간 사람에게 프랑스 출신의 한 추기경이 후하게 포상한 사실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게 하고 기념 메달을 제작하게 했다. 로마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 종소리와 교회 성가대의 찬양의 노래(Te Deums), 그리고 거창한 축하 행렬로 대혼잡을 이루었다.28 (282.1)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위그노 측 귀족의 한 사람인 나바르의 앙리(Henry of Navarre)가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가 되었을 때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는 그를 자격 상실자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바르의 앙리는 국왕 앙리 4세로 왕위에 올랐고 곧 이어 국민의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가톨릭 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그때 그는 “파리에서는 미사(mass)라야 통한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1598년에 그 유명한 낭뜨 칙령(Edict of Nantes)을 반포하여 비록 파리, 리용(Lyon) 등 프랑스의 주요 도시로부터 위그노 교도들을 완전히 축출하면서도 그들에게 여러 가지 자유를 법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위그노 교도들에게 신앙 생활이 허용된 지역에서는 위그노 교도들이 공업, 교육, 농업, 상업 등에서 뛰어났으며, 사실상 프랑스의 중류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백만에 육박하였다. (282.2)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자유는 하나씩 철회되었다. 교회가 헐리고 목사들이 추방당했으며 대학들이 폐쇄되었다. 가장 무자비한 조치는 용기병이라 불리는 사납고 야비한 병사들을 위그노 교도들의 가정에 배속시켜 함께 거주하게 한 일이었다. 이 병사들은 위그노 교도들을 국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었으며, 현지의 사제(司祭)들도 이 일을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위그노 교도들에 대하여 온갖 성가신 일들과 외설, 절도, 공갈, 만행, 강간, 살인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282.3)
 1685년 10월 국왕 루이 14세는 도저히 “변경할 수 없다”고 한 “낭트 칙령”을 공식으로 폐기시켰다. 그는 이 칙령에 의하여 모든 위그노 교도들의 법익을 박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떠날 자유까지 빼앗았다. 약 50만 명의 위그노 교도들(아무도 그 정확한 수효를 모른다)이 신앙을 위하여 그들의 가옥과 재산을 빼았겼다. “아무 고생 모르고 자란 사람과 임산부와 노인과 병약자와 어린이들” 이 순례객, 운동 선수, 농부 등으로 변장을 하여 낮에는 숲이나 동굴에 숨어 남의 눈을 피하고 밤에는 그 낯선 길을 걷거나 또는 마차나 배의 석탄 더미와 빈 통 속에 숨어서 자유로운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다행 이었다. 빠져 나가지 못한 사람들과 나가다가 붙잡힌 사람들이 당한 고통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낭트 칙령을 폐기시킨 그 악명 높은 조치로 말미암아 위그노 교도들은 “프랑스 혁명의 전야까지 박해와 순교와 추방을 강요받았으며 따라서 수천 명의 신자들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들을 받아들인 영국, 화란, 프러시아, 미국 등지에는 지속적인 이익으로 기여했으며” 이들을 추방한 프랑스에게는 영원한 손실로 작용했다.30 (2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