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1장 7, 8절에 말하기를, 베옷을 입은 두 증인이 1, 260년 동안 예언하기를 마칠 때 즉 “저희〔두 증인〕가 그 증거를 마칠 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니라”고 했다. (297.3)
 우리는 이 “큰 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 내야 한다. 어떤 독자들은 “큰 성”2절“거룩한 성”과 동일시하여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루살렘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서는 “거룩한 성”을 고대 예루살렘 도성이 아니라 새예루살렘과 일치시키고 있다. 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또 보매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다. (297.4)
 

다른 재난들과 마찬가지로 기근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세상을 괴롭힐 것이다.
(297.5)
 요한계시록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쌍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인”이 있고 “짐승의 표”가 있다. “거룩하고 복받은” 자들을 위한 첫째 부활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둘째 부활이 있다. 흰옷을 입은 순결한 어머니가 있고 자주 옷을 입은 음녀가 있다. 또 거룩한 성이 있고 큰 성이 있다. (298.1)
 바로 위에서 보았듯이 거룩한 성은 새예루살렘이다. 다른 성 곧 큰 성은 바벨론이다. “화있도다. 화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계 18:10; 18:2, 16). (298.2)
 실제의 바벨론 성은 다니엘의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요한의 시대에는 유령 도시가 되어 있었으며 그때 이후로 오늘날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바벨론”은 실제상의 바벨론일 수 없다. 이 성은 옛날의 바벨론 성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는 거대한 사회 집단을 상징한다. (298.3)
 역사상 실제의 바벨론이 존재했던 것처럼 실제의 새예루살렘도 존재한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에 의하면 언젠가 이 지상에 새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새예루살렘 역시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 새예루살렘은 신랑을 위해 “예비되고” “성도들의 옳은 행실”“옷 입은”, 어린 양의 신부로 일컬어진다(계 19:7, 8). 새예루살렘도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사회 집단을 상징한다. 그러나 악한 무리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새예루살렘은 큰 성 바벨론에 의해 “짓밟힘”을 당한, 다니엘 8장 13, 14절“백성”인 의로운 자들의 사회, 곧 참된 교회를 상징한다. (298.4)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서는 큰 성이 “저희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으로, 묘사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일부 성경 독자들은 큰 성을 고대의 예루살렘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장소가 “영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불리웠다. 소돔은 악덕과 사치를 대표하는 성이었다(창 19:4~8; 겔 16:49, 50, 56~58).(소돔은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악덕,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수반되었던 엄청난 부도덕을 상징하기에 너무나 적격이다(파리는 완전 방임의 사회가 되었다. 최소한 기혼 여성의 8분의 1이 매음에 종사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세의 시대에는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화하고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는냐”(출 5:2)고 조소하였다. 애굽은 철학자들의 대담 무쌍한 회의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노골적인 비그리스도교화 운동을 상징하였다. (298.5)
 히브리서 6장 4~6절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의 진리에서 떠나는 모든 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다는 것이다. “한 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298.6)
 거룩한 성은 1,260일 동안 짓밟힘을 받았다. 같은 기간에 두 증인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의 끝에 프랑스 대혁명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이 말을 특이하게 성취시켰다. (298.7)
 “지진” 의 진앙지는 그 도시의 10분의 1에 위치했으며 1,260년의 끝인 1790년 대에 발생했다. (298.8)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국가였다. 그리고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 중 가장 오래된 이 나라가 프랑스 혁명 기간에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배도의 길을 치달았으며 괴이하게도 그리스도교 정신을 내팽개쳤다. 이같이 부정할 수 없는 성서적 의미에서, 프랑스는 무자비하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298.9)
 그러나 그 지진은 단지 그 큰 성의 “십분의 일”에 국한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 큰 성 전체는 프랑스보다 훨씬 큰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큰 성은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 전체를 말한다. 이 사실은 다음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면 더욱 분명해질 줄로 믿는다. (299.1)
 3.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이방인”들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1장 2절“성전 밖 마당”을 점유하고 있는 “이방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부 영어 번역 성경에 “민족들”(nations)이라고 번역된 이 낱말이 신약 성경에서는 90회 이상이나 “이방인” 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이다(한글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자 주). (299.2)
 신약 성경 시대에는 예루살렘 대성전에 안팎으로 마당이 둘이 있었고 안 마당에서는 유대인들만이 경배했고 밖의 큰 마당에서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방인” 이란 번역이 오히려 이해에 즉각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에베소서 2장 14절에는 유대인 마당과 이방인 마당을 갈라놓은 얕은 담벽이 상징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299.3)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바깥 마당에서 경배하기 위해 올라온 이방인들이 1,260년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는다. 그런데 우리는 위에서 이 거룩한 성을 의로운 백성들의 사회로 보았었다. 우리는 같은 기간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박해하는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또 “백성들”“짓밟은”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을 상기하게 된다. 이 작은 뿔들은 「다니엘 연구」에서 보았듯이 일차적으로는 중세와 그 이후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모습 중 그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방인”들은 성전 바깥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인 집단을 나타내고 있다. (299.4)
 그렇다면 이 “이방인들”은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남으로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저 큰 성의 시민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안 마당에서 경배하는 참된 신도들과 바깥 마당에서 경배하는 “이방인”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은 성전과 제단을 “척량”함과 동시에 안 마당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함께 “척량”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경배자들은 “그냥 두라”고 했다. “그냥 두라” 의 희랍어 원어는 “던져 버리다”, “버리다” 라는 좀더 강한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하는 자들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갈라놓는 심판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심판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14장 6, 7절에 나오는 첫째 천사의 기별을 논의할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299.5)
 우선 여기에서는 요한계시록 11장 2절“이방인”이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299.6)
 4. 천사는 “남은 때가 없다” 라고 했는가, 아니면 “더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