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피조물과 다르다는 인식은 전통적으로 그분의 무시간적 영원성과 무감정한 불변성에 기초하여 이해되어 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피조물과 다른 이유는 피조물이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데 비해 그분은 무시간적이고 비역사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실재와 창조된 실재 사이에서 기본적인 유사점 곧 유비를 찾는다. 이런 유사점은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자연 신학을 구축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토대를 이룬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절대적 초월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초월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와 그분의 역사적 피조물 사이의 어떤 유사점도 인정하지않는다. (144.3)
 성경은 하나님을 그분의 실재(하나님은 세상 자체도 아니고 또한 그분의 존재가 세상에 포함돼 있지도 않다)와 본질에 비추어 세상과 전혀 다른 분으로 본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런 다름을 “절대적인 초월성”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대단히 낯선 분이 된다. 결론적으로, 과거 300년 동안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범재신론적인 개념으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해석에 전통적으로 그리고 현대적으로 접근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과독립된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깊은 존재론적인 이유와 존재 할 능력을 지닌 세상 자체이다. (144.4)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출발부터 창조 교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초월성과유사성 둘 모두를 위한 발판을 놓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우주라는 실재와 구분되는 하나님의 실재의 독립성을 확립함으로(창 1:1; 히 11:3), 하나님에 대한 우주의 의존성을 세운다(사 42:5). (145.1)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하던 시점부터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솔로몬성전 봉헌을 말하는 기사(대하 5-7장)는 피조 영역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내재성(IV. D)을 확인하는 말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하나님의 거소(居所)를 두 곳으로 밝힌다. 첫째는 지상 성소/성전이라는 그분의 인격적인 영광의 거소이고(대하 5:13- 6:2; 6:41; 7:1-3;참조 출 40:34-38), 둘째는 그분의 하늘 거소이다(대하 6:21, 25, 27, 30, 33, 39; 참조 히 8:1, 2; 계 7:15). 그러나 “하늘”이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므로 하나님의 하늘 거소는 그분의 초월성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거소는 그분의 역사적인 내재성, 곧 죄에 영향 받지 않은 다른 피조물들과 그분의 관계에 속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두 가지 거소가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 때문이 아니라 지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45.2)
 하나님의 초월적 국면은 솔로몬이 이렇게 물을 때 부각된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 6:18; 왕상 8:27). 하나님의 실재의 신비가 인지되어 여기에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은 지상 곧 성전과 하늘에 거하시지만(내재성) 그분의 존재의 본질은 피조물을 완전히 능가한다(초월성).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고 피조물을 완전히 능가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피조물과 함께 거하는 친밀한 관계 속으로 기꺼이 들어올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가 드러날 때만 우리는 거룩한 위엄을 입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예배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상을 동원한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서서 그분의 거룩한 존재를 꿰뚫어 볼수 없다. (145.3)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배제한 “절대적인” 초월성 같은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의 창조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는데(창 1:27),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사점이 있음을 분명하게 확언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우리의 사변적인 이성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하나님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양편 모두의 유사점을 온전하게 아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된 질서 안에서 그분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인식적인 유비를 끌어내실 수 있다. 창조에 관하여 자기쪽만을 아는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유비를 적절하게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145.4)
 이런 근거로 보면, 피조물에게서 끌어낸 어떤 유비도 하나님께 물리적 또는 관념적 형태를 부여하는 토대를 제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 자연 신학을 개진할 가능성을 주는 근거가 되진 않는다. 따라서 둘째 계명이 이렇게 명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출 20:4). 오직 하나님만이 그분 자신을 계시하는 데 공허한 사변을 개입시키지 않고 유비를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끌어내신 유비 가운데 어떤 것을 신인동성동형론적 표현(anthropomorphism)이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표현들은 인간 존재에게 속한 특징들을 하나님께 부여한다. 성경에 나오는 신인동성동형론적 표현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실재들에 비추어 그분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계시하신다. 예컨대, 하나님이 팔을 가지고 계신다고 표현되지만(출 15:16; 시 89:13), 그것은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팔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런 표현은 하나님이라는 실재는 인간의 팔이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일뿐 아니라 무한하게 더 많은 것도 행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실재 그대로의 구조를 상상할 수 없지만, 유비적인 언어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의 측면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면서, 동시에 그분의 신성의 신비를 보호한다. (145.5)
 그분은 그분 자체로 실재하고 형태를 지니지만 그런 신적인 실재와 형태는 최고의 지성적 피조물의 실재 및 이해의 능력을 초월한다. 그분의 존재에 관해 계시된 것 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이 웅변이며 언제나 웅변이 될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인간 역사와 직접 관련을 맺으면서 주어진다. 그분의 계시가 주어진 시작점부터 그분의 초월적 존재의 신비는 우리의 제한된 지성으로는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145.6)
 하나님의 초월성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속성 가운데 몇 가지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예컨대, 그것은 하나님의 예지와 전지성과 전능성이라는 속성과 관련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은 특별히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가장 심오한 수준으로 드러난다. (145.7)